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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C: 블랙워터

블랙워터. 03

Eugene_FMF 2018. 9. 16. 01:20

 

 아르마니야와 마이산 국경 어디쯤. 귀청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휴이 헬리콥터 두 대가 언덕 꼭대기에서 선회했다. 어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이 중포 기지는 특수작전부대와 용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장전이 된 무기들은 국경을 향해 있었고, 차량들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준비된 채였다. 주변에 있는 몇몇 언덕 꼭대기에도 헤스코를 쌓아 만든 전초 기지들이 보였다. 헤스코 방벽 위는 묵직한 모래주머니들과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가시철조망이 어지럽게 뭉쳐 있었다. 은색 철조망이 해의 움직임에 따라 살벌하게 빛났다. 

 트리스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서서 선회하던 헬리콥터가 천천히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터빈의 배기가스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중에도 내내 무표정했다. 검은 티셔츠와 카키색 바지, 방탄복을 입고 SCAR-H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였다. 뜨거운 햇볕과 프로펠러의 바람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짙은 군청색 머리칼이 먼지를 머금은 바람에 흔들거렸다. 잠시 후 헬기가 착륙하고 흙먼지가 차분히 가라앉자 헬기 위에서 미니건을 붙들고 있는 기관총 사수가 그녀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트리스는 인사를 대충 받아주며 에린이 전했던 '쓸만한 인간'이 헬리콥터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땅을 디딘 것은 자그만 체구의 갈색 머리 여자 뿐이었다. 헬멧 대신 비니를 눌러쓰고 라이플 하나를 비스듬이 안은 여자 한 명.   

 트리스는 헬리콥터가 착륙장을 떠날 때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헬리콥터에서 내린 여자는 그 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와 트리스의 손바닥에 쪽지 하나를 내려놓았다. 트리스는 아무 말 없이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쪽지를 펼쳐 읽고는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실력 보장.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니까 잘 부탁해. 익숙한 필체로 적힌 내용은 이게 다였다.  

 트리스는 작은 쪽지를 뒤집어보며 혹시나 다른 내용이 있을까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 땅에서의 무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보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지? 트리스는 여태껏 만났던 최악의 상관들을 떠올려보다 곧 그만두었다. 자신이 아는 에린은 사람을 패처럼 쓰는 자가 아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트리스는 사탕 막대를 우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낡은 AK-47을 던져주었다. 

 이름.

 메그.

 정말 아무것도 몰라?

 가서 쏘기만 하라던데.

 메그는 껴안고 있던 끈 달린 라이플을 등에 걸치고 건네받은 자동소총을 쥐었다. 트리스는 그녀의 느릿한 움직임을 보며 낡은 코트 밑의 어렴풋한 근육을 가늠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 이 더운 땅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델타포스니 네이비씰이니 한가닥 했던 인간들만 모인 중포 기지에서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다.

 소속은 있어?

 그냥 여기로 가라고 했다니까……. 메그가 대답했다. 계약서는 보지도 못했어. 중간에 내렸을 땐 사기당한 기분이었다고.

 타슈켄트에서 내렸겠지. 그대로 바쿠바에 들렀고?

 …어.

 나도 그랬거든. 트리스는 메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사실 체격이나 겉모습 같은 건 허상임을 안다. 중요한 건 가능과 불가능을 구분하는 판단력이지 근육과 힘이 아니니까. 트리스는 신입을 무턱대고 사지에 밀어넣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이 여자는 '그' 에린의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이므로 아주 잠깐 동안 믿어보기로 했다. 

 리더 트리스. 팀 이름은 네가 살아남으면 알려줄게.

 아주 잠깐 동안만. 트리스는 메그의 눈썹이 비니 밑에서 꿈틀대는 것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들은 해가 떠있을 동안 중포기지 몇 개와 컴파운드를 둘러보았다. 국경지대를 따라 깔린 요새들은 급조된 방어벽 같았다. 이 산악지대는 심심찮게 로켓 공격이 이루어지는 길목이었는데, 아르마니야와 마이산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하든 중요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마이산 부족 경찰이 그 쪽을 관할하고 미군이 아르마니야 쪽을 관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메그의 GPS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면 이 미군 전초 기지는 마이산 쪽으로 9키로쯤 침범해 들어가 있었다. 메그가 이에 대해 묻자 트리스는 미국 놈들이 늘 그렇지 뭐, 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은 해가 질 때쯤에 컴파운드로 돌아갔다. 컴파운드는 중포 기지 언덕 아래에 있었다. 네 귀퉁이에 커다란 사각형 감시탑이 있었고 구역마다 탄약과 무기를 잔뜩 쌓아놓은 곳이었다. 콘크리트를 대충 바른 1층짜리 건물 안에는 탄약통과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가 가구 대신 굴러다녔고 운동 기구로는 돌덩이와 물을 채운 생수통이 전부였다. 메그는 흙먼지가 굴러다니는 매트리스 위에 짐을 내려놓고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트리스는 플라스틱 의자를 가져와 메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민간 청부인으로서 아르마니야에서 해야 할 일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누구랑 싸우는 건데?

 반군.

 너 군인이야?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냥 청부인이야.

 트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우린 공식적으로 군인도 공무원도 정보 요원도 아니야. 없다고 부인할 수 있는 인간들이지. 어쩌다 붙잡혀도 정부 소속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들 말이야. 요즘은 CIA가 돈이 많아서 사람들을 뽑아 훈련시키느니 그냥 우리들을 고용하더라고. 메그는 트리스가 말하는 우리의 범주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메그는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채 흙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비니를 벗었다. 그리고 트리스와 눈을 맞추었다. 

 돈 많이 줘?

 꽤 많이.

 전에 했던 일이랑 비슷하네.

 무슨 일 했는데?

 시카리오.

 콜롬비아에서?

 멕시코.

 어떻게 빠져나왔대.

 현상금이 걸리긴 했는데…에린이라는 여자가 다 알아서 해주던걸.

 얼마였어?

 25만 달러던가. 

 ……그거 대단하네. 트리스는 베개의 먼지를 팡팡 턴 후 그 아래에 자동권총을 넣어두는 메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시카리오. 이 자그만 여자의 목에 25만 달러. 트리스는 본인도 상상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이 여자는 더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디 특수부대나 경찰 출신이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카르텔 청부업자의 삶은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았고 와닿지도 않았다. 여기랑 멕시코 중에 어디가 더 살만한 것 같아? 트리스가 물었다.

 지금은 여기. 조용하네.  

 그렇게 대답한 메그는 느긋하게 하품을 몇 번 했다. 그리고 곧 구색만 맞춘 이불을 덮으며 인사하듯 손을 내저었다. 감긴 눈꺼풀은 벌써 잘 준비를 마친 듯했고, 하루아침에 낯선 곳으로 떨어진 인간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곧 총 쏠 일이 있을 거야. 작게 말한 트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그 목소리에 약간의 걱정과 약간의 기대가 묻어나왔지만 메그는 이미 잠든 후였다. 

 

 다음 날. 그들은 아침 인사도 나눌 시간 없이 방탄복과 헬멧을 쓰고 군용 트럭에 올랐다. 새벽 정찰을 나간 미군 병사가 원격 폭파 지뢰에 부상당해 구조 지원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정찰할 수밖에 없는 길을 만들고 부상당한 병사가 구조를 요청하면 구조 헬기를 다음 타겟으로 잡는 방식은 고전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메그는 트럭 안에서 트리스의 브리핑을 듣다 비니를 더 눌러썼다. 왜 부상병을 구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였지만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기지 밖 매복 지대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를 엄호하며 부상당한 병사를 들것에 옮겼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방에서 총알이 튀었다. 아무것도 없는 암석 지대에서 적과 그들은 서로의 군용 트럭을 방패삼아 방아쇠를 당겼다. 트리스가 트럭 너머로 고개를 내밀 때마다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메그는 정신없는 상황을 둘러보다 트럭 밑에 납작 엎드려 비니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저 멀리 있는 트럭과 트럭 아래로 보이는 작은 군화들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메그의 스토너 SR-25가 반동에 흔들릴 때 마다 비처럼 퍼붓던 총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녀는 품에서 탄창을 꺼내 갈아 끼우고 다시 당겼다. 정확히 스무 발. 메그가 숨을 길게 내쉬고 몸을 일으키자 적들은 이미 트럭을 타고 떠난 채였다. 발에 총알이 박혀 행동불능이 된 몇몇은 흙바닥에 버려진 채 총알을 몇 발 더 맞고 숨을 거뒀다. 트리스는 방금 일어난 일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우선 목소리를 높여 귀환을 명령하고 매복 지대를 벗어났다.

 그날 오후 그들의 부대는 60명의 아르만 용병을 이끌고 반군 기지 중 하나를 쳤다. 컴파운드에서 차로 2시간 떨어져 있는 국경 너머의 마이산 땅이었다. 당국은 책임 회피를 위해 부대원을 모두 청부인과 용병으로 구성했으나 그들은 돈을 받은 만큼 역할을 다했다. 두 달에 걸친 도청과 대기를 끝으로 마침내 공격 승인을 얻은 그들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메그는, 그 황량한 계곡에서 AWM을 쥐고 6일 동안 반군 저격수 열일곱 명을 포함한 서른네 명을 죽였다.

 그들이 반군 기지 하나를 완전히 망가트렸을 때 동료 몇 명은 죽고 몇 명은 심하게 부상당한 상태였다. 고용된 용병들이 차를 타고 와 부상자와 사상자를 싣고 떠났고 사지가 멀쩡한 인간들은 다시 기지로 돌아갔다. 트리스는 남은 이들을 살피고 보고를 마친 후 메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조악하고 지저분한 방에는 사탕 껍질 몇 개와 찌그러진 콜라 캔만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메그는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서 야간 투시경으로 황량한 땅을 둘러보았다. 달 표면 같았다. 분가루 같은 먼지와 바위, 흙, 양쪽에서 산을 향해 굽이치는 메마른 언덕들. 멀리서 다른 진흙 요새가 보였다. 어두웠고, 아주 넓었고, 맨눈으로 수만 개의 별을 볼 수 있었다. 별이 가장 가까이 내려와 어깨 근처에서 쉼 없이 반짝거렸다. 

 트리스는 언덕 밑에서 무릎을 껴안은 메그가 하늘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빛이라고는 언덕 아래 컴파운드의 희미한 반짝임 밖에 없었다. 목을 가리고 어깨를 드러낸 니트 재질의 터틀넥. 등으로 내려온 땋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여섯 날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버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형체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처음에 했던 말 사과할게. 트리스가 말했다.

 어떤 거? 

 네가 못 버틸 줄 알았거든.

 뭐. 신경 안 써. 메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트리스는 메그 옆에 앉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새카만 하늘에 별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별들이 위치를 바꾸어도 알 수 없을 것처럼 광막한 밤하늘에 젖은 옆얼굴. 고요하고 차분하고 새파란 눈동자. 트리스는 메그를 오랫동안 보았다가 짧게 후, 숨을 내쉬었다. 

 아르마니야에서 군사 청부인으로 일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임을 뜻했다. 상황을 읽을 줄 아는 사람. 색깔과 대비, 움직임,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는 자들. 무차별적인 공격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훈련된 인재들. 그게 이 멕시코 출신 청부살인업자를 의심한 이유다. 자신이 아는 청부살인업자는 체계화된 전투 없이 누군가의 집에서, 욕실에서, 아파트 복도에서 한 발 쏘고 사라지는 이들이었으니까.

 개인적인 호기심인데. 대답 안 해도 돼. 

 들어보고.

 어떤 일을 했었어?  

 메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트리스를 보았다. 희미한 빛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또렷이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때때로 검은 것 같기도 했고 달빛보다 밝은 것 같기도 했지만 본질은 붉은 색이었다. 문득 메그는 트리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 것 같았다. 카르텔의 개로 살았던 게 아니냐고, 마약을 팔거나 청부살인을 했던 게 전부였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싸울 수 있냐고 말하고 있었다. 메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대다가 입을 열었다. 트리스가 어떤 인간인지 전부 다 알지는 못했지만 어두운 눈동자가 자신과 동류 같았기 때문이다.

 카르텔이 돈을 뭘로 버는지는 알지? 

 마약 아냐?

 맞아. 멕시코는 4개 카르텔이 꽉 쥐고 있어. 이름 들으면 너도 알 만한 놈들. 난 그 중에 한 곳에 있었고. 메그가 느린 호흡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놈들은 군대나 경찰이 소용 없어. 한통속으로 만들거나 없애버리니까. 그리고 일반 농장부터 작은 가게들까지 모조리 상납금을 내게 하지. 그쯤 되면 새벽에 트럭이 커다란 자루를 싣고 쏘다녀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 공포정치로 도시를 다 먹었거든. 그 다음엔 어떻게 할까? 먹은 땅을 차근차근 미국 국경과의 다리로 만들어버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살인 같은 건 아무도 신경 안 써. 카르텔에 대해 비판하는 놈들은 그게 기자든 변호사든 경찰서장이든 시장이든 다 죽여버리니까. 메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트리스와 눈을 맞추었다. 그 일을 내가 했어. 그 눈동자에는 어떤 열의도 흥분도 참회도 없었다. 높은 고도에서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평범한 인간들을 죽이는 건 어떻게든 힘을 자랑하고 싶은 젊은 놈들이 하지. 압도적인 폭력과 무처벌에 취해서 말이야. 그 놈들은 상납금을 안 냈다고, 인터넷에서 자신들을 별 거 아닌 놈들이라 말했다고, 눈을 마주쳤다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죽여. 후아레즈에선 굴러다니는 게 AK인데, 총으로 죽이면 차라리 상냥한 놈일 걸. 시체는 까만 봉투에 넣어서 새벽에 광장 구석에 두기만 하면 돼. 그러면 아침에 감식반이 수거해 가는데, 하루 열 명이 그렇게 죽지만 조사는 한 3퍼센트 쯤 하나. 왜? 범죄수사국 대가리가 이미 돈을 받아먹었으니까. 그럼 내 일은? 메그는 마치 어둡고 작은 호텔 방에 앉아 일생을 말하는 다큐멘터리 주인공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가리를 쏘는 거. 하지만 그녀에게는 검은 복면도 신에 대한 신앙도 없었다. 그저 했었고 할 수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 뿐이었다.  

 나는 적대 카르텔이나 그놈들에게 협조하는 인간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어. 순서가 어떻게 되더라. 먼저 애송이들이 인터넷에 협박 영상을 올렸던 것 같다. 적대 조직원을 고문하면서 협조한 공직자들을 실토하게 만드는 영상. 그리고 삼일 내로 사퇴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메세지를 남기지. 나야 경계가 없을 때 죽이는 게 제일 쉽지만 그러면 다음 놈이 또 같은 짓을 하니까. 절대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더라. 물론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너 같은 용병이나, 특수기동대의 호위를 받아. 하지만 나는 삼 일 후에 그 인간을 죽여야 하지. 동선과 호위 정보 몇 개만 주워듣고 혼자서. 상대가 국장이든 시장이든 CIA 요원이든 해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해냈어? 

 못 했으면 진작 죽었게.

 트리스는 메그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기지개를 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저 얇은 근육들이 살인을 목적으로 움직일 때를 떠올렸다. 트리스는 그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가, 지독하게 어울린다고 다시 생각했다.

 트리스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싶도록 만들었으며,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동료도 많이 잃었다. 가까운 이들의 기일에는 담배 한대를 태우며 그들을 생각했고 전투 도중 희생된 동료들의 시체에 구더기가 들끓던 광경을 가끔 떠올리기도 했다. 죽음의 냄새와 함께 살아왔다는 자각 또한 있었으며, 그런 만큼 비슷한 인간을 알아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조금 달랐다. 새로운 땅에 쉽게도 녹아들어 아무렇지 않게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 담담하고 서늘하고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사람. 트리스는 에린의 의도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살기에는 이 땅이 제격일지도 몰라. 적어도 이 곳에서는 죽고 난 후 염산통에 담그지는 않으니까.

 너는 왜 이 일을 하는데? 메그가 물었다. 트리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싸워야 하니까. 

 메그는 트리스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없이 밤하늘을 보다 손이 차가워질 때 쯤 컴파운드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한 달을 더 머물렀다. 이 주에 한 번씩 국경 지대에서 분쟁이 있었지만 큰 일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새벽부터 총을 쥐고 뛰어나가 다음 날 밤까지 대치하는 것 정도. 이 땅에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 없었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훈련이었기 때문이다.  

 트리스는 팀 리더답게 새로 합류한 메그에게 많은 신경을 쏟았다. 메그는 그게 호의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구분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메그가 그동안 관찰한 게 있었는데, 트리스는 어떤 출신의 인간이든 동등하게 대했고 동등한 존중을 받았다. 이 기지의 구성원이 죄다 한가닥 하는 놈들인 것을 고려하면 꽤나 대단한 일이었다.  

 과거의 메그는 조직원 외의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았다. 살면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그 중에는 민간인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말을 튼 인간들도 제 정체를 알고 나면 허풍이라 비웃거나 얼굴색을 바꾸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 곳의 놈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더더욱 트리스가 처음 보는 종류의 인간처럼 느껴졌다.  

 트리스는 거침 없었고, 때로는 잔인했고, 때로는 다정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이 제 말을 따르게 했다. 날카롭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동시에 가진 사람. 낮고 차분한 목소리와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를 가진 사람. 자주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화를 삭이려는 습관이 있는 사람. 이곳은 전쟁터고 그들은 모두 부하였으므로 그럴 필요 없는데도 그랬다. 그녀가 화를 낼 때는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실수에 대해서 뿐이었다.  

 트리스에게서 반군의 기지를 찾아낸 방법을 들었을 때 그녀가 선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한 인간도 아닐 것이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있다면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은 인간이겠지. 메그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새로운 요원을 맞이하러 착륙장으로 향하는 트리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트리스의 계약 기간인 3개월이 끝나자 그들은 바쿠바로 다시 돌아가 호텔에서 이틀을 보냈다. 메그는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못했지만 에린은 그녀를 아르만에 보낼 때부터 트리스와 함께 불러들일 생각이었다고 했다. 트리스가 그렇다는데 들었어? 하고 묻자 메그는 대꾸 없이 짐부터 챙겼다. 가져온 사탕이 다 떨어졌을 때부터 펴지지 않던 미간이 찌푸림 하나 없었다.  

 그들은 오래된 호텔에서 이틀 동안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죽은듯이 잠만 잤다. 식사는 대부분 호텔 식당에서 해결했는데, 가끔 트리스가 외부 식당에서 배달시킨 햄버거를 들고 메그의 방에 찾아가기도 했다. 양고기와 건포도를 기름에 끓인 스프와 납작하게 구운 밀가루 빵을 깨작거리다 방으로 돌아간 메그는 그때마다 꽤나 반가운 얼굴로 트리스를 맞이했다. 트리스는 그런 메그를 보고 웃음이 나왔지만 직원에게 웃돈을 잔뜩 얹어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 맛있었다.

 콜라 없어서 아쉽네.

 괜찮아. 괜찮아. 그게 뭐 대수냐. 

 감자튀김까지 배부르게 먹어치운 메그는 드물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메그는 햄버거 포장 봉투를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침대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하나 물었다. 메그가 주머니를 뒤지며 라이터를 찾자 트리스가 협탁 위의 성냥을 그어 불을 붙여주었다. 메그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고 연기를 길게 뱉었다. 트리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제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얇은 싸구려 커튼 뒤로 햇빛이 새어들어와 연기와 느릿하게 부유하는 먼지들을 비추었다. 빛무리 사이에서 천천히 모습을 바꾸는 담배연기. 반짝거리는 먼지들. 하얀 발끝을 햇빛에 적신 채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녀. 갈색 머리카락이 햇살에 물들어 반짝거렸고 깜빡거릴 때마다 움직이는 속눈썹은 먼지가 앉을 듯 길었다. 트리스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다 문득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촘촘한 속눈썹이 햇빛에 따라 색을 바꾸는 것이, 메마른 입술이 물기 없이 필터를 물었다가 다시 벌려지는 모습이, 그 정갈하고 고요한, 숨소리도 없을 것 같은 그녀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왜? 메그가 트리스를 보며 물었다. 트리스는 잠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 담배 연기를 내뱉고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냥, 뭐. 다음엔 무슨 일을 맡게 될까 싶어서. 그렇게 대답한 트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려 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늘 하던 일이면 편하겠는데.

 암살 같은 거?

 그렇지. 

 그럼 같이 일 할 기회 없겠네.

 아쉬워?

 조금?  

 메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협탁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트리스의 입에 물린 담배를 가져가 한모금 빨아들이고 재떨이에 툭 던졌다. 솔직하기는. 작게 중얼거린 메그는 살짝 웃으며 트리스에게 다가왔다. 트리스는 뿌연 연기 속에서 그녀를 보며 그녀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느다란 눈이 얇게 휘어져 웃는 것도, 한 손으로 침대 매트리스를 누르고 천천히 다가오는 그 얇은 몸도 처음 보는 아찔함이었다. 트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낮추어 그녀의 골반 위에 손을 얹고 귀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커다란 등으로 그녀를 숨기듯 덮었다. 아. 하고 작게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심장을 꽉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그 적막함. 열이 오르는 긴장감. 얕은 호흡을 반복하는 입술이 입술을 탐하기 직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곧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우뚝. 트리스가 문 쪽을 돌아보자 메그가 트리스의 가슴팍을 밀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한참 정적 속에서 말이 없었다. 트리스는 문과 메그를 번갈아보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고개를 푹 숙이고 뒷목을 내리눌렀다. 왜 그랬어?

 글쎄. 메그가 대답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며.

 넌 아무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넌 왜 만졌는데?

 ……여기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지나 봐.

 메그가 새 담배에 불을 붙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자. 트리스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들은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내내 잠을 잤다. 이스탄불에서 경유한 탓에 20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만 아니면 어디서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워싱턴 델레스 공항을 통해 입국한 그들은 그대로 본부로 돌아가 보고를 마치고 다음 행선지와 휴가 기간을 정했다. 트리스는 한 달, 메그는 이 주 후에 다시 아르만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사무실에서 각자 다른 서류를 읽어보고 서명을 한 후 그대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트리스는 혼자 있을 때 메그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의 표정이나 커다란 증유 드럼통에서 불을 쬐며 눈을 감는 얼굴, 담배 연기를 뱉으며 희미하게 웃는 눈 같은 것들을 떠올리면서. 그때 키스했다면 번호라도 물어볼 수 있었으려나. 거절할 것 같진 않았는데. 어쩌면 그저 분위기에 휩쓸렸던 걸지도 모르지. 공항에서라도 말을 붙여볼 걸 그랬어. 그랬다면 넌 어떻게 대답했을까? 트리스는 조명이 어두운 바 테이블에 앉아 진을 한 모금 마시고 어깨에 기댄 여자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쉬운 일인데 그때는 왜 망설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혀 위를 맴도는 맛이 달고 썼다.

 트리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트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트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안경 낀 짙은 갈색의 단발머리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휴가야? 부럽네. 트리스는 여자의 말에 대답하려다 여자의 옆에 서있는 메그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품 넓은 코트를 걸치고 비니를 쓴 채였다. 트리스는 재빨리 옆자리 여자의 어깨에서 팔을 내리며 그들을 향해 몸을 돌렸지만 눈을 볼 수는 없었다. 아.

 에린. 오랜만이야. 메그도…오랜만이고.

 잠깐 굳었던 입술이 겨우 떨어지며 더듬거렸다. 표정을 살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메그는 비니를 더 눌러 쓰고 고개를 까닥인 후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에린은 그런 메그와 뻣뻣하게 굳어 있는 트리스를 번갈아 보다 트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트리스가 한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괜히 여기 왔나봐. 그들 사이의 공기를 대충 읽은 에린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타이밍이 이래. 

 둘이 무슨 사이인데?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직은.

 아직은?

 그래. 트리스가 대답했다. 에린은 트리스의 말에 저 멀리 앉은 메그를 보았다. 메그는 턱을 괸 채 바 벽면에 붙은 너덜너덜한 포스터들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이쪽으로 주지 않으려 그러는 건지 그저 멍하게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에린 그녀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뭐, 잘해봐. 힘내고. 에린은 평소처럼 웃으며 트리스의 어깨를 툭툭 치고 메그에게 다가갔다. 트리스는 에린이 메그의 앞에 앉아 메뉴판을 펼치는 것을 보고 테이블에 팁을 올려놓은 후 바를 떠났다. 나쁜 꿈을 꿀 것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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