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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3년. 그리스 이피로스.

 

 검은 눈동자가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푸른 들풀이 파도처럼 굽이치는 평원이었다. 새파란 올리브나무 몇 그루가 능선을 따라 서있었고, 발자국 따라 꺾인 들풀은 그 자체로 길이었다. 저 멀리 작은 교회가 보였다. 주황색 지붕의 벽돌집들이 듬성듬성 자리했다.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낮게 흘렀다. 쏴아─… 시선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울창한 나뭇잎과 들풀을 흐트러트렸다. 꽃 대신 나비 떼가 새하얗게 날아올랐다. 여름 직전의 냄새. 밤색 머리칼을 적시는 숨 막히는 푸르름. 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

 1세기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신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노래했다. 9세기의 자이나교 경전에는 세상은 창조되지 아니했다 적혀 있었다. 17세기의 천문학자는 천체의 작동 기제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구현했다 주장했고, 금세기의 어떤 논문은 태양의 핵융합 반응이 이토록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다 말했다. 하지만 자연은 자연이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다. 이 작은 시골 마을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어떤 말로도 더 설명할 것이 없다.

 꿈을 꾸었다. 익숙한 풍경. 낯선 지명들. 울고 있는 그림자들. 그렇게 멈추지 않는 꿈.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으로 와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에린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걸음마다 여린 풀잎들이 발목을 간지럽혔다. 투명한 바람이 도시의 먼지를 털어내듯 코트 깃을 흔들었다. 그녀는 가끔씩 눈을 감으며 한낮의 봄을 걷다 문득 버려진 교회를 보았다.

 주인도 신자도 모두 떠난 교회. 오래된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역사적 가치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가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고목들이 몸을 숙인 채 교회를 둘러싸고 있었고, 수많은 이파리들이 교회 뒤편의 작은 공동묘지를 숨기듯 가리고 있었다. 에린은 덩굴로 뒤덮인 교회의 벽을 쓸어보고 창문 안을 들여다보다 공동묘지로 들어갔다.

 햇빛과 나뭇잎 그림자가 물결치는 작은 묘지는 오래된 묘비들을 품고 있었다. 발목까지 자란 잔디와 무성한 덤불이 바람결 따라 흔들렸다.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인 묘비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손톱만한 들꽃들이 꽃을 피웠다. 죽은 자의 기록이 빼곡한 묘석도 커다란 십자가만 덩그러니 놓인 자리도 있었다. 태어난 날들. 죽은 날들. 그 수많은 이름들. 사람들이 많이도 떠나간 시골 마을의 작은 무덤가.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녹색 그림자가 얼굴을 적셨다. 에린은 손으로 햇빛을 가리다 우뚝 멈추었다. 묘비도 없는 빈자리에 작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흰 종이로 감싸인 푸른 꽃다발. 꽃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허리를 숙여보자 꽃다발 아래에 작은 책 한 권이 숨어 있었다. 에린은 제 입술을 매만지다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뻗어 책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일인데. 꽃덤불처럼 술렁거리는 마음이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속닥거렸다.

 얇은 시집이었다. 고전 시를 담은 시집. 에린은 엄지로 페이지를 넘겨보다 멈추었다. 몇 번이고 읽은 듯 유난히 낡은 페이지가 있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여름은 너무나 짧다. 그러나 너의 영원한 여름만은 시들지 않으리. 너의 아름다움도 시들지 않으리. 죽음도 네가 죽음의 그늘 속을 배회한다고 자랑할 수 없으리라. 바람이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들꽃 향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고요한 평원. 시를 읽는 소리와 초목이 춤을 추는 소리 뿐. 에린은 천천히 시집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올리브나무 가지와 이름 모를 들꽃을 꺾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손에 쥔 것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 꽃다발과 책을 가져가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게 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묘비 하나 없는지. 왜 버려진 땅에 덩그러니 묻혀 있는지. 하지만 꽃과 시를 바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린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이름 모를 사람의 평온을 빈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이피로스의 작은 마을. 아테네의 북서쪽에서 출발해 테살리아 지역을 넘으면 겨우 닿을 수 있는 곳. 나지막한 건물이 오밀조밀 들어서 있는 시골은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낮은 담 위에 화분들을 하나 둘 늘어놓았고, 어린 고양이들은 정원 테이블 위에서 봄의 햇빛을 즐겼다. 어디를 가나 올리브 나무가 푸르렀고, 작은 호숫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가 머무른 숙소는 호텔이란 팻말을 내건 작은 가정집이었다. 2층을 개조해 관광객들에게 빌려주는 곳이었는데, 주인은 요리 솜씨가 좋고 말이 많으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에린은 응접실에 쌓인 다과와 찻잔을 보았지만 티타임을 정중히 거절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싱글 침대 두 개. 책상과 낡은 옷장 하나. 문 옆에 딸린 화장실이 전부인 작은 방. 에린은 창문을 활짝 열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비구름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보름 전이다. 보스턴에서 그리스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보름 전이다. 온갖 아름다운 휴양지를 뿌리치고 연고도 없는 시골 마을로 온지 2주. 주민들은 낯선 관광객을 신기하게 여겼고 그리스어를 곧잘 하는 그녀를 더 신기하게 여겼다. 누군가는 공항도 관광 명소도 없는 마을에 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는데, 그녀는 논문을 쓰러 고즈넉한 곳을 찾아 왔다고 얼버무렸다. 꿈에서 본 곳을 찾아 왔어요. 누가 들으면 웃을 터였다.

 처음에는 흑백 영화 같았다. 세 명의 그림자가 함께 살고 있었다. 한 명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두 명은 휠체어를 밀며 언덕을 걸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한 명이 죽었다. 곧이어 다른 한 명이 울며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꿈은 색을 바꾸어 흑백에서 빛으로, 회색에서 녹빛으로 다가왔다. 낯선 장소. 알 수 없는 감정. 차가운 눈물. 어떤 약속들. 그렇게 반 년 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

 몸무게가 줄었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꿈속의 지명을 찾기 위해 온갖 지도를 뒤졌다. 차가운 서재에서 기절했다 깨어나면 다시 울고 있었고, 누군가가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죽을 것 같아서 휴가를 내고 비행기에 올랐다.

 자신은 없었다. 근거는 더 없었다. 마을을 구석구석 걸으며 착각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 년 전부터 변하지 않았다는 예배당이나 거대한 성벽은 어떤 느낌도 없었고, 언덕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면서는 그 모든 꿈이 환상임을 인정했다. 자연은 자연이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일 뿐.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대해 더 설명할 것이 없었다. 애초부터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저 이 꿈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될 것 같았다.

 에린은 따뜻한 물에 씻은 후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주인이 올려준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종이를 꺼내어 글자를 몇 자 쓰다 다시 책을 읽었고, 차를 다 마시고는 응접실로 내려가 손님용 간식을 몇 개 집어 올라왔다. 열 시쯤 되자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소리. 벌레 우는 소리. 2층에서 내려다본 골목은 아담했고 단출했고 가로등 불빛도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오랫동안 창가에 서 있다 이불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오늘은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 기도하면서.

 

 다음 날.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에린은 펼쳐놓은 캐리어를 살펴보다 지퍼를 잠근 후 시계를 보았다. 택시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얼마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캐리어를 들고 응접실로 내려와 숙소 주인이 차려준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직접 만든 치즈와 요거트. 부드러운 빵과 두꺼운 반죽에 튀겨낸 생선 요리. 낯선 냄새가 났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주인이 차를 내오며 어젯밤부터 비가 온다고 투덜거렸다. 여긴 비가 잘 안 오나요? 이렇게 길게 오지는 않지요.

 에린은 아쉬워하는 주인 부부에게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올랐다. 택시를 타고 옆 도시로 이동한 후 공항으로 향하는 픽업 차량을 타야 했다. 구두와 바지 밑단이 어느새 비로 젖었지만 빗줄기가 거세지는 않았다. 부슬부슬 내리다 창문을 톡톡 때렸고, 다시금 부드럽게 땅을 적셨다. 봄비 같이. 안개 같이. 창문을 살짝 열자 마을의 자랑이었던 푸른 들판이 짙은 녹색으로 젖어 있었다. 에린은 차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손목시계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잠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거친 비포장도로에 차가 두어 번 흔들렸다. 잠깐 차를 돌려주세요. 에린이 말했다.

 에린은 작은 교회 앞에서 내렸다. 10분 정도면 돌아올 겁니다. 운전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에린은 작은 우산을 쓴 채 검은 구두로 들풀을 밟으며 품안의 작은 시집을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감상에 젖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이 시골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탓이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에린은 우산을 톡톡 건드리는 빗방울과 후드득 떨어지는 나뭇잎을 맞으며 단출한 묘지로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아무것도 없는 빈자리에 섰다. 어제 보았던 꽃다발은 포장지가 다 젖어 볼품없었고, 작은 시집은 물을 잔뜩 머금어 펼쳐볼 수조차 없었다. 에린은 우산 손잡이를 쥔 채 가만히 서 있다 허리를 숙여 품안의 시집을 내려놓았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책을 적셨다. 셰익스피어는 아니지만, 좋은 시들이 많습니다. 에린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술렁거리는 마음. 비바람 따라 노래를 부르는 꽃덤불들. 영원토록 이 자리에 있을 것 같은 묘비들. 어제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 끝날 것이다. 에린은 몸을 돌렸다.

 아. 빗소리 때문에 듣지 못한 걸까? 커다란 키의 사람이 검은 우산을 쓴 채 몇 발자국 멀리 서있었다. 그 사람의 손에는 우산 손잡이가, 다른 손에는 하얀 종이에 감싸인 노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커다란 손이 잘게 떨렸다. 우산 아래에 드러난 턱으로 빗물 같은 것이 뚝뚝 흘렀다. 짧은 머리칼은 검은색 같기도 했고 그보다 푸른빛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안개꽃. 안개꽃. 이름 모를 꽃. 커다란 그림자가 검은 우산을 떨어트렸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였다. 나에게로 다가오는 두 손. 떨리는 몸. 꽃다발이 튀어오르며 품 안에서 흐트러졌다. 짓눌려진 꽃잎이, 비에 젖은 짙푸른 머리칼이, 나를 담은 새빨간 눈동자가, 눈물에 젖은 입술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쉴 새 없이…….

 너희를 사랑해. 하지만 너희는 계속 가야 해. 남은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게 당연했다. 자연은 자연이고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지만 이 곳은 내가 죽어 묻힌 곳. 나는 비명을 지르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나의 묘비를 밟으며 목이 아플 정도로 울었다. 그리고 꽃다발과 시와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또 맞추고,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택시를 보냈다. 픽업 차량도 비행기도 취소했다.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손을 잡고 빗속을 걸으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빗물은 차가웠다가 가끔 눈물처럼 흘렀고 입술처럼 뜨겁기도 했다. 트리스는 열 걸음마다 에린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다 그녀를 안아올려 빗속을 계속 걸었다. 왜 그래? 잃어버릴까봐. 이제 가지 않을 거야. 그래도 이대로 있어줘. 에린은 트리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리운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들은 트리스의 숙소로 돌아갔다. 마을 초입의 허름한 가정집이었다. 에린은 트리스의 손에 이끌려 대문을 넘으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지 않았다면, 그 묘비를 보지 않았다면, 언덕을 오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린은 계단을 오르는 트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몰래 눈물을 닦았다.

 옷도 머리도 흠뻑 젖어 따뜻한 물로 씻었다. 씻고 난 후에는 익숙한 체향이 깃든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말렸다. 트리스는 방 한구석의 작은 부엌에서 차를 끓여 주었다. 차분한 찻잎 향기가 몸을 녹였다. 그들은 차를 몇 모금 나누어 마시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창밖으로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맞닿은 살결. 떨리는 입술. 사라져버릴 것 같은 숨소리. 할 말이, 지난 날들이, 기억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기억이 났다.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는 완벽하게 떠올리지 못했다. 죽음 끝에 다시 태어난 건지. 새로운 세상에서 눈을 뜬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타인으로 살아온 탓일까. 어떻게 해야 너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이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너는 어떻게 찾아왔어? 에린이 물었다. 꿈을 꿨어. 트리스가 대답했다.

 꿈. 낮선 곳에 혼자 남아 매일같이 무덤을 지키는 꿈. 먼저 죽은 사람을 그리워했고 혼자 떠나간 자를 걱정했다. 결국 만나지 못한 사람을 매일 곱씹었고 그럼에도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버틸 수 없는 아픔에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사랑과 그리움 사이에서 오랫동안 길을 잃기도 하였다. 처음 보는 마을을 지도에서 찾아냈을 때는 소름이 돋았어. 이상하잖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그렇게나 선명하게 꿈꾸다니. 잠깐 미친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그만 울고 싶었어. 그래서 적은 월급과 휴가를 모아서 이 곳으로 왔지. 꿈속의 그 교회로. 그 자리에는 묘비 하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꽃을 바치고 싶었어. 만약 그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여기까지 오지 않았으면. 비가 온다고 오늘을 건너뛰었으면 어땠을까? 너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워. 트리스가 에린을 보았다. 에린은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무덤. 파 봤어?

 ……응.

 어땠어?

 아무것도 없었어.

 미친 사람 같았겠다.

 미친 사람이었지. 한밤중에 삽을 들고 혼자 울면서.

 그리고는 꽃을 바치고, 시를 읽어주고?

 그래. 한 달쯤 됐나. 셰익스피어는 네 취향이 아닐 텐데.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아니야. 에린이 고개를 털어내듯 저었다. 기뻤어. 그리고 트리스를 보며 웃었다. 넌 계속 그렇게 했겠지. 내 무덤을 가꾸고 내게 시를 읽어주고 꽃을 안겨 주었겠지. 너를 묻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언젠가 올 마지막을 상상하며 나를 보살펴 주었겠지. 트리스는 에린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우리에게 허락된 여름은 너무나 짧다. 그러나 너의 영원한 여름만은 시들지 않으리. 그들은 침대에 누워 사랑에 대한 기억을 더듬거리다 다시 울고 다시 웃으며 잠에 들었다.

 

 그들은 우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에린은 미국에서 생리학 교수로 일했고, 트리스는 브라질의 군경 특공대 소속이었다. 명문 사립대 보스턴 칼리지의 표어는 항상 최고를 위하여. 최악의 치안으로 유명한 브라질 경찰특수작전대대의 모토는 확실히 처리한다. 그들은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집 주소와 직장 주소를 교환했다. 에린은 연구실의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를 함께 적어 주었다. 트리스는 일주일에 한 번 직장의 전화기로 몰래 에린에게 연락했다. 그때마다 에린은 다행이라고, 다 꿈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것들이 많을까? 세상에는 왜 이렇게 위험이 많은 걸까? 사랑을 모를 때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듯이 하루하루를 살았는데. 알고 난 후에는 매일이 불안했고 매일이 다행스러웠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트리스는 사표를 냈고 퇴직일이 정해졌다고 에린에게 말했다. 에린은 다행이라고 기쁘게 대답하며 조만간 자신도 좋은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늦게 돌아온 트리스는 제 아파트 문 앞에 앉아 있는 에린을 보고 모자를 툭 떨어트렸다.

 언제 부터 있었어?

 세 시간 전부터.

 위험했어.

 위험한 곳에 살지 말았어야지.

 학교는?

 때려쳤어.

 트리스는 거실의 불을 켜고 에린을 보았다. 에린은 덥고 습한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셔츠 차림이었다. 이 곳의 사람들이 본다면 부자라 생각할 법한 옷차림. 에린은 넓지 않은 집을 대강 둘러보았다가 눈을 접어 웃었다. 다른 여자는 없나봐. 다행이네. 트리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에린을 끌어안았다.

 …위험했는데, 기뻐하면 안 되는데.

 기뻐?

 응.

 나도 그래.

 네가 내 집에 있다니.

 제법 깨끗하게 사는구나.

 네 집은 보나마나 지저분하겠지.

 메그보단 아닐걸. 그리고 집도 팔았어.

 ……두 달 사이에?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에린이 품안에서 트리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양부모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어. 대학에서도 피아노를 배우고 토론 대회에 나가고 하루에 네 시간씩 자며 공부를 했지. 생리학 박사 학위를 딴 후에는 곧바로 교수가 되었고, 몇 년 동안 학생 수백 명을 가르치며 좋은 말만 하려고 했어. 보스턴의 부촌. 사립고등학교. 학비 비싼 가톨릭 재단의 명문대. 이게 내 삶의 전부였는데 돌아가고 싶을까? 그게 정말 내 삶이었을까?

 트리스는 대답 없이 에린의 뺨을 쓸어보았다. 부드러운 살결. 흉터 하나 없는 피부. 평생을 책상 앞에서 보낸 사람의 낯빛. 검은 눈동자는 꿈보다 더 검고 깊었다.

 나는 되는 대로 살았다.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고 누구도 내게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때로는 인간의 사랑이나 신념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한때로 끝났다. 나의 사랑과 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 매일 생각했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몰라 매일 포기했었다. 그런데 너도 그랬다니. 사랑하기 그지없는 학문 속에서 살면서도 지리멸렬한 염증을 느꼈다니. 트리스는 에린을 두 팔 가득 끌어안으며 아니라고, 함께 있자고, 네가 나의 삶이라고 속삭였다.

 

 그들은 커다란 지도를 구입했다. 커다랗고 비싼 핸드폰도. 수십 개의 펜과 노트도. 그리고 간직한 기억과 떠오르는 기억들을 밤낮으로 적었다.

 당장 쓸 수 있는 것들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곧 노트 두 권을 채웠다. 떠오르는 지역. 지명. 동료의 이름들. 눈에 익은 가로수의 학명. 거리에 붙어 있었던 표지판. 사소한 기념일. 단골 식당의 간판. 이전 삶과 그 이전 삶의 이야기들.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돌아온 트리스는 거실 바닥에 앉아 일몰을 응시하는 에린을 보았다. 에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고 한 손에는 검은 글자로 빽빽한 노트가 쥐여져 있었다. 그녀는 노트를 들여다보고 바닥에 펼쳐놓은 커다란 지도를 더듬었다. 그리고 다시금 허리를 펴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작은 머리. 금빛에 잠긴 눈동자. 살짝 굽은 등과 느린 박동이 오르내리는 몸. 그녀는 울고 있었다. 삶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랑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 언제쯤 내게로 돌아오는가. 트리스는 그녀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트리스는 작은 등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실내에 어둠이 차오를 때에야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한 달. 열권의 노트가 가득 찼다. 지도 위에 수많은 지역이 표시되었다. 그들은 수도 없이 울고 먹은 것을 토하며 수십 알의 진통제를 찾았다. 트리스는 새벽에 깨어 미친 사람처럼 전화번호부를 뒤지다 없는 번호라는 메세지에 핸드폰을 집어던졌고, 에린은 노트를 찢고 또 찢으며 이럴 수는 없다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죽고. 놓치고. 또다시 슬퍼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삶들. 모든 걸 잊지도 못했고 모든 게 기억나지도 않았다. 듬성듬성한 기억이 떠밀려올수록 파도에 잠겨 죽을 것 같았다.

 그들은 지도를 더듬으며 가능성이 있는 곳을 추리려 애썼다. 미국의 대도시. 볼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중동의 작은 나라. 이제는 반으로 갈라진 중부 유럽의 국가. 사하라 사막. 파푸아뉴기니. 극야의 땅. 그들은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모르는 삶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다. 시간을 넘어 다시 태어난 것도 아닌 새로운 세계요, 백 번이 넘는 삶 속에서 서로를 만난 것은 다만 몇 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궤적을 그리는 별이다. 몇 번을 살아야 옷자락을 붙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적이구나. 트리스가 말했다.

 기적이지. 에린이 대답했다.

 그 기적이 두번 더 일어날 수 있을까? 트리스가 물었다.

 미안. 모르겠어. 에린이 트리스를 보았다. 그들은 눈물을 닦으며 수십 권의 지도책과 전화번호부와 수백 통의 우편물을 뒤졌다.

 

 어느 밤. 에린은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협탁에 놓아둔 물병과 유리잔이 깨지며 큰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트리스가 불을 켜려 몸을 일으키자 에린이 트리스를 붙잡았다. 그녀는 힘이 잔뜩 들어간 손으로 덜덜 떨고 있었다.

 트리스는 블라인드 틈 사이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해 에린을 살폈다. 창백한 안색과 잘게 떨리는 입술. 장마철 밤하늘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눈동자. 에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떨어져버릴 것 같은 손가락으로 트리스를 더듬다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아픈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리다 두 팔 안으로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기억났어.

 진정해. 진정하고 천천히. 트리스가 커다란 손으로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우리 같은 꿈을 꿨잖아. 그게 처음이 아니었어. 그게 마지막도 아니었어.

 숨 쉬자. 좀 더 기대.

 알렉스는 처음부터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 나는 걔를 기억하지도 못했는데. 약국에 들어와서는 내 앞에서 펑펑 울며 보고 싶었다고 말했어. 그리고 네가 누군지 메그가 누구인지 말해줬었어.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해서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걔가 죽는 걸 봤어. 내 품 안에서, 예쁘게 웃으면서, 다음엔 이름을 불러도 놀라지 말아달라고 말했어. 나는 겨우 겨우 알겠다고 대답했었는데 어떻게, 아, 어떻게 이걸 잊고 살았지?

 에린은 거의 비명을 질렀다. 트리스는 에린을 끌어안으며 네 탓이 아니라고 속삭였다. 에린은 아니라고, 내 탓이라고 고개를 도리질쳤다. 흔들리는 몸. 떨리는 눈동자.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내 잘못이야. 에린이 말했다.

 뉴욕. 그래, 뉴욕. 알렉스와 같이 살았을 때가 있었어. 걔는 너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 너. 그리고 메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걔는 건강했고 상냥했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버릇처럼 말했는데. 밤마다 너희 이름을 부르며 울다가 깨어나서는 그게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말했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에린은 절망스러운 눈으로 트리스를 보았다. 언어가 되지 못하는 것들을 앓는 입술. 이마를 뒤덮은 머리칼. 어둠 속의 검은 눈. 생기가 사라진 자리. 트리스는 더듬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는 기억을 잃고 있어. 에린이 토해내듯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 애가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는 뜻이야. 에린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제정신으로. 수많은 기억들을 지고. 미치도록 긴 시간 동안 계속 우리를 찾았다는 뜻이야. 괴로웠겠지. 괴로워서 점점 잊어갔겠지. 수백 번의 시간을 넘으며 우리에게 기억을 나누어 주었겠지.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하지만 에린. 그러면 알렉스는. 트리스가 에린의 팔을 꽉 쥐었다.

 어떡해? 에린이 고개를 들어 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너무 불쌍해서 죽을 것 같아.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로 이불이 젖었다. 손발은 차가웠고 눈시울은 뜨거웠다. 호흡은 바람처럼 흩어졌고 울음소리만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어둠. 연민. 정적. 비참함. 트리스는 참담해졌다. 해가 떠오르기까지는 한참이 남아 있었다.

 

 에린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잠을 자지도 책상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머릿속의 모든 것을 서술할 것처럼 글을 썼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왜 더 기억이 나지 않냐고 소리지르기도 했다. 트리스는 그녀를 붙잡아 달래고 따뜻한 물에 씻기고 억지로 음식을 먹이면서도 그녀에게 그만 울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살았던 거야 대체 어떻게 버텼던 거야 당장이라도 쓰러져 울고 싶었고 괴로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너의 삶을 조금 곱씹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 이 아픔이 네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너를 기억하지 못했는지 왜 매번 너를 기다리기만 했는지 너의 고독과 슬픔은 어디까지 닿았는지 내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는지 삶은 내게 너무 많은 기회를 주었고 너는 내게 너무 많은 사랑을 주었다 언젠가 너는 죽고 싶은 것처럼 굴었고 나에게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네가 나의 품에서 마지막 병상에서 웃고 있을 때 나는 찰나의 바늘 위에 서있었을 뿐이다 그 찬란한 웃음 더없이 아름다운 웃음들 나는 그저 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너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거야? 대체 왜 지옥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너는 대답 없이 하염없이 나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죽고 싶었지만 너를 곱씹기 바빠 죽을 시간이 없었다.

 

 한밤중. 트리스는 에린을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깬 에린은 어둠 속을 둘러보다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기력함을 습관으로 삼은 듯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트리스는 얼굴을 숨기고 고개를 떨어트리는 에린을 이불로 감싸 그대로 안아들었다. 그리고 어둠에 잠긴 실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 감아. 뜨지 마. 괜찮아. 트리스는 그대로 에린의 신발을 한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갔다.

 오래된 SUV가 새벽의 도로를 달렸다. 트리스는 차를 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린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창밖을 보는 척 하며 눈을 감추었다. 멀리 서 있는 가로등. 어두운 차내를 비추었다 사라지는 불빛. 검은 손처럼 늘어진 가로수 이파리들. 뒷좌석의 가방과 캐리어가 정차할 때마다 덜컹거렸다. 어디로 가는 거야? 에린이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차가 멈추었다. 멀리 커다란 건물이 서있었다. 굴뚝같은 것들이 우뚝 솟은 건축물은 거대한 공단 같아 보였다. 수많은 차들이 들어오고 나오며 밤낮이 없는 것처럼 길을 밝혔고, 육중한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서 천천히 날아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에린은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운 트리스를 바라보았다. 고른 호흡. 곧은 시선. 가로등 불빛에 젖은 옆모습. 단단하고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형체. 빛과 어둠 단 두 가지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그림자. 에린은 트리스를 바라보다가,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넌 준비를 끝냈구나. 에린이 말했다.

 그래. 끝냈어. 트리스가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무서운데.

 뭐가 무서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말해야지.

 그래도 될까?

 왜 안돼?

 걔는 자기가 아팠는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해야 해.

 하지만.

 그래도 찾아야 하고.

 걔가 그걸 바랄까? 이제야 모든 걸 잊었을 텐데. 에린이 어둠 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트리스. 난 무서워. 기억이 없는 그 애에게 사과를 비는 것도. 걔가 날 용서할 것도. 결국 거기에 안심하고 말 것도 다 무서워. 걔가 겪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앞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텐데. 또다시 그 애를 혼자 두고 말 텐데. 안 그래? 생각하면 할수록 지옥이고 악몽이야. 그런데 어떻게 찾아가? 어떻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겠어?

 작은 입술에 피가 맺혔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떨렸다. 가슴팍 위를 더듬거리며 붙잡을 것을 찾는 손. 아픔을 새길 살결을 찾는 손톱. 울지 않았으나 더 흘릴 눈물이 없을 뿐이었다. 트리스는 조용히 에린을 보았다. 그리고 에린, 하며 이름을 불렀다. 에린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 잠긴 그림자는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알렉스는 네게 기억해달라고 했었지. 트리스가 말했다.

 에린은 힘없이 끄덕였다.

 내겐 잊으라고 말했어.

 뭐,

 행복했다고, 사랑받아 좋았다고, 여태껏 이런 마지막을 바랬었다고 말했어. 그리고 안녕이라 인사했어.

 안녕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난 잊지 않았지.

 하지만.

 나는 결국 너희를 사랑하고 말 거야.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도 생각을 많이 했어. 트리스가 말했다. 이건 답이 없는 이야기야. 답을 구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야. 하지만 에린, 난 여태껏 알렉스에게 이기적으로 굴었어. 기억하지도 못했고 잠겨 죽을 만큼 사랑을 주지도 못했고 마지막 인사를 받아들이지도 못했어. 그래서 조금 더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어. 그 애의 마지막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 작은 행복에 만족했던 그 애가 안타깝다고 생각하니까. 난 잊지 못했고 잊을 수도 없고 그러지도 않을 거야. 그래서 결국 그때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만들 거야. 이해했어?

 ……응.

 이번 삶이 실패하면 다음에. 다음번에 절망하면 그 다음 번에는. 쉽게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몰라.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알렉스를 이해하게 되겠지. 우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하니까. 이것도 이해했어?

 응.

 나는 계속 알렉스를 찾을 거야. 너를. 메그를. 내 사랑을 찾아 떠돌고 말 거야.

 응.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응…….

 가자. 우리, 이 생에 줄 수 있는 행복은 전부 다 주러 가자.

 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해가 천천히 떠올랐다. 새벽. 새벽.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혀끝에 작은 눈물이 걸렸다. 뜨거운 눈꺼풀을 입술로 식혀주었다. 가느다란 몸이 더 가느다란 뼈를 품고 떠는 것을 달랬고, 너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한다고 속삭이며 새처럼 작은 끄덕임을 느꼈다. 내 사람. 내 사랑들. 천 번의 비가 내려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다. 산은 바위를 포기하고 강물은 색을 바꾸며 바다는 새로운 생명을 품는데,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라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다음 비가 내리기 전에 너를 찾으리. 다음 별이 떨어지기 전에 너를 찾으리. 천 년을 살고도 다 받지 못한 사랑을 전부 다 주러 가야 한다. 모자란 행복을 손에 쥐고서도 더없이 아름답게 웃던 너를 우리의 품으로 파묻어 재워야 한다. 만 년을 헤매다 모든 것을 잊는다 할지라도 다음의 내가, 그 다음의 너희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볼리비아. 페루. 멕시코 노갈레스. 시우다드 후아레즈. 미국의 마이애미. 뉴욕. 디트로이트. 서쪽 끝의 오클랜드. 언젠가 모로코에서 살았다는 말이 기억나 아프리카로 갔다. 라바트와 탕헤르를 둘러본 후에는 스페인의 알헤라시스로 건너갔고, 남유럽 국가들을 넘어 체코슬로바키아에 발을 디뎠다.

 백 개의 바다. 천 개의 하늘. 그들은 슬퍼하지 않으려 애썼다. 무기력에 먹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발이 부르틀 때까지 걸은 밤에는 쓰러지듯 잠들었고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않았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도 쉽게 감상을 내뱉지 않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봄날에도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가끔 잠에 들기 전 까마득한 세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는데, 옆 사람 몰래 그 몸을 끌어안고 눈물을 닦는 날도 있었다.

 그들은 지역의 유지나 오래 산 주민들에게 제 전화번호와 얼마의 돈을 건넸다. 전화선이 깔리지 않은 지역에서는 보스턴으로 우편을 보내달라고 말했다. 나이 지긋한 노인과 그 가족들에게 정중히 부탁했고, 때로는 거리의 소매치기를 붙잡아 협박을 하기도 했다. 서로의 기억을 짜맞추며 가보았던 곳을 또 가서는 달라진 기억과 달라진 도시를 더듬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도 하였다.

 미안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어요. 미안합니다. 지금 장난쳐? 돈 때문에 이 지랄이야? 나는 목숨을 걸었어. 너도 목숨을 걸었어야지. 사람을 착각하는 일이 잦았다. 잘못된 주소는 당연한 거였다. 거짓 연락을 받으며 수없이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렇게 4년. 5년. 6년. 우리는 오랫동안 떠돌다 문득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은 사랑이다. 모든 것은 스쳐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 길고 긴 터널은 빛조차 없는데. 기댈 사람 한 명 없이 길을 걸었을 너는 얼마나 괴로웠을지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로테르담에서 지낸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들은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도개교. 니우어마스 강. 미들랜드. 화학 공장 단지. 지저분한 골목과 질 나쁜 놈들이 어슬렁거리는 터미널 부근. 트리스는 가끔 놈들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고 에린은 알렉스를 죽인 놈들이 아니라 했지만 그 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차가운 공터에서 비를 맞으며 홀로 죽어간 너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죽이고 싶어 마음이 끓었다.

 에린.

 응.

 레닌그라드가 어디야?

 그들은 밤의 운하를 걷고 있었다. 열두 시. 한시 쯤. 수로에 정박된 작은 보트가 물결 따라 몸을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은 좁은 도로 위를 느릿느릿 달리다 멀리 사라졌다. 흐린 가로등과 가로수 잎사귀가 검은 수면에 긴 빛그림자를 남겼다. 강물은 검었고, 멀리 풍차가 돌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구름결 따라 들렸다. 레닌그라드? 에린이 되물었다. 트리스는 가로등 옆에 멈추어 서서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았다. 흐린 기억을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듯 눈꺼풀을 떨면서. 에린은 트리스 몇 걸음 앞에 서있었다. 그들 곁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도 수로가 예뻤대. 추웠지만 반짝거렸대. 자주 산책을 했다던데.

 알렉스가?

 그래. 그 곳에서, 그래……. 트리스가 중얼거렸다. 메그를 만났다고 했었어.

 에린이 트리스를 돌아보았다. 트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먼 곳의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높은 곳에서 붉은 눈동자를 비추었다. 시계탑의 대바늘이 한 시를 톡, 가리켰다. 러시아인가? 트리스가 물었다. 에린이 끄덕였다.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는 옛 이름이야.

 언제쯤?

 소비에트 시절.

 소비에트라. 낮은 목소리가 낡은 국호를 중얼거렸다. 어떻게 할까. 트리스는 에린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며 물었다. 에린은 검은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가 트리스를 바라보았다. 가볼 곳은 다 가봤지. 에린이 말했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그들에게 하늘을 보게 했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로테르담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는 기차. 암스테르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비행기. 자. 가볼 곳은 다 가보았다. 그러니 이제는 막연한 희망에 기대를 걸 수밖에. 그들은 텅 빈 객실을 뒤로 하고 택시를 잡아타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떤 추억이 있더라도 너희가 없으면 의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곳이라면 이제 염증이 나는데. 소비에트의 그늘을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도시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지나치게 넓었다. 그들은 낡은 숙소에서 러시아어로 뒤덮인 지도를 살피며 들러볼 곳들을 꼽아보았다. 그리고 열여덟 개의 지역에 모두 빠짐없이 붉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푸른 운하와 금빛 건물들. 황금 날개를 단 사자상들. 낮은 아파트들과 높고 오래된 유적이 이웃처럼 자리했다. 낡은 차들이 도로 위를 탈탈 굴러다녔다. 빈틈없이 차가 들어선 사거리는 경적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들이 찾아왔을 때는 마침 밤이 긴 시기였고, 운하는 얼어붙었으며 하늘은 어둡게 푸르렀다. 노란 불빛이 흔들리는 할로겐 등. 다 무너져가는 아파트와 고급스러운 저택. 낮은 다리와 운하를 유영하는 자그만 배들. 어두운 낯빛의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뱉었다. 누군가는 가난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보다 더 가난했다.

 산이 아름다웠다는 말이 생각나 매일같이 산책길을 걸었다. 사냥을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도서관에서 레닌그라드의 사냥 역사에 대해 찾아보았다. 페트로그라츠키. 칼리닌스키. 아름다운 겨울 궁전. 지긋지긋하게 넓은 열여덟 개의 구. 그들은 모든 곳을 빠짐없이 걸었고 뒷골목의 아이들에게 큰돈을 내걸었다. 이 사람들은 왜 찾는데요?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널 죽여야 한다. 그들은 가끔 부자처럼 돈을 썼고 때때로 가난한 노동자처럼 술에 취해 걸었다.

 알고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간들 만나지 못할 것임을. 어디를 가더라도 그림자조차 밟지 못할 것임을. 흐린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지도의 귀퉁이조차 그리지 못함을.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사람들 속에서 바늘 두 개를 찾아내는 일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 세상을 누빈다고 해서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수억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옷깃을 붙잡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기적의 영역이다. 세상을 둘로 쪼개어 들여다본다고 할지라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고작해야 몸뚱이 두 개와 네 개의 발로 기적을 실현시키려 하고 있었다.

 가끔 참을 수 없이 비참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목이 아플 때까지 울며 잠에 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을 꼭 챙겨 먹고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모두 새로운 얼굴들이었고, 저마다의 표정을 품고 있었다. 때로는 구름이 많았고 때로는 햇빛이 밝기도 했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갈색 머리카락의 사람을 붙잡았다가 놓아주었다. 비슷한 키의 가진 사람들을 들여다보았다. 만 번을 덧그린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다 멈추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서로를 사랑했는지조차 몰랐지만 그렇게 했는데, 그러다보면 가끔은 그런 행동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과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 도시의 모든 얼굴을 들여다볼 거야. 그게 허락되기만 한다면. 시간을 멈추고 온 세상을 걸어 모든 생명들 사이에서 너희를 찾아낼 거야. 그것만으로도 수백 년이 걸릴 것 같은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깔끔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카페는 빈자리가 많았다. 점원은 어려 보였고, 카운터 너머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패션 잡지를 읽고 있었다. 그들은 따뜻한 차와 커피 한 잔을 시키고 구석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차의 수색이 흐렸다. 싸구려 티백을 시간도 온도도 지키지 않고 아무렇게나 우려낸 백 루블짜리 홍차. 트리스는 별말 없이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액체 표면에 떠올랐다가 변해 가는 얼굴이 어두웠고 지쳐 있었다. 형태를 잃어가는 사물들. 그와 더불어 사라지는 얼굴들. 트리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에린을 보았다. 지쳐 보여. 트리스가 말했다.

 괜찮아. 에린이 대답했다. 괜찮아야지.

 트리스는 대답 없이 카페 구석을 둘러보았다. 먼지 쌓인 조잡한 장식물들이 여기 저기 늘어져 있었다. 신문을 펼친 채 혼자 중얼거리는 남자와 담뱃불을 붙이다 재떨이를 가지러 일어나는 여자. 누군가는 일기를 쓰다 혼자 울었고 다른 누군가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 말이 없었다. 트리스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에린을 보았다. 군인일 때가 있었는데. 트리스가 말했다.

 1차 대전쯤이었나. 잘 기억나지는 않아.

 응.

 사람을 많이 죽였어. 동료도 많이 죽었고. 트리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죄책감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어. 슬픔보다는 분노를 가져야 했지. 그렇게 전쟁이 길어질수록 점점 무감각해졌는데, 아마 그 때의 인간들은 다 그랬을 거야. 공군들은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고 저격수들은 각자의 기록에 열을 올렸지.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전쟁이 우리를 망가트리고 있었어.

 그래. 그랬지.

 끝은 보이지 않았고. 내일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긴장과 분노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그때의 난 죽고 싶어 했었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했고, 동시에 내가 죽을 완벽한 자리를 찾고 있었어. 거의 미쳐 있었지. 전쟁이 끝나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어.

 ……응.

 그 때 알렉스를 만났어.

 에린이 고개를 들어 트리스를 보았다. 트리스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꺼풀과 짧고 짙은 속눈썹. 희미하게 곡선을 그린 입매. 아직도 사랑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이 웃어버리는 사람의 얼굴. 에린은 검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 애가 죽은 후로 어떻게 지냈는지는 기억이 안나. 하지만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애와 보냈던 일 년이 너무 아름다워서……그 기억을 평생 곱씹으며 버텼을 것 같아.

 일 년이었구나.

 고작 일 년.

 행복했어?

 그래. 지옥에서 살면서도 행복했어.

 트리스가 에린을 보았다. 트리스는 흔들림 없이 웃고 있었다. 일 년의 행복으로 평생을 버틴 사람. 찰나의 기억으로 천 년을 떠돈 사랑. 걸음을 헛딛을 때마다 나와 너를 생각한다. 두 발이 피범벅이 되어도 열 개의 발가락이 모두 꺾여도 네가 걸어온 길에 비하지는 못하리. 그러므로 우리는 너의 기억을 돌려주러 가야 한다. 너에게 못다한 사랑을 말하기 위하여. 작별의 인사를 천 배의 행복으로 안겨주기 위하여 계속 걸어야 한다. 트리스가 에린의 손을 쥐었다. 에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눈은 죽어 있지 않았다.

 

 해가 짧은 계절. 오후 다섯 시. 밤이 되기 전의 하늘은 어둡게 푸르다. 길과 길 사이의 운하 위로 구름이 헤엄쳤다.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경적을 울려대었다. 구름은 연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거리에는 샛노란 등이 하나 둘 켜졌다. 차가운 공기와 차가운 빛. 아름다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지막 모습. 가로등이 수면을 따라 일렁거리는데, 도시는 차가워 보였다.

 그들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멀리 떠나는 기차표를 두 장 끊은 후 사람들의 파도에 떠밀리듯 계단을 내려갔다. 밖으로 드러난 기차 플랫폼에는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어둠이 빛을 먹으며 다가와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졌고, 낡은 기차가 멀리서 도착했다. 돌이 잔뜩 깔린 기찻길. 지붕의 철근에 매달린 낡은 조명 몇 개.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적갈색의 오래된 노면전차는 냉전 시대의 유물 같았지만 낡은 몸으로도 승객들을 잔뜩 품고 있었다.

 기차가 출발 알림을 울렸다. 역무원이 사람들을 밀어내며 다음 기차를 기다리라고 소리 질렀다. 몇몇은 표를 쥔 채 역무원에게 항의를 했고, 다른 몇몇은 가방을 깔고 앉아 하품을 했다. 시끄러운 목소리들. 거친 언사. 구름 떼 같은 사람들. 트리스는 에린의 손을 쥔 채 가라앉은 눈으로 역을 둘러보았다가, 낡은 기차의 더러운 유리창을 보았다. 쿵.

 트리스가 에린의 손을 꽈악 쥐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가 한 곳에 못 박힌 시선을 따라갔다. 그리고 지도를 떨어트렸다. 흐리고, 지저분하고, 손자국이 잔뜩 나 있는 창문. 그 창문 너머로 기억보다 그림보다 사진보다 선명한 푸른 눈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역무원이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곧 기차가 떠날 것 같았다. 메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그리고 기차의 좁은 복도를 달렸다. 누군가는 뒤로 넘어졌고, 다른 누군가는 메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멈추어 서있다 발을 떼었다. 그리고 플랫폼을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던 사람들을 미친 듯이 밀치며, 더 빨리 이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무거운 다리를 채찍질하면서. 아 눈시울이 따가웠다 귀가 뜨거웠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직은 울 때가 아니다 유리창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몸이 휘청거렸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이 날렸다 검붉은 기차의 녹슨 차체가 흔들렸다 더러운 바퀴가 천천히 움직였다 청각이 툭툭 끊겼고 오직 시선만을 부지했다 창문, 창문, 저 너머의 창백하고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나는 발을 헛디뎠다가 균형을 잡고 에린의 손을 이끌었다 나는 들끓고 있었다 모두 다 포기하고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어느 것도 원망하지 않고 의연한 척을 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느 것도 용서하지 못한 마음으로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속절없이 퍼붓는 슬픔 속에서 너를 너를 기다렸다 기차와 기차 사이 기차와 역 사이 너와 나의 사이 우리의 세월 사이 나의 호흡과 너의 입술 사이 저 떨리는 두 손이 울고 있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 안의 초라한 내 모습이 마침내 마침내

 메그가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벌려진 네 개의 팔 사이로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기차가 출발했다 추웠고 입김이 나왔고 작은 몸은 그보다 더 차가웠고 눈물은 데일 듯이 뜨거웠다 하늘이 어두웠고 주황색 조명이 눈물에 흐려졌고 구름은 아직 어둠에 잠기지 않았다 아 너의 눈동자 이 거친 머리카락 안으면 부서질 것 같은 몸 나의 영혼 나의 빛 나의 기적, 우리는 메그를 끌어안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둠. 딱딱한 매트리스. 사각거리는 싸구려 이불. 숨결 따라 흔들리는 촛불 하나. 호텔 복도를 걷는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 길고 긴 웃음소리. 그리고 다시 적막. 작디작은 불빛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거대하고. 초라하고. 하염없이 몸을 떠는 그림자. 지붕 위로 눈이 쌓였다. 새벽이 길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적을 마주하고서도 웃지 못하는 자들의 호흡이 흐느낌 같았다.

 그 애는 열여섯이었어. 곧은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밤이었고, 이마에서 피를 잔뜩 흘렸고, 덜덜 떨고 있었어. 그 애는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고, 사랑하는 자들이 세상에 더 있다고, 그들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어. 나는 미안하게도 믿지 못했고 그 애는 괜찮다고 말했어. 그리고는 내 품에서 죽었어. 다음에도 내 이름을 부르러 오겠다고 했는데, 나는 공동묘지에 찾아갈 때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

 가느다란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만났어. 레닌그라드에서. 대전이 물러난 초라한 도시에서. 걔는 정말 다정했고 상냥했고 사랑스러웠어. 나는 걔를 꽤 좋아했는데, 걔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어. 밤마다 혼자 울기도 했고 자기가 지옥에서 왔다고도 말했지. 그래, 지옥.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가 돼. 걔는 나를 만나러 네 번의 삶을 넘어 왔다고 말했어.

 네 번. 커다란 그림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 네 번. 우리는 여행을 했어. 가난했지만 돈을 열심히 모아서 걔가 말하는 영혼의 반쪽을 찾으러 떠났어. 그때의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냥 걔가 행복하길 바랬을 뿐이야. 걔가 계속 웃기만 한다면 평생이든 떠돌 수 있었지. 그러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죽었어. 걔는 따라 죽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는 다음에 또 데리러 와달라고 말했어. 내가 잘못한 건가?

 아니야. 커다란 그림자가 말했다.

 모르겠어. 곧은 그림자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군인이었어. 커다란 그림자가 몸을 낮추었다. 나는 그녀를 보는 순간 대부분의 일이 기억났어.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나는 재회만으로도 기뻤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나를 밀어내지 못했고, 언제나처럼 살벌하게 전쟁터를 누비면서도 내게는 예쁘게 웃어줬어.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그녀 덕분에 겨우 살아있을 수 있었지. 나는 얼른 전쟁이 끝나기만을 빌었어. 그녀와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우리는 군인이었고, 나는 그녀를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상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죽었어. 죽기 직전에서야 많은 것들이 기억난다고, 행복했다고, 자신을 잊으라고 말했어.

 잊으라고.

 그만둘 생각이었는지도.

 그만둘 수는 있는 건가.

 모든 기억을 버리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겠지.

 그게 가능하다면 왜 진작 그러지 않았는데?

 사랑하니까.

 그놈의 사랑. 나는 언젠가 녀석에게 같이 지옥으로 가자고 말했어. 걔는 이미 지옥에서 왔는데 그걸 모르고, 다 그만두라고, 우리는 서로 지켜주지 못할 거라고 지랄을 했지. 어떡해? 어떡하지? 미안해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해?

 울지 마.

 걘 대체 얼마나 이 짓을 반복한 거야?

 모든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흐느낌에 촛불이 흔들렸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이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두 사람은 몸을 웅크린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백 번의 세계. 천 년의 시간. 그 가느다란 그림자 위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이 기어오르고 있다. 이 새벽을 덧없는 지난 삶을 과거의 자신을 미친 듯이 원망하고 있었다.

 트리스가 커튼을 걷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푸른 빛의 새벽이 비쳐들어왔다. 눈구름이 물러간 하늘. 하나 둘 가로등이 꺼지는 거리. 침대 두 개를 나란히 붙인 낡은 호텔방. 메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리며 토할 것 같다고 눈물이 계속 난다고 중얼거렸다. 에린이 메그를 쓰다듬었다. 원래 그런 거야. 죽고 싶고 울고 싶고 살아있을 수 없을 것 같을 거야. 미안하고 죄스럽고 또 미안해서 시작조차 하고 싶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걸 명심해. 그 아이가 넘겨준 기억이 우리를 이끌었다는 것을. 그걸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 메그는 몸을 웅크린 채 겨우 끄덕거렸다. 속눈썹과 옷자락과 이불에, 어깨와 품 안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트리스는 방의 구석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캐리어와 묵직한 가방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트리스는 그 사이에서 책 한권 크기로 접힌 두꺼운 지도를 꺼내었다. 양 팔을 뻗어도 다 펼칠 수 없는 지도. 끝이 너절했고 수많은 메모가 붙어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과 핏자국이 스며들어 있었다.

 트리스는 그 지도를 하얀 벽 위에 지도를 붙였다. 그리고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지도를 응시했다. 메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젖은 눈으로 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형체. 곧은 뒷모습.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등. 트리스는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와 메그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덜덜 떠는 손 위에 펜 하나를 쥐어주었다.

 여기에 너의 이야기를 더해줘. 트리스가 말했다. 메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검은 그림자. 아직 물러나지 않은 어둠. 색이 다른 두 쌍의 눈동자. 눈물과 핏자국이 기록되어 있는 거대한 지도. 메그는, 메그는 홀린 듯 일어나 맨발로 바닥을 딛고 펜의 뚜껑을 열었다. 걸음은 휘청거렸고 눈물은 여전히 옷자락을 적셨지만 그럼에도. 비참해 할 시간이 없었다.

 

 

 

 

1장. 빈 페이지 가운데에 199X년 5월 20일이라는 날짜가 쓰여 있다.

2장. 세계지도에 여러 국가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4장. 201X년 볼리비아 산타크루즈 몬테로

Calle Warnes 2XX, Montero, Bolivia

+59XX261X36X

 

6장. 콜롬비아 안티오키아 메데인

9장. 멕시코 소노라 에르모시요

18장.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

 

27장. 199X년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 오즈번

1XXXX Gratiot Ave, Detroit, MI 4XXXX

6개월 체류

102번 국도를 따라 검은 선이 그려져 있다.

국도 아래 지역에 여러 가게들이 표시되어 있다.

알렉스가 일했던 음식점 자리에는 중고차 대리점이 있었다. 7년 전부터 대리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부동산에 확인해보니 그 전에는 작은 옷가게였고, 노인이 혼자 운영하는 식당 같은 건 이 거리에 없다고 했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 자리에는 대형 상가가 들어와 있다. 중고차 대리점과 맞은편의 음식점에 번호를 남겼다.

 연락 왔어?

 아니.

 

34장. 찢어져 있다.

41장. 198X년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리치몬드

1XXX 1Xth St, Oakland, CA 9XXX

흑백으로 된 지도 위에 전화번호가 몇 개 적혀 있다.

 

57장. 191X년 프랑스 그랑테스트 레지옹

두오몽 요새

5XXXX Douaumont

현재는 기념관과 납골당이 있다. 요새와 포탄 자국들. 그 때의 희생은 기념관 따위로 추모될 것이 아니다.

 이건 왜 그어둔 거야?

 가볼 필요 없다는 뜻이야.

 가 봤구나.

 그렇지.

 

66장. 193X년 영국 런던

72장. 찢어져 있다.

 

77장. 194X년 슬로바키아 트렌친

Rastislavova XXXX/X, 9XX 0X Trenčín-Zlatovce

익숙한 이름의 음식점이 있었다. 바흐 강 옆.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이후로도 3대째 영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은 사진으로도 없었다.

 트렌친. 나도 여기 가봤어.

 언제?

 대전 때, 연합군으로.

 

86장. 페이지 대부분이 그리스의 지도가 차지하고 있다.

코자니 지역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87장. 198X년 그리스 이피루스 요아니나

88장. 198X년 그리스 이피루스 자고리아

EO Kalampakas Grevenon, Grevena 5XX XX Greece

+30X4X208X89X

8개월 체류

붉은 눈의 사람을 수소문 끝에 찾았다. 소득 없음.

 

109장. 201X년 튀니지 가베스

Avenue Habib Bourguiba, Gabes XXXX Tunisia

P16-C206 국도를 따라 파란 선이 그려져 있다.

110장. 201X년 튀니지 두즈

1X, avenue Taieb Mhirie Douz, XXX Tunisia

+21XX54X03X8

 

140장. 201X년 알제리 알제

141장. 찢어져 있다.

 

173장. 198X년? 모로코 라바트

3 impasse Nakhla Rue Bouqroune Rabat 1XXX

지도 위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다.

174장. 모로코 탕헤르

Ave Mohammed XX Tangier

입항지: 스페인 타리파, N-340 알헤시라스

2개월 체류 - 9개월 후 재방문

 여긴 왜?

 사기를 친 놈이 있었거든. 가봤더니 갈색 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인 새끼가 있었지.

 죽였어?

 그럼. 둘 다 죽였어.

 잘 했어.

 

190장. 찢어져 있다.

194장. 로테르담의 사진이 붙여져 있다.

201장. 199X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Coolsingel 4X, 3XXX AD 시청

Laan op Zuid 4X, 3XXX DB 세관처

Mevlanaplein 1, 3XXX EP 모스크

갱 소굴 같은 건 없었다. 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207장.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기차표가 끼워져 있다.

 여긴 있을 것 같았는데.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어.

 살인 했어?

 아니. 하지 않았어.

 그래.

 

 수십 장의 비행기 표. 온갖 색의 출입국 도장이 찍힌 여권. 전화번호부 수백 장을 엮은 파일. 구멍 뚫린 기차표들. 수십 권의 노트들. 그렇게 캐리어를 한가득 채운 것들. 돈은 어떻게 구했어? 교수 일로 벌어둔 게 제법 있었어. 언어는? 트리스가 스페인어랑 포어를 좀 했고 아랍어는 내가 배웠어. 체류 허가나 비자가 안 나오는 나라도 몇 있는데? 그건 뭐 어떻게든 했었지. 너희 진짜 말도 안 돼. 그들은 메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의자에 마주보고 앉아서. 침대에 누워서. 창밖을 내다보며. 비를 맞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메그는 많이도 울었다. 손톱을 죄다 물어뜯었고 피투성이 손끝으로 제 뼈를 더듬었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조용히 지도를 보았다. 머리를 찢는 두통에 삼일 동안 잠들지 못했고 뜬 눈으로 여섯 번의 일출을 보고 낯선 환청이 들린다 말하기도 했다. 코피로 젖은 베개에서 고개를 든 밤에는 얼굴을 닦아내고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기억이 몰려와서 그래. 죽을 것 같은데. 잊지 마, 글로 남겨둬, 겪어야 하는 일이야. 알겠어, 알겠어, 에린.

 그들은 메그의 고통이 필요한 것이라 말했다. 안타깝고 가엽지만 겪어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 일이라고. 그 고통은 새 발의 피이며, 목적지로 향하는 터널이며, 천 년의 슬픔을 읽어내는 과정이다. 고통을 모르고서는 사랑을 되찾을 수 없다. 그러니 네가 저지른 짓과 그녀가 겪은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하여라. 메그가 끄덕였다.

 내가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빗속에서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주제에 기억하지 못했고 그런 주제에 또 찾아와 달라고 말을 했다. 찾아왔더니 너무 늦었다고 질책했고, 그런 주제에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너의 가족이 되었다. 알렉스, 꽃이야. 이건 나비야. 반짝거리는 붉은 눈과 네가 더 예쁘다고 말하는 목소리. 그 어떤 순간마저 네 사랑 속에서 살았던 시간. 또 이런 날이 올까 생각했던 나날들. 메그는 그 삶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저녁 식탁에는 꼬박꼬박 앉았지만 자주 토했다. 담배 한 갑을 이어 피우고 차가운 물로 몸을 씻었다. 물어뜯은 손톱은 한두 개씩 사라졌고 옷자락은 핏자국으로 물들었다. 어느 날은 내내 잠을 잤고 어느 날은 밤을 모르는 사람처럼 깨어 있었다. 새벽에 홀연히 사라졌다가 밤바람이 묻은 뺨으로 돌아와 중얼거리기도 했다. 술 냄새. 피 냄새. 오래된 산책길. 나 할 수 있는 산책 모두 너와 함께 하였고 이제 그 길을 혼자 걷는다. 사랑한다 말해 달라 했던 것. 다시 나를 보러와 달라 부탁했던 것. 염치없이 지옥으로 함께 가자 저주했던 것. 그런 것은 그런 대로 참을 만하였다. 내가 두려운 건 네가 잊으라고 말했던 것. 세월이 조금씩 너의 존재를 지웠던 것. 하염없이 나를 용서하고 대가 없이 나를 사랑했던 네가 마침내 사랑받기를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미친 걸까. 이 죄를 다 갚을 수는 있는 걸까. 메그가 물었다. 그들은 메그를 끌어안았다. 갚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가야 해. 메그는 전부 미쳤다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들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새벽 일찍 일어난 트리스는 식빵 한 봉투와 과일을 사서 돌아왔다. 날이 아직 추웠다. 트리스는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머리를 대충 말린 후 식사 재료들을 부엌에 늘어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깬 에린이 부엌으로 나와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에린은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구석에 웅크려 자는 메그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메그가 고개를 도리질치자 에린은 한숨을 쉬며 그대로 커튼을 걷었다. 아침 햇살이 제법 넉넉했고, 메그는 햇빛을 피해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트리스는 계란과 우유, 설탕을 섞어 계란물을 만들었다. 노란 빛이 도는 계란물에 식빵을 푹 적신 후에는 팬 위에서 노릇하게 구웠다. 커피를 내릴 물을 끓였고, 틈틈이 냄비를 들여다보며 새빨간 딸기 위에 설탕물을 끼얹었다. 그 사이 씻고 나온 에린이 촉촉한 손가락으로 볼을 잡아당기며 한 번 더 메그를 깨웠다. 메그는 퉁퉁 부은 눈을 꿈뻑거리다 부엌으로 난 문을 흘끗 보고 팔다리를 쭉 폈다. 좋은 냄새가 방 안에 가득 맴돌고 있었다.

 찰칵. 메그가 식탁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머리를 말린 에린은 옆 자리에 앉아 트리스가 사온 신문을 폈다. 트리스는 커다란 접시에 프렌치토스트 몇 장을 얹어 시나몬과 설탕을 뿌렸다. 요거트 한 접시. 딸기 조림. 노릇하게 구운 토스트. 차와 커피도 함께 내왔다. 메그는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부드러운 빵 위에 딸기 조림을 올려 먹었다. 상큼한 요거트를 듬뿍 적셔 먹기도 했다. 차는 잘 우려졌고, 커피의 향이 좋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식기에 포크가 닿는 소리. 그들은 평범한 식사를 그날따라 천천히 먹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때 쯤 조용히 메그를 바라보았다. 입가의 설탕을 닦아내던 메그가 그들의 시선에 고개를 까딱였다.

 왜?

 오늘 갈 곳이 있어. 트리스가 대답했다.

 

 그들은 오래 전 메그와 알렉스가 함께 살았던 곳으로 갔다. 잘 심어진 가로수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천천히 흐르는 운하는 여전했다.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들도 몇 있었다. 낡은 아파트와 무너질 것 같았던 이민자촌은 진작 사라졌고, 대신 깨끗한 건물과 예쁜 공원이 들어와 있었다. 너희가 함께 했던 곳을 알려줘. 트리스가 말했다. 메그는 많이도 변한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따라와.

 쓰레기들의 집합소였어. 자주 드나들었다던 도박장은 밴드 용품을 파는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이 골목엔 괜찮은 술집이 있었지. 오래된 공터는 주차장처럼 보였다. 나는 여기 북구에 살았고 알렉스 집은 좀 걸어야 했는데, 나중엔 같이 살았어. 그 자리에는 도로와 버스 정류장만이 남아있었다. 그렇겠지. 낡고 더러운 곳이었으니까. 사실 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이 곳은 그녀와 살던 곳이었다.

 그들은 메그가 누볐던 산을 올랐다. 낮은 언덕에는 벤치가 몇 개 있었다. 사냥꾼들이 가끔 몸을 녹였던 작은 오두막은 사라져 있었다. 언덕 초입부터 빽빽했던 고목들은 모두 베여졌는지 말끔했고, 온갖 동물이 그려진 야생 동물 표지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많은 것이 변했고 너는 여기 없는데 하늘은 왜 이렇게 푸르른지. 그래도 메그는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산책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 걔를 한번이라도 행복하게 해준 것 같아. 메그는 조심스레 안도하는 얼굴을 보며 그들이, 이걸 위해 자신을 데리고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메그는 언덕 위에서 그들을 돌아보며 한 번 더 웃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그는 점심 값을 계산하는 그들을 기다리다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몇 십년 전에는 커다란 술집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낡은 서점이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메그는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태우다 골목으로 들어가보았다. 식당에서 나온 그들은 메그를 찾다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오래된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책. 골동품. 오래된 그림. 이제는 절판된 옛 밴드의 레코드판. 이런저런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오래된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었다.

 몇 사람들은 커다란 가방 가득 책을 가져와 헐값에 넘겼다. 몇 사람들은 어두운 창가에서 카페마냥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구석 마다 놓인 식물들은 천장까지 닿을 것 같았고, 카운터 근처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노부인도 있었다. 먼지 냄새. 커다란 잎의 화분. 장식품 같은 커피 그라인더. 레코드판을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 메그는 실내를 둘러보다가 한구석의 책장으로 다가갔다.

 너도 책을 냈었어?

 냈었지. 몇 년 전에.

 독일어로?

 영어로도 나왔을걸.

 인기는 좀 있었어?

 별로. 보는 놈들만 보는 그런 거.

 네가 작가라니 안 믿기네. 트리스가 말했다.

 작가는 무슨…그냥 사는 게 지랄맞다는 이야기였어.

 독일 놈들이 원래 그런 걸 좋아하잖아. 에린이 웃었다.

 메그는 에린을 따라 웃으며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구석에 구겨지듯 꽂혀있는 책 한 권을 꺼내어 카운터로 다가갔다. 이거 얼마야? 백 루블만 내쇼. 늙은 주인이 대답했다. 메그는 픽 웃으며 엉망으로 접힌 오백 루블 지폐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들은 호텔로 돌아왔다. 발이 멈추는 곳마다 들러본 탓에 네 시간 쯤 걸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걸으며 메그에게 이 도시를 헤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처 없이 헤매었고 해가 질 때까지 광장에 앉아 있었고 관광객이 넘쳐나는 관광지를 서성거렸던 일. 피의 궁전이니 겨울 궁전이니 온갖 아름다운 건축물이니 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빠짐없이 들러보았던 일. 메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자신도 그랬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나도 그랬을 거야. 없을 걸 알면서도 확신하지 못했을 거고 만나지 못할 걸 알면서도 자리를 뜨지 못했을 거야. 메그는 팔을 뻗어 그들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말이 그들 여정의 축약본이었다.

 해가 천천히 졌다. 하늘이 새파래졌다가 어둠에 잠겼다. 주황색 가로등. 수로에 비치는 분홍빛 노을. 그날 밤 그들은 어두운 방에서 소파에 앉아 전등 하나를 켜고 메그가 쓴 책을 펼쳤다. 메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웃으며 시작해 드문드문 긴 호흡을 뱉었다. 그리고 잠깐 눈물을 닦았다가 다시 검은 활자를 읽었다.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고 잠깐 입을 가리기도 했으며 한 페이지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도 했다. 팔락. 팔락. 조용한 방, 고요한 밤에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너도 많이 헤매었구나. 트리스가 말했다.

 꿈에 나온 곳들은 전부 다 돌아다녔지.

 이렇게나 외로웠어? 에린이 메그를 보았다.

 잘 모르겠어. 가만있을 수 없었을 뿐이야.

 알렉스가 이걸 봤으면 좋겠다.

 왜?

 그 애에게 보내는 편지 같아서.

 그렇군.

 이제는 안 써?

 그래. 이제 그만뒀어.

 

 밤. 굿나잇 키스를 하고 잠을 청하는 시간. 메그는 창가 쪽에 누워 창문을 바라보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었다. 작은 빗줄기는 곧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에 그들의 숨이 섞였다. 이불에 감싸인 몸이 느린 호흡을 따라 오르내렸다. 메그는 언젠가 이렇게 지새웠던 밤을 떠올렸다. 빗소리가 거칠었던 날. 땅은 습기에 젖어 어찌할 수 없었고 추위는 발끝을 파고들었던 밤. 불안한 숨소리를 뜬눈으로 세었던 천 번의 밤을 떠올렸다. 산속이었을까? 눈이 내리는 곳이었나? 생각이 난다면 좋을 텐데. 그럼 이번에는 잊지 않을 텐데. 피부를 긁어 초라한 기록이라도 해둘 텐데. 메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문득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글을 써볼까. 메그가 중얼거렸다.

 어떤 글? 에린이 한 박자 늦게 물었다.

 우리가 겪었던 이야기나…알렉스의 이야기 같은 거.

 왜? 트리스가 물었다.

 그냥. 그 녀석이 불쌍해서.

 그들이 입을 다물었다. 메그는 고개를 툭, 그들 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천장을 보았다.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선명했다. 눈동자는 부드러웠고, 웃음은 사랑스러웠다. 눈을 감고도 눈이 없어도 재현할 수 있을 것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런 것이 없었다. 메그가 말했다.

 걘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잖아. 내 말은, 행복하기만 했던 적이 없었을 거라는 뜻이야.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너희를 그리워했고, 너희와 함께 하고서도 나를 찾아 헤맸지. 그냥 사랑하고 사랑받기에도 충분히 바쁜데. 그리워하고 아파하느라 행복할 시간이 얼마 없었을걸. 어쩌면 평생 그랬을지도 모르고.

 그게 왜. 트리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그게 어떤 관계가 있어?

 우리는 그 녀석 덕분에 다시 만났는데…걘 누구에게도 인도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불쌍해서. 그 녀석에게도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너희가, 내 책이 알렉스에게 보내는 편지 같다고 했잖아.

 에린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트리스의 그림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었다. 메그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검은 손. 검은 형체. 창밖에서 눈물을 흘리는 비구름들. 죄를 고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메그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걔는 미쳤어. 안 그래? 몇 번이나 혼자 죽었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우리를 찾아왔는지 감도 안 와. 아마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아주 오래 살았겠지. 그 중에 우리는 단 한 번도 온전한 행복을 주지 못했겠지. 그래서 잊으라고 말했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뭘 먹다가도 자다가도 죽고 싶어지는데, 죽는 것 보다는 뭐라도 하나 남겨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게 뭐냐면, 에린.

 메그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옆으로 누워 그들을 보았다. 가느다란 손이 베개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에린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메그의 손을 꼬옥 쥐었다. 메그는 어둠 속에서 그들의 형체를 더 자세히 보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뭐냐면. 트리스가 그들의 손을 쥐었다.

 에린 너를 잃고 삶을 포기했을 때가 있었어. 내가 죽도록 후회하는 그때 말이야. 그때의 녀석은 나를 달래고 보듬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주었는데, 밤마다 온갖 책들을 읽어주기도 했어. 고전. 동화. 소설.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들. 나는 혼자 있고 싶었고 죽고 싶었지만 그 애처로운 눈이 무서웠고 걔가 좋아서 가만히 들었어.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걘 우리 이야기를 해준 것 같아.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고 더듬더듬 울면서 말해줬거든. 트리스 네가 고생하는 이야기. 내가 속을 좀 썩이는 이야기. 에린 네가 우리를 사랑하는 이야기 뭐 그런 거. 그러면서 이 이야기들은 결국 행복해진다고, 자긴 이 이야기들로 견뎌왔다고, 너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더라. 견디는 게 고작이었던 주제에 그런 말을. 웃기지. 그래. 그래서 내 말은…….

 메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밖에서 커다란 나무가 휘청거렸다. 바람. 바람. 빗소리. 창문을 넘어 손을 뻗어오는 추위. 갈피 없는 문장들. 운하와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나무 이파리들. 트리스는 협탁을 더듬어 작은 등을 켰다. 목이 까끌거렸다. 그들의 두 손과 무릎이 노란 빛으로 물들었다. 메그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그 새파란 눈동자. 울고 있지 않았다.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엮고 난 후에, 마침내 알렉스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주었던 사랑을 전부 다 돌려받고, 이틀이든 한 달이든 십년이든 마음껏 울고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다 하고 나서, 마침내 둘도 없이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읽더라도 읽지 않더라도 상관없으니까 언젠가는. 언젠가는 자신이 이토록 사랑받았다는 걸 알게 하고 싶어.

 트리스가 탄식했다. 커다란 손이 메그의 무릎을 꽉 쥐었다.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이 새카맣게 젖어 있었다. 그들은 하염없이 메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메그는, 어두운 눈밑과 부르튼 입술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이 생각했다. 의미가 없지 않냐고. 자기위안이지 않냐고.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리고 그들이 대답했다. 여태껏 그랬다고. 기대하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나을 뿐이라고. 이것은 그저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 시키는 일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헌시를 짓는 일이며, 언제 어디에 닿을지 모르는 유리병 편지를 바다에 띄워보내는 일이다. 단지 그게 전부다. 그래도 괜찮은가?

 바닷가……. 에린이 중얼거렸다.

 바다?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고 했어. 에린이 말을 이었다. 해변이 있는 곳에서.

 요리를 제법 좋아하니까, 직업은 요리사 어떨까. 트리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좋네. 위험한 일 그만 할 때도 됐지. 메그가 끄덕였다.

 잘 어울린다. 같이 살 때도 곧잘 해줬잖아.

 그럼 해변 도시로 할까. 따뜻한 곳이 좋다고 하더라.

 시골 마을이 좋겠어. 대도시는 지긋지긋하다고 했거든.

 넷이서 작은 집을 짓고 사는 게 꿈이라고도 했는데, 알아?

 잠깐만. 노트 좀.

 문을 열면 모래사장이 나오는 집이라고 적어줘.

 작은 해변 음식점의 요리사…해산물을 잘 요리함. 이 정도?

 쉬는 날에는 수영과 서핑을 즐긴다. 추가해주고.

 그럼 디저트도 잘 만든다고 써야지.

 이번에는 메그 너도 비치발리볼 같이 해줘야 해.

 으. 그래. 알았어.

 그리고 또,

 요구사항이 많잖아. 너덜거리던 노트 위로 바쁘게 펜을 끄적거리던 메그가 웃었다. 아직 멀었어. 그들은 젖은 눈으로 따라 웃었다.

 그들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여태껏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하지 못했던 것들의 목록을 기록하며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시를 썼다. 수십 권의 노트를 읽어주며 목이 쉬었고, 죽음과 이별에 대해 말할 때는 두 시간을 울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에서 구전으로, 때로는 믿을 수 없는 신화 같았고 때로는 어디서나 존재하는 설화 같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간의 시간이 헛수고가 아닐까 두려웠어. 세상 어디를 가든 그림자조차 만나지 못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했어. 하지만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사랑으로 가득 찬 편지를 엮을 수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누군가가 대답했다. 나는 너희의 여정이 필요해. 너희가 사랑했던 이야기를 다시 보여줘. 그 장소를. 그 바람과 하늘을 내게 보여줘.

 자. 우리 서로 사랑했고 너를 사랑했고 마침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쓰자. 죽고 또 죽고 헤어지고 또 헤어졌지만 차갑고 거친 항구도시 아닌 부드러운 바람의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샛노란 가로등 불빛 아닌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핏물 흐르는 어둠이 아닌 햇빛에 부서지는 파도 속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자. 그러니 너는 언젠가 이 편지를 읽어주어라. 서점의 매대든 도서관의 구석이든 카페의 장식품이든 버려진 책이든 언젠가는 우리의 사랑을 읽어주어라. 우리가 너의 슬픔을 전부 다 알지 못해도. 이것이 한심한 자기위안일 뿐이라도. 우리가 다른 궤도를 달리는 별이며 지구의 뒤편이며 낮과 밤이며 땅과 하늘이라 해도 언젠가는. 다음 삶에서도 똑같은 편지를 보낼 테니 단 한번이라도 네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주어라.

 언젠가의 나는 너 없이도 세상이 흘러간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어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글이 사랑을 말할 때 너는 사랑 때문에 비참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어떤 것도 읽지 못했다. 먼 곳으로 가버린 너에게 어떻게 닿아야 할지. 어떤 말로 너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너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너의 슬픔을 필사해야만 한다. 너에게 받았던 사랑을, 네가 겪은 고통을, 네가 보았던 지옥을 다시 적어내야만 한다. 세계를 넘어 새로운 궤도에 오르길 반복했던 황금색 별의 이야기를. 핏빛 눈에 울음을 머금고 심장에 사랑을 품은 채 나를 끌어안았던 태양에 대한 설화를.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사랑의 시작이 사랑의 끝으로 돌아오게 만들 마지막 이야기를 써야 한다.

 제목은 어떻게 할 거야? 누군가가 물었다.

 마지막 설화. 누군가가 대답했다.

 

 

 

 

 

 

 

 

 

 

 

 

 

 

 

 

 

 

 

 ……나는 이제 그녀의 말이 이해되었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영원토록 지옥에서 살 수 있다는 말. 만약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사랑을 버리는 것보다 사랑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이 더 쉬우니까.

 이것은 우리 사랑의 마지막 설화다. 하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책을, 나의 사랑에게 바친다.

 

 푸른 눈동자가 바다를 담았다. 수평선 끝까지 넓게 펼쳐진 바다. 반짝거리는 햇빛이 얇은 파도를 몰고 모래사장으로 돌아왔다. 우유빛 구름이 새파란 하늘 위에서 느린 물고기처럼 떠돌았다. 신발 안으로 모래알갱이들이 들어왔다. 저 멀리 낮은 산도 보였다. 바닷바람이 갈색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고 사라졌다.

 해안선 따라 자리 잡은 주황색 지붕의 단층 주택들. 하얀 파라솔 아래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 접이식 의자를 가지고 나와 맥주를 마시는 주민들. 장난감 같은 요트가 몇 척 버려져 있다. 가재 요리 전문점은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안뜰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테살리아의 해안선에 위치한 작은 마을은 집보다 공터가 많았고 공터보다 올리브나무가 더 많았다. 어딜 보아도 푸르고 싱그러운 마을. 온화한 사람들. 가끔 찾아오는 관광객들. 메그는 사탕 막대를 우물거리다 다시 걸었다.

 정원에 녹색 잔디를 깔아둔 집이 있었다. 낮고 하얀 철제 울타리로 빙 둘러싸인 집. 정문에서 몇 걸음만 걸어가면 해변이었고, 해변에는 라탄 재질의 파라솔과 하얀 선베드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작은 가게까지도 십 분은 걸어야 하는 단층집은 그럴듯한 이웃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메그는 정원에 쭈그려 앉아 파도를 보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재떨이로 쓰는 깡통에 꽁초를 버리고 기지개를 폈다.

 모래 잘 털고 들어와.

 이크.

 문을 열자 주방에 서있던 트리스가 말했다. 메그는 한 걸음 성큼 들어갔다가 그대로 뒷걸음질 쳐 정원에서 모래를 탈탈 털었다. 트리스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메그는 모래를 다 털고 현관의 모자걸이에 윗옷을 걸며 집을 둘러보았다.

 쉬는 날이야?

 오늘은 오전만. 새벽에 나갔잖아.

 그랬나……

 어디 갔다 왔는데?

 간식 사러. 산책도 좀 하고.

 트리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야채를 씻었다. 양고기와 토마토를 볶는 냄새가 잔뜩 났다. 메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식탁에 마트에서 사온 간식거리들을 풀었다. 사탕 세 봉투. 담배 두 갑. 치즈를 올려먹을 크래커. 인스턴트 미트 파이. 마시멜로 한 봉지. 메그는 에린이 부탁한 크래커 봉투를 만지작거리다 트리스를 보았다. 에린은? 트리스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아직 잔다고 대답했다.

 오븐이 있는 넓은 부엌. 작은 티비와 운동기구들이 덩그러니 놓인 거실. 거실 옆으로는 침실과 서재 하나가 있는 자그만 집이다. 메그는 소파에 풀썩 앉아 거실의 커다란 창문을 바라보았다. 낮고 하얀 울타리. 가까이 다가오는 파도. 컨테이너를 개조한 창고. 서핑 보드 두 개와 에린이 돌보는 화분 몇 개가 평화롭게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지 일 년 쯤 되었을까. 그전에는 누더기 같은 기억을 이어붙이며 세상을 떠돌았고 초라한 글을 쓰며 살았다. 20세기에 시작한 문장은 21세기에 마침표를 찍었고, 그 여정은 길기도 더없이 짧기도 하였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는 포기하고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우리는 칼로 살을 후비고 문장으로 심장을 찌르면서도 살아남고 살아남아 편지를 썼다.

 안 팔릴 것 같다 들었던 책은 그런대로 성과를 냈다. 작은 스튜디오에서 영화화를 하고 싶다고 연락하기도 했다. 이름 있는 작가가 정성스런 추천사를 써주었고, 유명한 영화감독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악평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 그 누구도 이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메그는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아주 새파랬다. 사람을 위협할 줄 모르는 파도가 하얀 거품을 내며 부서졌다. 키 낮은 나무들이 평화롭게 몸을 흔들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도마 위에서 야채를 써는 소리와 오븐에서 구워지는 무화과 파이 냄새가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에린 좀 깨워줘. 트리스가 식탁에 접시를 깔며 말했다. 메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침실 문을 열었다. 에린은 두꺼운 커튼을 두 겹으로 치고 침대 구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메그는 에린을 들여다보다가 찌푸려진 미간을 살살 눌러 폈다. 그리고 5분만 더 자게 해달라는 웅얼거림에 킥킥 웃고는 반듯한 콧대를 살짝 깨물어주었다. 손에 닿는 온기와 방금 막 일어난 살결 냄새가 좋았다.

 그들은 하얀 식탁에 앉아 점심 식사를 했다. 토마토소스에 볶은 양고기와 삶은 마카로니. 잘 구운 무화과 파이와 레몬을 곁들인 오징어 튀김. 에린은 코가 살짝 빨개진 코로 식탁에 앉아 안경을 썼다. 그리고 차가운 얼음에 술을 부어 한 모금 마셨다.

 첫 끼부터 술이야? 트리스가 오징어 튀김에 레몬즙을 뿌리며 말했다. 어제 늦게 잤으니 봐줘. 에린이 차가운 술에 만족스레 웃었다가 대답했다. 메그는 무화과 파이부터 한 조각 물었다. 열어둔 부엌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일이 꽤 바쁜가봐. 그렇긴 한데 학생들이 열정이 있어서 좋아. 또 대학원 가자고 꼬시는 건 아니겠지. 요즘엔 그러면 다들 도망간다니까. 내 학생들도 열정을 좀 가져야 할 텐데. 너무 무리하게 운동시키는 거 아니야? 난 할 수 있을 만큼만 시켜, 그러니까 그냥 의지의 문제야. 트리스는 작은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일했다. 에린은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도시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쳤다. 언젠가의 메그는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메그는 양고기를 우물거리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마카로니를 씹던 에린이 메그를 보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닦았다. 왜?

 어제 네 계정 좀 썼는데, 편집자가 메일 하나 보냈더라.

 차기작 독촉일걸. 일부러 안 보고 있었는데.

 그건 아니야.

 읽어 봤어? 뭐래?

 안 읽어봤는데, 아무튼 아니었어. 나중에 확인해 봐.

 메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정리했다. 오늘의 설거지 당번은 메그였다. 메그는 기름기가 남은 그릇을 대충 씻다가 트리스에게 잔소리를 듣고 세제로 거품을 내어 닦았다. 트리스는 창문을 활짝 열고 음식 냄새를 환기했고, 에린은 우조 한 잔을 홀짝거리며 묵직한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설거지를 끝낸 메그가 옷에 아무렇게나 물기를 닦고 마시멜로 한 봉투를 꺼냈다.

 메그는 거실에 앉아 마시멜로 하나를 우물거리며 메일을 열어보았다. 계정을 아무렇게나 사용했더니 스팸 메일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작가 모임. 북 세미나. 신용 대출. 에린의 주식 거래 내역들. 그 중에 담당 편집자가 보낸 메일이 있었다. 메일 제목은 '차기작 독촉 메일 아님.' 메그는 픽 웃으며 메일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담당 편집자 리사입니다. 선생님이라면 메일을 안 읽거나 삭제할 것 같아 부득이하게 제목을 이렇게 씁니다. 다름 아니라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실 건지 여부를 여쭙고 싶어서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안 간다고 하시겠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 확인 절차가 필요한 일이거든요. 또한 비영어권 번역과 관련하여 논의 드릴 것이 있으니 가능한 빨리 메일 회신 부탁 드립니다. 추신. 저는 편집자일 뿐이지 선생님의 비서가 아니랍니다. 추가 추신. 제발 핸드폰 하나 사세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메그가 깔깔 웃었다. 날짜를 보니 두 달 전 메일이었다. 옆에 앉아 손질한 무화과를 베어 먹던 에린도 메일을 읽다 따라 웃었다. 편집자 좀 그만 괴롭혀. 핸드폰 좀 사고. 메그는 에린의 입에서 무화과를 가져가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주일에 한 번은 차기작 내달라고 전화할걸. 트리스가 메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돈 좋아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트리스는 티비를 켜고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에린은 작게 하품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메그는 노트북의 터치 패드를 어설프게 더듬으며 보낸 사람을 클릭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답장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메그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일주일 전에 도착한 메일이 한 통 더 있었다. 메일 제목은 '선생님 스토커 있으신가요?' 웃던 메그가 눈을 찌푸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담당 편집자 리사입니다. 역시 답장을 주지 않으셨네요. 사실 그럴 줄 알고 시사회 참석은 진작 거절했습니다. 번역 업체도 몇 곳을 선정해 두었고요. 저는 참 선생님을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쯤이면 저를 불쌍히 여긴 가족분들께서 핸드폰 하나 장만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각설하고, 오늘 메일을 드린 건 다른 용무입니다. 얼마 전에 선생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찾아왔거든요. 탈색한 금발에 빨간 눈이었는데, 선생님 책에 나온 그 친구와 닮았더라고요. 창작물에 빠져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친구들은 많이 봤지만 그런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말씀 하신 것도 있고, 또 선생님의 가족분들을 생각하면 이상한 사람이 찾아가도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진 않아서 선생님의 주소를 알려드렸습니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도 받았으니 함께 첨부 드립니다. 부디 제 행동이 선생님께 해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추신. 이상한 사람이래도 죽이지는 마세요. 교도소 수기를 내실 게 아니면요.

 덜컥. 메그가 노트북을 놓쳤다. 티비를 보던 트리스가 황급히 손을 뻗어 묵직한 노트북을 받아내었다.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던 에린이 놀란 눈으로 메그를 바라보았다. 메그는 가슴팍의 옷자락을 쥐어뜯으며 숨을 다급하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그래. 왜. 무슨 일이야. 트리스가 소파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메그의 손을 쥐었다. 메그는 두 눈을 꼭 감으며 도리질쳤다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저거. 저걸 읽어봐. 얼른.

 에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들었다. 트리스도 몸을 일으켜 미간을 찌푸리며 메일을 읽었다. 네 개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이다가 순간 움찔, 멈추었고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에린이 노트북을 내던지고 침실로 뛰어들어갔다. 트리스는 메그의 손을 붙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에린은 핸드폰을 가지고 나오며 키패드에 숫자 몇 개를 다급히 입력했다. 뚜루루─… 뚜루루─… 심장 소리보다 느린 통화 연결음. 그 잠시의 지옥 같은, 천국 같은 순간. 그들은 서로를 더듬더듬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피부를 파고들어오는 손톱을 느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입이 바싹 말랐다. 귀끝이 뜨거워지고 체온이 높아지는데, 동시에 식은땀이 나왔다. 이게. 이게 뭘까? 정말이야? 정말 너일까?

 메그의 시선이 천천히 거실의 창문으로 향했다. 열어두었던 창문 너머로 벨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평온하고 단순하고 단조로운 기본 벨소리. 그들은 일제히 현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띵동. 그 잠깐의 초인종 소리. 터질 것 같은 심장. 그대로 쓰러질 것 같은 몸뚱이. 트리스가 숨을 들이켰다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발을 겨우 떼어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아. 빛이 쏟아져내렸다. 빛이. 그 무엇보다 찬란한 웃음이 쏟아져내렸다. 그 곳은 보드라운 파도가 있고 따뜻한 바닷바람이 부는 곳. 하늘과 파도를 칼로 잘라 세상 중앙에 걸어둔 곳. 태양이 황금색 머리칼을 흐트러트리고 어깨를 적시며 두 뺨을 물들였다. 머리칼 가닥가닥 사이 여름 한낮이 새어들어와 둘도 없는 금빛 장막으로 흩날렸다. 모든 것이 정성스레 이 존재를 빚은 후 마지막 입맞춤으로 새빨간 보석을 박아 넣었다. 사랑스럽게 휘어지는 새빨간 눈동자와 새카만 속눈썹. 화사하게 부서지는 햇빛 같은 얼굴. 알렉스는 웃고 있었다. 커다란 품에 작은 책을 꼬옥 안고 아름다운 눈물을 흘리면서. 어여쁘고 화사한 얼굴로 별보다 태양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책을, 너에게 바친다. 그들은 알렉스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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