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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방이었다. 새하얀 벽지와 새햐안 가구들. 깔끔하게 개어진 옷가지들. 검은 철제 선반 위에 캐틀볼과 덤벨이 무게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었고 단출한 책상 위에는 낡은 수첩과 외국어 교본이 늘어져 있었다. 무늬 없는 커튼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새어들어와 시트 위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어두운 군청색 머리칼 끝에 그 빛이 걸려 결따라 반짝거렸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 곧은 입매. 눈꺼풀은 부드럽게 닫힌 채였다. 메그는 무채색 침대 위에서 트리스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오랫동안 듣고 있었다.
메그는 헐렁한 회색 슬리퍼를 발에 대충 꿴 채 원형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소파에 널부러져 있는 트리스의 흰색 티셔츠를 주워 입고 현관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걸쳤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아마도 오후 한낮. 제법 추운 바람이 메그의 코트자락을 흔들었다. 멀고 먼 중동 땅과는 다른 하늘이었다.
정원의 잔디에 발뒤꿈치가 간지러웠다. 잔디들은 느릿하게 찾아오는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이파리 끝을 낙엽처럼 물들인 채였다. 넓은 정원은 키 낮은 정원수와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밖에 없었지만 조촐하지는 않았다. 평일 오후의 주택가. 멀리서 들리는 스프링쿨러 소리와 규칙적인 가위질 소리. 메그는 코트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지나온 새벽을 천천히 떠올렸다. 더운 땅에서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핏덩이 된 몸을 생각했던 까마득한 밤과,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흉터 하나하나를 쓸어내리며 입술을 물어뜯었던 밤에 대해서.
많은 여자를 안아본 것처럼 능숙하게 입술을 핥던 혀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이를 세우던 단정한 치열. 코트를 벗겨내리던 굳은살 박힌 손. 낮게 이름을 부르며 침대에 눕히던 그 여유. 메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앞에서 모든 것이 처음인 것처럼 행동했으면서. 내가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주변을 맴돌고 내 말 한마디에 안절부절 했으면서 이제 와서 나를 다른 인간과 똑같이 취급하다니. 메그는 옷 안으로 파고들어 상냥하게 가슴을 쥐는 손을 떼어내고 단단한 복부의 긴 흉터에 혀를 뻗으며 보았던 그 표정이 좋았다. 순간 손이 닿는 모든 곳을 휘어잡고 목을 물어뜯고 싶다는 욕망이 깃든 눈이. 좋았다. 자. 네 견고한 이성을 깨부수고 바닥으로 끌어내릴 테다. 왜냐하면 나는 네 생각을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이야. 메그는 그녀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고 싶었다.
커다란 나무에서 낙엽이 툭툭 떨어졌다. 바스락거리는 죽은 이파리가 발치에 닿았다. 메그는 손가락을 튕겨 담뱃불을 껐다. 그리고 뒤에서 끌어안는 팔에 몸을 맡겼다. 깊게 자고 일어난 후의 진한 체향이, 담배 냄새에도 가려지지 않았다. 메그는 제 뒤통수에 이마를 부비는 트리스를 가만히 두었다가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손을 올렸다.
지금 몇 시야.
세 시쯤…춥게 왜 이러고 있어.
추워? 좋은데.
하긴. 거긴 더웠지.
여기는 이제 곧 겨울인가?
응.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따뜻한 두 뺨이 곧 차가워졌다. 시답잖은 대화는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설명했다. 서로 다른 땅에서 다른 계절을 사는 사람들. 메그는 허리를 숙여 입맞추는 트리스의 뒷머리를 만지작대고 담배꽁초를 아무렇게나 툭 떨어트렸다.
늦은 점심은 트리스가 만들었다. 팬케이크 몇 장과 냉동 베이컨, 구운 계란과 소시지, 우유. 버터와 두 가지 과일잼. 메그는 팬케이크를 보고 드물게 좋아했다가 우유 잔을 슬쩍 트리스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이프로 자른 팬케이크 위에 버터와 딸기잼을 듬뿍 얹어 먹었다. 트리스는 우유와 계란을 기계적으로 먹다 팬케이크 세 장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메그에게 말했다. 5시 전에 본부에 보고하러 오라더라. 에린이.
너 에린이랑 연락 해?
하지.
나한테는 안 했고.
그, 번호를 몰랐다니까.
어제 내가 뭐라 그랬냐?
……내가 잘못했어.
당연하지. 이거 한 장 더 구워와.
점심 식사 후 외출 준비를 마친 그들은 트리스의 차에 올라탔다. 덜 말린 머리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적한 주택가를 벗어나자 그때서야 미국 같은 풍경이 보였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메그는 깍지를 낀 채 팔을 쭉 뻗었다가 하품을 하고 잠깐 눈을 감았다. 어떤 위험도 없는 순간. 언제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스가 메그를 깨웠다. 30분도 안 남았어. 차량용 시계가 4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메그는 크게 하품을 하고 머리를 긁다 차에서 내려 블랙워터 본부의 정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트리스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을 흔드는 메그를 보고 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나 차를 돌렸다.
메그는 추가금과 보수를 입금받고 가벼운 신체 측정을 한 다음 머리카락 몇 올을 뽑혔다. 마약 검사를 위해서였는데, 초짜들 중 열에 일곱은 여기서 쫓겨난다고 했다. 메그는 사탕을 우물거리다 안경 쓴 여자가 다음 계약에 대해 운을 띄우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생각 없다는 말을 남기며 본부를 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비가 툭툭 내리고 있었다. 메그는 트리스에게 연락하러 핸드폰을 꺼냈다가 아직도 번호를 교환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혀를 찼다. 잠결에 들은 말로는 운동을 하러 간다는 것 같았다. 메그는 얼마 없는 연락처 목록을 둘러보다 에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착신음 후 에린이 전화를 받았다.
/보고했어?
했는데. 트리스 번호 줘.
/아직도 몰라?
줄 거야, 말 거야?
/예전에 트리스한테도 같은 말을 했는데…직접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 잠깐만. 끊지 말아봐.
뭐야.
/알렉스랑 같이 있는데 술 마시러 올래?
뭐? 지금 여섯시야.
/두 시부터 마시고 있었어.
됐어.
/어제 귀국한다는 전화 받고 맛있는 거 좀 사뒀는데.
…뭔데?
/실러버브, 럼 초콜릿 케이크, 프룻 쿠키 한 박스.
하나 빼고 다 술 들어갔잖아.
/이걸 안주로 하는 거지. 주소 불러줄까?
…기다려. 택시 탈 테니까.
메그는 툭툭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택시에 올라탔다. 해가 짧아진 계절의 거리에 금방 어둠이 깔렸다. 그 숙취도 없는 녀석들과 술을 마시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별달리 할일도 없었다. 분명 아침까지는 연인 같은 녀석과 함께 있었는데, 사실은 전화번호도 주소도 모른다니 우스웠다. 메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택시의 뒷좌석에 몸을 묻었다.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이 하나 둘씩 가로등 불빛을 길게 늘어트렸다.
일어나, 메그. 메그는 이마에 닿는 부드러운 입술에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멍한 머리로 잠시 트리스인가 생각했지만 그보다 높은 목소리였다. 낯선 천장. 지끈거리는 머리. 온 몸이 욱신거렸다. 메그는 에린의 웃는 얼굴을 밀어내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속에서 술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알렉스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시리얼 통을 흔들었다. 시리얼 먹을래?
…나 우유 안 먹어. 메그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빵 데워줘, 알렉스.
오케이!
에린이 메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메그는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꽉 눌렀다. 숙취가 심했다. 에린이 사온 간식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어 칵테일을 몇 잔이고 비웠던 게 기억이 났다. 레몬, 라임, 딸기 같은 것들이 잔뜩 올라간 이름 모를 술들. 부엌에서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두 사람에게는 숙취의 기미조차 없어 보였다.
메그는 소파 밑에 떨어진 비니를 주워 쓰며 에린의 집을 둘러보았다. 바닥 구석구석 빈 병이 굴러다녔지만 제법 넓은 집이었다. 2층까지 터놓은 높은 벽은 전체가 거대한 책장이었고, 거실 한쪽에는 유리로 된 커다란 술장이 있었다. 여기저기 밟히는 책과 종이들. 아무 곳에나 흩어진 담요들. 테이블 위의 재떨이. 희미한 기름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냄새가 섞여 있는 듯했다.
메그는 발을 질질 끌고 식탁에 앉아 차가운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알렉스가 오븐에 데운 빵을 메그의 머리 앞에 놓았다. 평범한 아침 식사가 금방 차려졌다. 양파를 갈아 넣은 감자 스프. 아보카도와 브로콜리. 산처럼 쌓은 빵. 살짝 구운 계란과 토마토. 알렉스가 작은 빵 하나를 두입 만에 먹어치우고 우유 한 팩을 쭈욱 마셨다. 에린은 작은 잔에 카뮤 코냑을 따랐다. 술 뚜껑을 열자 훅 풍겨오는 술 냄새에 메그가 움찔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아침부터 술에 꼴아있게.
난 안 취하잖아.
그래서 그렇게 술을 먹였냐…….
먹인 거 아닌데.
맞아, 더 달라고 난리치는 거 겨우 내가 떼어 놨는걸.
됐고… 트리스 번호 안 줄 거면 전화라도 해줘.
뭐라고 말할까?
어디냐고.
에린이 알겠다는 듯 끄덕이고 핸드폰을 쥐었다. 메그는 테이블 위를 신경질적으로 툭툭 쳤다. 알렉스가 메그의 손을 쥐어 그 소리를 멈추게 하고 결따라 찢은 빵을 감자 스프에 적셔 내밀었다. 메그는 속에서 술냄새가 올라온다며 고개를 젓다 별 수 없이 입을 벌려 우물거렸다.
트리스, 전화 돼?
/어제는 전화 안 받더니. 메그랑 같이 있어?
어제 전화 했었어? 메그가 물잔을 내려놓고 큰 소리로 묻자 에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디야?
/지금 병원.
뭐?!
/그냥 검진이야. 괜찮아.
메그가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가 트리스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를 읽고 얼굴을 구겼다. 메그가 손을 뻗어 에린의 핸드폰을 뺏으려 들자 에린이 손을 맞잡아 내렸다. 몇 시쯤 끝나? 에린의 물음에 트리스가 거기 도착하면 다섯 시 쯤. 이라고 대답하자 메그가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고 툴툴거렸다.
그냥 검진이 왜 그렇게 오래 걸리냐는데. 트리스.
/…지금 한 시잖아.
아, 그랬어? 방금 일어났거든.
/알만하다. 너도 검진 받아봐. 간이 비명 지르고 있을걸.
멀쩡해. 그럼 저녁이나 먹을래? 금식이었지?
/좋지. 어디서?
제피렐리.
/다섯 시 반으로 예약해둘게.
이따 봐.
메그는 전화를 끊는 에린을 불만스레 보고 있다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더 자겠다는 말을 남기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알렉스는 빵을 더 데우려 냉동고를 열었다. 에린은 코냑 두 잔을 비우고는 그랑마니에르를 꺼냈다. 부엌 한쪽으로 난 창문에서 햇빛이 새어들어왔다. 알렉스는 감자 스프 위에 통후추를 갈아 뿌리다 문득 에린에게 툭 기댔다. 에린은 목덜미에 닿는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트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저 둘 잘 되고 있는 거 맞지? 알렉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보는 재미는 있네. 에린이 웃었다. 그들은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이마에도 입맞춤을 쪽 쪽 남겼다. 아직 조금은 졸리고 배가 부르고 한가롭고, 좋은 냄새가 나는 오후였다.
검은 마세라티 한 대가 버지니아 레스톤의 엘든 스트리트 안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초록색 어닝을 늘어트린 가게 옆 주차장에 멈추었다. 조수석에서 빨간 양털이 덧대어진 검은 가죽 자켓의 알렉스가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도 비몽사몽한 메그를 끌어내어 삐뚤어진 비니를 제대로 씌웠다. 에린은 먼저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예약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들은 가벽 옆의 큰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펼쳐놓고 트리스를 기다렸다. 메그가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자 곧 흰색 볼보가 주차장에 섰다. 트리스의 차였다. 차에서 내린 트리스가 커다란 창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들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트리스는 흰 슬렉스에 하늘색 셔츠, 회색 코트를 입은 채였다.
누가 병원 가는데 저렇게 입냐? 가늘게 뜬 눈으로 트리스를 보던 메그가 비니를 눌러 쓰고 중얼거렸다.
왜? 멋있는데!
그러게.
그게 싫다고……. 메그가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알렉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린은 그들을 보며 쿡쿡 웃었다. 트리스가 곧 식당으로 들어와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오며 코트를 벗었다. 여기 덥네. 에린의 검은 정장 자켓은 이미 의자에 걸쳐져 있었다.
알렉스도 있잖아. 둘이 아는 사이었어? 트리스가 메그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대충은…
우리 친해! 알렉스가 메그의 손을 쥐어 흔들며 대답했다.
메그가 대충 아는 사이라고 하면 친한 거겠지. 트리스가 픽 웃으며 펼쳐진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메그는 트리스를 빤히 보았다가 트리스 소매의 단추를 툭툭 풀어 셔츠를 팔뚝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팔꿈치 안쪽의 주사자국을 살폈다. 방금 막 피를 뽑아 희미하게 멍이 들어있는 피부. 작게 흠, 하고 손을 뗀 메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뭐 했어? 트리스가 말했다.
별로. 메그가 툭 내뱉듯 대답했다.
뭐 시킬래?
적당히.
소등심 스테이크 먹자. 알렉스가 메뉴판의 커다란 고기 사진을 가리켰다.
하나로 부족할걸.
여덟 개 쯤 시켜. 에린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점원을 불러 열다섯 가지의 메뉴를 주문했다. 소등심 스테이크, 마르살라 와인소스에 구운 닭고기 요리, 송아지 조개관자 요리, 가지튀김을 곁들인 모짜렐라 토마토 파스타, 마늘과 오레가노를 곁들인 조개 파스타, 노르웨이 연어 그릴, 마리나라 소스와 함께 나오는 새우 요리 등. 벌써부터 디저트 페이지를 보고 있는 메그를 위해 산딸기 소르베와 다크초콜릿 무스케이크도 함께 주문했다. 받아 적던 점원의 표정이 어두워질수록 카운터를 보고 있던 주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와인은 안 돼. 차 끌고 왔잖아. 트리스가 와인 페이지를 보던 에린을 말리듯 말했다.
사고 안 내.
전에 냈잖아?
그건 그쪽이 박은 거지. 에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술 마신 날이라 네가 다 물어주고 끝냈고. 트리스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도 그러면 되지 않을까?
나 바베큐도 먹고 싶다.
이따 시켜, 알렉스.
그들은 주문을 하고서도 한참동안 메뉴판을 닫지 못하다 테이블 위가 하나 둘씩 채워지자 그때서야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가 뜨거운 닭고기를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에린은 조개 파스타를 도르륵 말아 우물거리다 슬쩍 와인 페이지를 보았다. 메그는 무스케이크와 소르베를 한 입씩 번갈아 맛보며 만족스러운 듯 접시를 당겼다. 그리고 크림브뤨레와 티라미수도 시켜야겠다고 트리스를 툭 쳤다. 트리스는 적당한 크기로 썬 소고기를 메그의 접시로 옮겨 담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알렉스. 이번엔 어디 갔다 왔어?
시리아.
위험한 데 갔네.
알렉스는 경호 일 못 시켜. 에린이 버섯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트리스도 메그도 말 없이 동의했다.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손끝으로 닦고 웃는 이 인간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 한가로운 저녁 식사 테이블에 앉은 네 사람은 모두 동류였지만 그녀는 그 중에서도 특출나게 위험한 인간이었다. 트리스는 언젠가 에린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리며 파스타 면을 포크에 감았다. 비슷한 사람들. 사람을 죽였으면서 살인자라 비난받지 않는 사람들. 평범한 이들 속에서는 한 걸음마다 죄를 짓지만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
트리스 너는 언제 복귀 해? 알렉스가 새우를 껍질채 우물거리며 물었다.
감 떨어지기 전에 해야지. 이주 후 쯤.
어디로?
크레올. 크레올어 공부 하고 있어. 트리스가 대답했다.
이주 후라고? 메그가 포크로 접시를 툭 쳤다. 나 두 달 정도 쉴 건데.
그랬어? 난 네 계약 6개월인 줄 알고.
허.
메그의 헛웃음에 당황한 트리스가 물잔을 내려놓고 메그를 보았다. 메그는 비니를 끌어내려 눈을 숨기고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가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지만 에린이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듯 입을 막았다. 그들은 그대로 조용히 접시를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편한 공기가 따끔거렸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알렉스가 손을 흔들며 다음에 보자고 인사하며 차에 올라탔다. 메그는 대충 까딱이다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트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트리스는 눈을 살짝 굴렸다가 다시 메그와 눈을 맞추었다. 메그는 말 없이 차에 몸을 싣고 집 주소를 던지듯 말했다. 트리스는 에린의 마세라티가 알렉스를 태우고 멀어지는 것을 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라디오 소리도 말소리도 없이, 희미한 차 방향제 냄새만이 내부를 채웠다.
트리스의 차가 시내 한 가운데의 골목에 섰다. 골목 옆으로는 낡은 아파트 두 대가 서있었다. 트리스는 차에서 내려 메그가 내리는 것을 기다렸다. 아파트 입구 양쪽으로 초록색 가로등이 서 있었다. 트리스는 메그가 차에서 나와 문을 닫자 그 몸을 한번 꼭 껴안았다. 그리고 메그의 코트 주머니로 손을 넣어 그녀의 핸드폰을 꺼낸 후 제 번호를 입력했다. 메그는 아무 말 없이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돌려준 트리스가 눈을 내리깔며 웃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나트륨 등이 고장난 듯 몇번 깜빡거렸다. 긴 그림자. 조금 차가운 공기.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메그는, 저 표정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할 정도로 달콤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건조한 인간. 스위치를 올리고 내리듯 이성과 감정을 조절하고 적절하게 사회화 된 인간. 모든 결정에 나를 고려조차 하지 않고 제 안위는 제 책임이라며 말하는 인간. 메그는 자신이 그녀를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닐 지도 모르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을 맛보면서도. 그랬다.
집으로 돌아온 트리스는 차고에 차를 댄 채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지난 밤을 떠올렸다. 바라고 바라던 몸을 끌어안고도 괴로워 했던 일. 한평생 없던 충동에 휩싸여 이를 세우고 손목을 붙잡고 밀어붙이듯 입을 맞추었던 일. 그것이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머리칼을 쥐고 목에 팔을 감아오는 그녀에 대해서. 웃는 목소리와 높은 신음과 온 몸에 스치던 살결에 대해서였다. 짧은 손톱이 등을 쥐어뜯을 때 마다 죄책감과 흥분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이성이 허물어져간다고 중얼거려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내가 바라던 걸지도 몰라. 이성을 내던지고 짐승처럼 굴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트리스는 그 달콤하고 무서운 감각을 다시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 오만한 짓이니까. 단단한 손아귀 안에서 은색 열쇠가 꽉 쥐여졌다. 꼭대기 층 16호, 그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메그는 굳게 커튼이 쳐진 방에서 눈을 떴다. 방은 어두웠고 몸은 무거웠는데, 거실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메그는 베개 밑에 손을 넣어 권총을 더듬다가 트리스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열자 까만 작업복을 입은 사람 세 명과 트리스가 서있었다.
트리스는 발 디딜 곳이 없는 거실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메그를 보고 가까이 다가왔다. 찌푸려졌던 표정이 곧게 펴진 채였다. 메그는 그 표정 변화를 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거실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작은 목소리가 잠에 잠겨 있었다.
청소 업체.
누구 마음대로 뭘 불러?
파견 가기 전에 청소 안 했지. 쓰레기 다 썩고 벌레가 알을 깠더라. 정말 여기서 잔거야?
아, 집에 사람 들이는 거 싫다고.
메그, 여긴 집이 아냐. 쓰레기장이야.
트리스가 충격이 남은 얼굴로 메그를 보며 말했다. 업체 직원들은 그 말에 말없이 동의하며 거실 바닥의 쓰레기를 되는 대로 끌어모아 검은 봉투에 넣었다. 쓰레기 봉투가 현관 근처에 수북이 쌓였다. 트리스가 메그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방에는 다행스럽게도 철제 프레임 침대 근처의 빈 페트병과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메그가 트리스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구기며 손을 내저었다.
방은 안 돼.
왜?
신고당해.
…미등록 총기?
두 박스 정도.
알았어. 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그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메그는 세탁기 뒤쪽도 안 된다고 웅얼거리다 얌전히 욕실로 들어갔다. 트리스는 쓰레기 더미에서 플라스틱을 골라내고 있는 직원들에게 침실엔 들어가지 말라고 일렀다. 그리고 다용도실에 있는 세탁기 뒤편을 슬쩍 보았다가 상자에 담긴 수류탄 더미를 보고 창백한 얼굴로 나왔다.
얼굴에 대충 물을 묻힌 메그가 욕실에서 나왔다. 트리스는 부엌 서랍에서 열쇠 뭉치를 찾아 다용도실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수건도 없이 물을 뚝뚝 떨어트리던 메그는 제 옷에 물기를 대충 닦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점심 먹으러 나가자고 말하는 트리스를 보며 턱짓으로 직원들을 가리켰다. 저건 어쩌고.
집 비워도 괜찮아.
안 괜찮은데…….
그럼 방에 들어가 있을래?
메그는 쉽게도 지고 들어오는 트리스를 눈동자만 올려 빤히 보았다가 그 몸에 툭 기대고 고개를 저었다. 트리스는 그대로 손을 뻗어 메그의 머리끝을 매만지다 어설프게 땋아 주었다. 메그는 곧 아이보리색 니트 목폴라와 커다란 점퍼를 대충 입고 나와 방 문을 잠갔다. 검은 비니 아래로 엉성하게 땋은 머리가 흔들거렸다.
그들은 적당히 점심을 먹은 후 쇼핑센터의 캔디샵으로 향했다. 편의점과 식료품점의 작은 매대만 보았던 메그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예쁜 병에 담긴 사탕과 젤리를 보며 입을 벌렸다. 마시멜로, 초콜릿, 리코리스도 브랜드와 가격대 별로 빼곡했는데, 트리스는 메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메그가 집은 것들을 바구니에 넣기 바빴다. 투명한 봉투에 큰 스쿱으로 몇 번이고 퍼담은 딸기 사탕이 가득 찼다. 메그는 쇼케이스에 전시된 머핀과 색색 마카롱들도 동을 내고서야 만족했다. 트리스는 양손에 캔디샵의 하늘색 쇼핑백을 다섯 개나 든 채 한숨을 쉬었다.
그 후 쇼핑센터의 3층에 위치한 영화관에 갔다. 돔 형태의 유리창으로 덮여 하늘을 볼 수 있는 영화관이었다. 트리스는 티켓 판매소 앞에서 진지하게 영화를 골랐다. 메그는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큰 모니터를 몇 시간이고 봐야 하는 영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카라멜로 코팅된 팝콘은 나쁘지 않았다. 메그가 팝콘 두 통을 사올 동안 계속 고민 중이던 트리스는 결국 적당한 등급의 헐리우드 영화를 골라 티켓을 뽑았다.
메그는 빨간 영화관 의자에 앉아 몸을 늘어트리고 광고 영상이 나오는 것을 보며 카라멜 팝콘을 씹었다. 이런, 처음 있는 일. 흔히들 데이트라고 부르는 일이 나쁘지는 않았다. 디저트만 먹는 자신의 앞접시에 자른 고기와 껍질 벗긴 새우를 올려주고, 좋아하는 가게에 데려다준 다음 영화를 보러 오는 것. 영화가 끝나면 와인을 마시러 가자고 했지. 그 다음엔 호텔인가? 메그는, 트리스가 여유로울 때마다 문득 짜증이 났다.
이런 짓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했겠지. 그 잘생긴 얼굴로 흠 하나 없이 웃으면서 남을 챙겨주며 최선을 다했겠지.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고 눈을 감게 만들었겠지. 능숙해도 너무 능숙해. 메그는 몇 명을 만난 건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 능숙함이 싫었다. 나를 배려하지 말고 나를 돌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게 멋대로 굴고 내 앞에서 초조해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를 제어하지 못하고 날것의 너를 드러내었으면 좋겠어. 메그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트리스의 옆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화는 그저 그랬다. 메그는 와인바 말고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은 몰라보게 깨끗해져 있었다. 트리스는 창틀과 욕실까지 확인해보고 청소 업체에 전화를 해 대금을 지불했다. 머핀 이따 먹을 거지? 어어. 트리스는 상부장을 뒤져 밀폐용기를 찾다 포기하고 마카롱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래도 냉장고는 있네.
원래 있었어.
나 참.
탈취제 냄새 나.
점퍼를 벗지도 않은 채 깨끗해진 소파에 드러누워 리코리스를 우물거리던 메그가 중얼거렸다. 쓰레기장 같던 집이 몰라보게 깨끗해지긴 했으나 구석구석 뿌려놓은 탈취제 냄새가 유쾌하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메그의 말에 창문을 열다 메그와 눈이 마주쳤다. 메그가 말 없이 두 팔을 벌렸다. 트리스는 소파로 다가가 기꺼이 몸을 낮추며 메그를 꼭 안았다. 메그는 간지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는 느낌에 살짝 찌푸리며 트리스의 셔츠 단추를 툭, 풀었다.
잠깐만, 메그. 트리스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오늘은 좀.
메그가 말문이 막혀 눈을 크게 떴다. 트리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비쳤다. 트리스는 그대로 메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고 제 셔츠 단추에서 떼어냈다. 메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다 트리스의 뒷목 깃을 콱 쥐었다. 이 새끼가 상냥하고 다정하게 행동하다 선을 긋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너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뭐냐니.
상냥한 애인으로 있고 싶어?
그건 당연히…
당연하다고? 그럼 말을 바꾸지. 나랑 섹스를 하고 싶은 거야, 날 모시고 싶은 거야?
트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메그는 하, 헛웃음을 치며 땋은 머리끝을 묶은 끈을 풀어냈다. 너, 이게 연애 놀음 같아? 아니라고 하면 어쩔 건데? 남들 대하던 대로 하면 될 줄 알았나보지. 무해한 인간인 것처럼 웃고 적당히 어울려주고 본성을 다 숨기면 될 줄 알았나봐. 그렇게 해서, 뭘 하고 싶어?
메그가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뱉으며 트리스를 쏘아보았다. 자기가 바라던 것. 자기가 끌어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정말 다 헛짓거리인지도 몰라. 하지만 메그는 연애라는 단어로 이 욕망을 드러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즐기고 멀어지고 헤어져 또 다른 만남을 찾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고, 연애라는 명목으로 지나갔을 수많은 상대들, 그 인간들, 그런 것들과 자신이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메그가 손을 놓고 어깨를 팍 밀었다.
가.
메그.
가라고. 더 말 안 한다.
트리스가 입을 벌렸다가 입술을 깨물고, 다시 벌렸다 다물었다. 메그는 더 이상 트리스를 쳐다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문을 세게 닫았다. 낮은 테이블에는 쇼핑센터에서 사온 수십 종류의 사탕들이 작은 봉투에 담겨 널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탕보다 더 달콤한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하지만 메그의 침실 문은 수십 번 서성거렸던 경호원 숙소의 철제 문보다 더 무거워 보였고 숨막히는 적막은 그 어떤 말보다 큰 거절처럼 느껴졌다. 트리스는 소파에 누운 채 손등으로 눈을 가리고 한참동안 가만히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에 서서 깨끗한 거실과 먼지 하나 없는 바닥, 좋은 냄새가 났던 소파를 천천히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다음 날. 메그는 해가 뜰 때 겨우 잠들었다가 어둑해질 쯤 일어나 퍽퍽해진 머핀을 몇 개 먹고 소파에 드러누워 사탕을 으적으적 씹었다. 관심도 없는 티비 채널을 큰 소리로 틀어놓은 채였다. 티비에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의 드라마와 세제 광고가 번갈아 흘러나오길 반복했다. 띵동. 그 때 누군가가 밖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나야, 메그. 알렉스였다.
알렉스는 깨끗해진 집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가져온 종이가방을 메그에게 넘겨주었다. 메그는 테이블 위의 사탕을 한쪽으로 대충 밀고 종이가방에서 노란 천으로 감싸인 것들을 꺼냈다. 천 아래에서 여섯 부위로 분리된 저격소총 부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메그는 래밍턴 MSR을 능숙하게 조립한 후 소파에 앉은 그대로 무릎을 올려 저격 자세를 취하다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트리스 왔다 갔어? 집 엄청 깨끗하네. 알렉스가 머핀 하나를 멋대로 주워먹으며 말했다.
그 새끼 이름도 꺼내지 마. 메그가 짜증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싸웠어?
싸우고 뭐고……
메그가 검은 패브릭 소파에 몸을 늘어트리며 웅얼거렸다. 알렉스는 소파 등받이 뒤에 서서 머핀을 우물거리다 메그의 등 뒤에서 머리카락을 빼어 손으로 빗어주었다. 부드럽지 않은 머리칼이 커다란 손 안에서 엉망으로 흩어졌다가 하나로 깔끔하게 땋였다. 메그는 멋대로 머리를 만지는 손을 가만 두었다가 알렉스가 됐다, 하며 놓자 그 손을 쥐고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
응?
넌 사람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음.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알렉스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대고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다가 메그를 보았다. 정말 몰라. 알렉스는 메그의 손을 쥔 채 메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메그의 땋은 머리 끝을 만지작대고 말했다. 나는 싸우는 게 좋고 강한 사람이 좋아. 강한 사람을 보면 싸워서 이기고 싶어.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거든. 내가, 이기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게 하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이 마음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서 더 강해져서 내가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어.
메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안대 위로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사락사락, 물 빠진 금색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졌다. 붉은 눈동자와 길고 까만 속눈썹. 동그랗지만 순식간에 비틀릴 수 있는 눈매. 단순하지만 어딘가 비틀려 있는 사고. 하지만 제 머리보다는 훨 건강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메그가 눈을 내려깔고 중얼거렸다. 난 그렇겐 못해. 그 순간,
현관문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가 잠시 후 덜컹 열렸다.
트리스는 우드워드 공원 근처의 술집 구석 자리에서 안주 없이 바카디 한 병을 비웠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오는 밤바람을 맞으며 술집을 나왔다. 해가 진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 가로등이 있다가 없다가, 허술하게 닦아놓은 인도를 걷기도 했고 차 없는 차도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트리스는 걸음마다 메그의 말과 목소리와 표정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연애가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너를 돌보고 싶냐니 무슨 말이야?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 몽롱한 머릿속을 떠돌았다. 본성을 숨기고 있다니, 내가 뭘 두려워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어떤 것도 담지 않는 눈에 이끌렸다. 두 발로 서있으면서도 아슬아슬한 모습에 눈길이 갔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탐색이 심장을 간지럽혔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게 했다. 여태껏 없었던 감정이 이제야 길을 찾은 것 같았는데. 내가 진심을 다하지 않은 걸로 보였던 걸까. 그래도 나는 어쩔 수 없었어. 그때 그 밤이 계속 떠올라서. 너에게 손을 대면 지금보다 더 너를 가지고 싶어질까봐. 그래서 그랬어. 하지만 미움 받는 게 무서워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입을 맞춘 것처럼 서로를 들여다보던 두 사람과 마주치고서도 나는, 미움 받는 게 더 무서웠다.
트리스는 새벽바람에 차가워진 귀끝을 손으로 데우며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시간을 보려 했지만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었고, 별빛이 반짝거렸고, 달이 야속하게 밝았다. 트리스는 주택 단지를 느릿하게 걷다 어두운 정원으로 들어와 열쇠를 꺼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이상하게 컸고 문 여는 소리는 그보다 더 컸다. 트리스는 코트를 벗어 현관 옆의 옷걸이에 걸어두고 계단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거실을 돌아보았다. 그 익숙한 형체. 꿈에서도 보았던 것.
메그? 트리스가 중얼거렸다.
술 냄새. 어두운 거실에 앉아있던 메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트리스는 입을 가려 냄새를 맡아보다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몇 시간이나 여기 있었던 거지? 트리스는 전원이 진작 꺼진 핸드폰과 술집에서 하염없이 보낸 시간을 생각하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어디 갔다 오는데?
…술 좀 마셨어.
전화도 안 받고. 할 말 없냐?
메그가 두 발짝 앞에 멈춰서 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빛이 거실 창문으로 들어왔다. 가로등. 아니 어쩌면 달빛. 트리스는 그 인색한 빛 사이로도 두 눈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모자 아래에서 자신을 추궁하는 새파란 눈동자. 트리스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 겨우 한 마디를 씹어뱉었다.
……애매하게 굴었던 거 미안해.
그게 끝이야?
보호자 행세하면서 선을 넘은 것도, 미안하다.
내가 알렉스랑 키스한 건.
메그, 나는…….
트리스는 메그의 눈을 더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입을 맞춘 것처럼 얼굴을 맞대고 뺨을 쓸어내리던 옆모습. 정말 했어? 정말 한 걸까? 트리스는 묻고 싶었지만 대신 혀를 깨물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너 같은 사람을 누가 온전히 가질 수 있겠냐고. 나는 네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고. 나를 내리눌러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트리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떠올리며 숨을 내쉬었다. 네가, 어쩌면 다른 사람을 원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 한 번도 문제를 외면한 적 없는 단단한 영혼이 처음 겪는 사랑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인내는 더 깊이 빠진 사람의 몫이다.
……너한테 미움받는 게 무서워.
새벽은 온통 어두운 생각이 사고를 잠식하는 시간. 트리스의 긴 숨소리가 적막 속에 녹아들었다. 메그는 피가 싸늘해지는 기분에 대답 없이 이를 악물었다. 이. 새끼는 이렇게까지 욕심이 없나?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날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거야? 나는 네가 다른 인간과 눈만 마주쳐도 속이 끓고, 웃기만 해도 죽이고 싶은데?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해? 너한테 난 대체 뭐야? 어두운 시야보다 희미하게 풍기는 술 냄새보다, 짙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얼굴이 더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메그는 트리스의 목덜미로 손을 뻗어 짧은 손톱으로 까드득 긁어내었다. 그리고 핏자국을 목에 길게 남긴 후 손을 거두었다. 트리스는 숨 한번 삼키지 않았다.
갈래.
차 두고 왔어. 택시 안 잡히고.
그래서.
……내 방에서 자. 난 소파에서 잘게.
메그는 대답 없이 트리스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침대에 풀썩 엎드려 이불을 덮었다. 부드럽고 깨끗한 이불에서는 트리스의 냄새가 끝없이 났다. 마치 그녀에게 따뜻하게 덮여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불은 차가웠고 싸늘한 공기는 지나치게 조용했으며 넓은 방에 숨소리 하나 없었다. 메그는 그대로 한참동안 엎드려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협탁 위의 작은 종이봉투를 쥐어 들여다보았다. 헐스 웨스트 병원. 하얀 종이 위에는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약 이름이 몇 개 쓰여 있었다. 그래. 대체 왜. 먼 땅에서 했던 생각들을, 네가 바로 아래층에 있는데 왜 혼자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메그는 봉투를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트리스는 눈을 떴다가 익숙한 갈색 머리칼을 보고 눈을 꿈뻑거렸다. 그리고 팔을 들어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부볐다. 좁은 가죽 소파 위에 메그가 제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트리스는 무심코 퍼뜩 일어나려다, 몸을 돌려 메그를 살짝 끌어안았다. 잠깐 움찔거렸던 몸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어떡하지. 웃음이 나왔다. 이 작은 온기가, 작은 몸이, 네가 나를 질려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트리스는 소리 죽여 웃으며 어젯밤에는 손대지 못했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해가 천천히 떠오르는 새벽. 멀리서 새가 작게 울었다. 햇빛이 창가의 유리병에 비쳐 바닥과 벽을 조각조각 물들였다. 살결이 닿은 부분이 뜨거웠고,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트리스는 하염없이 손을 움직이다가 목의 상처를 매만지는 가느다란 손끝에 갈색 머리칼 사이로 입술을 묻었다. 희미한 목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 트리스. 메그가 작게 이름을 불렀다. 응. 트리스가 대답했다.
알렉스랑 안 했어.
정말.
너 귀찮지도 않아. 질리지도 않았고.
정말이지.
네가 욕심이 없어서 화났을 뿐이야.
…내가 욕심이 없는 것 같았어?
아니면 뭐야. 도망치고 선 긋고. 모를 것 같았냐.
음.
난 네가 다른 인간이랑 말만 해도 짜증나. 그런데 넌 미움 받기 무섭다니 어쩌니 개소리만 하니까.
하지만 진심이었어.
내가 다른 놈이랑 나돌아도?
……그래.
내가 널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메그가 물었다. 트리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메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처를 꾹 누르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다. 트리스는 대답 대신 그 가늘은 등을 보듬듯 안았다. 그녀는 그 순간에도 말할 수 있는 것들과 드러낼 수 없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이었나. 바다였나. 호수였던가. 내가 무엇을 보면서 널 그리워 했었지? 트리스는 무심코 손을 뻗어 메그의 뺨을 쥐었다. 메그는 트리스를 보다 속눈썹을 내리깔며 그 손에 뺨을 부볐다. 덜컥. 제 입술을 꾹 깨문 트리스가 더듬더듬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왜, 언제 했는지에 대한 고백이었다.
네 몸에 처음 손을 댔을 때. 무서웠어. 널 가지고 싶다고 생각해버렸거든. 네 눈짓과 목소리와 몸을…피부를 파고드는 손톱까지 전부 다 가지고 싶었어. 난생 처음이었지. 그런 기분을 또다시 느끼면 안 될 것 같았어. 그때야말로 너를 놓을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봐 무서웠어.
……누굴 놓아줘? 가만히 듣던 메그가 작게 반문했다.
언젠가 네가 나를 떠날 때가 오면. 트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딴 거.
메그가 몸을 일으켜 트리스의 골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트리스를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무게였지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투명한 눈은 화난 것 같기도 했고 우스운 것을 보는 듯 싶기도 했다. 트리스는 등 뒤로 메그가 투명한 햇빛을 받으며 제 머리칼에 손을 뻗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언젠가의 그 멍한 옆모습, 그 담배연기, 그 시선이 똑바로 자신을 꿰뚫어보는 것을 느끼면서 가만히. 등 뒤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칼 한올 한올이 놓칠 수 없이 예뻤다. 아.
그딴 거 없어. 난 너 못 놔줘. 메그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게 만든 주제에 벌써부터 끝을 떠들어? 나도 정상이 아니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가느다란 손가락이 뒷머리를 그러쥐고 콱, 당겼다. 그리고 반대편 손이 턱을 쥐고 자신을 보게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다 해. 나도 그럴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짜증내고 화내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거야. 진짜 죽일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너도 네 마음대로 해. 메그는 웃고 있었다. 화난 목소리와는 반대로 웃으면서, 살벌하고 달콤한 협박을 내뱉었다.
청부살인업자와 군인. 그들의 삶은 근본부터 달랐다. 죽여야 해서 죽였던 인간과 지키기 위해 죽였던 인간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트리스는 자신이 아는 인간들 중 가장 위험한 자가 예쁘게 웃으며 내뱉은 사랑과 집착을 곱씹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를 이해했다. 이건 연애가 아니라고. 그러니 우리는 얄팍한 이성을 집어던지고 깊은 곳으로 서로를 끌어내려 도망칠 길을 지워버려야 한다고 말하던 그 눈빛. 내가 널 가져도 될까? 트리스는 조심히 메그의 뺨을 두 손으로 끌어당겨 물었다.
날카로운 아픔이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가져. 메그가 대답했다. 비릿한 맛이 혀로 퍼졌다. 트리스는 그것이 제 피인 것을 알면서도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낯선 감정에 취해 어설픈 고민만을 반복했을 뿐. 각오 없이 발 디딘 곳이 목숨보다 깊을 줄은 몰랐지. 그러나 그녀의 탓은 아니다. 거대한 파도는 다가오기 직전까지 아무도 모르니까. 트리스는 그 새파란 파도에 자신을 내던지며 온몸으로 제 것을 끌어안았다. 이제야말로 너를 가지겠다고 속삭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