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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닿는 곳마다 눈이 쌓였다. 죽음의 수의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침엽수 가지가 버티지 못해 꺾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옆 봉우리에서 눈사태 같은 파도들이 위로 솟구쳤다가 연약한 숲을 먹어치우듯 멀리 쓸려내려갔다. 천둥같은 거대한 소리가 멈춘 후에는 귀가 아플 만큼 새하얀 적막이 이어졌다. 눈구름에 가려져 희미했던 해가 그마저도 천천히 산마루 아래로 사라지자 혹독한 바람이 호흡까지 얼려버릴 것처럼 불기 시작했다. 트리스는 그 모든, 익숙한 것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언젠가는 주인이 있었을 것 같은 동굴 안에서 작은 모닥불이 천천히 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꿰인 얇은 사슴고기 냄새와 섞여 아주 흐린 짐승 냄새가 났다. 트리스는 핏기가 가신 사슴고기의 냄새를 맡고 동굴 벽에 기대어 있는 메그에게 건넸다. 메그가 고개를 작게 저었지만 트리스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메그는 그 차분한 눈빛을 수십 초 마주하고 나서야 그것을 받아들였다.
다음 길을 위한 정찰로 들어왔던 산. 메그가 눈 덮인 곳을 잘못 디뎌 발목을 완전히 접질렸으나 돌아가기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을 깨달은 트리스는 메그를 안아들고 눈발 속에서 두 시간을 걸어 몸을 눕힐 만한 동굴을 찾았다. 설산에서의 오랜 생활로 체득한 옛 습관과 감각에 의지한 발걸음이었다. 트리스는 곧 얇은 나뭇조각 두 개와 튿은 망토 밑단으로 메그의 오른 발목에 부목을 대어 주고 사슴의 고기를 구해 돌아왔다. 아주 멀리서 칼 한 자루로 해체한 고기를 가죽 자루에 담아서. 트리스의 몸에서 피냄새와 알 수 없는 짐승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메그는 무슨 맛인지 모를 사슴고기를 우물거리며 트리스에게 물었다. 온 몸이 아프고 피곤에 절어 있었다.
어떻게 혼자서 사슴을 잡은 거야?
다쳐있는 걸 붙잡았어.
트리스는 끝이 새카맣게 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망토를 벗어 메그에게 둘러주었다. 추우니까 불가로 와. 밤에는 더 추워질 거야. 메그는 어깨를 감싸는 온기를 받으며 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다고 생각했다. 동굴 밖에서는 눈발이 굵어져 눈보라로 변하고 있는데.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해가 완전히 진 밖을 바라보는 옆얼굴이 그리운 것 같기도 했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메그는 트리스의 고향이 설산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감기는 눈꺼풀에 저항하지 않았다. 웅크렸던 몸이 천천히 옆의 어깨에 기댔다.
피 냄새 나…….
메그는 짐승의 냄새가 끝없이 난다고 중얼거렸다. 잡아먹은 사슴이 아닌 어떤 위험한 예감의 냄새였다. 몸은 온기와 피로로 나른해졌으나 여전히 예민한 신경은 계속해서 그 신호를 쫓았다. 하지만 모르겠어. 메그는 위험과 아픔, 무의식과 각성 상태 사이에서 헤매다 잠에 들었다. 트리스는 몸에 걸리는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꺼져가는 모닥불에 눈에 젖은 가지를 몇 개 더 넣었다. 괜찮아. 그리고 흘러내리는 흰 망토를 여며주며 중얼거렸다. 내 피는 아니야. 네 피도 아니겠지.
트리스에게는 고향 같은 곳. 추위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인생의 반을 보냈던 동굴엔 잡다한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 날카로운 바람과 새하얀 만년설이 피부 같은 것이었다. 트리스는 부목이 대어져 있는 부은 발목을 내려다보고 메그의 숨이 열과 섞여 뜨거워지는 것을 걱정하며 그녀의 이마를 조심스레 쓸었다.
새벽. 메그가 잠든지 두시간 정도 지난 시각. 트리스는 몸을 떠는 메그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모닥불로도 가려지지 않는 추위가 그 몸을 파고들자 메그는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몸을 웅크리고 스스로 팔을 껴안았다. 그러나 돌바닥의 냉기와 밤의 눈보라를 망토 한 장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트리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메그의 숨소리를 들었다가 작게 한숨을 후, 쉬고 발톱을 숨긴 발로 땅을 디뎠다. 탁.
만년설 덮인 산의 등줄기처럼 새하얗고 높게 자라난 침엽수처럼 퍼져 있는 무늬. 귀의 끝이 검은 무늬로 물들어 바짝 서 있었다. 부드러운 털로 덮인 얼굴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박혀 있었고 검고 흰 수염이 호흡에 따라 흔들렸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짐승은 그대로 몸을 낮춰 작게 웅크린 몸 옆에 누웠다. 메그가 뺨과 몸에 닿는 따뜻한 품을 찾아 발목을 끌고 파고들었다. 짐승의 꼬리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짐승은 조심스럽게 새끼를 끌어안듯 그녀를 안아 차가운 돌바닥에서 최대한 떼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품에서 천천히 아픈 숨이 제 길을 되찾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눈 섞인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하늘은 새벽이 깊어질수록 잿빛처럼 어두워졌다. 메그는 색이 흐린 꿈을 꾸다 웅웅거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잠에서 깼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부드러운 털을 끌어당겨 얼굴을 묻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알 수 없는 짐승의 냄새를 맡으며 느꼈던 희미한 기시감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
어두웠던 시야에 흰 털가죽이 들어온 후 뒤늦게 깨어난 후각이 강한 짐승의 냄새를 감지했다. 아직 꿈인가? 한 발 늦은 현실감각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자신을 흰 망토에 감싼 채 끌어안고 있는 것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심장이 쾅, 떨어졌다. 한순간에 크게 뜨인 눈꺼풀이 빳빳하게 굳은 채 간신히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비명을 내리눌렀다. 허억. 하얀 털의 거대한 표범이 그녀의 코앞에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잠들어 있는 건가? 내가 이걸, 안고 있었어? 시계초침을 쪼개고 또 쪼갠 그 짧은 찰나 생각이 본능 단위로 치고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새하얘졌다. 뒤로 물러나려 뻗은 손에 차가운 것이 닿아 소리를 지르려다 그것이 라이플의 총신임을 깨달았다. 메그는 숨을 멈춘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떼어 상반신을 일으켰다. 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쿵. 쿵. 쿵. 메그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며 라이플을 조용히 끌어안아 쥐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눈꼬리까지 시큰거렸다. 절그럭대는 소리가 들리자 짐승의 귀가 움찔거려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지금이 아니면 죽는다. 떨리는 총구가 천천히 짐승의 머리를 겨누었다. 꺼지기 직전의 작은 모닥불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후…….
소리가 되지 않는 숨이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호흡이 길어짐에 따라 비니 아래의 눈이 빛을 잃었다. 안전거리와 반동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가까이 붙은 총구의 떨림이 멎었다.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트리스, 트리스는? 그제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멈칫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짐승의 눈이 뜨였다. 그 아플 만큼 시린 빛이 시선을 마주했다.
크릉. 짐승은 총구를 보고 본능적으로 목울림을 내었다. 그러다 금방 멈추고, 본능 안의 이성이 고장 난 전구처럼 깜빡거렸다. 어떻게. 이대로 뛰쳐나갈까? 몸을. 일으키는 순간. 총을. 어떡하지? 혼자. 절대 이 산을. 못할 텐데? 얇디얇은 유리같은 의식 속에서 생각이 눈보라처럼 휘몰아쳤다. 아. 젠장.
그르렁대는 소리와 노려보는 눈빛에 굳어버린 손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그 모습이 변했다. 천천히. 빛 하나 없이.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단 한 조각도 이해하지 못한 그녀에게 한숨과 걱정 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나야, 메그. 메그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개머리판으로 트리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뭐…뭐야, 너 뭐냐고!?
순식간에 닥친 격통에 관자놀이를 누르고 흔들리는 뇌를 진정시킨 트리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트리스는 지끈지끈한 곳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후 주저앉은 메그를 보았다.
놀란, 건 알겠는데 손부터 나가는 버릇 좀 고쳐…….
너 정말 트리스야? 수작 부리는 타이탄 추종자새끼지!?
소리지르면서도 라이플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메그가 다시 한 번 제대로 파지하며 트리스를 겨누었다. 너라고? 한계까지 날카로워진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믿냐고. 쇠와 쇠가 부딪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메그가 중얼거렸다. 대답 잘 해. 머리 날려버린다……. 무거웠지만 합당한 의심에 트리스는 고개를 숙였다가 한숨을 쉬고 후드의 옷깃을 한쪽 어깨로 끌어내렸다. 이거.
트리스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총상이 분명한 흉터가 있었다. 검은 피부 위로 도드라진 흰 새살들. 입이 작은 짐승이 한입 파먹기라도 한 것 같은 흔적이 핏기 없이 아팠다. 메그는 눈을 찌푸렸다가 라이플을 조용히 거두었다. 트리스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입은 흉터. 그 이상 그녀를 증명하는 표식은 없었다. 메그는 젠장, 욕을 내뱉고 동굴 벽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극도로 긴장했던 숨이 젖혀진 고개에서 피로와 함께 흘러나왔다.
대체 뭐야. 늑대인간……?
그 비슷한 거. 말을 흐린 트리스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트리스는 메그의 비니를 밀어올리고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이 있는지 확인한 후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알지. 큰 손의 짧은 손톱이 손바닥 안을 파고들었다. 네가 추워하는 것 같아서 잠깐만 데워주려 했어. 안 자려고 버텼는데 그만. 메그는 그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트리스가 후회하고 있음을 알았다.
비밀로 부탁할게.
……같이 지낸 게 몇 년인데 어떻게.
그리고 메그는 그 후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메그가 트리스의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쪽 무릎을 꿇었던 트리스는 휘청거리지도 않고 상체를 기울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던지 전부 다 들을 것처럼. 왜 비밀인데? 밤마다 사람 뜯어먹고 그래?
안 먹어.
트리스가 눈을 아래로 내려깔았다. 짐승의 호수빛 눈과는 다른 검붉은 색. 인간의 피를 증명하는 것 같은 색이었다. 유일한 빛인 모닥불을 등지고 앉아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는 없었다. 이걸 말해서 뭐해. 트리스가 말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것처럼. 태어나길 짐승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것 같았다. 트리스는 그들과 만나기 전의 생활을 어렴풋하게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외로움조차 몰랐던 설산에서의 삶과 인간들 사이에서 숨을 죽이고 귀와 꼬리를 감춰야 했던 삶. 메그는, 적어도 우리한테는 말했어야지, 하는 말을 삼키고 트리스를 놓아주었다.
덕분에 얼어 죽지는…않았네.
다행이야.
트리스는 너희들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메그가 다시 눈을 감는 것을 보았다. 믿지 않은 게 아니야. 하지만 나에게는 선이 있다.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기 위한 선. 어느 쪽도 아닌 존재는 어느 쪽으로라도 살아가기 위해서 그러한 선이 필요했다. 트리스는 바깥을 살피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옷자락을 붙잡는 손을 느끼고 메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네 시간 후에는 눈보라가 그칠 거야. 그때 이 산을 나가자. 하고 속삭이며 그녀가 덮은 망토를 쓸어내렸다. 아주 많은 것들을 숨긴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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