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적. 침묵. 아득한 어둠. 공허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들. 한참의 흐느낌 뒤로 커다란 스크린이 밝아졌다. 흐린 빛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왔다. 알렉스는 익숙한 이름으로 빼곡한 화면을 보며 계속 울었다. 세 개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알렉스가 눈을 깜빡, 거리자 눈물이 그들의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영화관이 밝아졌다. 드문드문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빈 팝콘 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상한 영화라고 이야기했고, 누군가가 출구와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에린은 손수건을 꺼내어 알렉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트리스는 알렉스의 허벅지를 토닥거렸다. 메그는 알렉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젖은 눈꼬리에 입을 쪽 맞추어주었다. 뒷줄에 앉은 누군가가 쿠키 영상이..

1993년. 그리스 이피로스. 검은 눈동자가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푸른 들풀이 파도처럼 굽이치는 평원이었다. 새파란 올리브나무 몇 그루가 능선을 따라 서있었고, 발자국 따라 꺾인 들풀은 그 자체로 길이었다. 저 멀리 작은 교회가 보였다. 주황색 지붕의 벽돌집들이 듬성듬성 자리했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낮게 흘렀다. 쏴아─… 시선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울창한 나뭇잎과 들풀을 흐트러트렸다. 꽃 대신 나비 떼가 새하얗게 날아올랐다. 여름 직전의 냄새. 밤색 머리칼을 적시는 숨 막히는 푸르름. 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1세기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노래했다. 9세기의 자이나교 경전에는 세상은 창조되지 아니했다 적혀 있었다. 17세기의 천문학자는 천체의 작동 ..

만약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 사랑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들은 사람이 가득한 여객선 터미널에서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하게 일행을 찾는 사람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미아 방송. 승선 전 인원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여행 가이드. 커다란 대합실의 높은 곳에 걸려 있는 디지털 시계. 그들은 승선 티켓과 시계를 번갈아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몇 번 걸다가 거리로 나왔다. 터미널 앞은 항구를 오가는 사람들과 서행하는 차량들로 부산스러웠다. 그들은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하얀 불빛의 가로등들. 콧등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 그들은 택시운전수에게 지폐 다발 두 개를 던져준 후 차에서 끌어내렸다. 운전수의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