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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은 불을 옮기는 일을 했다. 또래의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을 새벽에, 얼음 같은 세숫물을 긷기도 전에 일어나 사제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매일 밤 부질없는 기도로 꺼트린 등불에 신전 가장 깊은 곳의 불씨를 옮기는 것. 신전의 모든 빛이 태초의 불씨로부터 시작되게 하는 것. 그게 그녀의 일이었다. 새하얀 돌바닥에 새하얀 사제복이 걸음 따라 흔들리고 가을 새벽녘의 아름다운 일출이 꿈처럼 두 손을 적실 때에도, 눈 내린 새벽의 창백함 사이로 고요한 등불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에도 신앙심을 가지지 못했으나. 그랬다. 신전의 인간들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가 거짓을 벌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고아들이란 신전을 위한 땔감이자 밭을 가는 괭이였으므로, 어느 누구도 창고의 장작더미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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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도 피로 젖은 카펫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뒹굴고 있는 안경과 액정이 깨진 핸드폰. 흥건한 피와 질척거리는 신체의 부산물. 그녀는 구둣발로 카펫을 지익 밟다가 흉부를 쓸어보았다. 이상하게도 상처가 없었다. 그녀가 흰 셔츠의 단추를 풀자 품에서 .22구경 총알이 후드득 쏟아졌다. 총알은 정확히 열 개였다. 멈췄어야 할 심장이 계속해서 뛰고 있었다. 역과 가까운 2층짜리 싸구려 호텔. 새빨간 벽지와 나뭇잎 무늬 카펫. 침대 커버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그녀는 창문에 가까이 붙어 커튼 사이로 눈을 내밀었다. 밖과 트여 있는 복도 너머로 주차장이 보였다. 방금 전 객실의 문을 두드렸던 낯선 남자는 자신의 자동차 문을 손쉽게 열고 대시보드를 뒤적..
언젠가 검은 피를 뒤집어쓰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닿는 차가운 방아쇠도 옆구리를 파고드는 거친 칼날도 청각을 어지럽히는 신음도 코를 마비시키는 뜨거운 피냄새도 모두 죽음으로 끝날 것. 우리 같은 인간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살아가지만 내가 아는 것은 이론에 가까워 전쟁터에서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생물학적 작용과 역학적 기능이 멈춘 후 흙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어둡고 조용한 것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 누구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우습고 두렵게도 진리란 그런 것이다. 과학은 우리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상실을 보듬어주지는 않는다. 대지와 태양이 인류를 존재하는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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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검은 피를 뒤집어쓰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닿는 차가운 방아쇠도 옆구리를 파고드는 거친 칼날도 청각을 어지럽히는 신음도 코를 마비시키는 뜨거운 피냄새도 모두 죽음으로 끝날 것. 우리 같은 인간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살아가지만 내가 아는 것은 이론에 가까워 전쟁터에서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생물학적 작용과 역학적 기능이 멈춘 후 흙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어둡고 조용한 것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 누구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우습고 두렵게도 진리란 그런 것이다. 과학은 우리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상실을 보듬어주지는 않는다. 대지와 태양이 인류를 존재하는 것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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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에 사는 카르텔 개새끼들도 저마다의 종교는 있었다. 어제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오늘은 성당에 나갔고 피 묻은 손으로 묵주기도를 했다. 누군가는 산타 무에르테를 숭배하며 그녀가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말했다. 종교를 납치와 밀수와 살인의 면죄부로 삼으며 훗날 풍요로운 내세로 갈 것이라 믿으면서. 거룩한 죽음의 우리 어머니,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인간은 경찰차를 피해 바이크를 몰다 트럭에 치여 죽었다.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말했던 내세는 생전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곳일까. 그는 어렸을 때 죽은 부모를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만나서 반드시 복수를 하리라고. 하지만 나는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기를 바랬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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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의 첫 번째 자질은 지속적인 피로와 고충을 견디는 것이다. 용기는 부차적일 뿐이다. 결핍과 박탈, 갈망은 좋은 군인을 만들어 낸다. 메그는 풀숲에 버려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복부를 깊이 찔렸고 다른 한 명은 경동맥과 성대를 잃은 채였다. 이들은 과다출혈로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고작 몇 십 걸음 너머의 비명소리에 안타까워하면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모르면서 단칼에 죽일 줄은 안다니. 메그는 알렉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다친 자들을 치료했다. 전투 의지가 없는 인간들을 감시하기는 쉬웠다. 아이들은 군용식량을 가방 가득히 챙긴 후 서로의 상처를 살폈다.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알렉스는 피 묻은 붕대를 감아주며 많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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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신이 죽었다.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앙보다 권력을 중요시한 자들과 신을 잃은 광신도들이 성전을 재현했다. 멋대로 국경을 긋고 비무장 상태의 일가족을 몰살시킨 자들. 인류가 인류를 이끌 것이라는 선언을 입맛대로 해석한 인간들. 힘없는 자들은 헛간의 쥐처럼 불안 속에서 살았고 따각대는 말발굽 소리만 들려도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폭력의 주체가 인간으로 변한 것 외에 무엇이 바뀌었는가? 우리는 버석하게 마른 땅과 날카로운 피안개를 헤치며 계속해서 싸웠다. 약한 자들의 세상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다. 이가 부러지고 허벅지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날이 끝없이 이어졌다. 핏덩이. 매캐한 화약 냄새.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모래 알갱이. 특별히 고되지는 않는 고통과 고난들. 가끔은 이유 없이 불안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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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개처럼, 그녀는 꿈속에서 사냥을 한다. 비가 그칠 때쯤에 알렉스는 잠에서 깼다. 창틀에 매달려있던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면서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아직 침침한 응접실에서 기지개를 쭉 폈다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었던 몸이 기분 좋게 나른했다. 그녀는 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린의 열을 재어본 후 깊이 잠들어 있는 세 명의 이불을 여며 주었다. 알렉스는 난롯가에 말려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양동이 두 개를 든 채 마당으로 나갔다. 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을 둘러보다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 놓은 물펌프를 찾아냈다. 오래된 펌프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펌프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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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잿빛 숲에서 눈을 떴다. 새벽 이슬이 내려앉는 시각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자고 있는 알렉스를 더듬었다. 알렉스가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가슴께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녀는 옆으로 누운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메그와 에린의 호흡을 확인했다. 그들은 피로를 담은 소중한 숨을 쌕쌕 내뱉고 있었다. 트리스는 그 옅은 숨소리를 몇 번 세다가, 녹색 방수포로 만든 어설픈 텐트 아래에서 조용히 기어 나왔다. 앳된 두 눈이 해가 뜨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이 터오자 새벽 숲의 안개가 술렁거렸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야전의 피냄새가 불어왔다. 트리스는 눈을 찌푸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대신 새들이 빈 나무로 날아가 무게 없이 앉는 것을 보았다. 회색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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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명의 병사들 중 열 명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자들입니다. 여든 명은 적의 목표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싸우는 자는 아홉 명으로 이들이 전투에 걸맞은 사람입니다. 아, 나머지 한 명은 전사고, 그가 다른 이들을 전장으로 이끕니다. 그것이 그녀였다. 임무 중 실종된 대원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선두 부대는 공중 강습을 진행했으나 그들을 태운 헬리콥터는 착륙하자마자 공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났다. 대원들과 승무원들은 방어를 튼튼히 갖춘 대규모 적군에게 둘러싸인 채 안데스 산맥의 깊은 산등성이에 고립되었다. 제 1소대 증원 부대는 헬기로 이동하던 중 적군의 사격을 받아 산기슭에 내렸다. 포위된 아군 병력으로부터 약 1.7키로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를 포함한 대원 10명은 45키로그램의 무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