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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그는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자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어두운 색의 나무 천장에서 햇빛이 자취를 감출 때쯤이었다. 메그는 몸을 돌려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몇 장의 종이를 넘겨보고 있는 트리스의 등을 보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짐승의 등에 업혀 얼어붙은 땅을 가로질렀던 새벽을 생각했다. 매달릴 곳이라고는 새하얀 털과 그 목덜미 뿐이었던 새벽. 일출조차 구분 할 수 없었던 흐린 하늘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익숙하다는 듯 한참을 달려 안전한 땅에 내려준 짐승에 대해서.
헤이.
메그가 작게 부르자 트리스는 협탁 위의 사탕을 쥐어 메그 머리 옆에 내려놓았다. 메그는 사탕의 껍질을 벗기며 한 번 더 불렀다. 야, 트리스. 트리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작전 자료를 팔락거리며 넘기기만 했다. 메그가 흰 망토를 쥐어 슬쩍 들추었다. 꼬리 없네. 그제야 돌아본 트리스가 메그의 손을 떼어내었다. 표정을 구긴 채였다.
잊어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너 그런 말 한 적 없어. 비밀이라고만 했지.
더 궁금해 하지 마. 앞으로 그런 일 없을 테니까.
뭐 어때? 다 나갔는데.
메그가 망토에 손을 제대로 감아 잡아당겼다. 이리 와봐. 메그는 그 밤에 동굴 밖을 내다보던 트리스의 표정을 떠올렸다. 언제나 이성적이려 노력하는 인간인 것을 알면서도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차분한 얼굴과 열 오른 채로 눈을 마주쳤던 표범에 대해서였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전혀 낯선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메그 안에서 흥미와 이유 모를 화가 아주 조금씩 싹을 텄다.
트리스는 망토를 잡아당기는 손을 붙잡아 떼어 내며 메그의 얼굴 옆에 손을 짚었다. 없던 일이라고 생각해. 넌 아무것도 못 봤어. 트리스는 눈을 한 번 깊게 감았다가 메그를 내려다보았다. 부탁할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불쾌감이 아닌 단호함을 담고 있었다. 말하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는 것 같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하루 이틀 알던 사이 아니잖아. 메그가 미간을 구겼다. 목숨을 수백 번 맡겼는데 고작 그게, 날 어떻게 할 것 같아? 반장갑 낀 손이 짙은색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꾹 쥐었다. 트리스는 제 짧은 머리칼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단단히 붙잡혀 바닥까지 끌어내려진 기분이 들었다. 어두워진 실내에서 빛을 담고 있는 것은 비니 밑의 눈동자뿐이었다.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봐주고 있는 거야. 그 날카로운 눈매와 대답을 강요하는 손아귀,
내가 널. 어떻게 해버릴 것 같아.
트리스는, 고개를 숙이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일 땐 이성이 흐릿해. 후천적인 건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지. 그래서 어떻게 살지 정해야 했어. 가장 여린 피부를 내보이는 것처럼 가장 날카롭고 위험한 본성을 더듬더듬 고백하는 낮은 목소리. 어디론가 가버릴 듯 희미했다. 짐승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죽이고 잡아먹고 살다 보면 그게 최선인 것 같이 느껴지니까. 하지만 난 인간 속에서 살고자 그걸 버렸어. 이성과 본능을 나눠놨다고. 그게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아……. 트리스는 메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고 아픈 듯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너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야.
메그는 가라앉은 눈과 다문 입술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선을 느꼈다. 은빛 방패의 숙명처럼 타인을 보호하려는 단단한 벽 같았다. 몇 년을 함께 했더라도 부술 수 없는 것. 몇 년을 함께 다니면서도 알 수 없었던 그 본성. 메그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다른 녀석들이라면 여기서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야. 그리고 양손으로 트리스의 뺨을 감싸 끌어내려 이마를 맞대었다. 어깨에 고정된 흰 망토가 넓은 등 위에서 아래로 늘어졌다.
나는 알아야겠어.
메그가 중얼거렸다. 트리스는 뺨에 닿은 손과 이마에 느껴지는 체온에 당황하며 그 목소리를 들었다. 모든 비밀을 말했음에도 놓아주지 않는 손이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내가 널 못 믿는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다니 무슨 뜻이야? 그러면서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을 떨치지 못했다. 총구를 겨눌 정도로 두려워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 시선을 피하지 않는 눈에 대한 기대를. 떨치지는 못 했다. 트리스는 입술 안쪽이 피가 날 정도로 씹었다.
……여기서는 안 돼.
왜?
짐승 냄새가 묻으니까.
트리스는 자신의 것이 분명할 냄새를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메그는 흰 망토와 글자가 빽빽한 종이가 팔락팔락 흩어지는 것을 보며 표정을 살필 수 없는 뒷모습을 따라 여관방을 나섰다. 해가 이미 완전히 졌는데도 그들은 등불 하나 들고 가지 않았다.
메그는 트리스가 깊은 숲에서 희미한 빛을 받으며 짐승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설화에 귀를 기울이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전설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람에 흔들리던 망토가 들판의 눈처럼 흰 털로 가라앉고 짙은 머리칼이 발자국처럼 무늬를 남긴 등.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새하얀 짐승이었다. 무거운 발이 땅을 딛는 소리가 터벅, 났다. 짐승은 목울림을 내리누르며 꼬리를 낮추고 메그를 보았다. 차가운 공기에 숨이 새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흐으음.
메그는 짐승이 꼬리와 귀를 낮추고 바라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숨기고 숨기려던 본성을 마주하는 것에 묘한 고양감이 드는 것 같았다. 메그는 길고 큰 꼬리를 불안한 듯 낮게 젖는 짐승의 머리에 손을 대어 웃었다.
안 돼.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이대로 있어.
손 아래에서 짐승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메그는 몸을 낮추어 두 손으로 짐승의 턱과 뺨을 받쳐 올리고 귀까지 쓸어 만졌다. 그러다 커다란 머리를 끌어당겨 이마를 맞대었다. 색도, 모양도 전혀 다른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시울 속에 유리알처럼 박힌 하늘색 눈. 새까만 동공을 중심으로 호수가 얕아지는 것처럼 투명했다. 짐승이 꼬리를 바짝 세웠다가 두 걸음 물러나 고개를 젓는 것처럼 꼬리를 낮게 살랑거렸다.
도망을 가?
메그가 사탕막대를 까딱거리며 손짓해 짐승을 불렀다. 짐승은 숲으로 도망갈 것처럼 몇 발자국 물러섰다가 메그의 찡그린 표정을 본 듯 다시 다가와 고개를 낮추었다. 메그는 머리를 톡톡 두드리고 마음껏 털을 헤집어 푹신한 귀를 매만지며 눈가를 쓸다 몸을 낮춘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 앉아.
짐승이 메그의 옆에 엎드리듯 앉았다. 지면에 놓인 부드러운 발에는 발톱이 보이지 않았다. 본능이라더니 별로 차이도 없네. 이런 걸로 숨기고 도망치려 했다 이거지……. 메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흘리며 물었다. 이성이 흐릿해지면 어떻게 되는데? 반장갑을 낀 손이 짐승의 앞발 위에 부드럽게 올라와 누르듯 매만졌다.
내놔. 트리스.
짐승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고 움직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와 발톱을 보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철장 안에서 사육된 맹수 같았다. 메그는 말이 없다가 부드러운 입가에 손을 올렸다.
넌 진짜 생각 많고, 요령 없고, 뻔히 보이는 성격에, 여태 그게 너인 줄 알았더니…….
작은 손이 반항하지 못하는 머리를 붙잡아 이빨 위를 덮은 가죽을 쓰다듬고 위로 들쳐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대리석 같은 단단함과 칼날같은 날카로움을 동시에 가진 것이 희미한 빛에 비쳐 반짝였다. 메그는 그것이 무섭지는 않았다.
…본성은 어디 숨겨놓고 있었다 이거잖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본질. 메그는 그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숨기고 싶었던 것이 뭐였는지. 어떤 것이길래 몇 년 동안 함께하면서도 한 마디 안 했는지. 동료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하며 그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직접 확인할 것이었다. 으르렁이든 야옹이든 해봐. 그렇게 말한 메그가 입을 벌려 짐승의 코끝을 깨물었다.
으? 짐승이 송곳니가 드러난 당혹감에 굳어 있자 그대로 코에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다. 짐승은 그 찰나 앞발로 메그의 몸을 바닥으로 밀치고 그 가느다란 어깨에 올라탔다. 메그가 눈을 크게 뜨고 뜨거운 숨이 목에 닿는다고 느낀 순간 송곳니가 검은 코트 깃을 헤치고 회색 터틀넥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종이 한 장 차이, 갈색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멈추었다. 쇠사슬로 온 몸이 묶인 것처럼 억눌린 움직임이었다. 그르렁대는 소리, 그 목울림, 트리스는 비린 맛이 혀에 감도는 것을 느끼며 한참동안 숨을 고르다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만 해.
하하…….
메그가 웃었다. 사냥에 성공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까뒤집듯 기어코 모든 것을 파헤친 메그가. 그녀는 목에 와닿았던 숨결과 명백한 살의를 다시 한 번 곱씹으며 트리스의 고개를 들게 했다. 나 봐. 트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 웃어. 뭐가 그렇게 즐겁지? 죽을 뻔 했는데.
안 죽었으니까.
너도 나도 감당 못할 게 있어.
그래서 이렇게 겁을 먹었어?
내가 다시 설산으로 돌아가서, 동굴에 혼자 처박혀 살아갈 게 아니면,
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어둠 같았다. 호수빛 눈과 달리 새카만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모든 게 두려운 듯. 스스로가 가장 두려운 듯이. 트리스의 손등과 손바닥에는 수많은 손톱자국이, 손톱 아래에는 추위에 그새 말라붙은 핏자국이 있었다. 메그는 트리스의 혀에서 감도는 피냄새를 맡았다. 내 피는 아니야, 네 것일까?
이래서는 안 돼.
트리스는 망토에 감기는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의 짐승보다 절반은 더 작은 그 체구가 온 어둠을 등에 지고 있었다. 내 본능이 궁금하다고 했지. 트리스는 추락과 탈출을 거듭하여 아찔한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피투성이로 짐승의 목을 물어뜯는 걸 보면 만족할 수 있어? 터진 가죽에 입을 처박고 내장 하나 남기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럼 넌 도망칠 텐데?
표정을 숨길 수 없었지만 숲의 그림자가 그 얼굴을 가려주었다. 트리스는 두 발짝 더 물러났다. 메그는 밀어내는 손길에 확 찡그리고 목소리를 높이려 하다 이를 악물었다. 전장에서 포효를 지르며 누구보다 앞서 방패를 세우던 자가 당장이라도 숲으로 자취를 감출 것처럼 일그러진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아득한 명암 차이에 달빛마저 가닿지 못했다. 네가 지금 송곳니를 드러낸다면 그것만이라도 반짝일까. 메그는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에 비니를 눌러 쓰고 몸을 일으켰다.
……너야말로 도망칠 거잖아.
메그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나서야 뇌에 뿌리를 내린 불쾌함과 화의 근본을 깨달았다. 그래. 도망칠 것 같았다. 동굴 입구에서 밖을 내다보는 그 내리깔린 눈꺼풀이, 눈발을 하나하나 세듯 공중에 매달려 있는 시선이, 자신이 모르는 모습으로 눈밭을 가로지르는 그 몸뚱이가.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버릴 것 같아. 메그는 트리스의 입술이 그림자 속에서 달싹거리다 다물리는 것을 보았다.
영원히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언젠가는 정말 떠나려고?
따라붙는 말에 몸이 굳는 것까지 전부 다. 트리스는 대답 없이 손으로 눈두덩이를 내리눌렀다.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짐승과 인간은 너무나도 달라. 어렴풋하게 의식이 남아 있다 해도 매순간 핏덩이 같은 목덜미를 물어뜯다 보면 어느새 잊고 잃어버린다. 처음 말과 글을 알려준 인간들이 어떻게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잊지 못하면서. 너희들이 나를 알게 되면, 내 본성을 그 눈 앞에 풀어놓는 날이 오면, 너희들이 도망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라질 거야. 아무도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 인간과 만나지 않고 살 거다.
……그렇게 해야 해.
다 잠긴 목소리가 아픔을 억누르고 속삭였다. 그렇게 태어났어.
그 때가. 언젠가 오리라. 메그는 그것을 직감했다.
하.
메그가 헛웃음을 터트리고 등에 맨 라이플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높은 고목의 나뭇가지가 저 위에서 흔들리며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목을 꿰뚫리는 죽음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벗어났으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그 모든 순간 불확실한 이별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을 인간이 우스워서. 화로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너를 안다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딴 식으로 도망치면.
그들에게는 대화와 대화로 풀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쏠 거야.
총신이 천천히 가로로 서며 검게 빛났다. 짐승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들이대었던 총구가 며칠 밤을 지나 짐승을 붙잡기 위해 번뜩였다. 괜찮은 것. 괜찮지 않은 것. 절대로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던 것. 그리하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던 것. 트리스는 매 순간 그들에게 진심이었으나 오래 전에 했던 맹세 하나만큼은 거짓이었음을 생각해냈다. 새하얀 분노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도망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인간이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을 붙잡아놓는 것을 보면서. 메그가 라이플 끝을 툭 떨어뜨리며 말했다. 기억해둬. 그리고 뒤돌아, 돌아갔다.
트리스는 메그가 깊은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뒤통수에? 어깨에? 다리를 쏠 거야? 묻고 싶었지만 대답할 자가 없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조금씩 튀어오르며 마침내 점으로 사라졌다. 더위 속에서 추위 속에서 손가락 허물이 벗겨지는 고통이 이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난생처음 짐승의 가죽 없이 눈보라를 맞이했던 때도 이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깊은 숲의 그림자가 몸을 하염없이 집어삼키는 것을 느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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