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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블랙워터

블랙워터. 04

Eugene_FMF 2018. 10. 21. 23:22

 

 댈러스 컨벤션 센터의 라운지. 몸에 딱 달라붙는 골프 셔츠를 입은 인간들이 라운지 테이블에 앉아 맥주병과 술잔을 비웠다. 개중에는 아랍어가 쓰인 말보로를 자랑처럼 피우는 자들도 있었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디서 일하다 왔냐고 묻는 아마추어들도 있었다. 미국보안산업전시회 회장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를 구분할 수 있는 자들은 전투에 단련된 프로와 잔뼈가 굵은 무기 제조업체 판매원 정도였다. 붉게 타들어가는 담배 불빛이 용병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독립 청부인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ASIS는 보안 장비와 카메라를 선보이는 따분한 전시회처럼 보였지만, 청부인들의 사교장이자 보안 서비스 제공자를 위한 전시장이기도 했다. 민간보안회사들은 이곳에서 바쁘게 돌아다니며 멋진 부스와 멋진 전시품으로 잠재 고객을 끌어들이고, 동료들을 만나고, 다른 회사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었다. 돈은 많지만 사회적 접촉의 기회가 적은 청부인들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떼지어 몰려들었다. 보통 사람보다 일당이 높은 청부인들은 전시장에서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하루 6백 달러의 손해를 보았지만 개의치 않은 듯했다. 집과 분쟁 지역만을 왕복하는 그들은 언제든 동류와 어울리길 원했으며 어디에서든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했다. 

 트리스는 시끌시끌한 전시회 라운지의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과 꽁초가 가득했다. 그녀 맞은편에 앉은 에린은 맥주병을 맨손으로 따 한모금 들이키고 멘솔 담배의 캡슐을 깨물었다. 트리스는 담배 연기가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철제 의자의 딱딱한 등받이에 몸을 파묻은 채 회장을 둘러보았다. 마르케스 반체 마르케스, 블랙워터, 스틸 파운데이션, 트리플 캐노피같은 온갖 회사의 청부인들이 허세를 부리고 그들처럼 되고 싶은 아마추어들이 눈을 빛내며 경청하는 멍청한 축제였다. 어디선가는 요인 경호 팀을 꾸리기 위해 급조된 협상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기밀 취급 허가를 받은 놈들을 모셔가려고 눈을 빛내기도 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과 뿌연 담배 연기는 여기가 마약 소굴인지 으리으리한 전시회장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트리스는 무기 팜플렛을 읽으며 맥주를 한모금 더 들이키는 에린을 보면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댔다. 턱을 괸 채 철제 테이블을 툭툭 건드리기도 했고 연락 올 일 없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내려놓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에린이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글자를 읽다 드디어 팜플렛을 내려놓자 트리스가 의자를 당기며 고쳐 앉았지만 에린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을 꺼내 업무 메일함의 스크롤을 내렸다. 

 에린. 

 어? 아직 있었네.

 처음부터 계속 있었는데.

 너 이런 데 관심 없잖아. 금방 갈 줄 알았지.

 에린이 웃으며 등을 폈다. 마침 회장을 어슬렁거리던 무기 제조업자 한 명이 다가와 서류 가방을 내밀며 반경 180 미터의 모든 통신을 차단할 수 있는 상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과장 광고가 아니라면 핸드폰으로 터트리는 급조폭발물에 대처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였겠지만 트리스는 에린이 그 상품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의자에서 일어나 제조업자를 내려다보며 표정을 구겼다.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으니까 꺼져.

 아, 잠깐만. 명함 좀.

 에린…….

 왜?

 아니다.

 트리스는 명함을 던지듯 내려놓고 사람들 사이로 도망치는 제조업자를 보며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명함의 사진을 찍은 후 구매팀에 보낼 메일을 쓰고 있는 에린을 보았다. 술을 좋아하고 글자를 좋아하고 손끝에서 멘솔 냄새가 나는 사람. 기계공학과 행동과학, 형사행정학 학위와 SCI 기밀 취급 허가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 이 전시장에는 그녀를 모셔가고 싶은 놈들이 넘쳐났지만 그녀의 명함에는 블랙워터 헤드헌팅 담당자라는 직함이 쓰여 있었다. 에린이 담배를 한대 더 물고 불을 붙였다. 트리스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마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에린에게 본론을 이야기했다. 메그 다음 행선지 알아? 

 물론 알지. 어디냐면. 트리스의 물음에 무심코 대답하던 에린이 문득 손을 멈추고 트리스를 보았다. 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메그 번호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알려줄게.

 아, 왜. 연락해서 무슨 말을 하라고…….

 그냥 따라가는 게 더 이상할걸. 넌 가끔 거리감을 못 재더라. 에린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트리스는 에린의 말을 묵묵히 곱씹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에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거리감을 못 잰다는 것까지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연을 가장하고 싶은 트리스에게는 그다지 좋은 방법 같지 않았다. 트리스는 커다란 손으로 맥주병을 꽉 쥐다가 에린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그냥 알려줘. 

 메그 개인 신상인데 우리 사이라도 좀. 에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 별로지? 아까부터 표정 안 좋더라.

 맥주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냥 물처럼 마셔.

 오늘 스톨리치나야 한 병 깔래?

 그런 걸로 꼬시는 거야? 너무 싼데. 

 말고, 에린. 얼마전에 300병 한정 구했거든.

 트리스가 턱을 괸 채 말했다. 에린은 눈을 깜빡이다 멈추고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검은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짓궃게 접혔고, 단정한 입매가 담배 연기를 뱉었다가 천천히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번거로움과 구하기 어려운 고급 보드카의 가치 계산을 끝낸 것처럼. 메그는 아르마니야로 가. 에린이 말했다. 트리스는 테이블 구석의 팜플렛들을 모아 에린의 가방에 넣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방금의 거래로 2천 달러가 날아갔지만,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보드카가 하룻밤 사이 에린의 뱃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20분 동안 에린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다 택시를 잡아 댈러스 포트워스 공항으로 향했다. 

 

 독재자들이 전문 용병을 고용해 음모를 피하려 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부패한 왕실이 델타포스와 육군 특수부대 출신의 독립 청부인들을 고용하는 것처럼. 그러나 한 나라가 외국 지도자를 보호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일은 드물었는데, 미국은 몇 년 전부터 아르마니야 대통령 대신 총을 맞아줄 인간들을 부지런히 바쿠바로 보냈다. 아르만 역사에 암살로 국가의 진로가 바뀐 일이 있기도 했지만 더 단순하게는 미국의 국익에 친미파 대통령이 살아 있는 쪽이 좋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대통령의 호위를 맡게 될까? 

 경호 인력 선정의 첫 번째는 미 국무부와 보안 계약을 맺은 민간군사회사에서 소속 청부인들의 이력서를 국무부로 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국무부에서는 그 중 몇 명을 신중히 골라 몇가지의 상세 서류를 요구했고, 서류 심사와 심리 테스트를 통과한 자에게만 일급 기밀 취급 허가서를 내려주었다. 그렇게 차출된 지원자는 몇 주 동안 근접 경호와 운전, 사격, 근접전과 백병전 등 국무부가 요구하는 것들을 훈련해야 했는데, 이 수업을 무사히 졸업해야만 고용 계약서와 보험 계약서에 서명하고 아르마니야로 향할 수 있었다. 메그는 매 계약 마다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잠적하고 싶었지만 국무부에 제출할 서류를 조작해 준 에린을 생각하며 짜증을 삭혔다. 가장 큰 이유는 계약서에 찍힌 두둑한 일당이었지만 뭐, 어쨌든 그랬다. 

 트리스는 출국 수속을 마치고 경유지인 두바이로 향할 C 터미널에서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렸다. 키 큰 근육질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그녀는 흰 줄이 들어간 검은 항공점퍼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전투화를 신고 있었다. 트리스의 시선 끝에 저 멀리서 캐리어 하나 없이 긴 코트를 늘어트리며 막대 사탕의 포장을 뜯는 메그가 보였다. 이 주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트리스가 옷가지 몇 벌과 낱말 퍼즐 책자 두 권이 든 캐리어를 끌고 메그에게 다가갔다. 메그는 트리스를 보고 발을 멈췄다가 고개를 옆으로 한번 까딱였다.

 메그.

 어…….

 이름 까먹었어?

 트리스?

 안 잊었네. 

 뭐어. 

 아무렇게나 대답한 메그는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사탕을 우물거렸다. 작은 가방 하나. 목을 가리는 니트 재질의 옷. 품이 넓고 안감이 새빨간 검은색 코트. 그녀의 짐은 그게 전부였다.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반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트리스는 지루한 듯 깜빡거리던 파란 눈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보았다가 캐리어에서 사탕 두 봉지를 꺼내 건네주었다. 

 너 전에 사탕 없어서 짜증냈잖아. 챙겨둬. 

 오. 

 대통령 경호팀이지?

 너도?

 트리스는 메그가 떨어트린 비행기 표를 주워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메그는 그 커다란 몸이 허리를 숙였다 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표를 받았다. 손끝이 살짝 닿은 것 같기도 했다. 뜨겁고 조금 굳어 있는 손끝. 메그는 제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트리스를 지나쳐 대기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트리스는 그녀의 맞은편과 옆자리 중 어느 곳에 앉을지 잠시 고민하다 캐리어를 끌고 와 옆자리에 앉았다. 

 짐은 그게 다야?  

 어차피 옷 지급해준다던데.

 가면 심심할걸. 비는 시간 꽤 많다. 

 잠이나 잘래. 

 메그는 입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하며 팔을 쭉 폈다. 그리고 트리스가 준 사탕 봉투를 뜯어 자그만 알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다. 달콤한 냄새가 잠깐 났다가 메그의 한쪽 볼이 볼록해졌다. 트리스는 잠깐 스트레칭을 하듯 깍지 낀 손으로 뒷목을 내리누르다 메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메그, 그러면.

 왜?

 저번에 바에서 만났을 때…혹시 기억나?  

 어어. 뭐.

 내 옆에 있던 사람, 애인 아니거든. 

 ……그래서?

 가끔 시간 나면 찾아가도 될까?

 메그가 옆자리에 앉은 트리스를 돌아보았다. 트리스는 곧은 눈썹을 약간 누그러트리고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와 한쪽 눈을 가린 군청색 머리카락. 또렷한 눈매와 진한 쌍커풀. 짧고 짙은 속눈썹이 내려깔렸다가 다시 올라왔다. 콧대가 곧았고 붉은 눈동자는 그보다 더 곧았다. 메그는 트리스는 얼굴을 뜯어보다 문득 에린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렇게 안 생겨서 꽤 놀지? 만약 저 녀석이 너한테 관심을 보이면 그땐 좀 괴롭혀줘. 잘생긴 놈이 너한테 쩔쩔매는 게 좋다면 말이야. 못 믿겠지만 한 사람한테 충실하긴 하거든. 에린은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 나한테 관심 있어?' 메그는 잠시, 입술을 떼었다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그만두었다. 물어볼 것은 많았으나 그랬다.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에린의 조언을 들어볼까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메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리스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탑승 수속 방송이 그들의 출발을 알렸다.

 

 아르마니야에 도착한 블랙워터의 청부인들은 서로 다른 팀으로 흩어졌다. 트리스를 비롯한 세 명은 밀착경호팀에, 다른 몇몇은 공격대응팀과 운전 팀에 차출되었고 메그는 홀로 저격수 팀에 들어갔다. 아르만 대통령 경호팀은 델타포스니 해병대 수색대니 공군 전투 통제관 같은 이른바 명문 출신들로 바글거렸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기술을 배울 곳으로는 군대만한 장소도 없었다. 

 팀 배정이 끝난 청부인들은 M-3소총과 글록19, 개인 모토롤라 무전기를 지급받은 후 짧은 교육을 받았다. 임무 지침과 아르만 율법, 복장 규제와 자유시간 등에 대해서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진 수행팀장은 첫날이 으레 그렇듯 과장을 잔뜩 섞어 신참들을 겁주었는데, 그들을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있던 기존 인원들이 또 허풍을 떤다며 면박을 주기도 했다. 트리스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 듯 삐딱하게 서서 수행팀장의 말을 듣다 가끔씩 메그를 훔쳐보았다. 메그는 등을 살짝 굽히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사람들 속에 서있었다. 분명 이번이 두 번째 파견일 텐데, 그녀는 10년은 된 베테랑 같았다. 

 교육이 끝나갈 때 쯤 수행팀장이 밀착경호팀 인원에게 검은 봉투를 나눠주었다. 크고 가벼운 것이 종이나 옷감 같았다. 봉투를 지급받은 몇 명이 이게 뭐냐고 물어보자 수행팀장은 유니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밀착경호팀은 언론용 사진이 많이 찍히니 정장을 입어야 한다며, 방탄복 위에 깃 있는 셔츠와 넥타이를 꼭 착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날씨에요? 그래. 자켓도 입고요? 그렇지. 셔츠 깃만 남기고 잘라도 됩니까? 안 들킬 자신 있으면 해봐라. 수행팀장에게 하나씩 묻던 인원들 사이 한숨이 터졌다. 이 놈들 외엔 자율 복장이다. 수행팀장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사파리 조끼든 아웃도어 러너든 뭐 벗지만 않으면 돼. 어차피 윗분들은 신경도 안 쓰니까. 메그는 그 말에 만족스러운 듯 끄덕이다 트리스의 단정한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보며 혼자 웃었다.

 

 새 인원이 투입된 대통령 경호팀의 아침이 밝자 운전사들과 경호원들은 대통령 업무 시작 30분 전에 서버번을 타고 관저로 향했다. 밀착경호팀과 국무부 사람들이 관저 앞에서 대통령을 대기하는 동안 운전사들은 바쁘게 세차를 했고, 대통령이 나오자 경호팀이 도보로 출근하는 대통령을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밀착경호팀이 새로 파견된 인원의 차출 우선권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경호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한 후까지 그들은 항상 대통령과 함께 해야 했다.

 저격수들은 대통령이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지붕 꼭대기에 배치되었다. 오후가 되자 대통령은 모스크에 들렀다가 점심 식사를 위한 건물로 이동했는데, 얼마 없는 저격수들은 만일에 대비해 식사 시간에도 근무해야 했었다. 잠깐의 쉬는 시간도 없는 일정이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내와 기다림이 저격수의 핵심이기 때문일까? 메그는 배급받은 튜브 유동식을 삼키고 사탕 하나를 문 후 다시 스코프에 집중했다. 지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옥상은 그들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지방 원로들과 점심 식사를 마친 대통령이 집무실로 복귀했다. 대통령을 따라 이동하던 밀착경호팀은 대통령이 오후 업무를 시작함에 따라 집무실의 창가와 문, 복도와 복도 양 옆의 계단에 서서 소총을 쥔 채 대기했다. 검은 정장 자켓과 검은 바지, 검은 넥타이에 투명한 이어마이크를 찬 채였다. 먼지 하나 없는 실내. 잘 관리된 카펫. 총소리 없이 고요한 공간. 저 멀리 있던 그림자가 해의 위치에 따라 길어지며 집무실 복도로 들어왔다. 매일같이 죽음의 도로를 달리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평화로웠지만 프로는 그런 감상에 젖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여섯 시간을 더 서있다 대통령의 퇴근길을 경호한 후 하루 일과를 마쳤다.

 그들의 숙소는 커다란 5층 건물이었다. 1층은 넓은 식당과 운동장, 2층은 하루 종일 일하고도 몸이 찌뿌둥한 놈들을 위한 피트니스 센터, 3층부터 5층까지는 개인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운동장은 흙바닥과 잔디 바닥 구역이 구분되어 있었고, 피트니스 센터는 이탈리아산 고가 브랜드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하리허술한 컴파운드와는 다르게 먹을 만한 식사가 나오는 점이 좋았다. 저녁을 먹고 운동까지 마친 트리스는 넓직한 개인실 바닥에 모토롤라 무전기를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저격수 팀의 복귀 무전이 들리자 벌떡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트리스는 사람이 얼마 없는 식당을 둘러보다 수행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트레이를 들고 가던 수행팀장은 계단 방향을 턱짓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귀뜸해주었다. 트리스가 머쓱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하자 수행팀장은 파견와서 연애라도 하냐고 놀리듯 말했다. 트리스는 대답 없이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지만 차라리 연애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트리스는 개인실로 돌아와 무전기를 한참 만지작대다 괜히 푸시업만 몇 번 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똑같은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트리스는 책상 위의 위스키와 사탕 봉지를 내려다보았다. 프리랜서 기자를 검문하다 뇌물처럼 받은 조니워커와 이름 모를 상표의 딸기사탕이었다. 트리스는 메그에게서 나던 냄새가 조잡한 딸기향이었음을 곱씹다 메그의 개인실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연락 없이 찾아와서 귀찮아하지는 않으려나. 가끔 시간 나면 찾아가겠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트리스는 굳게 닫힌 철문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다시 손을 들었다. 못 들었을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트리스는 문틈으로 확 퍼져나오는 열기에 표정을 찌푸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아 닫았다. 쾅. 문 닫는 소리인지 심장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트리스는 허공에서 주먹을 꽉 쥔채 방금 본 것을 머리속에서 지우려고 애를 썼다. 머리 위에 수건 한 장을 덮어쓰고 긴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메그를. 커다란 검은 티 한 장만을 걸치고 있던 몸과 그 다리를. 젖은 목덜미와 하얀 발등과 도드라진 무릎을. 아. 여자가 처음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뭐야?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메그는 표정을 구긴 채 문가에 서있었다. 트리스는 입을 합 다물었다가 시선을 피했다. 대답 없는 트리스 대신 그 손에 들린 검은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그건 또 뭐야. 메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잠깐만, 옷 좀 입어. 트리스가 대답했다. 

 뭐냐고. 그거.

 이거? 위스키랑 딸기ㅅ… 

 빨리 들어와.

 메그가 트리스의 말을 자르고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벼운 힘이었지만 뿌리치지는 못했다. 잠깐 사이 메그의 방에 들어오게 된 트리스는 어색하게 천장을 보았다. 메그는 그런 트리스를 신경도 쓰지 않고 검은 봉투를 뺏듯 가져가 사탕 봉지를 꺼냈다. 막대사탕이네. 메그가 살짝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트리스는 선물이 먹힌 듯 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시선을 내릴 때마다 보이는 맨발과 맨다리에 눈을 맞추질 못했다. 그리고 결국 보다 못해 구석의 담요를 가져와 메그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옷 좀…입으라고!

 입고 있잖아.

 밑에,

 짧은 거 입고 있는데.

 메그가 담요를 들어 짧은 반바지를 보여주었다. 트리스는 심장이 덜컥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귀까지 빨개진 트리스가 그대로 철제 옷장에 머리를 박고 서서 그래……하고 중얼거리자 메그가 다리를 쭉 펴며 씩 웃었다.

 은근 밝히네. 

 멋대로 말해라…….

 이거 맛있다. 어디 거야? 메그가 막대를 톡톡 흔들며 물었다. 검문 때 압수한 건데. 겨우 얼굴을 식힌 트리스가 대답했다. 

 뭐야.

 너 저녁은 먹었어?

 원래 안 먹어.

 점심은.

 유동식?

 그러다 죽어.

 건물 옥상에서 대충 먹는 점심이 맛이 좋겠냐.

 일은 좀 할 만해?

 더워.

 그렇겠지.

 트리스는 잠시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가도 표정을 숨기고 말을 돌렸다. 메그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 시답잖은 걱정이, 네가 찾아오는 게 귀찮지는 않다고 말을 해줘야 할까. 메그는 트리스가 어떤 얼굴로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물기로 살짝 젖은 입술로 사탕막대를 까닥거리다 침대에 털썩 누웠다. 덜 말린 머리카락이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사탕 주러 온 거야?

 …어. 이제 자려고?

 일찍 일어나서 졸려.

 그래. 불 끈다.

 어어.

 메그는 자리에 누운 채 대충 손을 흔들며 트리스를 배웅했다. 그리고 잘 자, 하며 저녁 인사를 덧붙였다. 트리스는 메그가 보지 않는데도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쿵. 커다란 철문이 아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트리스는 그대로 문에 기대어 서서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이 방에서 보았던 것들을 잊으려 했다가, 잊지 말자고 고쳐 생각했다. 트리스는 작은 목소리의 저녁 인사를 머릿속에서 되감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비번인 날. 메그는 느지막히 일어나 점심을 대충 먹고 야외 운동장의 선베드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그늘 아래였지만 그다지 시원하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남은 팀원들과 한참 축구를 하다 멀리서 꾸물거리는 형체를 보았다. 검은 코트를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목폴라를 내린 채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메그였다.  

 트리스는 구석의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두 개 뽑아 메그에게 다가갔다. 메그는 눈을 감은 채 선베드에 늘어져 있었다. 트리스가 차가운 캔을 뺨에 슬쩍 대자 메그는 으악! 하고 소리질렀다가 트리스를 보고 꿍얼거렸다. 그리고 물이 맺힌 이온음료 캔에 한쪽 뺨을 댄 채 눈을 감았다. 모자를 살짝 뒤로 당기고 앞머리를 쓸어올려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어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차가운 캔을 쥐고 있던 커다란 손에 금방 열이 올랐다. 다행스럽게도 메그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다행일까? 

 트리스는 언제부턴가 일이 끝난 후를 생각했다. 파견 종료까지는 두 달이 넘게 남았는데도 그랬다. 여태껏 일에 집중하지 못한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가 이상할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이 일이 끝나면 함께 일할 기회가 또 있을까? 저번처럼 멍청하게 번호도 못 물어보고 끝나는 건 아닐까? 이 사람은,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차라리 헛수작 부리지 말라고 비웃기라도 하면 좋을 것이다. 거절하기 귀찮아서 나를 허락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될 테니까. 

 문득 바람이 불었다. 날씨가 좋았다. 덥긴 했지만 긴 코트와 니트 재질로 된 옷만 입지 않는다면 괜찮을 온도였다. 한낮의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고 새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하얀 돌바닥에 흙먼지 알갱이가 까슬거리는 것 외에는 거슬릴 일 하나 없는 주말. 메그는 트리스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살짝 떴다가 웃었다. 갈색 속눈썹 아래의 파란 눈동자에는 회색이 조금 섞여 있었다. 트리스는 메그가 왜 웃는지, 왜 그렇게 웃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처음 느껴보는 망설임을 간질거리는 심장 속으로 내리누르며 따라 웃어주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찾아갔다. 일주일에 한 번쯤. 대부분 메그의 개인실에서 시답잖은 대화로 시간을 때웠지만 괜찮았다. 같이 산책을 하거나 저녁을 먹은 적은 없었지만 그것까지도 그랬다. 다만 마지막으로 들렀을 때는 문을 잠근 채 자고 있었는데, 트리스는 그날 이후 3층 복도에 발길을 끊었다. 일곱 시 쯤 되는 시간이었고, 매주 찾아가던 목요일이었고, 귀찮게 해버렸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것은 끝없이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일임을 트리스는 알지 못했다. 

 이주가 지났을 때 쯤. 2층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던 트리스 앞에 메그가 슬쩍 얼굴을 비추었다. 높이 매달린 철봉을 붙잡고 턱걸이를 하던 트리스가 깜짝 놀라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재빨리 의자에 걸쳐두었던 타올로 얼굴과 목을 닦고 메그를 보았다. 메그는 운동복을 입고 땀을 흘리는 놈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검은 코트를 입은 채였다.

 오래 하네.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보고 있었다고?

 30분 쯤? 

 메그가 트리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대로 두꺼운 팔뚝의 근육을 하나하나 눌러보았다. 트리스는 어색하게 웃다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음, 메그. 땀냄새 날 것 같은데. 트리스가 작게 말하자 메그는 그대로 시선을 올려 트리스와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반팔 운동복을 입은 상체가 근육의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새삼 몸 좋네. 메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얀 손끝이 단단하고 짙은 피부의 근육을 눌렀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복근으로 가 배를 몇 번 꾹꾹 누르고 다시 어깨로 올라왔다. 트리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메그의 비니를 살짝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지? 분명 너를 보지 못하는 동안 생각해둔 것들이 많았는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실없는 말뿐이었다.

 …왜 왔어?

 그냥. 네가 안 와서 내가 와봤지.

 메그의 한쪽 볼이 사탕으로 볼록해졌다. 트리스는 무심코 메그를 덜컥 끌어안을 뻔 했지만 이성을 붙잡고 조심스레 숨을 들이쉬었다. 대신 팔뚝 위에서 꼼지락대는 손을 조심스레 끌어와 깍지를 끼고 그녀를 보았다. 메그는 깍지 낀 손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팔을 당기거나 손을 풀어내지는 않았다. 망설임. 자기검열. 부끄러움. 혼자 했던 많은 생각들을 말 몇 마디로 지워버리는 사람. 트리스는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웃음이 나왔다. 

 미안. 오늘은 사탕 없어.

 그거 때문 아니라니까. 

 이제 다 먹었어?

 몇 개 안 남았지.

 쉬는 날에 사러 갈래? 

 여기 시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내가 알아. 

 아랍어 못 해.

 내가 할 줄 안다고.

 제법인데. 디저트 가게 알아?

 어.

 그 사이 제법 준비했나봐. 

 ……맞아.

 트리스가 씩 웃고는 깍지 낀 손을 들어올려 메그의 손등 뼈마디에 입을 맞추었다. 메그는 발끝을 조금 움찔거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손등에 닿는 입술이 뜨거웠고, 내리깔린 눈이 지나치게 정갈했다. 그 둥근 이마와 곧은 콧대. 땀에 살짝 젖은 군청색 머리카락. 메그는 문득 제 개인실에 덩그러니 방치된 위스키를 떠올렸다. 그리고 반대쪽 손을 뻗어 트리스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트리스가 동그란 눈으로 메그를 보았다.

 그럼 그날 내 방에서 위스키 마시자. 메그가 말했다. 

 위스키?

 네가 두고 갔던 거. 

 아.

 트리스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커다란 손으로 메그의 손을 만지작대면서도 그랬다. 검은 티셔츠의 목덜미 주변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트리스는 시선을 잠시 바닥으로 내렸다가 손을 놓아주고 습관처럼 뒷목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메그를 보았다. 

 그런 말 하면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뭘?

 그러니까, 호텔에서처럼. 또 그럴지도 모른다고.

 오해 아니야.

 응?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 메그가 대답했다.

 메그는 그대로 트리스의 손을 잡아당겨 깍지를 낀 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 피트니스 센터를 떠났다. 트리스는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바보같은 한숨을 내쉬며 쭈그려 앉았다. 손으로 가린 얼굴이 뜨거웠다. 왜 내게 웃어주었는지. 왜 나를 허락해주었는지. 왜 나를 찾아왔는지에 대한 고민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르겠어. 이제 모르겠다. 다만 내 어설픈 노력이 헛짓거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 트리스는 메그를 생각하며 겪은 초조함과 답답함마저 달콤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 날. 아르만 대통령은 선거 유세를 위해 나하리로 향했다. 나하리는 친미 정부에 저항하는 지역이었지만 대통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청부인들은 요인을 경호하며 위험 지역을 순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으나 고용주의 승인이 내려오자 군말 없이 따르기로 했다. CH-47 헬기 두 대와 아파치 헬기 두 대가 착륙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리스는 밀착경호팀 팀원들과 함께 대통령이 탄 헬기에 탑승했다. 멀지 않은 거리를 이동한 후 나하리 상공에 다다르자 많은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전기에서 공격대응팀이 보내는 정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첫 번째 헬리콥터가 기자들과 함께 착륙했다. 멀리서 대통령이 탈 장갑차도 보였다. 저격수들은 이미 지상에 다다른 듯 했다. 트리스가 탄 헬기의 고도가 점점 낮아졌다. 그들은 안전띠를 풀고 헬기에서 뛰어내려 사각 대형을 이룰 준비를 했다. 그 때 평지에 사뿐히 내려앉아야 했던 헬기가 상공 4.5미터 높이에서 갑자기 아래로 확 몸을 낮추었다. 바로 다음 순간, 로켓이 그들 헬리콥터 위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수행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터져나왔다. SAM!! 지대공 미사일이었다.

 지상에 있던 차량이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한 발을 맞았다. 그들의 헬리콥터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요동을 쳤다. 트리스는 재빨리 안전띠를 매고 온 몸으로 대통령을 가렸다. 헬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튀었다. 방탄복을, 뚫은 총알이 트리스의 어깨에 박히는 순간 조종사가 재빨리 조종간을 잡아당겨 헬기를 위로 끌어올렸다. 단 1초만 빨랐다면.

 메그는 지상에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나하리로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리던 대통령은 얼이 빠진 채 밀착경호팀의 수행을 받으며 관저로 돌아갔다. 부상자는 들것에 실려 수도 외곽의 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메그는 수행 시간이 끝날 때 까지 제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헬기 좌석에 흥건했던 피를 보았는데도. 들것에 실린 익숙한 형체를 눈에 새겼는데도. 그녀는 관저 근처의 옥상에 배치되어 스코프로 주변을 살펴야 했다. 숨을 가다듬고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그녀가 평생 해온 일이었으며 시야를 가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그 모든 것이. 새까맣게 보였다.

 메그는 밤이 되어서야 군 병원으로 향할 수 있었다.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메그가 검문소 앞에서 총을 말아쥐자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수행팀장이 급하게 뛰어와 그녀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병원 부지는 어두웠고 가로등도 몇 개 없었다. 수행팀장은 병원 입구까지 메그를 안내하면서 아무 말 없는 그녀를 흘끔 보다 입을 떼고 트리스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지금은 수술실에 있으며 눈을 뜨면 바로 미국으로 보낼 예정이라는 것. 병실은 허가를 받은 소수의 인간들만 드나들 수 있다는 것. 난동을 부리면 바로 체포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그는 수술실 전등이 붉게 켜져 있는 것을 밤 내내 바라보다가 아침의 집합 명령을 듣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무전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마치 일상이라는 듯, 생명수당이 포함된 돈을 받는 것은 이런 일이라는 듯 어제와 다름없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메그는 수행팀장에게 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며 트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트리스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 급하게 주고 갔다는 쪽지를 건네받았다. 같이 시내 못 가서 미안해. 술은 다음에 마시자. 쪽지 안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메그는 순간 쪽지를 구기며 욕을 내뱉었다가 고개를 떨구고 주머니에 쪽지를 쑤셔 넣었다. 

 메그는 평소처럼 일을 수행했다. 그러나 때때로 검은 늪이 발밑에서 찰랑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메그는 구겨진 쪽지를 펼쳐보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얀 종이. 급하게 휘갈겨 쓴 검은 글씨. 아직도 오지 않는 연락. 그녀는 무전기에 대고 보고하는 것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고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인간. 하지만 쪽지의 귀퉁이가 조금씩 찢어질 때마다 점점 새카매지고 있었다. 옅은 분홍빛 사탕이 그녀의 입 안에서 산산조각났다. 

 50일 후 메그는 계약 연장 제의를 뿌리치고 수도의 국제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회사에서 지급한 비행기 표를 찢고 당장 출발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입안에서는 단맛이 났다. 옷 군데군데 흙이 묻어 있었다. 기내식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편의를 봐준 수행팀장의 얼굴과 목소리는 진작 잊었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구름 한점 없는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두바이에서 내린 메그는 경유 터미널로 향하며 에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린이 반가운 목소리로 메그의 전화를 받았다. 13시간 후에 거기 도착할 테니까 그 새끼 보내. 터미널 번호는 문자로 보낸다. 메그는 에린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핸드폰을 끈 후 좁은 비행기 좌석에 다시금 몸을 실었다. 

 

 새벽 다섯 시. 인적 드문 새하얀 출국장 바닥을 까만 군화가 바쁘게 가로질렀다. 검은 코트에는 화약 냄새와 중동의 모래먼지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메그는 사탕도 물지 않고 눈을 굴리며 한 사람만을 찾았다. 팔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목숨은 제대로 붙어 있는지. 연락 한 번 없을 만큼 아팠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많은 이들이 괜찮을 거라 했지만 누가 어떻게 너의 안위를 전하든 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메그의 시선 끝에 검은 가죽 자켓이 보였다. 자켓 안에 흰 티를 받쳐 입은 군청색 머리 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눈이 마주치자 메그가 우뚝 섰다. 그리고 긴 다리가 바쁜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급하고 멍청한 얼굴이 눈앞에서 멈추는 것. 메그, 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는 것.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손을 뻗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 뺨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동자. 메그는 대답 없이 자켓 깃을 꽉 쥐고 끌어내려 입술을 물어뜯었다. 대체 언제 익숙해진 걸까? 대체 언제부터, 이 시선에 담기는 것이 당연해진 걸까? 한평생 불확실한 것에 자신을 내건 적 없는 몸이 두 팔로 목을 끌어안았다.

 한참동안 서로를 탐하던 입술과 혀가 호흡을 위해 떨어졌다. 발끝으로 선 몸이 휘청거리자 트리스가 허리를 단단히 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혀와 묵직한 손아귀 힘. 집요한 입술과 익숙한 눈길. 메그가 입술을 떼어냈다. 트리스는 메그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체향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몸은? 메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괜찮아. 트리스가 메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소근거리듯 대답했다. 

 이제? 

 수술 경과도 좋고. 재활도 하고 있고. 

 연락 한 번 없더라.

 네 번호를…몰라서?

 에린한테라도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수행팀장이 뭐라고 말 안했어?

 말 했지, 했는데, 그렇다고 전화 한 통 없냐고!! 

 메그가 드물게 소리를 높이며 트리스의 깃을 확 잡아당겼다. 그 손에 끌려간 트리스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메그를 그대로 안아올려 제 몸에 기대게 했다. 메그는 잠깐 휘청거리다 어깨에 손을 짚고 트리스를 쏘아보았다. 역시 보자마자 턱을 날리고 욕을 퍼부어줬어야 했는데. 무릎이라도 꿇리고 사과를 받아냈어야 했는데. 트리스는 바보같은 얼굴로 계속 웃고 있었다. 

 미안해. 정신이 없었거든. 회사놈들이 병원에 거의 감금해놓고 재활만 시켰어. 팀장을 잃을 수 없다나 뭐라나. 트리스가 말했다. 말하는 내용은 변명에 가까웠지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좋았다. 메그는 트리스가 무어라 말할 수록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술을 물어뜯었다. 보나 마나 내가 걱정할 줄은 조금도 몰랐던 주제에. 검붉은 눈이 기분 좋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화가 누그러지는 자신이 우습고 화가 났다. 

 좋아? 

 응.

 뭐가 좋은데. 

 네가 나를 걱정했다는 거. 날 기다렸다는 거. 

 이 새끼가…….

 그리고 이제 같이 술 마실 수 있겠다는 거. 

 메그가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트리스의 오른쪽 뺨을 꾸욱 잡아당기고 그 입술에 맺힌 피를 엄지로 닦아냈다. 트리스는 여전히 멍청한 얼굴이었다. 왜 기뻐 보이는 걸까.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메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짧게 후, 숨을 내쉬고 트리스의 어깨에 이마를 내리눌렀다. 익숙한 체향에 날카로웠던 신경이 제자리를 찾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집에 갈래.

 …그럴까.

 집에 여자 있는 거 아냐?

 절대 아니야.

 연락 한 번 없던 놈은 못 믿겠는데. 

 맹세해. 그리고 내가 잘못했어. 

 그래. 계속 사과해야 할 거야. 살려둔 놈한테는 뒤끝이 길거든. 메그가 말했다.

 얼마든지, 얼마든지. 아가씨. 트리스는 기쁜 듯이 대답했다. 누가 훔쳐듣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은 비밀을 이야기하듯 끝없이 속삭이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메그는 트리스의 옷깃에서 나는 은은한 섬유유연제 냄새와 바깥의 바람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정했다. 이 인간이 이 품으로 자신을 물들이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을.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빠져들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너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얄팍한 마음으로 만나던 여자들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밤새도록 알려주겠다고, 메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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