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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 사랑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들은 사람이 가득한 여객선 터미널에서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주하게 일행을 찾는 사람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미아 방송. 승선 전 인원을 확인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여행 가이드. 커다란 대합실의 높은 곳에 걸려 있는 디지털 시계. 그들은 승선 티켓과 시계를 번갈아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몇 번 걸다가 거리로 나왔다.

 터미널 앞은 항구를 오가는 사람들과 서행하는 차량들로 부산스러웠다. 그들은 맨몸으로 비를 맞으며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하얀 불빛의 가로등들. 콧등을 때리는 거센 빗줄기. 그들은 택시운전수에게 지폐 다발 두 개를 던져준 후 차에서 끌어내렸다. 운전수의 당황한 눈빛과 경악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양해를 구할 겨를이 없었다.

 속도를 올리며 핸들을 꺾었다. 그들은 본능처럼 어떤 곳으로 가고 있었다. 한참 전에 스쳐지나갔던 별 볼일 없는 공터로. 별다른 약속도 없었고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메그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에린은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트리스는 신호를 무시하며 빗길을 달렸다. 오랜 발신음이 뚝 끊긴 후 자동 응답 메세지로 넘어갔다. 하얀 손끝에서 기어이 피가 흘러내렸다. 에린이 창밖을 보았다. 불안한 호흡. 고요 속의 와이퍼 소리. 빗방울에 색색의 빛이 길게 맺혔다가 사라졌다. 버려진 공터와 가까워질수록 심장 소리가 선명해졌다.

 십수 대의 차량이 길을 막고 있는 공터에 차를 멈춰세웠다. 낡은 차들이 몰려든 형태가 마치 벌떼 같았다. 아까보다 비가 더 내렸다. 멀리 검은 파도가 출렁거렸다. 빗물이 소매와 신발을 흠뻑 적셨다. 어둠 속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 너머의 바다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수십 명의 인간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옆으로 쓰러진 새빨간 바이크와 바닥에 떨어진 검은 헬멧도. 피로 젖은 몸뚱이도. 그 몸이 쓰러져있는 모습도.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빗물을 머금은 금색 머리칼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검은 구름. 개새끼들의 그림자들. 자갈 위로 흩어진 샛노란 탄피들. 바다를 보며 누운 몸.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을 얼굴. 그 시선 끝에, 도시를 떠나는 배가 있었다. 그들, 은.

 복수를 하자고. 복수를 하자고 말했다.

 

 

 

 

 

 

 

 

 

 

 

 

 

 

 

 

 

 

 

 

 정적. 침묵. 아득한 어둠. 공허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들. 한참의 흐느낌 뒤로 커다란 스크린이 밝아졌다. 흐린 빛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왔다. 알렉스는 익숙한 이름으로 빼곡한 화면을 보며 계속 울었다. 피비린내와 냉기가 두 뺨에 남아 있었다. 온 몸을 흔드는 비바람과 그보다 더 큰 허무함도. 검은 파도와 거센 빗줄기가 하염없이 출렁거리다 화면을 집어삼켰다.

 알렉스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에 잠겨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뒤. 다시 정면. 끝이 없는 어둠 속에 수천 개의 의자가 계단처럼 늘어져 있었고, 새빨간 천으로 감싸인 의자는 저마다의 번호를 가지고 있었다. A01부터 Z99까지. 혹은 AA0001부터 ZZ9999까지. 영화관의 모습을 한 지옥 같았다.

 알렉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휘청거리며 몇 걸음 걸어가다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더 나올 게 없을 때까지 구토를 했다. 거친 울음이 시들어버린 흐느낌으로 변할 때까지. 신물이 입안을 채우고 혀끝에서 침이 뚝뚝 흐를 때까지. 엔딩 크레딧이 끝났다. 스크린에서 몰아치던 파도가 멈추었다. 소름끼치는 정적이 저기 먼 9999번 좌석에서부터 빠르게 다가왔다. 화면이 훅, 어두워졌다.

 사랑한다고? 이따위 것이 사랑이라고? 거절이 무서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피 흘리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다. 원하지 않을 형태로 마음을 증명하려 했고, 조금이나마 가엽게 여겨주길 바래서 목숨을 내버렸다. 그들은 복수를 위해 죽었을 것이다. 이 허무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죽을 준비만 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제 목을 붙잡았다. 손끝이 피를 보려는 듯 날카로워졌다. 단단한 피부에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의미 없는 후회가 구토로 터져나왔다. 온 몸이 덜덜 떨렸다. 나, 나는. 죽고 싶었다. 지금 당장 죽으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 같았다.

 거대한 화면이 새하얗게 밝아졌다.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렸다. 검붉은 의자와 어두운 바닥 위로 흐린 빛이 쏟아졌다. 알렉스는 바닥에 처박았던 머리를 들고 무릎으로 기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텅 빈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세상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설산. 고요의 평원. 모든 존재를 지워버릴 듯 쉼 없이 내리는 함박눈. 날카로운 침엽수림 외에는 조금의 초목도 없는 땅. 알렉스는 빈 좌석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립고 사랑하며 내가 죽인 사람이, 낯선 세상을 배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멈출 줄 모르는 눈물을 쉴 새 없이 닦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설산의 이야기가 조용히 시작했다.

 전쟁. 대학살. 수많은 군인. 신체 개조 실험. 지독한 일방통행과 메마른 사랑들. 불완전한 자들이 만든 완벽한 풍경들. 나는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다. 우리의 영혼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자 기적이었다는 사실. 이상할 정도로 그들을 원했던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었다. 나는 분노가 갈 길을 찾았을 때 전율했고, 피투성이의 나를 안아줄 때 함께 울었다. 그들이 사랑을 말할 때 나도 사랑을 말하고 싶었고, 너희를 평생토록 지킬 테니 나를 보호해 달라 울고 싶었다. 영화 같은 것은 그때뿐인 재미였는데. 짧은 삶 동안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슬프게 하지 못했는데. 알 수 없는 행복과 상실이 눈물로 쏟아졌다.

 다시금 영화가 끝이 났다. 아름다운 광야를 배경으로 의미 없는 엔딩 크레딧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그마저도 끝났다. 또다시 어둠과 적막이 찾아왔다. 머릿속에 멋대로 파고든 행복과 충족감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끔찍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의 우리들 이야기. 그것도 더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 속절없이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질 운명이었다 말하는 이야기. 나는 죄를 지었다. 혼자 죽을 각오를 한 것은 나인데, 그들이 벌을 받았다.

 나는 다음 영화가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나는 바닥도 천장도 구분가지 않는 곳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울었다. 비명을 지르고 이름을 부르고 피부를 쥐어뜯고 손톱을 세웠다. 가만히 주저앉아 죽음을 생각했고, 의자에 머리를 처박고 목을 메달 밧줄을 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 곳에는 바람도 먼지도 없다. 시간도 계절도 없다. 눈을 뜬 것도 감은 것도 같았다. 아, 당신이 악마라면. 내 생각이 맞았다.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건 폭력도 마약도 아니다. 오직 사랑뿐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다만 몇 분 일수도. 며칠이거나 몇 달일 수도 있겠다. 배가 고프지도 목이 마르지도 않았고 졸음이 오지도 않았다. 빛도 없고 바람도 없고 추위도 없는 곳. 오직 뜬눈으로 외로움과 죄를 견뎌야 하는 지옥. 버틴다고 한들 죽음이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 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나는 낯선 자극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없이 늘어선 의자의 산맥 끝자락에서 빛이 내려왔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새하얀 빛이 일렁거렸다. 나는 홀리듯 일어나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가까워지는 빛에 눈이 부셨다. 나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 누군가 있는 거냐고, 대체 이 곳은 어디냐고,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 걸음에 두려움과 후회가 하나. 다음 걸음에 떨림과 외로움이 하나. 걷고 또 걷자 까마득하게 멀어보였던 빛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영화관 문 너머로 새로운 장면이 막 피어나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고 새순이 피어났다. 북풍에 대지가 날것으로 드러났다. 바람이 불고 모래가 흩날리며 불길이 타올랐다. 천지가 재건되는 성스러운 풍경과 탐욕을 벌하러 내리치는 벼락들. 몰려드는 떼구름과 하늘에 닿을 듯 굽이치는 파도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새로운 세계임을 알았다. 이 거칠고 낯선 풍경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세계임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경고했다. 만나지 못할 지도 몰라. 모든 걸 다 잊을지도 몰라. 더 이상 너로서 존재하지 못할 지도 몰라.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앞으로 더 울게 되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

 

 

 

 

 1981년. 모로코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온 지 일곱 해 쯤 되었을 때 옛 기억이 떠올랐다. 열 살 남짓이 되자 대부분의 기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제대로 된 부모나 친지는 없었다. 절친한 친구와 믿을 만한 사람들도. 언제나 그랬듯 지독하게 혼자였다. 나는 열세 살까지 지저분한 재래시장에서 카페트를 팔았다. 열다섯 때는 불법 농장에서 해시시를 심었다. 스무 살에는 모아놓은 돈으로 무작정 배에 올랐다. 그리고 서유럽으로 향했다.

 로테르담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없었다. 마르세유에서도 특별한 소식을 얻지는 못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새로운 세계에는 새로운 법칙과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세상을 떠돌기로 했다. 위험한 일 대신 작은 화물선의 선원으로 일하면서.

 밤하늘이 찬란한 바다. 은하수를 건너는 배.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고래 떼와 오로라. 비가 내릴 때 예뻤고 해가 떠오를 때는 더 예뻤다. 가끔씩 걱정이 꿈을 망치기도 했지만 그 지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이 살아있는 세상이라 생각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밀수를 종용하는 카르텔과 싸우다 총을 맞아 죽었다. 스물세 살 때였다.

 

 다시 깨어났을 때 나는 새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둡고 적막한 영화관의 핏빛 의자에 앉아서. 어린 시절의 우리들 이야기였다. 춥고 힘든 땅에서 맨손으로 길을 만드는 아이들의 이야기. 나는 영화를 보고 또다시 울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이 나자 둘도 없이 가라앉았다.

 만나지 못했다. 운명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심장이 무거웠다. 호흡이 조금 갑갑했다. 가슴께를 더듬어 보았지만 총상의 흔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 경고가 맞을 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로서 존재하지 못할 거라는 경고. 하지만 어떻든 상관없었다. 이것이 악마의 계략이거나 신의 장난이라 해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죽어서라도 다음 세계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못다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못다한 고백을 속삭일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무엇이 나를 다음 삶으로 이끄는지는 상관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먼 곳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다시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997년. 열여섯이 되었을 때 나는 디트로이트로 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 전에는 지역 공동체의 지원 아래에서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른 아침에는 동네의 빵집에서 카운터를 보았고, 저녁에는 배달 기사로 뛰었다. 나이를 속이고 야간 경비 일을 하기도 했다. 학교는 지원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만 나가며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했는데, 그래도 뒷골목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다. 큰돈보다 깨끗한 신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출생지가 뚜렷하고 전과의 기록이 없는 깨끗한 신분. 나는 여권을 발급 받은 날 외교부의 인장과 나의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두 달짜리 여행 비자로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하늘이 새파랬다. 짐은 별로 없었다. 반겨주는 사람 또한 없었다. 나는 그간 모은 돈으로 낡아빠진 모텔방을 구했다. 그리고 계약서도 없이 야간 식당에서 일했다. 가게 주인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주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구석 테이블에서 뜨개질을 하며 보냈다. 가끔은 메뉴판에 없는 파이를 구워 주기도 했는데, 요리 실력은 꽤나 좋았다. 손님도 점원도 할 일도 없는 식당. 내 일은 바닥 닦기와 노인의 말상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어요. 나는 이미 60살을 넘겼거든요. 노인은 시답잖은 소리에 콧방귀를 끼면서도 내게 새빨간 목도리를 떠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왔다고 했지. 요즘 어린놈들은 배짱이 없는데 좋은 자세야. 사랑에 한 몸 불살라 봐라. 애인을 데려오면 크게 한 턱 내주마. 나는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일한지 한 달쯤 되었을 때 노인에게 디트로이트 북구를 관리하는 갱에 대해 들었다. 노인은 이런 낡고 가난한 가게는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너는 덩치가 크고 배짱이 좋으니 놈들이 접근할 수도 있다고.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면 거절하거나 도망쳐야 한다고도 말했다. 나는 그런 놈들을 수십 수백 명 봐왔으니 걱정 말라고 대답했다.

 밤에는 지저분한 침대에 누워 그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말과 손길을 떠올렸고 영화의 장면 장면을 곱씹었다. 사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온기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피범벅으로 죽어가는 것이 제법 따뜻하다는 사실 뿐. 그들에 대해 더 오랫동안 생각하고 싶었지만 영화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얼마 없었다. 이번에도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천년을 홀로 버텨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게 내 벌일지도 모른다. 라디오에서 티비에서 영화에서 노래하는 세상의 사랑들이 다 내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다. 나는 또 베개를 적시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우다 잠을 잤다.

 가게의 쓰레기를 버리고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덩치 세 명이 나를 찾아왔다. 놈들 중 한 명은 나보다 키가 컸다. 총을 가진 놈은 없었다. 그들이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텍사스라고 거짓말했다. 몇 살이냐고도 물어보았다. 나는 관심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또다시 쓰레기처럼 살다 죽느니 겁쟁이로 보이는 것이 나았다.

 입안이 찢어졌고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노란 머리카락은 먼지투성이가 되었고 유리병에 맞은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나는 모텔로 돌아가기 전 약국에 들르기로 했다. 엉망인 꼴을 보이면 노인이 핏대를 세우며 쫓아낼 것이 분명했다. 어린놈들의 솜방망이 주먹 덕분에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약국 하나가 늦은 시각에도 열려 있었다.

 넓은 약국 안은 새하얗게 밝았다. 손님도 얼마 없었다. 매대에 여러 가지 건강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한구석에는 면도기와 세안 용품들이 쌓여 있었다. 나는 깨끗한 바닥에 피를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렀다. 카운터에서 등을 돌린 채 퇴근을 준비하던 약사가 어서 오세요, 인사하며 나를 보았다. 순간.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시간이. 공기의 흐름이 멈춘 듯. 하늘에서 커다란 액자가 내려와 이 순간을 눈앞에 고정시킨 듯이. 그 목소리와 그 얼굴과 그 눈동자와 그 입술. 하얀 가운에 적힌 이름은 에린, 에린이었다.

 그 다음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녀가 나를 보고 경악했던 것도 같다. 나는 설마 기억하고 있을까 해서 주저앉았는데, 달려온 그녀는 창백한 표정으로 이마의 피를 닦아주었다. 나는 많이 울었다. 정말 정말 많이 울었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섯이라 대답했다. 그녀는 봉투에 거즈와 붕대와 약병을 쓸어 넣은 후 간판의 불을 껐다. 그리고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의 집은 시외에 위치한 비싼 아파트였다. 고급스러운 외부에 비해 집안은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 술병과 책더미. 쌓인 잡지와 종이 뭉치들. 아무렇게나 묶어놓은 쓰레기봉투들. 그녀는 조금 후회하는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았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게 물 한잔을 주고 소파에 앉힌 후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 투명한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영상으로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얼굴. 손과 얼굴에 와닿는 숨결. 상냥하고 다정하려 노력하는 목소리.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상처에 눈물이 들어가면 곤란하니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나를 보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나는 그녀를 붙잡아 덮쳐누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간의 숨, 그간의 호흡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제야 숨을 쉰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냐 물었다. 그리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돕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고 상냥한 사람이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쥐어 가느다랗고 메마른 손등을 조심스레 이마에 갖다 대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는데, 그럼에도 그녀의 손에서는 여전히 초목의 냄새가 났다.

 내 말을 믿어줄까. 날 미친 사람 취급하지 않을까. 그간의 인내와 기다림이 부정당하지는 않을까.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내 사랑은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불투명했다. 흔해빠진 연가에서조차 답을 찾을 수 없어 내가 가진 것은 장미도 초콜릿도 열렬한 고백도 아닌 낡은 이야기 뿐. 나는 그녀를 보며 울고 울다가, 우리의 지독한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했다.

 귓바퀴와 눈시울이 아플 만큼 뜨거웠다. 긴장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목소리와 울음이 함께 비집고 나와 헛기침을 계속했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머뭇거리다 더듬더듬, 모든 걸 믿을 수는 없다고 했다.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부른 게 아니냐고. 네가 말한 메그와 트리스라는 사람은 기억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울고 또 울면서 믿지 않아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내가 여기 있고 네가 여기 있다고, 너에게 닿을 수 있고 네가 나를 달래주어 기쁘다고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에린. 나는 미치도록 아프지만 미치도록 행복해. 나는 너를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그녀의 집을 나왔다.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배웅 아닌 배웅을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아준 후 웃었다.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내가 보고 싶다면 이 가게로 와. 나는 밤새 울어 새빨개진 눈과 상처투성이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이 닫힐 때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보고 있다가 가게로 돌아갔다.

 그러지 말아야 했던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었나? 전에 했던 후회를 또 다시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나는 이게 첫사랑이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몰랐고 어떻게 해야 미움 받지 않는지 몰랐다. 그녀의 온기가 좋았고 당황한 표정이 무서웠고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언행이 어쩔 수 없이 슬퍼서. 의연한 척 시간을 주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지가 무거웠다. 몸이 다시금 따뜻해졌다. 익숙한 피냄새가 후각을 파고 들어왔다. 노인이 소리를 지르며 구급차를 불렀다. 할멈. 늦었어요. 경찰이나 부르세요. 옆으로 누운 채 중얼거리자 노인은 시끄럽다며 화를 냈다. 깨진 창문. 쓰레기들의 시체. 구석구석 남은 총알 자국들. 이 도시에서는 흔한 것이라 했지. 주어야 할 사랑은 넘치는데 다 버려두고 가야 한다니. 나의 고백은 너무 길었고 안타까운 눈물만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나는 또 어설픈 꼴로 죽음 앞에 서있었다.

 알렉스!

 반쯤 쪼개진 문을 열고 에린이 뛰어들어왔다. 찢어지는 비명이 쏟아졌다. 그녀는 손을 떨며 무릎을 꿇었다. 검은 치맛자락과 검은 스타킹이 더러운 피로 물들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아, 너무 기뻤다.

 그녀는 어떻게든 상처를 지혈하며 피를 멈추려 했다. 그녀의 새하얀 손이 피로 젖어갔다. 나는 그녀의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깜빡, 깜빡 움직였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툭툭 흐르는 눈물을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무너지는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네가, 네가 찾아오라고 했잖아. 보고 싶으면 오라고 말했잖아. 그녀가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아직 대답도 못 했는데. 그런데 이게 뭐야. 대체 이게…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 나는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쥐고 더듬더듬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뺨에. 그녀의 입술에 맺힌 눈물을 핏자국으로 덧그리면서. 그녀는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녀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녀는 입을 맞추어 주었다.

 아마 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이다. 흰 천을 덮은 채 병원으로 이송되어 의미도 없는 부검을 받을 것이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신분으로 조사가 끝날 것이고, 그렇게 친지도 가족도 없이 도시의 공동묘지에 묻힐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입맞춘 내 사랑은 피와 눈물의 맛. 하지만 그녀의 눈물을 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생에…모르는 사람이 네 이름을 불러도……놀라지 않기야?

 나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에린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스크린 위에서 또 다른 영화가 시작했다. 사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절망한 사람의 이야기.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한없이 초라하게 눈물 흘리는 신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가 공상 과학 같다고 생각했다가, 곧 나의 삶도 다르지 않다고 고쳐 생각했다. 저 시뮬레이션과 나의 세상이 다를 바 있겠는가? 사랑이야말로 진리의 이름이다. 에린은 대단한 사람이다. 그녀는 단단하고 다정하고 강인하며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사랑하고 싶었다. 실패한 건 아니었다. 조금 더 운이 좋았다면 조금 더 함께 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했을까? 언젠가는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었을까? 혀와 입술에 짜디짠 입맞춤이 남아 있다. 그녀의 울먹임과 투명한 눈물이 귀와 눈동자에 새겨져 있었다. 조금만 더 맛본다면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확신 할 수 없고 의미도 없다. 대신 나는 바다와 세상의 넓이를 알았다. 이 재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를 알았다. 다른 세상. 또 다른 세상. 밤하늘을 수놓는 수천 개의 별들. 다음 세상에서는 천 번의 사랑을 주고 한 번의 사랑을 받아야지. 나의 소망은 언제나 불확실하며, 해류를 떠도는 작은 배이며, 언제 만날지 모르는 섬이다. 사랑을 일삼기에도 난 시간이 없다. 나는 새로운 세계로 다시금 몸을 던졌다.

 

 서른두 살. 레닌그라드. 소비에트로 이주한 지 1년하고도 6개월 째. 도시 외곽의 사냥용품점에서 메그를 찾았다.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매대 뒤로 숨었다. 그리고 물건을 고르는 척 하며 그녀가 나가길 기다렸다가 카운터에 물건 값의 몇 배를 올려놓고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메그는 이 부근에서 알아주는 사냥꾼이라 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군인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매주 한 번 사냥감을 팔러 이 가게에 들른다는 것. 이민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역에 산다는 것. 번 돈을 담배와 도박으로 다 날린다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가게에서 한 달 동안 일하기로 했다. 무급의 잡일꾼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그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아니야. 안녕하세요. 그쪽 이름이…이것도 아니야. 일은 여태껏 해오던 것에 비하면 별 거 아니었다. 주인이 무겁다며 엄살떨던 물건들을 척척 옮겼고, 남자 네 명이 끌고 온 곰 시체를 혼자서 해체했다. 대신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그녀가 문제였다. 나는 밤마다 메그를 생각하며 그녀를 대하는 연습을 했다. 머릿속에 그녀의 형태를 그리고 첫 대화를 상상하면서. 그 목소리와 눈빛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건 사냥이 아니야. 싸움도 아니고 협박도 아니야. 그녀는 날카롭고 예민했으며 나는 그녀를 놓치거나 그 손에 죽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죽는 것은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날. 유난히 햇빛이 좋았던 날. 바람도 강하지 않았고 입김이 나올 만큼 춥지도 않았다. 나는 메그가 잡은 사슴을 창고로 끌고 들어가며 손을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메그는 몇 발자국 떨어져 나를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사냥감에 값을 매기고 장부를 적고 지폐 몇 장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그녀는 돈을 세어보다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검은 코트. 푸른 눈. 담배를 문 입술. 재를 터는 손가락. 메마른 선과 숨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그녀였다. 당장에라도 허리를 끌어안아 품 안에 넣고 싶은 그녀 그 자체였다. 나는 혼자 몰래 울었다가 오랫동안 웃었다.

 또 오셨네요. 다음번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좀 춥죠? 눈을 보며 웃어보았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슬슬 겨울이 오네요. 가죽 값이 올라 좀 더 넣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고 돌아갔다. 나는 사장에게 한 달 더 일한다고 말했다. 사장은 기뻐하며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사탕 한 봉투를 샀다. 그리고 담배 냄새밖에 나지 않는 그녀에게 언젠가는 달콤한 냄새가 나길 바라면서 혼자 사탕을 씹었다.

 딱 하루 일을 쉰 적이 있었다. 물건을 옮기다 도축용 칼에 베인 탓이었다. 그 다음 주, 메그는 평소처럼 창고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어쩌면 한참 동안. 그리고 툭 내뱉었다. 저번 주 녀석은 솜씨가 엉망이었는데. 너 어디 갔었냐? 나는 놀라 벌어지는 입을 한손으로 가렸다가, 겨우 웃었다. 조금 다쳤거든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맡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 그녀가 피우는 담배를 태우다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일주일에 한 번. 그렇게 반 년. 내 이름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사를 받아 줄 정도는 되었다. 말을 낮추고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기까지는 반년보다 더 걸렸다. 사탕이니 집적 구운 빵이니 선물 받은 버터 같은 것을 의심 없이 받기까지도. 나는 가끔 도박장을 나서는 그녀를 기다렸다가 그녀 뒤를 쫓는 잡배들을 반쯤 죽여버리기도 했는데,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 눈 대신 비가 내린 날. 그녀는 골목길을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바닥에 쓰러진 놈들과 내 피투성이 손을 보고 픽 웃었다. 나는 그날 그녀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메그는 치안이 나쁜 지저분한 골목에서 살았다. 좁은 방 한 칸과 공용 화장실이 전부인 곳.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제 눈치를 보는 게 뻔히 보이는데, 먼발치에서 맴돌기만 하는 게 재밌었다고도 말해주었다. 그녀는 내 어깨를 깨물며 왜 우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저 좋아서,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최선을 다해 웃어보았다. 몸을 낮추고 메마른 입술에 혀를 뻗으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날처럼, 그때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내 방식이 옳았지만 그 이상으로 겁이 났다. 조금 더 기다려. 사랑한다 말하면 또다시 엉망이 될까 두려웠다. 조바심 내지 마. 그녀의 감정이 내 감정과 같음을 확신할 수 없어 머뭇거렸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날에는 꼭 혼자 울었다. 행복하고 꿈만 같은데 사랑한다 말하기가 겁이 나서.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그 목소리와 그 입술이. 차갑고 메말랐지만 온기를 품은 몸이 너무나도 좋았다.

 우리는 제법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대전 당시 저격수로 복무했다 말했다. 부상 때문에 전역했고, 지금은 적은 연금과 사냥 수입으로 살고 있다고도 말해주었다. 손을 대면 아픔을 토했던 어깨와 집에 널브러져 있던 마약성 진통제들. 나는 그녀의 커다란 흉터를 떠올렸다가 그녀의 고통을 짐작하고 문득 두려워졌다. 그리고 나 없이도 흘러갔던 그녀의 삶과 내가 모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말해줄 것이 얼마 없었다. 나는 언젠가 술에 취해 내 고향은 지옥이라고, 나는 지옥에서 왔다고 말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잊어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별말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술을 줄이고 도박을 끊었다. 대신 나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몸을 섞었다. 그녀는 가끔씩 창고 옆에 쭈그려 앉아 내 일이 끝나기까지 기다려주었고, 나는 그녀의 사냥에 따라가 총을 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녀는 날카롭고 아름다웠다. 꼭 맞는 옷을 입은 듯이, 그 배경이 초목이든 새하얀 눈밭이든 언제나 새파란 칼날처럼. 인공조명 아래에서든 태양 아래에서든 언제나 아름다웠다. 나는 그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맞는데 왜 인정받을 수 없는지 슬퍼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자주 산책을 했다. 분주하고 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둘밖에 없는 숲길을 걸었다. 목적 없이 떠돈 지 몇십 년이 지났을까. 나 할 수 있는 산책 모두 너와 함께 하였다. 나는 그녀의 걸음에 보폭을 맞추다 문득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잠깐 우뚝, 멈추었다가 내 머리끝을 당기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내가 지옥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웃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이미 지옥을 보았다고 했다. 전쟁터에서. 꿈속에서. 사람들이 뒤엉킨 모든 곳에서. 그러니 내가 지옥에서 왔을 리 없다고 말했다. 너는 태양……그래. 태양 같아. 환하고 밝고 가끔 사라지고. 밤에 조용히 혼자 울고. 나는 네가 있어서 따뜻하고 좋은데, 밤의 너는 미치도록 혼자 같아. 넌 대체 뭐야? 뭐가 널 그렇게 슬프게 하는 거야?

 눈물이 뚝뚝 흘렀다. 감정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낯설고 기뻤고, 언젠가의 너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해서 눈물이 나왔다. 네가 나를 그렇게나 자세히 봐주었다니. 가끔은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는 네가 내 울음을 들었다니. 심장을 태울 듯 깊어지던 밤의 정신병을, 네가 알아챘다니. 부끄럽고 기쁘고 슬프고 좋아서 또다시 부끄러워졌다. 나는 정신없는 머리로 입술을 더듬거리며 나를 사랑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옮겼다가, 나를 보며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음을 삼키며 우리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항구도시에서의 첫 만남. 죽음. 사후의 절망. 검은 영화관. 스크린 속의 이야기들. 흑백영화조차 본 적 없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 해가 뜨고 다시 해가 지고. 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울고. 배가 고팠다가 목이 말랐다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네가 전부 다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나는 너에게 사랑을 말하러 네 번의 삶을 넘어 왔어. 그 눈물과 그 떨림과 그 고백에, 메그는 담뱃잎 냄새가 나는 입술로 입을 맞추어 주었다. 밤이었고, 새벽이었고, 1967년의 레닌그라드였고, 나는 언젠가 또 이런 날이 올까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어도 좋아. 나는 마침내 사랑을 말했고 사랑을 받았다.

 메그는 트리스와 에린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모아놓은 돈으로 소비에트를 떴다. 사실 나의 행선지는 그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인데, 그녀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이들을 찾아가겠다고 말해주었다. 기약이 없을 수도 있어. 평생 떠돌 수도 있어. 만나지 못할 수도 있어. 내가 말했다. 너도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잖아. 그럼 나도 그렇게 해야지. 메그가 말했다. 배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웃는 그녀가 지나치게 예뻐 나는 또 울어버렸다.

 그렇게 십몇 년을 떠돌았다. 냉전 시대는 살벌한 얼음판 같았다. 우리는 자주 위기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먼지투성이인 서로를 바라보며 신나게 웃다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었다. 새로운 곳. 새로운 하늘.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음식들. 전에 다 본 것이라 해도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그녀가 어깨의 통증을 참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녀는 모르핀을 전보다 더 자주 찾았고 밤마다 침대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나는 어느 순간 때가 왔음을 깨달았지만 그녀는 고향도 목적지도 아닌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떠돌았다. 그리고 그녀가 죽을 곳을 찾았다.

 아름다운 언덕에 지어진 어느 여관. 그네가 흔들리는 커다란 나무. 낮고 하얀 울타리들. 멀리 보이는 무연고자의 공동묘지.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바람에 젖은 그녀를 보았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고 찬란한 들꽃들이 바람결 따라 넘실대고 있었다. 내 사랑이 져버린다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나도 같이 죽으면 안 될까?

 죽으려고?

 죽고 싶어.

 다른 녀석들을 찾으러 가야지.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네가 그랬잖아. 우리는 혼자 행복해질 수 없다고.

 응.

 그 말이 맞아. 나는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는데.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나도 그래. 정말 행복했어. 지금도 행복해. 하지만. 하지만 메그.

 잘 자라고 해줘.

 잘 자.

 사랑한다고도 말해줘.

 사랑해. 사랑해, 메그.

 다음에도 날 데리러 와줄 거야?

 그렇게 할게. 그렇게. 할게.

 고마워. 사랑해. 알렉스.

 메그는 더없이 다정하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곁에 머물렀다. 그리고 누구도 파헤칠 수 없는 곳에 그녀를 묻었다. 그녀는 내가 떠나길 바랬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무덤가에 서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을 보았다. 고통의 흔적이 많이도 남아 있었다. 죽기 전 네가 웃던 모습이 생각나 핏자국을 그대로 두었어. 유월의 노을은 너의 머리칼 같아. 너는 나를 태양이라 말했고 햇볕이라 불렀지만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이라고 읽는다. 나는 너의 무덤가 옆에서 눈을 감고, 또 눈을 감고, 다시 눈을 감으면 함께 끝이 나길 바랬다.

 

 사랑했다. 사랑받았다. 욕심이 끝없어 같이 죽고 싶었다. 눈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울었고, 눈물 대신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진대도 놀라지 않을 만큼 아팠다.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왜 너의 죽음을 봐야 했던 걸까. 왜 이렇게 두렵고 슬픈 걸까. 벌써. 벌써 네가 보고 싶었다. 사막에서 시작하여 사막으로 끝나는 저 영화는 마침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었는데. 왜 나만은 이렇게 나약한 걸까.

 문득 내 존재 자체가 실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살결과 웃음을 더듬으며 아니라고 믿으려 했다. 지나치게 슬픈 일이 있었지만 개중에는 계획하지 않은 기쁨도 있었다고.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나는 여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그러나 사랑을 생각할수록 추억에 잠겨 어둠 속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막과 공허 속에서 그간의 행복을 끼니 삼아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지만 메그. 다음에도 날 데리러 와줄 거야? 나는 반드시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빛이 내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약속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2017년 시리아 이들리브. 내전에 휘말린 민간인들을 구하다 죽었다. 내가 구한 어린 아이와 부모가 고맙다고 울었지만 나는 죽기 직전에도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숨 한 번에 기대. 다음 숨 한 번에 슬픔. 작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곧 절망이 된다. 나는 영화 속의 트리스가 걸음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토록 아프고 절망스러웠음에도 몇십 년 살다 죽는 우리를 위해 몇백 년을 기다린다 말했다. 그렇기에 나 또한 그녀를 배신할 수 없었다. 자. 다시 가야 한다. 힘을 내야 한다. 힘을 내야 한다. 힘을 내야 한다.

 

 다섯? 여섯 번째 삶인가? 몇 편의 이야기를 보았지?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뒤섞인 탓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애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삶에서는 트리스와 에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단단하고 다정한 천성으로 나를 많이 보듬어 주었다. 어둠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언제나 불을 끄지 않았고, 밤마다 찾아오는 불안에 울고 있으면 떠나지 않겠다는 백 번째 약속을 해주었다. 나는 또다시 그들을 잃을 것을, 언젠가는 홀로 돌아갈 것을 알았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이 짓을 수천 수백 번 반복할 수 있었을까? 트리스는. 에린은 정말이지 강한 사람이다. 나는 그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내가 사랑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이나마 기뻐했다.

 그들은 메그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홀로 태어나 홀로 죽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메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혼자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에린이 죽을 곳을 찾으러 그리스로 갔다. 에린은 오래 살았고 행복했으며 사랑했으므로 괜찮다고 이야기하며 눈을 감았다. 병 없이 곱게 맞이하는 죽음이었다. 트리스는 매일 매일 에린의 묘비에 들러 꽃을 건네고 시를 읽고 그녀가 좋아했던 책을 바쳤다. 나는 트리스가 에린의 무덤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나 또한 그러했기에, 홀로 메그를 찾으러 떠났다. 우리는 주름진 손으로 악수를 건네고 포옹과 입맞춤을 나누고서 다시 만나자 했지만 그러지 못할 것을 알았다.

 

 불사는 두려운 것이다. 영생은 끔찍한 것이다. 하지만 둘이라면 버틸 만할 것이고, 셋이라면 살만할 것이며, 넷이라면 즐거울 것이다. 마침내 신이 된 그들은 많은 고뇌를 겪었지만 어쩌면 즐거워 보였다. 이게 정말 죽음이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다시 태어날 세상에서 다시 한 번 너희를 사랑할 거야. 나는 그 대사를 따라 중얼거렸다. 내가 말하는 것은 희망보다 불행이었지만 나의 쓸모를 다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대부분의 것들을 경험으로 배우는 인간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배워버렸다. 지금이 몇 년인지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잊어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아는 것들을 기록해보려 펜을 들었지만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나를 잊는 건가. 스러져가는 기억들을 어떻게 붙잡을 건가. 나는 그들도 나를 보았을 거라고 나를 사랑했을 거라고 함께 하는 행복한 세상을 그렸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계속 걸었다. 산. 또다시 만난 들판. 미칠 것 같은 바다.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빗물들. 사랑을 알았으므로 매분 매초가 아팠고 먼지 같은 사랑마저도 애타게 원했다.

 언젠가의 메그는 부러진 칼날 같은 사람이었다. 더 이상 날카롭지도 예리하지도 않은 사람. 그게 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녀는 에린을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메그에게 너를 데리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더러워진 얼굴로, 메마른 입술과 생기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 아주 조금이지만 네가 기억나. 하지만 너무 늦었어. 나는 더 불행하고 덜 불행한 일만 남았기 때문이야.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곧이어 지옥으로 갈 거야.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지 못할 거야. 최선만으로는 안 될 거야. 나는 불행한 그녀의 곁에서 불행을 나눠 살다 죽었다.

 

 그녀는 내게 그만두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외로웠고 너의 불행마저도 달콤해 그만둘 수가 없었고, 영화 속의 너는 어쨌든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 너를 가두고. 내 것이라고 말하고. 괴로워하고 밀어내도 무시하여 마침내 마음껏 사랑한다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어야 했었나. 그 사랑이 뭐길래. 그러나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묻는다. 나는 그냥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함께 지옥으로 가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나는 그동안 이름을 부르면 나를 돌아볼 그들을 수없이 생각하였다. 트리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어깨를 흠칫 떨었고, 나를 돌아보고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너를 잊고 살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미치도록 원했던 그 말들. 그녀는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그녀보다 더 울었다.

 몇 개월 후 독일의 돌격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여 2차 대전의 불씨를 피웠다. 우리는 손을 잡고 도피생활을 하다 런던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온 망명자들과 함께 연합군을 지원하며 시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두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전쟁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계속 걱정했고,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던 것들이 내 상상과 망상이 아닌지 고민해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여섯 해의 시간 끝에 나치들이 항복을 선언했다.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갔다. 살던 집은 무너졌으며 함께 걷던 거리는 엉망이 되어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더 이상 폭격과 총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다행스러웠을 뿐이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주의는 폐쇄되었다. 광장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제 하에 넘어갔다. 우리는 1차 대전의 휴전 기념일에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꼴로 커다란 가방을 지고 커다란 배에 몰려들었다. 그녀는 그 속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찾아보자고, 혹은 이미 미국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의 단단한 마음이 좋았다. 내가 아는 그녀는 절망하고 슬퍼할지언정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건너 미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로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수없는 이민자들의 파도 속에서 속절없이 사라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목에서 피가 터져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두 번 다시 트리스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고도 이십 년을 더 살았다. 지리멸렬한 기억만 늘려놓고는, 미련하게도 목숨을 끊지 못하였다.

 

 내 존재가 저주인 걸까? 내가 너희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내 사랑 때문에 수십 수백 번 더 죽는 것은 아닐까? 내 그리움의 대가. 천년 내내 버리고 버려질 것들. 극야의 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인간성을 버리고서라도 함께 하길 바랬다. 나도 그렇게 말해줄 이가 있다면. 나도 저렇게 사랑을 속삭일 이가 있다면.

 죽은 너와 죽지 못한 나에 대해 생각한다. 고독과 습관으로 살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지성이라는 저주를. 외로움이라는 보잘것없는 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커다란 죄와 커다란 절망이여. 나는 더 이상 지으면 안 되는 죄를 짓고도 이 삶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신문에서 우수한 공군의 이야기를 읽었다. 에린의 부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멋진 얼굴로 화려한 견장을 차고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신문을 품에 안고 그녀의 장례식을 먼발치에서 보았다. 하늘이 맑고 초목이 푸르고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쓸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날. 너는 나의 것인데 왜 장례조차 시체조차 가까이에서 볼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하루가 주어진다면 너와 함께 할 거야.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너와 사랑할 거야. 그러나 삶을 반복할 때마다 기억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몇 번의 삶을 더 거쳐야 이 슬픔을 벗어날 수 있을까.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더 비참한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기적을 겪고 신을 겪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열릴 때까지. 나는 공허 속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메그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우리는 같은 시설에서 자랐다. 나는 그녀에게 아주 먼 미래나 아득한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작해야 여덟 살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가족이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내미는 발에 신발을 신기고 머리에 꽃을 엮었고, 자그만 손으로 내 뺨을 누르며 웃음을 터트릴 때 자주 눈물이 나왔다. 긴 갈색 머리칼이 사르르 흐트러지며 슬픔을 모르는 새파란 눈으로 초원을 담을 때 살아있음을 느꼈다. 알렉스. 꽃이야. 이건 나비야. 너는 꽃이고 태양 같아. 나는 네가 더 예쁘다고 말했다.

 나는 차에 치여 죽었다. 그녀를 구했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온 너의 조그만 신발과 파리한 입술만 어른거릴 뿐. 나는 아프게 우는 운동자를 보며 웃었던 것 같다. 보고 싶어. 보고 싶을 거야. 나는 너를 많이 사랑했어. 나는 그녀에게 나를 잊으라고 말했다.

 

 언젠가의 나는 너와 사막에 가고 싶었다. 네가 아무것도 못 하는 곳으로 가서 내 어깨에 매달려 땅을 두려워했으면 했다. 그리고 무섭다고, 나를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모래 사이에 파묻혀 함께 죽어가기를 원했다. 벌을 받는 걸지도 몰라. 죽음과 사랑을 동시에 바래서 어느 하나도 얻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 속수무책의 시간. 뱀처럼 고요한 어둠. 나는 자꾸 원하지 않는 생각에 잠기고 많은 것들이 이해되었다. 내가 나빴다는 것. 영화와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라는 사실. 나의 삶은 무엇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재회에 대한 상상은 나를 움직이는 전력이었을 뿐이다. 기억과 영혼의 마모는 기쁜 일이다.

 

 평범하게 살았다. 슬픔이 나의 평범이라 한다면 그랬다. 견딜 수 있는 고통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고독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주 혼자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기억은 머릿속에 넘쳐흐르는데 나의 설화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빈자리를 행복한 이야기로 채우려고 그랬다.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끝.

 언제나 그랬듯 혼자 죽었다. 그 누구도 내 이름을 알지 못했다.

 

 사랑을 받은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들에 대해 생각하다 가끔 나를 잃어버렸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내가 떠오르기도 했고, 그들의 이름이 반짝거리다 사라지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혼자 웃었다. 나의 피와 나의 외로움. 그런 건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다. 고요에 귀가 멀고 고독에 눈이 멀고 슬픔에 손가락을 잃으니 이제는 누구를 그리워하고 무엇을 더듬으며 울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에린은 월스트리트의 증권사 직원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살았다. 출근과 퇴근마다 차를 몰았고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아침에는 커피를 내렸고 저녁에는 정성스런 식사를 준비했다. 티비를 보며 빨래를 개었고 장을 보며 생필품을 채워 넣었다. 반복되는 일상. 평화로운 시간들. 나는 그게 너무 좋았다.

 우리는 좋은 집에서 살며 주말마다 멋들어진 데이트를 했다. 높은 건물과 반짝거리는 야경. 눈부시게 흐르는 밤의 강물과 아름다운 웃음들. 나는 문득 확신이 들었다. 아마 십년 후 이 날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백년 후에는 잊을 것이다. 저녁을 먹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그녀의 옷자락에 달린 커프스의 무늬를. 나에게 웃어주었던 예쁜 눈동자의 색깔을 분명 조금씩 잊어버리겠지.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걸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녀와 오랫동안 사랑했지만 밤마다 밤마다 내 이름을 부르는 낯선 목소리가 누구인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또다시 어둠. 잊어버렸다. 너의 목소리와 눈웃음을. 네가 어떤 말로 사랑을 속삭이며 나를 어떻게 달래었는지를. 너는 내게 어디가 아픈지 말해 달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너는 누군가의 이름을 읊으며 이 자들이 누구인지 알려 달라 말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바다는 바다였고, 항구는 항구였고, 비는 언제나 아팠으며 눈송이는 이상하게 그리웠을 뿐. 나는 언젠가 네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울었지만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다. 너의 웃음이 나의 이유였던 날 이상하게도 소멸을 생각했을 뿐이다. 세상은 내게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진정한 죽음은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다.

 

 나는 군인이었다. 내 상사의 이름은 트리스였다. 그녀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몰랐는데,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는 죽을 날을 기다리던 군인이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몰려오는 막연한 것들이 두려웠지만 그녀가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기에 계속 함께 했다.

 트리스는 엄하지만 다정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변화가 내 덕분이라고 말했다. 날카롭고 거칠었던 언행이 누그러졌다고. 전보다 자주 웃게 되었다고. 어쩌면 행복해보이기도 하다고.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 그녀가 필요한 사람들.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지 마. 찾지 마. 기억하지 마라. 그녀와 밤을 보낼 때마다 낯선 목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단단한 품과 낮은 목소리가 좋았을 뿐이다. 부드러운 쓰다듬과 뜨거운 눈물이. 너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속삭이는 말이 좋았을 뿐이다. 나를 사랑하나요? 그래, 너를 사랑해.

 그녀의 품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며 많은 것들이 기억났다. 하지만 곧 잊을 것이라는 사실도 기억이 났다. 나는 두 손을 피로 적시고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트리스에게 웃어주었다. 미안해. 잊은 척한 게 아니야. 이제야 기억이 났어. 하지만 또다시 잊어버리겠지. 나는 너무 오래 살았으니까. 너도 나를 잊어. 그게 좋을 거야. 나는 정말 행복했어. 그래서 나는 이게, 이것이, 이 마지막이 내가 바랬던 것이라 생각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트리스. 안녕. 안녕. 잘 있어.

 트리스는 네가 바랬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며 울었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그게 아니었을까? 나는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이게 마지막이길 마지막이 아니길 기도했다. 그러니 이제 됐어. 이제 됐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받은 사랑의 조각을 끌어모아 억겁의 시간을 홀로 보낼 것이다. 더 이상 이 이상 너희에게 사랑의 고통과 이별의 아픔과 죽음의 비참함을 안겨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 되었다.

 

 아 좋은 봄이었고 더운 여름이었고 짧은 가을이었으며 긴 겨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긴 적막이었다 봄은 우울의 계절이라고 하지 포기하기에는 아름다운 봄이 가장 좋다 여름까지 버티다 보면 가을을 보고 싶고 겨울눈 사이로 그들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다음 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계절과 계절 사이 계절이 다 끝난 사이 그러다 세월이 갔다 나는 너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또다시 죽는다 답장은 받지 못할 것을 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천 년의 삶 내 사랑들 내 사랑이여 이 곳엔 빛이 없다 더 두려운 건 어디로 향하다 멈추었는지 혹은 돌아가는 중인지 벼랑을 걷고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나는 이정표 삼을 이름을 잊어가고 있었고 이제야 묻고 싶었다 두렵지는 않았는지 내가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았는지 나를 용서해줄 예정이었는지 나를 많이 사랑했는지

 

 누군가가 말했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사랑과 누구보다 가까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보고 싶었어. 그들에게 못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조금 더 함께 하고 싶었고 마침내 같이 죽고 싶었어. 잊고 싶었고 잊고 싶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다음 세상과 다음 고독이 없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었어.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지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없어. 사랑이 뭐야? 대체 사랑이 뭔데? 수천 번 입에 올리고 단 몇 번 보답받은 그 사랑이 대체 무엇이기에?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 누군가가 대답했다.

 나 그들을 위해서라면 영원토록 지옥에서 살 수 있어. 나는 울었다.

 

 그만두고 싶어. █만두고 싶지 않아. 나는 지난 삶을 필사하듯 길을 걷는다. █고 싶어. 잊고 싶지 않아. 그 지옥의 영화관에서 어둠이 되든 인간이 다져놓은 콘크리트 바닥을 밟든 똑같은 짓이다. 걸어가면 계단. █단. 빛. 사랑. 너는 그렇게 죽어서 다시 █ 년을 살 거야? 나는 그럴 것이라 대답했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살지는 못했다.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영화를 보았고 책을 읽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노랗게 물들였다가 다시 잘랐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모든 걸 해내고 나면 신을 만날 줄 알았지. 해냄조차 못 해낼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야말로 ██한다고 ██한다고 █를 ██한다고

 

 이 미완성 지도. 세상의 비밀이 밝혀진지 천 년이 지났는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지? 내 이름이 무엇이었지? 어딘가의 ██한 약사님. 아픈 ██를 가진 사냥꾼. █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군인. 나는 눈을 떠 사랑을 말했고 눈을 감으며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 ██. ███. 더듬더듬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아름다운 운율에 나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노래가 이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믿는다.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로 연가를 부르고 싶다. 검은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싶다. 파란 하늘을 보며 구름이 되고 싶다.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그 눈동자에 빠져 죽고 싶었다. 이 어둠이 끝나면 평화로운 일상이 있는가. 추운 도시 아닌 꽃핀 바다가 있는가. 흙먼지와 핏자국 아닌 종전이 있는가. 안식이. 망각이. ██이 있는가. 아, ██. ██. ██.

 

 나는 어렵게도 ██을 배워 쉽게도 행복해졌다 그것으로 살 수 있고 그것으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노가 드디어 갈 곳을 찾았다 우리는 기도 대신 선언을 해야 한다 계시는 부질없이 오직 계기만이 필요하다 진리의 이름은 ██이다 그것을 잊지 마라 마침내 우리의 날이 오리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도 변하지 않았다 자 내 심장을 가져가 그리고 너희를 데려와 우리는 심장보다도 비싸고 시간보다도 긴 ██을 맹세하자 너희를 ██하지 않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으니까 언젠가 그들에게 말할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너희를 ██하는 만큼 아팠고 아픈 만큼 너희를 ██했다고 그래도 우리는 너를 ██해 네가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든지 갈 거야 ██ ██ ███ ████ ██ ███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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