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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는 광야를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바람에 깎여나가 앙상하게 드러난 돌기둥과 끝없는 모래들판. 구름이 넓고 얇게 퍼져 금색으로 물이 들었다. 척박한 곳에서도 살 수 있는 검은 새 몇 마리가 멀리서 날아올랐다. 트리스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에 길을 찾으려 했다. 죽은 다육 식물들 사이로 뻗어 있는 토막 난 듯 한 길. 무엇이든 색깔이 있는 것을 찾았다.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 무엇이든 희미하게나마 갈 방향을 알려줄 어떤 것. 검붉은 동공이 지는 해를 따라 움직였다.
메그는 멀리 서 있는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하루 종일 같은 길을 빙빙 돈 다리가 불평을 했다. 메그는 깨어 있는 시간이 늘었다.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먼저 일어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동료의 본질을 알고 난 후 하루도 빠짐없이. 탄창은 언제나 꽉 차 있었다. 가장 깊게 늘어지는 일몰 뒤로 망토가 간간히 펄럭였다. 메그는, 속이 뒤틀리는 그 느낌이 싫었다. 차라리 빨리 어두워져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어둠이 내려 저 치가 도망치지 못 하게 해라.
하루 종일 헤맸는데 쳐다본다고 답이 나와? 메그가 말했다. 가자. 눈부셔. 트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십 초 정도, 어쩌면 그것보다 더 길게. 침묵이 초침으로 끊어질수록 메그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광야의 지평선을 더듬는 눈길이 싫었다. 그들을 위한 길을 찾는 것 뿐이라 해도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거짓으로 맹세하고 아주 오랫동안 숨겨온 자를.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지라도 믿을 수가 없었다. 트리스가 한참 후에나 작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시선을 모래바람에서 떼지 않은 채였다.
먼저 들어가. 어디 안 갈게.
뭐?
이미 너덜너덜한 사탕 막대 끝을 날카로운 이가 씹었다. 메그는 단단한 팔목을 움켜잡아 확 당겼다. 트리스는 그때서야 돌아보았다. 흔들리지도 않는 몸과 동요도 없는 눈이 지긋지긋했다.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알면서도 그따위 말을 해, 두려워서 떨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이렇게 차분하냐고. 메그는 입술 안쪽을 씹고 말을 내리눌렀다. 차라리 뒷걸음질 칠 때가 나았다. 적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정찰 필요하면 내가 가……헛짓 하지 말고 이리 와.
메그는 트리스를 더 바짝 잡아당겼다. 트리스는 밤이 검게 광야를 물들이는 광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렸다가, 돌아와 말없이 끄덕였다.
그들은 불을 피운 캠프에서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데워먹고 지도를 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상한 정보상에게서 산 지도는 한참 오래 되기라도 했는지 길이 뚝 끊어져 있었다. 같은 자리를 한참동안 돌아 식량도 사냥할 동물도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을 걸으며 돌기둥에 흔적을 남겨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만 겨우 알 수 있었고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메그가 총열 끝으로 돌바닥에 앞으로의 길을 그렸다. 네 시간 내로 돌아올 거야. 에린은 자신의 작은 가방에 군용 식량과 물 한병을 넣어 그녀에게 건넸다.
트리스는 정찰을 떠나는 메그를 캠프에서 몇 십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배웅했다. 어두워 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메그는 발을 떼기 직전에서야 작은 손전등을 켰다. 그리고 트리스를 돌아보았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그들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돌아갔다. 메그는 손전등 불빛을 트리스의 발치에 비추었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그 몸을 지탱하는 발.
무슨 생각을 해? 메그가 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뭔데.
너 없는 동안 도망치지 않을 거라고.
…….
그때는 놀라서 그랬어.
그러냐.
평소대로 행동해야 해. 가야 할 길을 찾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거. 트리스가 두 발짝 다가왔다. 이제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아. 메그는 트리스가 최선의 대답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단 한 명이 알게되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고, 다시는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언제나 하던 대로 리더의 일을 하고 싸우고 방패를 세우며 나아가는 것. 그 길의 끝은 없다고 믿는 것. 얼마나 불확실한 믿음인가. 하지만 메그는 비웃을 수 없었다. 내가 제일 무서운 건. 트리스가 메그의 총열을 살짝 쥐며 내려다보았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피투성이인 너희들을 내려다보는 거야. 그러니까.
지시가 아닌 조용한 부탁이 희미한 불빛 속에서 속삭였다.
내가 너희들에게 발톱을 세우면 쏴줘.
망설이지 말고 죽여버려. 메그는 트리스가 숨긴 뒷말을 읽어내었다. 석판에 새긴 옛날 신화처럼. 낡은 연대기. 짐승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자 할 때 언젠가는 찾아올 끝. 내 약속으로 네가 편해진다면 그렇게 하지. 그들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죽음 속에 사는 자들은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유일한 죽음이 그것이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메그는 라이플 끝을 툭, 트리스의 가슴팍에 떨어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트리스는 작은 손전등 빛이 새카만 어둠에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돌아갔다.
새벽. 트리스는 거의 사라진 발자국을 따라 광야를 달리고 있었다. 불침번이었던 알렉스가 메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두 사람을 깨웠고 에린은 그때서야 이 땅 곳곳에 숨어 있는 암호와 함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왜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트리스의 물음에 에린이 메그의 뜻이라고 대답했다. 그걸 알면 절대 혼자 보내지 않을 거라고 했어. 식량도 더 없는데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맞는 말일지도 몰라. 트리스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멈춰 섰다. 적은 체력으로 어두운 길을 정찰하는 것은 저격수의 전문이며 네 선택이 최선이었겠지. 하지만 위험은 어디에나 있다. 너도 그걸 알잖아. 아는데. 하지만. 트리스의 발치에서 흔적이 끊겨 있었다. 하지만 네가 없으면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어.
트리스는 해가 뜰 기미조차 없는 지평선의 형태만을 겨우 둘러보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겠으나 그녀는 동료의 목숨이 달린 일을 망설였던 적이 없었다. 늘 그렇게 그들 앞에 방패를 세우던 몸. 힘줄이 터지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멈추는 일 없던 몸뚱이.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짐승으로 돌아가 검은 모래 위에 코를 박고 냄새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지울 수 없는 화약 냄새. 항상 따라다니는 딸기 사탕 냄새. 목덜미에 송곳니를 대었을 때 맡았던 체향과 피냄새. 짐승은 아주 흐린 피냄새를 맡으며 메그가 얼마나 다쳤는지를 생각했다. 많이? 아니야. 몇 방울. 다른 인간 냄새는 없다. 짐승은 밤이 오지 않은 호수빛 눈동자를 빛내며 숨을 몰아쉬고 눈밭 아닌 곳을 내달렸다.
설화석고 같은 바위덩이. 발바닥에 파고드는 갈색 모래알. 낯선 곳에서 익숙한 냄새만을 쫓는 커다란 몸. 그 자체로 거대한 산 같았다. 다양한 냄새가 저마다의 색을 내며 바람에 밀려오자 짐승은 우뚝 멈추었다가 흔적을 더듬으려 그날 밤을 생각했다. 목덜미. 어깨를 쥐었던 가느다란 손. 너임을 숨길 수 없는 체향. 이에 닿았던 달큰한 핏방울. 그리고 다시 달렸다. 이 쪽이야. 여기서 되돌아왔다가 동쪽으로. 해가 뜨는 곳으로. 황량한 저지대를 따라 모든 것이 뿌리까지 죽은 땅에서 너는 살아 있겠지. 살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지쳐 어디선가 잠들어 있어라. 차라리. 죽음같은 잠에 빠져들어 나만을 기다리고 있어라. 오직 한 존재만 생각하고 뒤쫓으며 짐승의 흐린 정신이 드문드문 끊겼다.
함께 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할 거야 너희들의 무덤까지도 보고 죽을 거야 인간을 동경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삶을 동경했다 쉽게 죽더라도 기억할 자가 있는 것 짐승의 영혼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흰 눈발이 지겨운 계절을 닫을 수 있다면 설산 아래의 아래의 인간들 속에 녹아들 수 있다면 그 곁에 영원토록 자, 이렇게 욕망은 깊어진다 그 갈망과 목마름 누군가를 깊이 생각하여 그것만을 찾을 때 더욱 더 새카매지는 본능 순수한 광야를 가로지르며 먹이에게 달음박질하는 그 맹목의 식욕으로 사냥감을 뒤쫓으며 가라앉으리라 가라앉으리라 흩어지는 모래알들과…….
짐승은 신기루 같은 돌무더기 사원을 지나 커다란 석판을 매만지는 손을 보았다. 새벽 끝자락에 해가 천천히 뜨고 있었다. 메그. 아주 흐리게 남은 이름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계속, 계속 너만 생각했다고, 너를, 너를 데려가야 한다고, 너를, 나의 고향으로 끌고 들어가야만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짐승은 뒷발로 땅을 박차 이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메그에게 달려들었다.
메그는 어두운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자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키고 라이플을 꽉 쥐었다. 얼핏 보였던 옅은 푸른색 눈동자가 짐승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두 앞발로 어깨를 짚고 온 무게로 내리누르는 몸과 그 아픈 열망과 식욕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메그는 라이플을 눕혀 목으로 파고드는 그 커다란 얼굴을 겨우 옆으로 밀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이게 뭐야? 이게 누구냐고. 나는 몰라. 그녀는 동굴에서 처음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의 경악과 두려움을. 죽이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때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짐승의 턱을 뚫고 나갈 총알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메그는 커다란 송곳니가 목에 닿아 파고들 때야 피바다에서 혼자 눈을 뜰 자를 생각하고 후회했다. 양쪽 목덜미에 고통이 비현실적이게 몰려들었다. 아.
트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혀 위에서 느껴지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과거에 맛 본적 있는 것. 계속해서 쫓았던 냄새. 흐린 시야가 그때서야 돌아왔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제 몸 아래 깔린 옅은 색깔의 천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트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터틀넥 부분을 조심히 끌어내렸다. 깊지 않지만 그렇다고 얕지도 않은 짐승의 잇자국이 왈칵 피를 뱉어내는 중이었다. 트리스는 천천히, 입술을 닦아내어 손바닥을 보았다. 반쯤 몸을 드러낸 해가 아직 말라붙지 않은 핏자국 위에 빛을 비추었다. 순간 금색처럼 보이는 붉은 것. 머리카락처럼 끊어지는 그 숨소리. 이 땅에서 나는 짐승의 냄새 모두가 네가 한 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트리스는 망토를 찢어 메그의 목을 감싸고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몸을 안아들어 뛰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에서 보호하듯 찢어진 망토를 그 몸 위에 덮은 채로. 그리고 쏟아지는 모든 죄와 후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제 몸에 겨우겨우 파고들어 옷자락을 꼭 쥐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느끼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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