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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참모의장은 부관을 돌려보낸 후 문을 닫았다. 60제곱미터의 작은 공간에 순간적으로 어둠이 찾아왔다가 밝아졌다. 잉크, 잎담배, 동물 박제의 희미한 냄새가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종이 냄새와 섞여들었다. 벽에 걸린 새빨간 모직 위에는 수많은 임명장과 훈장들이 정갈하게 매달려 있었고, 어두운 방에 불길 그림자만이 피어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규칙적으로 튀는 마른 장작의 울음소리. 금기를 저지르며 창조해낸 병기에 대한 문서. 붉은 후드를 눌러 쓴 방문자는 그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인간이란 어쨌든 위계서열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 길을 따라 말뚝에 박혀 죽은 병사들. 포탄에 형체도 없이 사라진 존재들. 전쟁이란 집단의 재앙인 동시에 개인의 승리다. 세상과 함께 태어난 신들조차 그들에게 이런 형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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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낯선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나뭇잎을 태우는 것 보다 조금 더 독한 냄새. 막사의 녹색 천장을 흐린 눈으로 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트리스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메그가 한쪽 무릎위에 팔을 얹고 구겨진 담뱃갑을 쥔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손끝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갈색 필터를 문 입술은 찢어진 채였다. 메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갈색 속눈썹 위로 먼지가 앉을 때조차도. 입술만 벌려졌다가 다물리고를 반복했다. 저 얇은 입술 아래에 차게 식은 피가 천천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서 굴러다니는 알약들이 심장을 붙잡고 있을 것이었다. 사과가 안쪽부터 문드러지듯 조용하게 파국으로 행하는 몸뚱이가 호흡을 반복하자 담배 연기가 위로 흩어졌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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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는 승리 외의 목적이 없었다. 쥐와 벌레가 들끓는 콜로세움의 최하층에서 태어났으나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고 운이 좋게도 살인에 재능이 있었던 인간.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녀는 그 외길이 즐거웠다. 좁아터진 방에서 등을 맞대고 잠들고 별 것 아닌 음식을 나눠먹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을 때도, 형제들의 고통에 찬 신음보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좋았다. 그들에게 약한 자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자는 가장 강한 인간 뿐이었으므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콜로세움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알렉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유명한 존재였으므로 도시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곧 그녀는 적의 의지와 목을 함께 꺾어버리는 행동반의 탑시드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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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의 제병협동대대는 특수한 운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에린이 정보지원활동대 소속이었을 시절 개발한 소형 무전기를 달고 단장의 명에 따라 행동했다. 트리스와 알렉스가 그들의 중대를 이끌고 전선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면 수십 기의 장갑차가 그 길을 통해 종심 깊이 침입, 적이 전선 복구를 시도할 때 보병중대를 적 병력과 섞이게 해 적의 화기 사용을 주저시켰다. 동시에 최후방에서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C4I 체계를 무너트린 후 보급소를 타격해 남방군 제 3지역대 본부를 완전히 포위하고 후방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병기공학, 군사학, 정보기술학의 권위자 에린 대령이 본부에서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모든 것을 지휘하며 하루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녀는 수십 대의 장갑차 기관포의 목표물 좌표지점까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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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꼬박 이틀을 감금당한 후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들이 던져준 옷으로 갈아입고 수갑을 찬 후 방탄유리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열 두 개의 총구 앞에 앉아 의장을 바라보았다. 벽면 양쪽의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서는 입을 열 자격조차 없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목적은? 북방군의 정보를 넘겨주지. 목숨을 구걸하러 온 거냐? 그녀가 헛웃음을 쳤다. 살고 싶었으면 여기에 왔겠어? 나는 모든 것을 걸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적진까지 맨손으로 걸어 들어왔다고.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보기라도 하려고 온 거 아니겠어. 배신의 변명이 길구나. 쉽게 배신하는 놈은 쉽게 죽는다. 나는 충성했던 적이 없어. 목적이 같았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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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곳은 눈밭이 아름답고 바람이 칼날 같은 설산이었다. 스물여섯 개의 빙하와 얼어붙은 호수로 뒤덮여 침엽수만이 높게 자라는 곳. 흑곰, 재 빛깔의 새, 거대한 손바닥 같은 뿔이 자란 사슴, 노란 눈의 거대한 짐승만이 간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짐승의 털을 목과 발에 감고 가끔씩 마을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손상을 최소화하는 가죽 손질법, 산짐승들의 이름, 특정 부위의 가격과 요리법 같은 것들을. 자식들이 타지로 떠난 집에서는 가끔 버릴 책들을 주었다. 나는 처음 읽은 신화에서 내 이름이 될 만한 것을 찾았고 더 이상 눈표범으로 불릴 일은 없었다. 전쟁에서 격리된 땅. 일 년 중 며칠 동안만 타인과 말을 섞었으며 인간의 지도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