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린은 불을 옮기는 일을 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을 새벽에, 얼음 같은 세숫물을 긷기도 전에 일어나 사제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매일 밤 부질없는 기도로 꺼트린 등불에 신전 가장 깊은 곳의 불씨를 옮기는 것. 신전의 모든 빛이 태초의 불씨로부터 시작되게 하는 것. 그게 그녀의 일이었다. 새하얀 돌바닥에 새하얀 사제복이 걸음 따라 흔들리고 가을 새벽녘의 아름다운 일출이 꿈처럼 두 손을 적실 때에도, 눈 내린 새벽의 창백함 사이로 고요한 등불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에도 신앙심을 가지지 못했으나. 그랬다. 신전의 인간들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가 거짓을 벌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고아들이란 신전을 위한 땔감이자 밭을 가는 괭이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창고의 장작더미에게 ..
군인의 첫 번째 자질은 지속적인 피로와 고충을 견디는 것이다. 용기는 부차적일 뿐이다. 결핍과 박탈, 갈망은 좋은 군인을 만들어 낸다. 메그는 풀숲에 버려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복부를 깊이 찔렸고 다른 한 명은 경동맥과 성대를 잃은 채였다. 이들은 과다출혈로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고작 몇 십 걸음 너머의 비명소리에 안타까워하면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모르면서 단칼에 죽일 줄은 안다니. 메그는 알렉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다친 자들을 치료했다. 전투 의지가 없는 인간들을 감시하기는 쉬웠다. 아이들은 군용식량을 가방 가득히 챙긴 후 서로의 상처를 살폈다.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알렉스는 피 묻은 붕대를 감아주며 많이 울었다..
마치 개처럼, 그녀는 꿈속에서 사냥을 한다. 비가 그칠 때쯤에 알렉스는 잠에서 깼다. 창틀에 매달려있던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면서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아직 침침한 응접실에서 기지개를 쭉 폈다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었던 몸이 기분 좋게 나른했다. 그녀는 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린의 열을 재어본 후 깊이 잠들어 있는 세 명의 이불을 여며 주었다. 알렉스는 난롯가에 말려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양동이 두 개를 든 채 마당으로 나갔다. 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을 둘러보다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 놓은 물펌프를 찾아냈다. 오래된 펌프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펌프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서서..
트리스는 잿빛 숲에서 눈을 떴다. 새벽 이슬이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자고 있는 알렉스를 더듬었다. 알렉스가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가슴께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메그와 에린의 호흡을 확인했다. 그들은 피로를 담은 소중한 숨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트리스는 그 옅은 숨소리를 몇 번 세다가, 녹색 방수포로 만든 어설픈 텐트 아래에서 조용히 기어 나왔다. 앳된 두 눈이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이 터오자 새벽 숲의 안개가 술렁거렸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야전의 피냄새가 불어왔다. 트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새들이 빈 나무로 날아가 무게 없이 앉는 것을 보았다. 회색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