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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잿빛 숲에서 눈을 떴다. 새벽 이슬이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자고 있는 알렉스를 더듬었다. 알렉스가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가슴께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메그와 에린의 호흡을 확인했다. 그들은 피로를 담은 소중한 숨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트리스는 그 옅은 숨소리를 몇 번 세다가, 녹색 방수포로 만든 어설픈 텐트 아래에서 조용히 기어 나왔다.
앳된 두 눈이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이 터오자 새벽 숲의 안개가 술렁거렸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야전의 피냄새가 불어왔다. 트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새들이 빈 나무로 날아가 무게 없이 앉는 것을 보았다. 회색 안개와 검은 새들. 새벽의 냉기와 젖은 흙의 냄새. 흑백으로 된 꿈 같았다. 트리스는 언제부터 꿈을 꾸지 않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았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트리스는 빈 수통 세 개를 어깨에 메고 천으로 된 주머니를 챙겼다. 오는 길에 보았던 작은 물가로 갈 거였다. 그녀는 단검으로 나무에 표식을 남기며 이슬로 젖은 풀을 밟았다. 죽은 군인에게서 훔친 칼의 손잡이에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지만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관심 없었다.
그녀는 물가로 가는 길에 안장버섯과 엉겅퀴를 땄다. 여린 잎과 덜 자란 꽃망울도. 자기 전에 설치한 덫에는 토끼가 두 마리 걸려 있었다. 골짜기 아래로 느긋하게 흐르는 시내는 투명하고 차가웠는데, 작은 송사리들이 얕은 물에서 놀며 돌과 돌 사이로 헤엄치기도 했다. 산새의 지저귐. 졸졸 흐르는 물소리. 바람 따라 흔들리는 짙은 초목들. 눈을 감기만 한다면 더없는 평화일 것이다. 트리스는 차가운 물로 손과 얼굴을 씻은 후 물을 길어 돌아갔다.
알렉스가 이슬로 젖은 방수포를 작게 접어 배낭 안에 넣었다. 에린은 마른 나뭇가지를 골라 모닥불에 던져 넣고 화덕을 쌓았다. 메그는 산사나무의 열매를 앞섬에 한아름 담아 돌아왔다. 그들은 트리스가 납작한 돌 위에서 토끼를 해체하는 동안 물을 끓여 양철 컵에 나눠 따랐다. 밀가루 맛이 나는 군용식량 한 덩이. 마지막 콩기름을 넣고 끓인 토끼 고기. 산사나무 열매 스무 알. 그것이 그들의 첫 끼였다. 어쩌면 오늘의 마지막 식사. 트리스는 음식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갈 길은 아주 멀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조차도 모르는데. 이 땅에는 부족함 밖에 없었다.
한 시간 뒤 그들은 길을 나섰다. 네 명 모두 군용 배낭을 멘 채였다. 배낭에는 양철 컵과 수통을 매달았고 가죽을 덧대어 묶은 신발은 밑창이 닳아 있었다. 결코 군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아이들. 그중 두 명은 체격이 제법 컸으나 다른 두 명의 등은 배낭보다도 작았다.
트리스는 커다란 단검으로 시야를 막는 나뭇가지와 덩굴을 쳐내며 걸었다. 커다란 산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는 알렉스가 먼 곳까지 나가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깊고 유속이 빠른 강이 길을 막았다. 트리스와 알렉스는 바지를 걷고 배낭을 강 너머로 옮긴 후다시 돌아와 에린과 메그를 한 명씩 업었다. 강바닥의 날카로운 돌이 발바닥을 베었으나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가에 불을 피워 잠깐 몸을 말리고 다시 걸었다. 몸이 무거웠지만 멈춰 있을 수 없었다.
폭격이 쏟아지던 신전에서 도망친 후 몇 달을 떠돌았는지 모르겠다. 에린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높은 신전. 아름다운 조각들. 부모 없는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곳에서 억지로 쥐어 준 일을 했다.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냄새나는 옷을 입은 채로.
하늘이 무너졌던 날을 기억한다. 작은 농기구 창고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폭격이 끝나길 기다렸던 새벽을.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얼어붙던 그 감각을 기억한다. 맞잡은 손이 떨렸고 누군가는 그보다 더 떨었다.
해가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이미 잿더미가 된 신의 조각상. 날것을 드러낸 땅과 피로 물든 풀잎들. 희게 뒤집힌 내장과 젖은 살점을 두고 부지런히 경쟁하던 벌레들. 종교를 지키겠다 나섰다가 뼛가루로 변한 사제들. 죽은 자의 침묵과 죽지 못한 자의 신음이 저주처럼 맴돌았다. 같은 방을 썼던 친우들은 도망치지도 못한 채 신의 곁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들은 죽은 자들에게서 옷을 빼앗고 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챙겼다. 그 누구도 도둑질하지 말라 혼내지 않았는데, 그들에게 매를 들었던 자들조차도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뼈대만 남은 조각상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가 그대로 그 땅을 떠났다.
신앙과 종말을 함께 배워 불안하진 않았다. 그러나 무엇이 다가오건 우리를 지탱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반짝거렸던 날들. 좁은 운동장에서 낡은 공을 가지고 놀며 웃던 아이들. 트리스는 뒤를 따라오는 위태롭고 작은 몸을 돌아보았다. 메그와 에린의 뒤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는데, 짙은 나뭇잎들은 천 개의 손을 불길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찬송가와 성서는 한 구절도 없었다.
메그는 꿈을 꿨다. 차가운 강물에 손이 부르트도록 일한 후 낡은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던 일. 귀찮은 녀석들에게 시달려 창고에 갇혔던 일. 삼일을 고열에 시달렸을 때조차 식사 대신 사제의 기도나 들어야 했던 일. 알렉스가 마른 빵과 차가운 스프를 양보하며 울었던 일. 별것 아닌 꿈 사이에서도 새빨간 눈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고 나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썩은 감자를 골라내다 집어치우고 알렉스와 신전 뒤편에 숨었던 때가 있었다. 찬양 시간이었는지 하얀 석재 벽 너머로 찬송가가 들렸다. 고대의 언어로 이미 죽은 타이탄을 찬미하는 찬송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노래와 뙤약볕 아래에서 허리를 숙여 이삭을 줍는 아이들. 알렉스는 메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트리스는 천사일지도 모른다고 소근거렸지만 메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신이 우리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이렇게 살게 할 리 없었다.
큰 축제가 열렸을 때조차 아이들은 일을 했다. 옷을 멀끔히 차려입은 인간들이 침을 튀기며 음식을 축낼 때 아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썩은 부분이 없는 감자나 먹다 남은 빵 정도였다. 교양 있는 대화. 점잖은 웃음소리. 초라한 아이들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어른들. 메그는 테이블에 쌓인 컵을 옮기며 숨을 곳을 찾다가 저 멀리서 단상에 오르는 트리스를 보았다. 짙푸른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하얀 로브를 입은 채 두 손으로 금빛 성물을 쥔 그녀를. 제 주변의 인간들이 손을 맞잡고 찬양을 준비할 때 그녀는 한가운데에서 메마른 눈으로 성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에 깃든 피로와 불경함은 아마 메그만이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메그는 그 입술이 열리는 찰나를 보고 있었다. 그 음색. 한순간 변하는 공기의 색깔. 청량하고 시리기까지 한 목소리. 바람과 푸르름이 온 땅에 내리깔리며 백 개의 촛불이 공명하듯 일제히 몸을 흔드는 순간까지. 전부 다 보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네가 부르면 신이 대답할지도 모른다고. 신앙과 고양은 관계없는 단어였다.
깊은 한밤중. 메그가 눈을 떴을 때 트리스는 자리에 없었다. 메그는 텐트 밖으로 기어나가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모닥불로 다가갔다. 빈 배낭을 깔고 앉아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트리던 트리스는 메그가 다가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가 그녀가 제 곁에 앉은 후에나 고개를 들었다. 잠깐 동안 둘 사이에 말이 없었다.
배고파서 깼어?
아니. 목말라서. 메그는 수통을 열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트리스는 나뭇가지 몇 개를 모닥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메그는 트리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가도 알 수 없는 형체. 짙은 눈매와 그것보다 더 어두운 눈동자. 사방이 고요했다. 모닥불 너머는 차가웠고 어둠은 두터웠으며 별은 멀리서 떨어졌다. 신이 대답할 때는 언제인가? 메그는 트리스가 지금쯤 죽은 자들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폭격이 내리기 전의 한밤중, 가장 먼저 학살의 기미를 알아채고 우리의 손을 잡아끌어 창고에 밀어 넣었던 그녀는 어쩌면 구하지 못한 이들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메그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왜 날 구했어?
트리스는 천천히 메그를 보았다.
우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 난 그때 독방에 있었고.
의자로 남자애를 패서 말이지.
알렉스가 말해줬어?
아니.
알렉스가 날 데려가야 한다고 했어?
아니.
열쇠도 없었는데 문짝을 부수기까지 해서. 손에서 피가 났었지. 네 눈이 너무 간절해 보였어. 알렉스랑 에린은 너랑 친하다 치고, 나는 왜?
트리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메그와 눈을 마주쳤다. 잔뜩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에 모닥불 불빛이 닿아 언뜻 금빛으로 보였다. 뺨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고 메마른 입술은 생기가 없었다. 어둠조차 버거워 보이는 형체가 안타까울 만큼 가느다랬다. 왜 그랬을까. 나와 아침 인사를 나누던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잠에 빠져 있었을 텐데 왜 너를 찾았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명확한 것은 바라볼 여유조차 없는 하늘대신 네 눈에서 하늘을 찾고 바다를 찾는다는 사실 뿐. 메그는 입을 열지 않는 트리스의 손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자러 가자. 트리스는 메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일어난 아침에 에린은 비가 올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폭풍이. 그들은 에린이 말하는 구름 모양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모닥불의 연기가 아래로 흩어지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식사조차 하지 못한 채 짐을 챙겼다.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어디든 지붕이 있는 곳. 동굴도 괜찮았다. 그들은 멀리 보이는 민가로 갈지 어떻게든 동굴을 찾을지 이야기하다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메그는 피와 화약 냄새가 난다고 했으나 먹을 것이 없었다.
늘 먹을 것이 고민이었다. 그 다음은 신발과 청결. 신전에서도 배불리 먹지는 못했지만 가끔 몰래 사냥을 했었다. 야생 새와 들짐승, 울타리에서 도망쳐 나온 닭 같은 것들을. 그 시절의 트리스는 저녁거리가 된 짐승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었다. 내일의 생존조차 불투명한 생활이 계속 계속 이어졌다.
오후가 되자 비가 내렸다. 에린은 천둥의 기미가 보인다고 했다. 강물 소리가 흐려지고 그것보다 더 큰 빗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트리스는 메그와 에린에게 방수포를 뒤집어씌운 후 앞장섰다. 산은 올라가는 것 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려웠는데, 비가 올 때는 더욱 그랬다. 젖은 땅에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협곡 건너편의 높은 바위 절벽에 가늘고 검은 나무들이 겨우 매달려 있었다. 가장 큰 희망이 식량 창고를 발견하는 것이라니 신이 웃을 터였다.
두꺼운 구름 너머로 해가 사라지기 직전에 산을 내려왔다. 겨우 도착한 마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길 구석구석 죽은 자들이 방치되어 있었고 구정물이 빗물에 섞여 악취가 진동했다. 메그는 한 손으로 방수포를 쥔 채 다른 손으로 코를 막았다. 시체 냄새. 단백질이 녹아 땅으로 스며든 냄새. 회반죽 같은 진흙이 신발을 엉망으로 더럽혔다. 트리스는 무너지지 않은 집 하나를 골라 문을 열었다. 불을 피워 몸을 녹인 다음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 볼 거였다.
누구쇼?
순간 트리스가 그들 앞을 막아서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쥐었다. 알렉스는 배낭을 어깨 한 쪽으로 메고 트리스의 옆에 섰다. 물방울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소리. 창밖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멀리서 하늘이 우르릉 울었다. 트리스는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환청인지 아닌지 구분해 내려 애를 썼지만 알 수 없었다. 작은 등불이 복도 끝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낡은 마루가 삐걱거렸다. 죽음이 기어오는 소리처럼 느릿하고 무거운 소리였다.
세상에.
허리 굽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트리스는 단검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놀란 남자는 등불을 쥐고 있지 않은 빈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무기가 없음을 알리는 것 같았으나 경계를 멈출 이유는 되지 못했다. 빈속으로 종일 차가운 비를 맞은 아이들과 무기 없는 남자 한 명. 남자는 노인이 되기 직전의 나이 같았다. 이길 수 있을까? 죽일 수 있을까? 죽여야 한다면 내가 할 것이다. 귀 끝이 뜨거워지는 것과 반대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핏빛 눈이 피를 마주하려 하는 순간. 남자가 탄식을 내뱉었다. 아이들이구나. 어서 들어오렴.
남자는 그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주었다. 그는 이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했다. 허리를 다쳐 밭일을 할 수는 없는 대신 모아둔 식량으로 살아가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들이 이 곳을 빈집으로 착각한 이유는 창문을 두꺼운 천으로 가려두었기 때문이었다.
응접실 옆방의 침대에는 아픈 사람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그 사람을 자신의 동생이라고 말했다. 남자보다 더 늙어 보였는데 제 동생이라고. 그 사람은 오른쪽 다리가 없었고 뭉툭한 환부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몸을 덮어둔 흰 천은 세탁을 반복해도 지울 수 없는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잘라낼 수밖에 없었어. 남자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살려면 그렇게 했어야 했어. 동생이라는 자가 무언가를 웅얼댔지만 남자가 끌어안아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남자는 벽난로에 불을 피워 그들에게 몸을 말리라고 했다. 메그의 떨림은 거의 멎었지만 에린이 기침을 몇 번 했다. 남자는 우선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가 응접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손때 묻은 장식장과 단단히 가려진 창문. 노끈 자국이 남은 마루와 군데군데 그을린 카펫. 트리스는 기침하는 에린에게 수통을 건네주었다. 남자가 내어준 찻잔은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얘 몸이 얼음장인데. 에린을 살피던 메그가 말했다.
…미안해, 아직은 안 돼.
저녁은 먹을 거야? 알렉스가 물었다. 트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해야 했지만 여유가 없었다. 침침한 산 속에서보다 더 그랬다. 어쩌면 오늘 죽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살인을 할지도 몰라. 트리스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조용해졌다. 트리스는 달그락거리는 부엌 소리를 들으며 다 마른 윗옷을 에린의 어깨에 여며주었다.
남자는 구운 고기와 통조림 콩을 작은 접시에 얹어 가져왔다. 옥수수 가루로 구운 납작한 빵도 함께였다. 어서 먹으렴. 그들은 이유 모를 호의에 떠밀리듯 앉아 음식을 들여다보았다. 하루 종일 굶은 배가 아픈 소리를 냈지만 이것들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짧은 침묵이 맴돈 뒤 알렉스가 옥수수 빵을 덥석 쥐자 남자는 기쁜 표정으로 물을 가져 오겠다며 일어섰다.
남자의 등을 바라보던 메그가 접시를 끌어와 은색 포크로 고기를 뒤적거렸다. 그들은 식기를 달그락거리는 척 하며 메그를 보았다. 작게 킁킁거리는 소리. 정체 모를 육고기의 결을 살피는 눈빛. 내리깔린 눈이 몇 번 깜빡였다가 표정 없이 위로 뜨였다. 이거……사람이네. 어쩌면 예상했었다는 듯,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작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응접실을 나서다 우뚝 멈춰 섰다. 멀리서 낮게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은 아니었다. 비슷한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트리스가 식탁을 발로 차 무너트렸다. 알렉스가 뒤도는 남자의 등에 달려들어 양쪽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끼워 넣었다. 메그는 에린을 붙잡아 의자 뒤로 당겼다. 트리스는 발치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단단히 쥐고 발을 박찼다. 어깨. 목. 배. 허벅지. 어디를? 트리스는 순간적으로 살려둘 때의 이익과 위험성을 계산했다. 그리고 목을 찔렀다. 우악스러운 두 팔에 강제로 펴진 허리. 쇄골과 쇄골 사이 움푹 들어간 곳. 피부가 갈라지고 근육이 찢어졌다. 트리스가 단검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더욱 강하게 눌렀다. 크게 벌려진 입에서 피가 왈칵 터졌다. 무거운 몸에서 힘이 빠지자 알렉스가 팔을 풀었다. 남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들은 시체를 카펫에 말아 마당의 수레 옆에 두었다. 바닥을 대강 치운 후에는 세탁 소다로 옷을 빨았다. 창고 한편에 정어리 통조림 몇 개와 땅콩 더미가 있었다. 그들은 식량 창고를 살펴보다 보관 기간이 긴 음식은 챙기고 나머지는 새로 구운 옥수수 빵과 함께 먹었다. 나무 의자를 부수어 벽난로 장작 대신 썼고, 올가미용 줄을 벽에 걸어 옷을 말려 두었다. 타인의 집에서 타인의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도 살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에린이 앓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 집안의 서랍을 닥치는 대로 뒤져 페니실린 한 병을 찾아냈다. 트리스는 깨끗한 천으로 이마의 땀을 계속 닦아주었고 메그는 미지근하게 식힌 물과 약을 가져왔다. 알렉스는 응접실 한편에 방수포와 침실에서 가져온 이불을 깔고 에린을 눕혔다. 에린은 한쪽 무릎을 꿇고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트리스를 보며 겨우 웃었다. 아니야.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트리스는 차가운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내 탓이 아니라면 누구의 탓일까?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있던 너를 깨워 그 기다란 복도를 뛰었던 일. 좁은 창고에서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죽지 마라 날아가지 말아라 기도했던 일. 너희를 끌고 먼 길을 떠돌며 원망 없는 눈동자에 안심하면서도 죄책감을 느꼈다. 어떻게 산들 오래 살지는 못할 텐데. 매 순간마다 춥고 허기지며 희망은 털끝조차도 보이지 않는데. 앞으로도 수없는 고난과 위협을 마주해야 할 텐데. 오늘 살인을 저질렀다 한들 내일의 죽음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을 살린 죄책감과 사람을 죽인 죄책감이 빠져나갈 길 없이 덮였다.
트리스.
응.
참담한 붉은 눈. 목을 겨우 쥐어짠 대답. 에린은 떨리는 눈꺼풀을 보며 손을 뻗었다. 불처럼 뜨거운 작은 손이 커다란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 손끝을 꼬옥 쥐었다. 트리스가 흠칫 놀라며 에린을 보았다. 에린이 말했다. 작고 힘이 없지만 성냥불처럼 또렷한 목소리로. 나는 살고 싶었어. 그렇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았어. 널 따라온 걸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 하지만 네가 날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해.
…….
혹시 나를 좋아했어? 그래서 죽게 둘 수 없었니?
에린은 열이 끓는 몸으로 말갛게 웃었다. 어쩌면. 그녀는 모든 걸 알고 있을 지도 몰라.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하여 깜부기불을 뒤적거렸던 일을. 너희의 안색을 살피며 매분 매 초 불안해했던 일을. 하늘은 재앙처럼 비를 퍼붓고 정원에는 시체가 있다. 가방에는 고작 며칠 분의 식량이. 목적지 없는 지도에는 헤맴만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만의 욕심으로 너희를 이끈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벽난로의 불길이 크게 타올라 그림자가 기울었다. 나무 타는 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맞아. 그랬어. 트리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너희보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데도 그 밤에는 너희만이 떠올랐어. 죽게 둘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희를 찾았고, 살아남은 후로는 가능한 오래 함께하고 싶었어. 배가 고프고 추운데 원망 한 번 하지 않는 너희에게 고마웠고 미안했어. 왤까. 왜일까. 너희도 내게 물었고 나도 내게 물었어. 하지만 답을 알 수 없었어.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해. 그러니까 나는 너를, 너희를…….
에린이 트리스의 말을 가로막듯이 천천히 두 팔을 뻗었다. 그리고 트리스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트리스. 그 말을 듣고 싶었어. 나는 살고 싶었고, 네가 구해줘서 기뻤고,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애정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말자. 응? 그건 죄가 아니야. 나도 너를 정말 좋아해.
아. 트리스는 몸을 낮추었다. 알렉스와 메그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와 그들을 껴안았다. 고난과 불안. 애정과 죄책감. 지금이 일 년 중 어느 때일까?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트리스는 가끔 성서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이들이 성서보다, 두 손에 쥐었던 금빛 성물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인색한 어제와 초라한 내일. 과거는 멈추었고 미래는 알 수 없다. 두 손을 맞잡더라도 내일을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 속삭였다.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구해주어 고맙다고 말했다. 멋모르는 아이들의 말이 아니야. 우리는 죽음을 넘었고 살인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들은 너를 좋아한다고, 너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트리스는 조용히 그들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몰래 맹세하였다. 핍박이 오래되었고 기근은 끝이 없지만 너희를 죽게 하지는 않겠다고. 길을 알 수 없는 세상을 걷고 발을 적시는 비구름을 만나더라도 가장 앞에 서겠다고. 만일, 만일 그 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내가 죽으리라고. 세 명의 아이는 에린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에린을 지켜보다 그녀의 곁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트리스는 그 자그만 온기와 풍경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낮추어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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