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에린의 제병협동대대는 특수한 운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에린이 정보지원활동대 소속이었을 시절 개발한 소형 무전기를 달고 단장의 명에 따라 행동했다. 트리스와 알렉스가 그들의 중대를 이끌고 전선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면 수십 기의 장갑차가 그 길을 통해 종심 깊이 침입, 적이 전선 복구를 시도할 때 보병중대를 적 병력과 섞이게 해 적의 화기 사용을 주저시켰다. 동시에 최후방에서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C4I 체계를 무너트린 후 보급소를 타격해 남방군 제 3지역대 본부를 완전히 포위하고 후방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병기공학, 군사학, 정보기술학의 권위자 에린 대령이 본부에서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모든 것을 지휘하며 하루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녀는 수십 대의 장갑차 기관포의 목표물 좌표지점까지 문제없이 지시할 수 있는 전장의 스페셜리스트였다.
2작전부는 한 번의 패배도 없이 그들의 땅을 넓혀가고 있었고 남방군은 그들의 깃발만 보여도 도망치기 바빴다. 작전부 내의 사기는 최고였으며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을 칭찬하기 위하여 부상자를 제외한 모두를 모아놓고 단상 위에 올랐다. 해는 저물어가고 먼 땅에서 연기가 들끓었으나 군인들은 죽음을 모르는 것처럼 그들에게 환호했다. 숯처럼 변한 적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몇 명을 죽였고 그 중 목숨을 애원하는 자가 몇이었는지 말하면서, 저분들은 우리를 위한 전쟁의 신이며 앞으로도 우리에게 패배는 없을 거라고 떠들면서. 그 때였다.
에린!!
북동쪽에서 날아온 총알이 에린의 어깨에 명중했다. 바람과 반대 방향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알렉스가 받아내었다. 에린은 짧은 숨을 훅 들이쉬었다가 제 입을 막았다. 트리스는 겉옷을 벗어 에린의 몸을 덮고 총알이 날아온 곳을 가리키며 추적을 지시했다. 멀진 않을 거다. 반드시 저격수를 숨이 붙은 채로 끌고 돌아와라!!!
에린은 곧 군의관의 막사로 옮겨졌으나 군의관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목례하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트리스가 표정을 구기며 군의관의 어깨를 붙잡으려 하자 에린이 떨리는 손으로 트리스의 옷자락을 쥐었다. 에린, 움직일 수 있어? 트리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내, 막사로 가자. 에린이 대답했다.
트리스는 에린이 침대 위에서 한 손으로 목까지 오는 새하얀 제복을 벗는 것을 보았다. 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상의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나서야 그 상처가 어떤 모양새인지 알 수 있었다. 엉망으로 부서져야 마땅한 쇄골이 그 부분만 빈 듯 깔끔했고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았어야 할 근육과 살점이 천천히 수복되고 있었다. 피가 철철 새어 가슴골로 흐르는데도 신체조직이 기형적으로 제 자리를 찾아 움직이는 중이었다. 트리스는 에린이 안경을 벗어 무릎 위로 내려놓을 때 까지 돌처럼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알렉스가 아주 조용히, 아름다워, 하고 중얼거렸다. 에린은 지친 듯한 웃음을 짓고 핏빛 눈으로 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묻고 싶은 게 많겠지?
트리스는 조용히 끄덕였고 에린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린은 남쪽에 위치한 기계도시의 연구원이었다. 3년 전 새벽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투항 혹은 죽음을 요구하기 전까지는. 가장 먼저 저항한 그녀의 상사는 본보기로 동료의 앞에서 살해당했다. 그녀는 산 채로 눈이 뽑히고 배가 갈라져 내장을 흘리는 상사를 보며 투항했다. 살고 싶었어. 돈을 모아서 소실된 바빌로니아 고문서들을 복구하는 게 꿈이었거든. 그녀는 차분하게 웃었다.
그녀는 그 후로 1년 동안 온갖 무기를 개발하며 살았다. 옛 동료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흙빛 얼굴로 바람 좀 쐬고 온다고 말했던 자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는 하루에 두 시간씩 자며 삶을 조금씩 연장시켰지만 마지막 연구원이 되었을 때 상층부가 그녀에게 제안했다. 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너를 외부자로 두기에는 위험이 크다 판단했다고. 너의 자력탈출과 납치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너의 생사여탈권을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기 위한 장치를 달 생각인데 수락한다면 따라오고 아니면 여기서 죽음을 선택하라고. 그녀는 이미 살기 위해 많은 것을 버렸고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집착뿐이었으므로 제 발로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수술 침대 위에 누웠다.
에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주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개심수술을 진행하다 거부반응으로 쇼크가 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신경체계가 무너졌는데,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아직 개발 초기 단계이던 강화군인 실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날 죽게 두지 않았던 이유는 개발 중이던 소플램이었어. 레이저를 발사해 반사된 빛에 따라 유도폭탄을 명중시키는 원리인데, 그들은 그것으로 포병이 우수한 남방군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라 했지. 완성도 못 하고 끌려간 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 그 후로 몇 개월은 부작용 때문에 침대에 붙어있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네. 에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재밌지 않아? 나를 마음대로 죽이려 한 덕분에 웬만한 방법으로는 못 죽게 됐으니까. 에린은 트리스의 숨이 불을 끄고 사라진 듯 아주 조용해진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놀랐어?
……네가. 총에 맞았을 때.
넌 상냥한 사람이야.
아니. 그런 게. 나는.
트리스가 말을 더듬거리다 침대에 털썩 앉았다. 에린은 그 넓은 등을 두어 번 토닥거리고 웃기만 했다. 어느새 상처는 흉터만을 남기고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알렉스가 환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에린. 아파?
안 아파.
에린 정말 예쁘다.
고마워.
트리스는 짧은 손톱으로 제 뒷머리를 꽉 눌렀다. 네 명중 세 명. 트리스는 에린이 당한 수십 가지의 일에 분노했고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끝없는 욕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제 손에 쥐려 하는 자들. 절대자인 양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자들. 분명히. 더 있을 것이다. 이 곳에 모인 세 명이 전부일 리 없어. 트리스는 눈을 감았다가 막사 지지대에 달린 전구가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노란 불빛을 받아 불투명한 붉은 눈이 새빨갛게 흔들렸다. 이래서는 안 돼. 그. 핏빛 중얼거림.
그리고 트리스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여기 맞아?
메그는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르는 저격수의 옷깃을 쥔 채 대령 막사를 가리켰다. 산에서부터 끌고 내려온 인간은 숨이 붙어 있긴 했으나 성한 곳은 없었다. 막사 밖을 지키던 군인이 경례를 하며 끄덕였다. 메그는 옷깃을 팽개치며 손을 털고 들어간다, 하고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군청색 머리 여자가 천막을 걷고 나왔다. 아.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쳤을 때 메그는 이 자가 자신의 목표물인 것을 알았다.
관등성명.
뭐?
메그는 트리스의 큰 손이 비니에 닿는 것을 라이플로 막으며 툭 내뱉었다. 차가운 총구가 트리스의 턱에 닿았다. 딱 벌어진 어깨에 흉터가 가득한 몸, 긁힌 낮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화를 참고 있는 짐승. 메그는 비니를 더 눌러 쓰며 중얼거렸다. 관등성명 대라고.
……방패중대 중대장 트리스 소령.
특무부대 중대장 메그 중령이다. 함부로 손 대지마.
메그는 긴 총신으로 트리스를 휙 치워버리듯 하며 천막을 걷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피냄새와 희미하게 남은 화약 냄새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말라붙은 피를 젖은 수건으로 닦던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이야. 메그.
어어.
안 보던 사이에 꽤 권위적인 인간이 됐네.
처음 보는 놈이 대뜸 모자를 벗기려 하잖아….
메그가 침대 옆의 의자에 앉으며 몸을 늘어트렸다. 흔들리는 이송 차량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낸 몸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메그는 사탕 막대를 바닥에 뱉고 코트 안에서 새 사탕을 꺼내 물었다. 피비린내가 달콤한 냄새에 조금이나마 가려졌다. 메그는 처음 보는 금발의 여자와 막사 입구에서 조각상처럼 굳어 있는 자를 포함해 전술 지도와 온갖 암호가 붙어 있는 막사를 느릿하게 둘러보고 말했다.
그래서…이게 다 뭐야?
제 1 제병협동대대 대장 에린이야.
1티어 저격특무부대 중대장 메그.
참모…뭐더라.
참모의장 아닐까, 알렉스.
아. 맞아. 참모의장 직속…특수전술대대 중대장 알렉스!
…보병사단 직할 방패중대 중대장 트리스다.
메그 너 진급했네.
1티어 놈들이 다 죽었거든.
그들은 막사 테이블에 둘러 앉아 한 명씩 소속과 직급을 말했다. 트리스는 거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관의 모자에 함부로 손을 댄 것에 대한 당혹감은 아니었다. 그 모자 밑이 절실하게 궁금했을 뿐. 알렉스가 손뼉을 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다 모였네. 에린이랑 아는 사이면 나랑도 아는 사이지! 붉은 눈이 신난 듯 반짝거렸다.
그래…….
메그는 귀찮은 듯 대강 대답하며 턱을 괴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누더기에 가까운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참모의장의 화려한 서명이 담긴 임명장이었고 하나는 기밀 작전 명령서였다. 에린이 그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치자 고개 숙인 트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난 못해.
그러셔.
메그가 의자에 더 깊게 몸을 기댔다. 남방군 전선에서 거주 중인 사령관의 아들을 납치하는 임무. 사령관의 외동아들이며 전쟁광인 사령관과는 반대로 전쟁 반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자였다. 그의 사진과 이름, 나이, 취미, 평소 동선과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 맨 아래에는 외우고 태울 것, 타 세력에 빼앗길 것 같다면 반드시 사살할 것이라는 주의 문구가 있었다. 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 두 장을 구석의 난로에 던져버렸다. 알렉스가 나 아직 못 외웠는데! 하고 말하자 메그가 어차피 너는 못 가. 하고 대답했다.
왜!?
너는 딱 봐도…….
남아서 아군 사기를 올려야 하니까.
그렇구나.
메그가 사탕 막대를 까딱거렸다. 너처럼 피비린내 나는 녀석과는 못 다니겠다고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는 피를 철철 흘린 에린보다 더욱 강한 살육의 냄새가 났다. 돼지 도살자도 이렇지는 않을 것. 메그가 눈을 흘기다 에린을 보았다.
너는?
겉으로는 며칠 정도라도 요양해야 할 것 같아서.
그건 그러네.
메그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혀 위에서 분홍색 사탕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메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때까지 조용하던 트리스가 테이블 위를 파내던 손을 꽉 쥐고 메그를 보았다. 눈 안에서 싸늘한 불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너. 눈 보여줘.
쏴버린다.
메그가 혀를 차고 어깨끈을 맨 라이플을 두 손으로 쥐었다. 절그럭. 쇠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막사를 순식간에 덮었다. 트리스가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의 압력에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억눌린 목소리가 낮게 입술에서 기어 나왔다.
이런 짓이 뭔데.
납치, 같은. 졸렬하고 잔인한 짓.
넌 전쟁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메그가 이미 다 먹은 막대의 끝을 씹었다. 전쟁은 잔인해. 그걸 바꿀 필요는 없지…….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빨리 끝나니까.
부모의 마음은 몰라?
누구 부모 있는 사람? 난 없는데.
…소중한 사람 말이다.
너 정말……짜증나네. 작전회의 안 할 거면 난 갈래.
트리스가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철제 테이블에 움푹 들어간 구멍이 생겼다. 네 명 중 그 누구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속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숙여진 머리, 군청색 머리칼이 귀를 덮고 뺨을 가려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자 메그가 표정을 찡그렸다. 짐승 냄새였다.
전쟁에서. 죽을 각오도 없는 민간인을 끌어들이는 건…….
트리스는 삭은 나뭇가지들을 삼킨 듯 말을 잇지 못 했다. 목이 따끔거리고 불에 덴 듯 아팠다. 가시가 혀에 박힌 듯, 혈관이 얼어붙은 듯. 뇌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굽어있는 검은 몸이 바다짐승의 등줄기처럼 바닥으로 커다란 그림자를 비추었다.
용납할 수 없어.
전장이란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뱉은 트리스는 천천히 막사 밖으로 나갔다. 메그는 막사 입구가 올라갔다가 트리스를 어둠 속으로 숨겨주는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살인을 해본 적 없는 것도, 탁상공론에 취한 윗대가리도 아닌 주제에. 그 절박함이 우스웠다.
군인은 다 죽을 각오를 했다고 생각해? 알렉스가 물었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 아냐.
메그 네가?
저 녀석 말이야. 메그가 대답했다.
에린 대령을 노린 저격으로 방어체제에 들어간 제 2작전부에서 트리스는 내내 생각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설산에서 맹수의 가죽을 걸치고 그들의 피를 마시며 살아왔던 것. 수백의 인간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수천의 인간들을 죽였던 것.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얼리는 추위에 짐승의 내장이 썩지도 못한 채 방치되는 것을 보며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고 방패에 머리가 으깨지기 전의 푹 꺼진 눈은 그들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승리를 거듭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트리스는 인체강화실험이 끝난 후 받았던 수십 가지의 테스트를 떠올렸다. 머리에 7.62mm 소총탄이 박히고 치사량의 독극물을 마시고 끊임없이 손상과 수복을 반복하며 피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불에 탔던 것을. 트리스는 손톱과 옷이 재가 되어 떨어지고도 두 발로 서있을 수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중얼거렸다. 나는 인간이야. 나는 인간이다. 강화유리창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연구원은 경이로움에 눈물을 흘렸다. 천 명. 아니 만 명을 죽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전쟁병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중앙군에 승리를 가져다줄 피투성이 신의 탄생입니다.
트리스는 침대 위에 다리를 뻗은 채 머리를 숙였다. 네 명.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전선 전역에 퍼져 있는 작전부의 지도자가 모두 자신과 같은 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이길 수 있겠지. 중앙군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할 필요가 있나? 민간인이 분명한 전쟁반대자를 납치하여 고문과 협박수단으로 쓸 필요가 있냐고. 만약 승리하더라도 그런 지도자가 군림하는 땅이 어떤 지옥일지는 뻔했다.
그리고 4일 후 아들의 고문 영상을 받아본 남방군의 사령관은 자신의 군대를 끌고 투항했다. 제 2작전부는 휴식과 재정비를 위한 시간을 벌었고 전사자 한 명 없이 남진의 중요한 거점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트리스는 거점을 옮기는 군대의 가장 맨 뒤에서 행진하는 그들을 보았다.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잠시나마 더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 고민하면서. 보병들의 양 옆에서 그들을 보호하듯 천천히 움직이는 장갑차와 보병들의 닳은 신발 밑창. 질서정연한 발걸음 아래로 퍼지는 흙먼지. 실 자국이 두드러지게 남은 오래된 흉터들. 찢어졌으나 정성스레 기운 군복. 그들의 얼굴에 웃음은 없으나 자부심은 있었다. 승리하고 승리하여 건국영웅이 될 상관 밑에서 싸우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잘 됐네.
……뭐가.
메그가 발소리도 없이 트리스 곁으로 와 걸었다. 여전히 모자를 눌러쓴 얼굴에서는 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메그가 사탕 막대를 위아래로 까딱이다 말했다. 민간인 죽이지 말라며. 살아 있어.
그게 살아 있는 거라고?
숨만 붙어 있으면 됐지 뭘 바라는 거야.
귀가 잘리고 한쪽 눈은 못 쓰게 됐지. 영상을 봤어. 손톱은 모조리 뽑혔고 토치로 지진 얼굴은 반쯤 녹아내리더군.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아버지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비는 인간이, 살아 있는 거냐?
메그 위에 트리스의 그림자가 지자 그들 주변을 걷던 병사들이 숨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메그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가 허. 하는 소리를 뱉었다. 비니 아래로 색을 살필 수 없는 눈동자가 찌푸려진 채 그녀를 보았다. 그 덕분에 부하 한 명 안 죽게 된 놈이 말이 많네.
뭐…….
그 사령관의 군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잖아. 적어도 부대 반은 죽었을걸. 너는 명색이 중대의 지휘관이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하지 그래. 네 결정에 부하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네가 강하다고, 안 죽는다고 그만인 건 아니겠지.
그딴…생각. 한 적 없어.
그럼 부하들의 목숨보다 뭐가 더 중요한 건데? 네 정의? 네 선의?
메그가 이어진 침묵으로 물었다. 네 소중한 부하들의 목숨보다 너의 정의가 중요하냐고. 트리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을 시리게 보는 눈빛이 붉은 것 같기도 검은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의 그림자가 규칙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자 검은 코트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화약 냄새를 담고 있는 바람이었다.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뭐지? 내일을 살게 하는 건 뭐냐고.
다음 목표물.
트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인간이 너 같진 않지. 메그는 비니를 눌러쓰고 사탕 막대를 뒤로 버렸다. 그리고 트리스보다 한참 작은 손끝으로 은색 사탕껍질을 부스럭거리며 떼어냈다. 메마른 입술 안으로 붉고 동그란 사탕이 사라졌다. 거창한 이유 없어. 그녀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는 죽기 전까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살고 있는 거야.
네 방식이 인간답다고 생각해?
인간만이 그런 짓을 하잖아.
메그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혔다. 군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흙과 바위를 딛고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려고. 새하얀 태양 아래에서 방금 흘린 땀이 바짝 마르는데도 잿빛 바닥을 계속해서 밟았다. 그들이 만든 폐허. 백 년 동안은 식물이 자라나지 못할 죽음의 땅. 탄환만이 이 땅에 잠들며 타죽은 군인들의 시체는 수거하지도 못할 것. 트리스는 천천히 메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어떤 것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전장 한 가운데를 338 라푸아 매그넘탄이 가르자 모두가 행운의 바람이 분다고 환호를 질렀다. 적의 장교만을 노려 사살하는 행운이. 지휘관을 잃은 적의 대대는 제대로 된 전술도 펼치지 못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 가운데로 기관포가 떨어지고 알렉스의 특수전술대대가 뛰어들었다. 알렉스에게는 쏟아지는 총알이 축제의 폭죽과 같았다.
트리스는 지난 며칠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전장에서만큼은 굶주린 짐승이 될 줄 알았다. 추위와 더위와 허기와 피로를 사냥의 욕구로 바꿀 수 있는 인간이 그녀였다. 몇몇은 무릎 꿇은 몸이 점점 기울어지며 땅 위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몇몇은 망치에 으깨진 채 군화에 밟히고, 부상자 중 일부는 넋 나간 듯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몇몇은 은빛 방패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갔다. 이빨이 부러진 자가 눈알을 굴리며 미친 듯이 도망쳤고 파괴된 대열의 끝에서 수십 명이 소리도 내지 못하고 포탄에 죽었다. 마치 넝마조각처럼 솟구쳤다가 동료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자가 있었고, 옆구리를 감싸 쥔 채 동료를 구하려 애쓰던 자가 총에 맞아 죽었다. 산 자나 죽은 자나 가릴 것 없이 목덜미를 움켜쥐고 두개골에 칼날을 박아 넣었고 몇몇은 피웅덩이에서 개처럼 구른 듯 피칠갑을 하며 기쁜 듯 소리질렀다. 트리스의 방패는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마치 신의 품인 양 안온했고 사신의 낫인 듯 날카롭게 번쩍였다. 메그는 아주 멀리서 그 모든 것을 스코프에 담은 채 조용히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적이 정리되고 도망치는 자들을 처리할 때 알렉스는 가져 온 가방에서 터렛을 꺼내 하늘로 띄우고 가방을 팽개쳤다. 그녀가 뛰어올라 지면으로 발을 구름과 동시에 적군 수십 명이 띄워져 터렛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알에 맞아 온 몸이 찢겼다. 창자와 비장이 역겨운 냄새를 내며 구름처럼 흩어지며 핏방울이 저주받은 비처럼 얼굴 위로 튀었다. 트리스는 알렉스가 그 가운데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알렉스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다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나 말이야. 콜로세움에서 자랐어. 그녀가 말했다.
나는 열두 살 때 가장 최하층에서 시작했어. 매 달 시작하는 경기에서 열 명을 죽이면 다음 층으로 오를 수 있었어. 올라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고 20층을 밟았을 때는 관객석이 꽉 차있었어. 그 곳에서 승리했을 때 악단이 나만을 위해서 연주했고 흰 옷을 입은 천사 같은 사람이 내 머리에 월계관을 씌워줬어. 내 피 묻은 망치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흰 방석에 올려 관객들에게 보여줬어. 나는 반짝거리는 색종이 가루를 맞으면서 꽃다발을 받았어. 하늘과 꽃을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 알렉스가 안대를 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승리가. 환호성이. 꽃향기가 너무 좋았어.
그녀의 얼굴을 덮는 핏방울들은 꽃가루 같았다.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은 작은 노랫소리 같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은 아름다운 태양 같았다. 해가 뒤로 저물고 온 사방에서 연기가 흩어지는데 그 장면이 그 순간에 고정된 것처럼. 한 폭의 그림처럼 반짝거렸다. 트리스는 언젠가 에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트리스가 조용히 탄식했다. 우리는 이미 괴물이 된 것인가.
아니면 괴물이었던 자를 거둔 것 뿐인가.
그날 밤 메그는 막사 안에서 한참을 누워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온 몸이 쑤셨다.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메그는 쉼 없는 지시로 몸을 혹사시킬 때마다 자신이 받았던 훈련을 생각했다. 죽음을 바라던 고통에서 깨어난 후 벽과 바닥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에서 받았던 것들을. 아주 작은 소리를 구분하고 바람의 방향을 느끼고 수백 가지의 화약 냄새를 맡고 발자국 소리를 가려내는 훈련. 피냄새로 짐승인지 인간인지 구분하고 몇 키로 밖에서 나는지 기록하는 훈련이었다. 오감은 혹사시키면 혹사시킬수록 더욱 예민해졌고 몇 개월 후 그녀는 혼자서 백 명의 저격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이백 오십 명의 특등사수 중 단 두 명이 될 수 있는, 보병 한 명을 죽이는 데 필요한 2만 발의 총알을 1.7발로 줄일 수 있는, 고가치표적만을 사살함으로서 누구보다도 죽음의 위협을 달고 다니는 저격수. 그런 고급 인력의 백배를 해내는 것이 그녀였다. 군이 그녀를 잠시도 쉬게 두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에게 편한 밤 따위는 없었다. 대부분이 잠든 본부에서도 그랬다. 순찰을 도는 보병의 발자국 소리와 군의관 막사에서 들려오는 죽기 직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적의 소리를 가려내려고 감각이 멋대로 요동을 쳤고, 오늘처럼 열이 오를 때는 웅웅거리는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정보들이 쉴 새 없이 메아리치기도 했다. 끝없는 피냄새와 쇠의 냄새를 맡으며 쓸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쓰고 나서야 기절하듯 잠에 들 수 있을 것. 그녀는 엎드린 채 베개로 머리를 누르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속옷과 바지 밖에 입지 않은 몸에 코트를 걸친 채 라이플을 안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나 없을 때 가면 안 돼?
메그가 후드를 눌러 쓴 트리스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잔소리 듣는데. 작전본부에서 800미터 떨어진 황야였다. 트리스가 천천히 뒤돌았다. 길 위에는 발소리도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메그는 늘 쓰던 모자 없이 한쪽 얼굴을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핑 도는 머리를 기대고 싶었으나 기댈 곳이 없었다.
너. 감시역이었구나.
아마도.
트리스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썼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의미가 없어. 내가 없어도 전쟁은 이기겠지. 불빛이라고는 별과 달 밖에 없는 밤. 트리스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으나 메그는 들을 수 있었다. 메그가 라이플을 껴안은 채 물었다. 괴물이 되는 게 두려워서?
그래.
전쟁을 끝내려면 괴물이라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끝나더라도…중앙군 상층부의 개가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했네. 그 인간이 들으면 기뻐하겠는데…….
넌 아무 생각 없어?
인간은 모두 소모품이야. 누가 더 오래 사용되느냐의 문제지.
네가 그런 생각이라면 더더욱 여기 못 있겠어.
서풍을 타고 멀리서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걱정과 상관에 대한 믿음도 들려왔다. 어디서는 담배를 두고 카드를 돌리고 있었고 그 옆 막사에서는 자기 전 신에게 기도를 했다. 누군가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중얼거렸으며 누군가는 피가 섞인 기침을 하며 숨을 들이키기도 했다. 메그는 웃기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후유증도 스위치도 없이 날뛰는 감각도 겪어보지 않았으면서 도망치겠다고 하는 꼴에 열이 오르는 듯이. 메그가 발을 끌고 몇 걸음 걸어가 트리스의 후드를 잡아 내렸다. 너. 내가 강화군인이라서 반발심이 드는 거야, 아니면 에린이나 알렉스보다 목숨의 가치를 가볍게 여긴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거야? 트리스는 처음으로 메그의 눈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악의를 증오하면서, 악의가 없는 자는 무슨 짓을 해도 미워하지 못 하지. 네가 알렉스를 싫어하지 못하는 건 그녀가 사랑스러워선가? 그럼 넌 군인도 인간도 아냐. 정에 흔들리는 쓰레기지. 입안에서 어금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너는 고작 2주였다며. 네 번째라 그래. 나는 두 번째였어. 우연으로 성공한 실험을 처음으로 맨 정신에 받았다고. 만약 내가 그때 정신을 놓아버렸다면 그래도 날 싫어할 수 있을까? 메그가 트리스의 후드를 거칠게 놓으며 떨리는 두 손으로 라이플을 쥐었다. 몸이 이제 그만 움직이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너는 사람의 의지와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자원했는지 징병됐는지 같은 것들. 에린이 강요당해 그런 꼴이 되어서 안타깝다 생각해? 모든 것을 선택한 알렉스가 두렵다고 생각해? 그러면 난 뭐지? 할 수 있는 게 이것 밖에 없었던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살인 한 번 마다 오늘도 죄를 지었다 생각해야 하냐고? 난 미친 게 아냐,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지. 죽음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는 너 같은 새끼는 아무것도 몰라. 크게 뜨였던 메그의 눈꺼풀이 땀 맺힌 채 파들파들 떨리다 허물어지고, 난 고통스럽게 일찍 죽을 거야, 흐리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트리스의 가슴팍 위로 쓰러졌다.
트리스는 제 품으로 축 늘어진 메그의 어깨를 쥐었다가 몸을 안아들었다. 너무 가벼워. 가볍고 불덩이 같았다. 트리스는 그녀가 한 말을 곱씹고 곱씹다 고개를 숙이고 더 조심히 고쳐 안았다. 어떤 지령도 두려움 없이 수행하는 저격수의 정점이자 전장의 행운이, 온 몸으로 너는 너무 어리고 어리석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에린은 자신의 막사를 찾아온 트리스에게 웃으며 침대를 내어주었다. 에린은 잠시 사라졌다가 메그의 약통을 찾아와 테이블 위에 두었다. 트리스는 문득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탈영 시도와 메그의 역할을, 그녀가 아픈 이유와 앞으로의 방법을, 강화군인 실험 기록과 그 성과를. 어쩌면 전부 다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에린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침대 옆에 서 있는 트리스를 보고 물었다.
메그에게 듣겠어, 나한테 듣겠어?
…기다릴게. 트리스가 대답했다.
'마지막 신화 > Eriny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Erinyes. 06 (완) (0) | 2018.11.28 |
---|---|
Erinyes. 05 (0) | 2018.09.25 |
Erinyes. 04 (0) | 2018.08.18 |
Erinyes. 02 (0) | 2018.08.12 |
Erinyes. 01 (0) | 2018.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