낯선 방이었다. 새하얀 벽지와 새햐안 가구들. 깔끔하게 개어진 옷가지들. 검은 철제 선반 위에 캐틀볼과 덤벨이 무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고 단출한 책상 위에는 낡은 수첩과 외국어 교본이 늘어져 있었다. 무늬 없는 커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새어들어와 시트 위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어두운 군청색 머리칼 끝에 그 빛이 걸려 결따라 반짝거렸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 곧은 입매. 눈꺼풀은 부드럽게 닫힌 채였다. 메그는 무채색 침대 위에서 트리스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오랫동안 듣고 있었다. 메그는 헐렁한 회색 슬리퍼를 발에 대충 꿴 채 원형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트리스의 흰색 티셔츠를 주워 입고 현관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걸쳤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아마도 오후 한낮..
댈러스 컨벤션 센터의 라운지. 몸에 딱 달라붙는 골프 셔츠를 입은 인간들이 라운지 테이블에 앉아 맥주병과 술잔을 비웠다. 개중에는 아랍어가 쓰인 말보로를 자랑처럼 피우는 자들도 있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디서 일하다 왔냐고 묻는 아마추어들도 있었다. 미국보안산업전시회 회장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할 수 있는 자들은 전투에 단련된 프로와 잔뼈가 굵은 무기 제조업체 판매원 정도였다.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불빛이 용병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독립 청부인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ASIS는 보안 장비와 카메라를 선보이는 따분한 전시회처럼 보였지만, 청부인들의 사교장이자 보안 서비스 제공자를 위한 전시장이기도 했다. 민간보안회사들은 이곳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며 멋진 부스와 멋진 전시품으로 잠재 고객을 끌어들..
아르마니야와 마이산 국경 어디쯤. 귀청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휴이 헬리콥터 두 대가 언덕 꼭대기에서 선회했다.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 중포 기지는 특수작전부대와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장전이 된 무기들은 국경을 향해 있었고, 차량들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준비된 채였다. 주변에 있는 몇몇 언덕 꼭대기에도 헤스코를 쌓아 만든 전초 기지들이 보였다. 헤스코 방벽 위는 묵직한 모래주머니들과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가시철조망이 어지럽게 뭉쳐 있었다. 은색 철조망이 해의 움직임에 따라 살벌하게 빛났다. 트리스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서서 선회하던 헬리콥터가 천천히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터빈의 배기가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중에도 내내 무표정했다. 검은 티셔츠와 카키색 바..
메그는 사람 죽이는 일을 책 한권 읽듯 했다. 가끔은 살인이 재미없는 책을 읽는 것보다 쉬웠다. 그게 그녀가 하는 일이고, 그녀가 했던 일이고, 그녀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멕시코 최악의 카르텔이 수 년 동안 수천달러를 주며 그녀에게 시킨 일이었다. 그녀가 죽음과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주목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표적과 표적 아닌 자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싶어서다. 그녀는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고 되도록이면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싶어 했으며 가능하다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고 싶지 않은 게으른 사람이었다. 메그는 오후 세 시 쯤에 눈을 떴다. 엎드린 채 자다 몸을 반쯤 일으킨 그녀는 베개 밑의 권총을 확인하고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아침에 천장이 날아가 있어도 이상하..
12명의 블랙워터 경호팀은 바그다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요르단에서 오는 새로운 교대근무자들을 인솔하기 위해서였다. 비행기가 하루에 두 번 밖에 들어오지 않는 바그다드 공항은 버려진 세트장처럼 조용하고 으스스했다. 알람시계 대신 총소리로 기상하는 사람들에게도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잠시 후 통과해야 하는 아일랜드 도로에 지난 이틀 동안 열 여섯번이나 공격이 떨어졌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블랙워터 이지스 팀은 이 길을 거의 날마다 달렸다. 정부 반군이 퍼붓는 총알과 급조폭발물을 피해 전속력으로. 그들은 어두운 주차장에 앉아 다른 경호팀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열두 명 중 몇몇은 마르케스 반체 마르케스나 다인코프 같은 다른 보안업체의 험담을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