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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의 제병협동대대는 특수한 운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에린이 정보지원활동대 소속이었을 시절 개발한 소형 무전기를 달고 단장의 명에 따라 행동했다. 트리스와 알렉스가 그들의 중대를 이끌고 전선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면 수십 기의 장갑차가 그 길을 통해 종심 깊이 침입, 적이 전선 복구를 시도할 때 보병중대를 적 병력과 섞이게 해 적의 화기 사용을 주저시켰다. 동시에 최후방에서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C4I 체계를 무너트린 후 보급소를 타격해 남방군 제 3지역대 본부를 완전히 포위하고 후방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병기공학, 군사학, 정보기술학의 권위자 에린 대령이 본부에서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모든 것을 지휘하며 하루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녀는 수십 대의 장갑차 기관포의 목표물 좌표지점까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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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꼬박 이틀을 감금당한 후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들이 던져준 옷으로 갈아입고 수갑을 찬 후 방탄유리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열 두 개의 총구 앞에 앉아 의장을 바라보았다. 벽면 양쪽의 스피커를 통하지 않고서는 입을 열 자격조차 없었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목적은? 북방군의 정보를 넘겨주지. 목숨을 구걸하러 온 거냐? 그녀가 헛웃음을 쳤다. 살고 싶었으면 여기에 왔겠어? 나는 모든 것을 걸었다. 말 한 마디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적진까지 맨손으로 걸어 들어왔다고.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보기라도 하려고 온 거 아니겠어. 배신의 변명이 길구나. 쉽게 배신하는 놈은 쉽게 죽는다. 나는 충성했던 적이 없어. 목적이 같았을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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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곳은 눈밭이 아름답고 바람이 칼날 같은 설산이었다. 스물여섯 개의 빙하와 얼어붙은 호수로 뒤덮여 침엽수만이 높게 자라는 곳. 흑곰, 재 빛깔의 새, 거대한 손바닥 같은 뿔이 자란 사슴, 노란 눈의 거대한 짐승만이 간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짐승의 털을 목과 발에 감고 가끔씩 마을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손상을 최소화하는 가죽 손질법, 산짐승들의 이름, 특정 부위의 가격과 요리법 같은 것들을. 자식들이 타지로 떠난 집에서는 가끔 버릴 책들을 주었다. 나는 처음 읽은 신화에서 내 이름이 될 만한 것을 찾았고 더 이상 눈표범으로 불릴 일은 없었다. 전쟁에서 격리된 땅. 일 년 중 며칠 동안만 타인과 말을 섞었으며 인간의 지도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