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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고향

짐승의 고향. 04 (완)

Eugene_FMF 2018. 10. 1. 00:18

 

 메그는 흐린 고통 속에서 꿈을 꿨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는 곳에서 사냥감을 동굴로 끌고 들어가는 짐승에 대한 꿈. 짐승은 가끔 밤중에 산기슭까지 내려와 멀리서 마을 불빛을 보기도 했다. 땔감을 주우러 온 어린 인간들과 마주쳤을 때는 그들이 소리를 지르기 전에 먼저 도망을 쳤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그들이 나뭇가지를 한아름 주워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짐승이 언젠가 다시 내려갔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사태 때문인 것 같았다. 적막하고 황폐하고 신조차 없는 땅. 짐승은 낮과 밤을 알았으나 날짜 세는 법을 몰랐다. 제 목을 노릴 어떤 날짐승도 없는 땅에서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다. 짐승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있다 동굴로 돌아가 차갑게 언 사슴 내장에 이빨을 박아 넣고 뜯어 먹은 후 다시 잠을 잤다. 

 메그는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소리를 내뱉으려 하다 기침을 했다. 쇠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목 안쪽과 양쪽 상처가 화끈거렸다. 메그는 붕대를 감아놓은 목덜미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나다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에린의 손에 붙들려 다시 누웠다. 에린은 메그가 입모양으로 트리스는? 하고 묻는 것을 보며 항생제 병에 주사기를 꽂아넣고 쭉 당겼다. 옆 방에서 자고 있어. 메그는 그 말에 겨우 몸에서 힘을 뺄 수 있었다. 한참 큰 흰색 옷 안에서 마른 팔다리가 덜그럭거렸다.

 메그는 많은 것을 들었다. 피투성이인 자신을 안고 돌아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응급처치를 부탁했다는 트리스에 대해서. 왜 이렇게 다쳤는지 물어보자 눈을 가리며 제 탓이라고만 반복했다는 트리스에 대해서. 광야의 입구만을 빙빙 돌았기에 큰 부상으로 번지지 않고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너는 꼬박 다섯 날 동안 눈을 못 떴고 트리스는 잠을 안 잤어. 입에 댄 것도 없고. 내가 보기엔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어. 벌을 주는 것 같았지. 에린이 메그의 붕대 위를 조심히 만지며 말했다. 이런 이빨을 가진 짐승이 살 땅이 아닌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어. 걔 입이 피투성이였어도 아무 것도 물을 수가 없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어? 메그는 회색 이불 위에서 손을 꽉 쥐며 에린을 보았다. 걔 잘못은 아무 것도 없어.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메그는 트리스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리고 작은 등을 켜 그 얼굴을 살폈다. 머리카락 속에 파묻힌 눈과 바싹 마른 입술. 얇은 옷 하나만을 입어 손톱자국이 남은 목덜미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흔적만 남은 것부터 피가 말라붙은 것 까지 전부 다. 메그는 그 몸에 올라타 얼굴을 한참동안 내려다보고 거친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식은땀이 맺힌 이마에 이마를 맞대었다. 네 꿈을 꿨어. 갈라진 목소리가 갈라진 목에서 아프게 새어나왔다.

 꿈에서의 너는 아주 오랫동안 살았어. 혼자서. 사물과 사람을 구별하고 말을 할 줄 아는 지능이 있으면서도 발톱을 숨기느라 혼자 살았지. 멀리서 인간들의 땅을 지켜만 봤어. 밤중에 반짝거리는 가로등이나 집안의 불빛 뭐 그런 것들. 사냥꾼들이 오면 가끔 그 인간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동물 사체를 두기도 했어. 너는 외로워 보였어. 짐승들과 지내기에는 너무 똑똑했고 인간들과 지내기엔 너무 위험했지. 너도 그걸 아는 것 같았어. 외로웠어? 말해봐. 지금 깨어 있잖아. 눈꼬리를 쓰다듬던 손이 내려와 뺨에 닿았다. 트리스, 외로웠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천천히 눈을 뜨는 검붉은 동공이 눈밭에 흩어진 핏자국처럼 아팠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왜 쏘지 않았어. 왜 죽이지 않았냐고.

 그래. 죽여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못 했지.

 어째서.

 네가 어느 순간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생각한 건 아니야. 무서워서 몸이 굳은 것도 아니고. 그냥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어.

 그러면 나는 여기 못 있어.

 내가 죽을 걸 알면서도 널 죽일 수 없었다는데, 그게 잘못됐어? 네 비참함과 내 비참함 중에 고르라고 하는 거야?

 메그, 제발. 이러면 안 돼. 

 뭘. 뭐가 안 되는데.  

 나는 확신이 필요해. 너희들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생각했어. 너한테 부탁한 그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고.

 아니. 아냐. 메그는 트리스의 턱을 꾹 누르고 내려다보았다. 제가 상처를 냈음에도 자신보다 더 괴로워 보이는 짐승. 어려 보였고 여려 보였다. 이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알 것 같았다. 메그가 트리스의 목덜미에 남은 손톱자국을 하나하나 만졌다. 그런 일이 앞으로 몇 번 있든 간에 보내지 않을 거야. 그게 내 답이야.

 목을 물어뜯기고 죽을 뻔 했는데.

 살아 있잖아.

 앞으로 몇 번이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넌 결국 나한테 죽고 싶은 거야? 호기심이나 동료애라면 이제 집어치워. 널 언젠가 죽일 놈이랑 같이 다녀선 안 돼. 트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 너절한 입안과 아프게 맞물리는 송곳니. 메그의 말을 들을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목 안이 잔뜩 긁혀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신의 죄를 발음마다 끄집어내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그녀가 깨어나는 것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끝없이 충돌하여 심장은 이미 너덜해져 있었다.

 호기심? 야. 그딴 게 아니야. 메그는 트리스의 짧은 뒷머리를 잡아당겨 억지로 눈을 맞추었다. 너는 후회만 하지. 내가 후회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어? 내가 그 날 다리를 다치지 않았으면, 내가 널 헤집지 않았으면, 새벽에 혼자 나가지 않았으면 이렇게 안 됐겠지. 이렇게 곧 죽을 듯 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지도 않을 거고 어떻게 죄를 갚을까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어떻게 몰래 빠져나갈까 생각하지도 않겠지. 네가 곧 떠날 것처럼 굴었던 건 이제 잊을 거야. 그딴 건 없는 거라고 여기기로 했어. 네가 우리의 약속을 거짓으로 했던 것도. 그래야 했기 때문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할래. 수백 수천 번 방아쇠를 당겨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놓아주고 뒷목을 쓰다듬어 만졌다. 여태껏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손길이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멋대로 말하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가 멈추고 옅게 웃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대신 넌 이제 아무데도 못 가. 네가 쏴달라면 쏴 줄게. 다리를 맞추든 어깨를 맞추든 귀를 잘라내든 간에 말이야. 아프겠지. 아파도 눈을 뜨면 결국 안심할 거야. 그렇게 해서 네가 안 떠나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지금이야말로 약속해. 메그는 땋은 머리칼 끝에 달린 끈을 풀어내며 말했다. 군데군데 피가 말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흐트러졌다. 끊어지던 숨처럼 얇은 것. 얼굴 위로 목덜미 위로 겨울 커튼처럼 내려오는 것. 그 사이에서 빛나는 눈이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아름다웠다. 트리스는 더 보고 있을 수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피가 달았어.

 알아.

 너를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먹으려고?

 외로워서.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아주 추운 동굴.

 거기가 네 집이야?

 응.

 아닐걸.

 하지만.

 우린 돌아갈 곳이 없어. 너도 없지.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어. 메그가 손바닥을 떼어내며 말했다. 트리스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때로 돌아가려 하지 마. 그녀가 윗옷을 벗어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고 입술을 맞추는 것에도, 작은 손으로 상처를 매만지고 어깨의 흉터에 혀를 대는 것에도, 너는 인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녀석이야,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트리스는 몸을 일으키고 메그의 허리를 한 팔로 안아 처음 하는 키스를 아주 오랫동안 맛보고 그 몸에 손을 대었다. 피가 나지 않아도 너의 몸은 달콤하구나, 생각하면서. 

 

 트리스가 눈을 떴을 때 메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턱을 괸 채로. 흰색 커튼 뒤에서 비치는 햇빛이 아침인 것 같았다. 트리스가 멍하게 눈을 깜빡이자 메그는 그 눈가를 만지며 잠을 깨웠다. 너 얼마나 잔 줄 알아? …얼마나 잤는데? 열 네 시간. 트리스가 메그의 대답에 벌떡 일어났다. 너 뭐라도 먹었어!? 메그가 눈을 동그렇게 떴다가 픽 웃으며 트리스의 어깨를 붙잡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됐어…이따 머리나 감겨줘.

 트리스는 목덜미에 갈색 머리카락과 그녀의 숨이 닿는 것을 느끼며 잠시 굳어 있다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짙은 살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흐렸던 전등 빛에 보았던 몸은 그보다 새하얘 시트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메그는 자신이 남긴 어깨의 잇자국과 손톱자국을 만지며 트리스 몰래 웃었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진작 이럴걸 그랬어. 트리스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얌전히 벌려진 입술로 혀를 뻗었다.

 욕조의 절반 높이로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씻겼다. 목에 감은 붕대가 젖지 않도록. 수건 두 장으로 머리를 말린 후에는 에린이 붕대를 갈아주었다.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묶어 상처에 닿지 않도록 하여 상처를 살폈다. 살가죽 아래로 날카로운 것이 뚫고 들어가 검게 삭아버린, 하루만 그대로 두어도 고름이 차고 부어오르는 상처였다. 트리스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과 흉터를 손바닥에라도 기록하려 하는 것처럼. 메그는 고름을 닦아내는 소독약 묻은 솜을 눈 한번 찌푸리지 않고 받아내며 트리스를 보았다. 입모양으로 안 아파, 말하면서. 트리스는 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간에 죄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식사는 여관 1층의 식당에서 했다. 마을 유일의 의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여관이었다. 그들은 눈이 내리는 추운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들로 만든 비싼 음식을 먹었다. 두껍게 자른 육류와 신선한 야채, 게살이 들어간 스프 같은 것.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돈을 버는 것은 쉬웠다. 사냥을 나가고 공사를 돕고 고장 난 기계를 고치면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2주. 그들은 의사가 말한 완치 기간까지 돈을 모으고 정보와 식량을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메그는 몸을 움직이는 일을 자제하고 먹고 자며 회복하는 일만 했다. 메그는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이 녀석이 없는 것은 아닐까, 수백번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메그가 트리스와 몸을 섞고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가 깨었을 때는 새벽이었다. 가로등조차 잠을 자는 새벽. 트리스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작은 등을 켠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는 고요하고 단정한 옆모습은 익숙했지만 초조함은 없었다. 메그는 트리스가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는 것을 보았다. 무너지고 떨리고 두려워하는 그 빛은 이제 없었다. 메그는 트리스의 손을 잡아당기고 또 무슨 생각 해? 속삭였다. 트리스는 손이 뒷목을 감싸고 끌어내리는 것에 저항하지 않고 몸을 낮추었다. 알렉스와 에린에게 어떻게 말할까 하고. 

 서두를 필요 없어.

 네가 그런 말을 해?

 이제 안 갈 거잖아. 

 응.

 그럼 됐어. 그 녀석들은 기다려주겠지.

 너는 안 기다렸고.

 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런 적 없는데.

 ……미안하다, 됐어?

 키스해주면. 

 메그가 픽 웃고 입을 맞췄다. 혀가 혀를 훑고 입천장을 쓰다듬었다가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입술 가장자리를 집요하게 잘근거리다 흐, 작은 소리가 나면 다시 그 안을 파고들었다. 메그는 그 뜨거운 접촉과 커다란 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하는 손. 마디가 느껴지는 단단함. 어깨를 쥐고 허리를 안고 골반을 어루만지며 다시금 파고드는 것. 너는 가장 약할 때 도망치려 하고 가장 강할 때 순종하지. 하지만 소유라는 건 가장 어두운 곳을 드러내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목숨을 너는 절망을 걸고 커다란 내기를 한 거야. 그리고 내가 너를 가졌다. 네 손톱과 송곳니로 내 피부를 찢고 너를 가진 거야. 메그는 열에 취해 몸을 축 늘어트리며 그 이름을 불렀다. 트리스는 메그의 숨이 평온하게 가라앉을 때 까지 오랫동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을에서의 마지막 날. 트리스는 에린과 알렉스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너희들이 묻고 싶은 게 있을 거라고. 지금 당장은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말해주겠다고. 에린과 알렉스는 웃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환자를 제외한 세 명은 끝도 없이 술을 마셨다.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술판은 웃음과 큰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트리스가 멍하게 테이블 위에 뺨을 대고 눈을 깜빡이고 있자 메그가 흰색 후드를 끌어올려 머리에 억지로 씌웠다. 그리고 끝자락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트리스는 과일 냄새만 나는 입술을 몇 번이고 맛을 보다 그대로 안아올려 계단을 올랐다.

 

 트리스는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 메그는 마지막 약을 먹은 후 깊게 잠들어 있었다. 트리스는 의자 양 끝을 꽉 쥐었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잠든 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깨우려는 의도도 전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가라앉은 눈빛이 창문으로 내려오는 달빛 속에서 하염없이 머물렀다. 마치 눈먼 자 같은 그런 눈빛. 그런 목소리로 인생보다 긴 고백을 시작했다. 

 너희들을 처음 봤을 때. 너를 처음 봤을 때. 강해보이니 너희와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 물어봤었지. 나는 순간 괜찮을까 수십 번을 생각했는데 너희들은 망설임이 없었어. 만약 내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나도, 아 괜찮겠구나 생각을 했어. 매일같이 먹던 사슴 고기도 캠프에서 너희들과 나눠먹으니까 훨씬 맛있더라. 그 평범한 맛에 눈이 뜨거워져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그런 나한테 너는 맛없지? 하고 물으면서 사탕 하나를 줬었잖아. 그게, 내가 처음 느껴보는 단맛이었어. 얼어붙은 산딸기보다 훨씬 달콤하고 혀가 녹는 맛. 메그.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 나한테 그건 인간과의 유대였어. 너희들이 내게 처음 준 거야. 동등한 힘을 가진 자들과의 유대. 

 우리는 가야 할 길이 굉장히 멀었지. 해야 할 게 있었잖아. 그 길의 시작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떠나지 말자고 맹세했었고. 나는 날짜 세는 법을 몰랐지만 너희들과 함께하고 나니 내 삶이 진절머리나게 길었다는 걸 알게 되더라. 내가 지나온 삶은 아주 길었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이 순간만큼은 짧지만 아주 길 것이라고. 나는 너희들보다 한참동안 더 살겠지만, 너희들이 죽는 것을 보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앞을 막아서자고……. 그게 내 진짜 맹세였어.

 메그. 너는 후회했다 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그게 내 방패였어. 너희들을. 너를 지키기 위한 방패. 그 후의 일은 오랫동안 거짓말을 한 벌일지도 모르지.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싶어서 발악했던 죄일지도 모르고. 나는…이제 알았어. 이제 정말 알겠어. 너의 피를 보고 너의 집착을 보고 나서야 정리할 수 있었어. 너는 언젠가 나를 쏘지 않고 그대로 죽을 테니까. 

 이제 꿈에서 깰 때야. 트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찢어진 망토를 메그의 몸 위에 조심히 덮었다. 너희들이 했던 말을 매일매일 곱씹으면서 살게. 불을 피우고 형편없는 음식을 데워 먹으면서도 즐거웠던 일을. 술을 진탕 마시곤 잔을 깨트리고 다트를 던졌던 일을. 네가 나에게 등을 맡기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던 일을. 그 고양감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할게. 너도 나를.

 트리스는 열린 문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 속에서 웃었다.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잊지 말아줘.

 그리고 문이 닫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추운 마을을 모조리 덮을 듯이. 트리스는 돌계단에서부터 마을 입구까지 걸어가며 간간히 불 꺼진 여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자 어깨의 갑주를 떼어내 쌓인 눈 위에 버렸다. 발목까지 오는 눈이 갑주를 먹어치웠다. 트리스는. 마지막으로 그들의 이름을 한 글자 한글자 부른 후 제 이름을 버렸다. 짐승이 눈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최선이었을까? 최선이었다.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든 그것이 최선이었다. 짐승이 바라던 것은 죽더라도 기억해줄 자가 있는 것. 그들이 자신을 잊지 않는다면 되었다. 그리고 훗날에 그런 녀석이 있었지, 하고 한 번 떠올려주기라도 하면 좋을 것이었다. 이 땅을 떠나 아주 먼 고향으로 가자. 맨살로 밤을 견디고 까닭 없는 통증이 나를 괴롭혀도 좋아. 손톱처럼 잘려나간 숨소리가 하얀 김을 만들었다. 짐승은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기슭에 멈추어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새벽의 불빛이 하나 둘 씩 사그라졌다. 별이 졌다. 눈이 재앙처럼 내렸다. 짐승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뒷발로 땅을 박찼다.

 그 때 짐승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선명한 총소리는 그 후에나 귀에 닿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산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메아리쳤다. 짐승이 겨우 왼쪽 무릎을 세워 땅을 디뎠다. 오른쪽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안 돼. 여기서 붙잡히면 안 돼. 짐승은 흐린 정신 속에서 얇은 코트 하나만을 걸치고 산을 올라올 자를 생각했다. 죽더라도 혼자 죽어야 했다. 제발. 그럴 수는 없어. 짐승은 다리를 질질 끌고 꼬리와 앞다리, 왼쪽 다리에 의존하여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핏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눈보라가 그것을 지워주기만을 바랬다. 

 짐승이 주인 없는 동굴에 몸을 숨기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한 시간. 두 시간 쯤. 짐승은 라이플 볼트가 내려가고 탄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도저히 설산을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차림의 메그가 비니를 벗어 던졌다. 손과 뺨이, 귀가 엉망으로 얼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짐승은 이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피가 나. 그래도 내 품은 따뜻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메그는 고개를 숙여 웃으며 그 털을 쓰다듬었다. 순백색 설산. 이게 너의 고향이냐. 메그는 파들거리는 귀를 매만지고 차가운 두 손으로 뺨을 쓰다듬고 코와 코를 맞대었다. 마치 자신의 것을 확인하듯이. 그랬다.

 나는 갖고 싶은 게 없었어. 메그가 말했다. 그날 하루 먹고 잘 수 있으면 됐지. 그렇게 생각했거든. 아니더라. 너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더니, 아니게 된 거야. 내가 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그래서 너를 헤집었어. 메그는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드러운 짐승의 털 안으로 파고들었다. 너를 다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거겠지. 인간도 짐승도 전부 내가 가지자. 그런데 네가 떠날 것처럼 굴었잖아. 차가운 숨이 모닥불 하나 없는 동굴 안에서 하얗게 얼어붙었다.

 사실 언제까지고 같이 있을 수는 없지. 우리가 어떤 맹세를 했든 간에 말이야.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뎌지고 아주 익숙해질 때쯤에 하나 둘씩 각자의 길로 떠나는 거라면 괜찮을 지도 몰라.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았을 거야. 그런데 네가 어느 날…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건 못 참겠더라고. 네가 내 말을 끊고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려는 게. 어떤 것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구는 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구는 게 불쾌했어. 짐승은 앞발로 메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전부 들으면서. 

 목이 물어뜯기는 순간에 네 생각만 했어. 네가 피바다에서 눈을 뜨면 돌이킬 수 없이 후회하겠지. 절망하겠다. 그래. 떠나는 것보다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네가 나를 잡아먹든 내가 너를 죽이든. 하지만 너는 나를 잡아먹지 않았으니까. 트리스. 메그는 그녀가 버린 이름으로 짐승을 부르며 아주 평온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망가트린 다음 이어 붙여서 내 것이라고 하면 되겠구나…….

 눈이 접혀 눈꼬리가 예쁘게도 휘어지는 형태, 후회도 절망도 없는 평온함, 어쩌면 그걸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대답이야. 메그는 다친 짐승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초목으로 부드럽게 색칠된 세계에서 벗어나 깨지기 직전까지 얼어붙은 땅으로 들어왔는데도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눈빛을 했다. 하루하루가 헤아림도 달력도 없는 삶. 메그는 끝없이 괜찮다고 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며 전부 다 죽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뭐가 괜찮은지조차 모르겠지만. 네가 있으니 괜찮아. 짐승이. 얼음장보다 차가운 몸을 끌어안으며 제 품으로 감추었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새하얀 밤. 몹시 추웠다. 그들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떨어지는 눈송이. 희미하게 밝아오는 빛. 잠들어 있는 세계를 잠식하는 오랜 꿈들. 추위는 차가운 벽에 더욱 바싹 파고들었다. 짐승은 끝없는 체향에 취하여 상상할 수 없는 과거를 지켜보았다.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나 그녀를 만나고 망설일 것 없이 손을 내미는 삶을. 그리고 여태껏 지나온 길을 생각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숲과 떨어지는 낙엽. 비정할 정도로 너른 광야. 처음 보는 짙푸른 바다에 대해서. 나는 그 길을 전부 너와 함께 걸었어. 이름 버린 자가 말했다. 메그는 기침을 두 번 하고 웃었다. 나도 그래. 그들은 새벽이 올 때까지 끝없이 사랑과 소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름을. 서로를 절대 잊지 않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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