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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그는 몇 시간이 지났는지 생각하며 에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뺨에 스치는 것이 좋았다. 홀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을 때는 손닿지 않았던 것. 메그는 거품에 씻겨내려가고 남은 체취를 맡으며 다시금 무겁고 나른하게 정신을 가라앉히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대가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푸른 눈이 얇은 칼날처럼 어둠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빛이 들어올 틈이라고는 없었다. 어떤 부정한 것도 깃들지 못할 정갈한 실내. 사랑하는 것만이 가득한 곳에 쇠의 비린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있었다. 메그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숨을 고르자 인기척을 느낀 알렉스가 메그를 뒤에서 끌어안아 눕히고 뺨을 부볐다. 왜 그래? 메그가 대답했다. 피 냄새가 나서.
알렉스는 메그의 작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가 에린과 트리스의 검은 형체를 보았다. 가슴팍이 천천히 오르내리며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맞추고 조용히 일어나 이불을 어깨까지 포근히 덮어 준 다음 침대 발치에 둔 무기를 쥐고 문을 나섰다.
새벽의 궁은 빛이 아주 드물었다. 그들은 발소리를 죽인 채 검은 복도를 걸으며 희미한 피 냄새를 뒤쫓았다. 메그의 눈동자가 시선 가닿는 곳 전부를 보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친 밤의 경비병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소총을 등 뒤로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메그는 현명한 자들에게 눈길을 던졌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빛이 없는 곳을 걸었다. 그들은 태초부터 어둠에서 자란 존재처럼 자취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이게 우리 일인 것 같아. 메그가 말했다.
어떤 게?
저 둘이 못 보는 걸 찾아내는 거.
알렉스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맞아. 그리고 무기를 쥐지 않은 손으로 메그의 손을 꼭 잡았다.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는 일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 알렉스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메그가 왕궁 끝자락 복도의 문 앞에 섰다. 안에서 걸쇠가 걸린 형태였다. 알렉스가 윗옷을 벗어다 둥근 띠 모양의 구리 손잡이 위에 덮고 비틀어 손잡이 채로 뜯어냈다. 나무문이 결 따라 찢어지는 소리가 천 아래에 덮여 죽었다. 알렉스가 뒤로 물러나자 메그가 동그란 구멍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걸쇠를 툭 풀었다. 그들은 그 작은 틈 사이로도 새어나오는 피냄새에 눈을 내리깔았다가, 안으로 들어가 걸쇠를 다시 걸었다.
군화를 신은 알렉스의 발이 지하실 바닥을 디뎠다. 묵직한 발소리를 죽일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누가 몇 명이 있든 죽을 인간은 이 곳에 피냄새를 퍼트린 자다. 감히 우리의 잠을 방해하는 자다. 크고 작은 그림자가 지나가자 벽에 걸린 촛불이 꺼질 듯 휘청거렸다가 돌아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간헐적인 억눌린 신음. 그 사이로 파고드는 바닥을 긁는 쇳소리가 거칠었다. 그들이 지하실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인기척을 느낀 자가 철문 너머로 누구냐! 하고 외쳤다. 알렉스는 대답 없이 철문에 난 작은 창문의 창살을 쥐고 경첩을 다른 손의 손끝으로 뜯어 당겼다. 팔근육이 부풀고 손등에 핏줄이 섰다가 곧 가라앉았다. 메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거운 철문이 돌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가 곧 지옥만큼의 정적으로 잦아들었다. 의자에 묶여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기절해 있던 인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물에 피부가 희게 질렸고 입술은 파래진 채였다. 양동이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자는 숨을 들이쉰 후 내뱉지 못 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천장의 어둡고 노란 불빛에 완전히 핏빛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 안대를 풀어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데, 이거 뭐야?
남자가 양동이를 떨어트리고 벽으로 바짝 붙었다. 대답하는 것조차 잊은 채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허벅지로 지탱하고 있었다. 메그가 알렉스를 옆으로 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습하고 눅눅한 좁은 지하실은 피와 곰팡이 냄새가 함께 났다. 메그는 지하실 안을 한 번 둘러본 후 바닥에 떨어진 양동이를 발로 우그러트리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안 들려? 뭐냐고.
그, 그…저 자가 신성모독을…….
암살 시도를 하기엔 부실해 보이는데. 알렉스가 묶여 있는 자의 고개를 들게 하며 말했다. 어두운 머리카락이 가슴께까지 오는 여자였다. 메그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닿았다가, 천천히 등에 맨 라이플을 당기고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말해. 우리도 고문할 줄 알거든.
남자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을, 믿지 않는 발칙한 자를 벌하고 있었습니다. 차마 비명이 되지 못해 울음이 섞인 목소리. 남자의 다리 사이에서 역겨운 냄새와 함께 축축한 기운이 퍼졌다. 메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해가 뜨고 있었다. 얇은 면사 커튼 사이로 아침 일출이 비쳤다. 은색 외과도가 살 위를 누비고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간헐적인 신음이 툭툭 꽉 다문 이 사이로 새어나왔다. 트리스는 흰 천으로 된 가림막 뒤에 앉아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인간이 치료를 받는 병실에. 그녀는 자신이 이 곳에 있어도 되는가에 대하여 한참동안 생각했으나 궁의 인간과 홀로 둘 수는 없었다.
여자는 아픔을 삼키며 가림막 너머를 바라보았다. 등받이 없이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는 불투명한 그림자. 그 존재는 마치 돌처럼 산처럼 말이 없었다. 그림자는 동정도 연민도 어떠한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으나 여자는 저 자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았다. 옛 왕의 초상화를 어두운 곳에서 마주하면 이런 형체일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느낌. 존재만으로 정당성을 얻는 것.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정말 신인가?
부지런히 바늘을 움직이던 자가 손을 흠칫 멈추었다.
아니야.
그럼 과거의 왕인가?
그래.
아주 어릴 적 신전에 간 적이 있다. 평범한 인간들은 당신들 근처에도 못 갔지만 멀리서 하얀 관을 보며 기도를 드렸지. 하지만 그걸 믿지는 않았다. 인간이 몇 십 년 동안 잠들어 있다니.
그렇겠지.
학교에서는 새로운 신화를 가르쳤다. 모든 노래가 당신을 찬양했다. 나와 나의 동료들은 그 모든 이야기가 왕권 유지를 위한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과 이마에 채 닦아내지 못한 피가 굳어 있었다. 내가 틀린 건가?
틀리지 않았다.
신이 정말로 존재하나?
검은 형체가 입을 다물었다. 상처를 봐주던 자가 도구를 거두고 소리 없이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잠깐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기어들어와 가림막과 면사 커튼을 흔드는데, 아침의 햇살이 이렇게나 한가롭고 창밖으로는 작은 새가 이슬을 마시며 우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여자는 양 팔과 어깨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트리스는 그 뒷모습을 보았다. 피가 드문드문 묻어 있는 머리카락이 새까맸고 밤새도록 이어졌던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은 곧은 등이었다. 여자는 흔들림 없이 걸어가다 문고리를 잡고 우뚝 멈췄다. 그러나 신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틀리지 않았다고 했지. 당신은 좋은 지도자야. 여자는 빛이 비치는 창문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우리 지식인들은 더 이상 신에 기대지 않을 거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트리스가 새하얗고 넓은 왕궁의 홀을 가로질렀다. 시종들은 고이 받들었던 망토조차 뒤로 감추고 뒤로 물러났다. 굳어 있는 그 얼굴에 대고 인사를 올릴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3단 천측창에서 햇빛이 새어 바닥이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기둥마다 새겨져 있는 성서의 글귀가 그 뜻을 알렸으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천장이 가장 높고 왕좌가 있는 궁의 중앙에 닿자 수십 명의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이렇게 많다고?
더는 없어. 나랑 알렉스가 물어봤으니까. 메그가 대답하며 다가왔다. 에린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눈이 어떤 모양으로 그것들을 응시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트리스가 하, 허탈한 소리를 내며 인간들 앞으로 걸어나갔다. 머리를 조아린 수십 인간들 앞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존재. 분노를 불러와라. 분노를. 깊이나 차원이 없는 그 검은 진창이 거대한 폭풍을 이끌고 연약한 인간들의 등줄기 위를 덮쳐버릴 것. 정갈한 영혼에 분노가 깃들어 짐승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핏빛 눈동자에 불씨가 서려 모든 것을 태울 듯 새까매졌다. 아.
트리스.
알렉스가 트리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설명을 듣고 싶잖아. 응? 검은 속눈썹이 휘어지며 방긋 예쁘게도 웃었다. 빠드득 소리가 나며 맞부딪치던 치열이 그때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트리스는 눈을 감고 폐에 머물러 있던 공기를 천천히 내뱉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리고 엎드려 있는 국왕의 무릎을 발로 툭 건드렸다. 너희들도 고마워해라, 지금 당장 죽는 건 면했으니까. 그 잠깐의 상냥함은 사랑하는 자에게만 향하는 것이라는 듯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런 식으로 몇 명을 죽였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내가 말했다. 숭배하는 걸 그만두라고. 그런데 너희들은 뭘 해? 이단이라는 자를 납치해 고문 한 거? 신을, 우리를 믿지 않는 자를 너희들 손으로 벌하고 자랑스러워 한 거? 그러면 내가 기꺼이…그 자리를 받아들이고 너희들에게 은총이라는 걸 내려줄 줄 알았나?
폐하…….
집어치워. 대답이나 하라고.
트리스가 검은 부츠 끝으로 국왕의 턱을 들게 했다. 바닥만 보며 덜덜 떨었던 눈동자가 고개가 들려 그녀를 마주했다. 새하얀 망토와 반짝이는 방패, 신의 증표는 그 어떤 것도 없었음에도 천 년을 산 나무처럼 그 고목을 집어삼킨 숲처럼 거대했다. 그림자가 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이것은 죽음조차도 파멸시킬 수 없는 것. 그녀는 거스를 수 없는 왕이며 자연이며 역사인 동시에 신이다. 그러므로 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 저희는 그럴 수 없습니다.
뭐,
평생토록 당신을 믿었는데, 숭배하고 염원하고 저희에게 사랑을 주시리라 믿었는데 이제 그만두라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희에게 향하는 당신의 분노가 모두 인류와 백성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그러므로 더욱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를 감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서 살아갑니다. 좌절하여 꿈을 잃습니다. 악마나 운명이 있지 않다면 저희가 겪는 수많은 비통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힘도 섭리도 이유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에게 물어도 모든 존재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끝내 침묵이 이기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부재한다면 영원히 불투명한 미래에서 헤매다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희의 분수는 당신이라는 존재에 역사를 내맡기는 것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희는 언제나 죽음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 신의 대리자라면 저희는 언제든지 기꺼이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불길로 향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기꺼이 당신 곁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랑하는 자와 자신을 믿으라 하셨지요. 저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희가 저지른 일에 대한 죄를 정당히 받겠습니다. 허나 부디 당신을 믿지 말라고는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남자의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백지처럼 새하얀 광기. 이성과 논리의 부재. 인간의 존재를 한없이 나약하게 그리며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으로 인생이라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자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 여기고 학살도 죽음도 주저하지 않는 자들.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는 그들이 가슴에 평생토록 새겨왔던 진심이었다. 뭐라고. 트리스는 삼킨 숨과 함께 내뱉었지만 말을 잇지는 못 했다. 인류가 숭배하는 유일한 신이 된 기분은 어떤가? 듣기 싫은 목소리만이 뒤틀린 속에서 메아리쳤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국가의 탄생이 사회적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한 후 단순한 사회보다 국가가 더 낫겠다고 생각하여 자발적으로 국가를 형성했을 것이라고. 그러나 신이 다스리는 세계에 합의 같은 교양은 없다. 이 대륙의 국가란 타이탄의 압도적인 힘을 목도한 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발치에 엎드렸을 때 처음 탄생했기 때문이다. 타이탄의 은총이 닿지 못한 부족 사회는 신앙과 인구수로 무장한 국가에 의해 정복당했다.
가장 신앙심이 두텁고 가장 똑똑한 자, 가장 야망 있는 자들은 그 믿음을 증명하여 타이탄에게 특별한 직책을 얻었다. 그들은 인간의 짧은 사고와 짧은 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이탄 대신 인간을 통솔했다. 인간의 무리가 모여 살기 위해서는 부족 사회보다 훨씬 복잡한 행정 업무가 필요했는데, 먹고 자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타이탄에 비하여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했기 때문이다. 흡수당한 부족원들은 노예가 되어 밭과 대규모 관개시설과 광산으로 보내져 농경 사회의 발전과 철기의 확산을 위한 제반을 마련하는 데 쓰였다. 더 많은 식량을 위한 농기구를 굶주린 자가 만들고 더 많은 노예를 위한 무기를 노예가 만들게 된 것이다. 무력을 쥔 자들은 노예를 수탈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여 아름다운 신전과 높은 성벽을 세웠고 성스러운 땅에 불결함이 깃들지 못할 것이라 외쳤다. 이 넓은 대륙은 타이탄 각자가 하나의 종교인 신정제 도시국가 수십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타이탄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그 모든 것이 지겨워져 인류를 세상에서 지우고자 했을 때, 타이탄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기꺼이 반역을 일으켰다. 아주 긴 전쟁 속에서 수십의 타이탄과 십 수만의 인간이 죽었으나 재앙을 봉인하는 것에 성공했고 인류를 누구보다 사랑하여 기꺼이 반역을 주도한 프로메테우스가 타이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따르던 타이탄을 잃은 국가들은 혼돈 그 자체였으며 살아남은 타이탄들은 지도자가 빈 국가를 잡아먹으려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가장 강한 타이탄들을 모아 전체 대륙을 자신들이 관리하자 명했다. 인간이 쌓은 성벽과 문화와 권력 체계는 유지하되 신과 인간의 거리를 떨어트린 것이다. 그리고 한데 모여 인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에 대해 밤낮 없이 논의를 나누었다.
인류는 낯선 환경에서 혼란스러워 했으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평생 노예였던 자가 반역을 일으켜 죽은 신을 따르는 지도자의 목을 쳤고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혼란이 끝없이 발생했다. 프로메테우스는 더 많은 인간들이 죽기 전에 혼란을 통제했지만 그것은 그가 인간을 사랑한 탓이지 높은 자리를 넘본 자들을 괘씸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인류란 모두가 평등하게 하찮고 평등하게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는 한 세기 동안 완전한 자유를 원하다 다음 세기에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누군가를 원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끝없이 우러러보던 옛날이 그립다고 말하는 타이탄 또한 있었다. 결국 수 세기가 지난 후 타이탄은 분열하기 시작했고 인류와 타이탄을 수천 년 동안 중재하던 타이탄 왕은 더 나은 방법이 있으리라 믿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순혈 바빌로니안을 다시 품길 원하는 렐란토스가 가장 먼저, 그리고 인류의 엄격한 통제를 원하는 미노티우스와 기술력으로 인간의 찬사를 갈망하는 코이우스가 그 뒤를 이어 동맹에서 이탈했다. 그 후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새로운 왕은 대륙에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몇 세기 동안 이어진 신의 지배를 꺾고 떠오른 네 명의 지도자. 그들은 식민지를 철폐하고 균등한 교육을 퍼트리려 노력했으나 왕권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기후와 지형과 인구수까지 다른 수십 개의 도시가 평등이 성장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노예와 식민지에게 충분한 지원금을 지급한다 해도 출발선부터 불평등했으며 정당한 재산을 갖고 있던 자들에게 세금 외의 방법으로 부를 빼앗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그 모든 사유를 알고 있었으나 다만 비참하고 굶주리는 자들이 없기만을 바라며 최선을 다하였다. 명석하고 총명한, 그들이 뽑고 그들이 감시했던 인재들과 함께.
그들의 재위 기간 동안은 일말의 평등과 평화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십 수 년 후 그들이 잠들듯 타계하고 강력한 절대왕정이 사라졌을 때 문제가 찾아왔다. 노력하고 재능 있는 자들이 이룬 업적을 그들의 핏줄이 이어받는 것. 교묘하고 이기적인 자들이 자그만 권력을 이어받는 것. 어쨌든 인간의 생각은 누군가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불평등이 퍼져나가며 강력한 왕과 신이 없는 국가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왕은 왕권의 정당성을 신을 통해 되찾았다. 잠든 네 영웅을 신으로 모시며 그들의 부름과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신을 믿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교육과정에 포함된 신학과 수십 종류의 성서, 신을 찬미하는 찬송가가 확실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종교를 다시금 가지게 된 인류는 불평등한 현재의 세상을 언젠가 그들이 다시 굽어 살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일정 이상의 부와 권력을 쌓은 자들에게는 신의 존재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토지와 영토, 생산수단을 신도 신을 죽인 자도 아닌 한낱 인간이 독점하고 그 독점의 정당성을 종교에서 찾는 것.
권력은 생산수단과 생산물에서 온다. 땅을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대가를 받고 토지를 빌려주듯. 공장을 가진 자가 노동자들의 분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듯. 왕권의 도움 없이도 부를 쥔 자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규모 공장주, 상단의 주인, 은행장, 사업가, 학문의 권위자 등이 그들이었다. 제국이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시대와 사회는 하나인데 권력은 둘, 두 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나 왕은 그들을 신이라는 거대한 정당성으로 누르고 있었다.
에린이 말을 마치자 트리스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수심이 지워지지는 않았다. 수십 년 전보다 더 복잡하게 다층화 된 사회는 잔뜩 꼬인 털실처럼 엉망이었다. 수천 권의 책이 드높은 천장까지 정렬된 왕실 서고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편중된 시선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에린은 정보의 허위값을 정확히 골라낼 줄 아는 자였다.
알렉스가 트리스의 팔을 쥐며 물었다. 그냥 저놈들 죽이면 안 될까?
한 놈 죽였잖아.
그건 메그가 기분 나쁘대서.
냄새 더러웠다고……. 메그가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리며 사탕 막대를 까딱였다. 알렉스는 그녀의 땋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도 트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를 사랑한다니. 어두운 얼굴에 트리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 인간들은 우리 모두를 말하는 거야.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트리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아는데, 그 사랑은 달라. 트리스가 알렉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도 너를 사랑해. 알렉스는 그 입술에서 흐리게 피냄새가 나는 것을 알았으나 무언가를 더 말하지는 않았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떤 짓도 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들을 죽이고 싶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기억 못 하겠지만 너를 납치했던 독립국가 말이야. 에린이 안경을 위로 살짝 올리고 피곤한 듯 콧대를 매만지며 말했다. 거기는 이미 역병이 돌고 있었어. 신권 강화를 위해 일부러 퍼트린 역병. 젊은 인간들도 제대로 먹은 자들도 없었어. 모두 전쟁에서 죽었을걸.
트리스의 손이 제 뒷머리로 파고들어 손톱자국을 내자 메그가 팔을 잡아 내렸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테이블 위에서 쥐었다 펴지기만을 반복했다. 에린이 그 손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며 검은 눈동자로 트리스를 보았다. 예전에는 타이탄이 있었지. 부정할 수 없이 전능한 힘을 가진 존재. 그 다음은 우리야. 인간이지만 그만한 힘을 가진 자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이 거대한 국가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왕의 권력에 우리라는 정당성을 부여해서야. 그게 답이야.
에린이 말을 마쳤다. 트리스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곧은 눈은 어떤 현실이든 제대로 마주하게 만들었고, 그녀 자체는 오래되고 곤혹스러운 기록에서조차 하나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오래된 석판에 새겨진 문구가 떠올랐다. 명령이 주어지면 그것을 해석하고 따를지니. 그녀의 가장 긴 날개가 길을 보여줄 것이다.
트리스는 에린의 손을 쥐고 대답했다. 그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왕궁에서 빠져나온 네 명은 새벽까지 시끄러운 술집을 피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악취가 나는 맹인 거지가 낡은 담요를 깔고 엎드려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고 주름진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한 푼만 도와주시오. 아픈 손녀가 있다오. 알렉스가 눈썹을 누그러트리며 트리스의 검은 옷깃을 쥐었다. 에린은 그 거지를 내려다보다 품에서 금화 한 닢과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허리를 숙였다. 맹인의 손이 허공을 헤매다 책 표지에 닿자 그는 음각으로 새겨진 그 무늬를 읽듯 조심스럽게 더듬고 책을 물렸다. 왼쪽으로 여섯 블록. 울타리에 장갑이 걸려 있는 곳. 지하로 가는 계단이 있소.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에린은 허리를 펴고 책을 품 안으로 숨기며 금화를 그의 낡은 담요 위로 떨어트렸다. 다음에는 손에 검댕이라도 묻히는 게 좋겠네.
그들은 어두운 계단으로 내려가며 검은 복면을 썼다. 제국 수도의 지하에 숨은 비밀 모임에는 사십 명 정도가 앉아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신원이 드러나면 고문과 사형을 면치 못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작게 마련된 무대를 보았다. 무대 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전등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곧은 등을 가진 자가 그 무대 위로 올라왔다. 트리스는 모여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신이 눈을 뜬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과 폭력의 신이다. 불합리한 것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찍어 누르고 새 질서를 세운 신. 과거에는 그들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 권력을 잡은 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이성이 없다. 개인의 욕심을 신의 이름으로 저지르지. 왕이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군. 우리의 이성을 다시금 꺾어버리고 신앙에 눈멀게 할 축제를 말이다. 거리에 떠도는 모든 노래가 신을 찬미하고 병석의 늙은이가 신의 대리자를 기다리는 일. 그들은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는데 기꺼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겠다며 군에 입대하는 일. 급변하는 사회에 몸을 내맡기고 오직 신이 굽어 살피리라 믿는 일. 그 모든 비이성적인 행동들. 왕권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다. 유일한 불빛에 의해 등 뒤로 늘어지는 검은 그림자. 단호하고 간결한 목소리가 좁은 실내를 장악하며 떨림 하나 없었다.
신은 요청된다. 지배자는 신을 부른다. 신이 정말로 응답을 하거나 깨어나거나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조종할 수 없는 존재가 눈을 뜬 것을 불행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지배자에게는 그가 부를 수 있는 신이라는 단어 하나면 충분하니까. 신은 지배자가 사회를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는 명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권력자의 신앙이 절실한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인가?
곳곳에서 작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지식인이다.
그래. 우리는 지식인이다. 교육과 재산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여기, 우리의 머리에 들어 있는 이성 뿐. 부자든 빈자든 신을 믿든 신을 믿지 않던 건강한 자든 아픈 자든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신을 거부하고 왕권을 부정하고 다수가 이끄는 사회를 만들. 불합리란 칼날에 납작 엎드리지 않고 고개를 쳐들어 왕실의 높은 담장을 무너트릴 자들! 우리는 이 상황을, 이 사회를 타계하여, 신앙이 아닌 이성과 지성으로 절대 다수가 이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함을 널리 퍼트릴 것이다!
힘 있는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어지며 주먹을 위로 치켜들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작은 박수소리가 울렸다. 누군가는 주먹을 꽉 쥐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닦았다. 누군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누군가는 감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네 쌍의 눈동자는 말없이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몇 명이 죽을지,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몇 명이 처형당할지,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의 광장 분수가 몇 리터의 피로 잠길지 생각하면서. 먹구름처럼 짙은 신앙을 밀어낼 순풍인가. 또 다른 권력자의 도래를 위한 발판인가. 그 누구도 내일이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깊은 잠. 발끝에서부터 어둠이 차올라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 기억도 꿈도 없이 의식이 통째로 들어내진 것 같은 텅 빈 느낌. 메그는 어떤 걱정도 없이 휴식에 몰두할 수 있는 잠을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익숙하고 꺼림칙한 감각이 죽음의 수의처럼 온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메그가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곁에서 눈을 감고 있던 에린이 잠깐 움찔거렸다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에는 긴 끈뭉치가 꼭 쥐여져 있었다. 메그가 에린의 안경을 벗긴 후 그 끈뭉치를 유심히 보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어 협탁 위에 올리고 기지개를 폈다. 땋은 머리가 등 뒤에서 흐트러져 잔머리가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밝은 창가로 눈을 돌리자 트리스가 책상에 앉아 서류 몇 장을 넘기고 있었다. 감금한 왕을 대신하여 국무를 보는 중이었다. 알렉스는 소파에 앉아 지식인들의 저서 중 하나를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읽고 있었다. 창밖은 밝았는데, 얼마나 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메그가 두리번거리자 알렉스가 책을 내려놓고 침대로 다가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깼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든 트리스가 각 지역의 납세증명서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요새 많이 자네.
지금 몇 시야.
네 시쯤.
이상해.
왜?
에린은 언제 잤어?
서고에서 잠들어있던 걸 내가 데려왔는데…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너희들 기억 나?
뭘?
우리가 예전에…몇 십 년 동안 잠들기 전에 어땠는지.
알렉스의 손가락이 메그의 머리칼을 정돈하다 우뚝 멈췄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메그가 고개를 위로 들어 트리스와 눈을 맞추었다. 하루 세 시간을 자고도 거뜬히 몸을 움직이던 자들이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어 어떤 소리도 듣지 못 하던 것. 잠이 들기 직전의 기억이 새하얗게 날아갔던 것. 점점, 자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리하여 죽음이 다가온다 생각했던 것. 트리스가 대답 없이 메그의 손을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 때가 다시 온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몰라. 이 감각이 익숙할 뿐이지.
그럼 거의 확실한 거 아니야?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대를 넘어가 에린의 안색을 살폈다.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때,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서 잠들었었나? 아니면 한 침대에서 서로를 안고? 알렉스는 두 번째가 찾아온다면 그렇게 끝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꼭 감긴 눈꺼풀과 갈색 속눈썹까지 이렇게나 예쁜데, 마지막까지 서로를 마주보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알렉스의 손이 에린의 뺨에 닿자 에린이 눈을 반짝, 떴다.
에린이 무어라 말하려 몸을 일으키다가 마른기침을 했다. 한참이나 물을 마시지 않아 목이 메마른 것 같았다. 알렉스는 덜컥 나쁜 생각이 들었다가도 협탁의 물병에서 미지근한 물 한 컵을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에린은 알렉스의 몸에 기대어 물 한 모금을 겨우 마시고 휴,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메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안경을 씌워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근데.
응응.
내가 들고 온 끈 어디 있어?
끈?
아, 그거……. 메그가 턱짓으로 협탁을 가리켰다. 에린이 몸을 뻗어 끈뭉치를 쥐고 위로 들어올렸다. 찾아냈어. 그러다 아직도 졸린 듯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세 명이 그녀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끈뭉치를? 트리스가 물었다.
이건 그냥 끈뭉치가 아냐. 키푸라는 고대의 기록 체계야. 양모나 면으로 만든 색색의 끈을 매듭지어 무언가를 기록하는 데 쓰였는데, 예전에 고문서들을 복구할 땐 이게 그저 대량의 수학적 데이터를 기록하는 데만 쓰이는 줄 알았지. 세금 징수나 재산 소유권 같은 거 말이야. 그런데 아니었어. 프로메테우스가 말했잖아. 우리 같은 자들이 있었다고. 에린이 동그란 얇은 밧줄에 색이 다른 수백 개의 끈이 달린 뭉치를 그들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와, 그거 멋지다. 근데.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알아. 풀어보라고 안 할게. 나도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니까.
짧게 부탁해.
에린이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이 끈 하나하나를 매만졌다. 그리고 살짝 찡그렸다가 입을 열었다. 수백 명이 타이탄의 피를 나눠 마시고, 한 명이 살아남았다. 그는 늙지 않은 채로 인간의 수명만큼을 살았다. 아주 먼 고대의 이야기를 전하는 목소리가 멀게도 가깝게도 느껴졌다. 그가 죽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자가 몰래 보관해 두었던 피를 한 모금 먹였다. 그는 눈을 떴지만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에린의 짧은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알렉스는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단단한 손이 한없이 여리게 그것만을 붙잡을 것처럼. 에린이 그 손등을 쓸며 눈을 맞추고 웃었다. 메그는 사탕의 껍질을 뜯었고, 트리스가 굳은 입술을 달싹대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곧 다시 잠들 거라는 거야?
우리가 불사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지. 계속 타이탄의 피가 필요할 지도 모르고.
잠깐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트리스는 또다시 이 육체가 왕권 강화의 도구이자 종교로 사용될 것에 대한 걱정을. 에린은 지식인들의 금지된 저서에서 읽은 새로운 사회의 부르짖음을. 알렉스는 또 다시 그때가 온다면 잠들기 전까지 사랑을 속삭일 것이라는 결심을. 메그는 인간들이 다시 한 번 더 너희를 탐낸다면 모두 다 죽일 것이리라는 생각을. 에린이 고개를 들어 트리스를 마주했다. 트리스. 이제 선택해야 해. 그 작은 입술이 내뱉는 모든 말.
트리스가 생각했다. 이것이 마지막 진실이다.
그들은 새까만 어둠만이 떠도는 동굴로 또다시 발을 들였다. 인류가 첫 역사를 나눠받은 곳. 작은 불가가 재도 산소도 없이 타오르다 그들을 반기듯 크게 휘청거렸다. 나무 등걸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자가 그들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고 앉은 그 형체가 세상의 끝에 세워진 묘석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을 시작한 신과 모든 것을 끝낼 신. 깃털 달린 지팡이의 불씨가 은빛 방패에 비쳤다.
안녕. 잡상인. 우리 이야기 좀 해야겠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었다. 자네들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살점이 드러난 채 방패를 쥐고 있는 손. 피가 엉겨 붙은 금색 머리칼. 안경알은 깨어져 시야를 가렸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푸른 눈을 핏빛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스러질 듯한 호흡과 사나운 적의는 없다. 모든 행동이 당연한 것처럼 살해를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생각을 그만두고 몸을 내맡겨라. 심박을 끌어올리고 인지를 벼랑까지 몰아가라. 방패를 세워 죽음을 떨쳐내고 망치를 휘둘러 근육을 으깨고 총알을 퍼부어 고통을 박아 넣고 마지막 한 발로 생명을 끊어내라. 핏방울이 소리 없이 바닥으로 튀었다. 커다란 몸이 불씨 밖의 공허에서 쓰러졌다. 다시 한 번, 타이탄 왕을 죽여라.
트리스는 바닥에 방패를 세우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땅 위로 붉은 피가 스며들지 못하고 새어나왔다. 강으로. 바다로. 무엇이든 태어날 수 있는 죽은 자의 산으로. 트리스는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내고 말문을 열었다.
죽기 전에 알려줘. 완벽하게 죽음을 연기한 방법이 뭔지.
쓰러진 자가 그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영원히 사는 게 벌써부터 지겨워졌나? 허물이 벗겨지고 살이 드러난 손끝이 방패 모서리를 꽉 쥐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매끄러운 방패 위로 흘러내렸다. 녹이 슬지도 어떤 물에도 녹지 않을 두 가지의 피. 불온하고 성스러웠다.
우린 완벽하지 않아. 금방이라도 다시 잠들 것 같다고.
내가 피를 나눠준다면 어떤가?
그렇게 살아가느니 죽는 게 낫지.
잘 벼린 칼날 같은 대답이 그의 말을 잘라내었다. 그는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허공을 향해 한참동안 웃었다. 어리석은 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죽는 게 낫다니. 죽어본 적도 없는 자들이 할 말이냐. 비니를 벗어 피를 짜내던 메그가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 외에 누구도. 그 누구도 필요 없어. 낮게 깔린 단호한 목소리가 마지막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성서의 글귀처럼 어둠 속으로 퍼졌다.
신조차 도망친 땅이 어떤 몰골로 스러질지 보고 싶은 것이냐.
알렉스가 한 발짝 앞으로 뻗어나왔으나 에린이 알렉스의 손을 꼭 쥐었다. 트리스는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두 눈동자가 올바르고 곧았다. 세상의 끝을 마주하고 진정한 결심을 한 듯이.
그래. 도망. 그 말이 맞아.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류를 놓지 말아야 하는 자들이.
이제는 그들이 우리를 놓아야 한다고.
지금 꼴을 보고도?
인류는 변했어.
너는 믿나? 네가 방금 뱉은 그 말을?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검은 땅. 죽은 나무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았다. 왕궁의 높은 벽과 빈자의 시체를. 사물조차 존재를 멈추는 아프고 보잘것없는 광경을. 신을 노래하는 자들과 신을 저주하는 자들이 똑같은 벼랑에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어쩌면 세상은 기울어지며 본질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조차 인류를 모른다면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조차 믿지 않는다면 그 누가 믿을 것인가?
신에게도 왕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다. 다수가 이끌어나가는 국가를 원하는 자들이.
그걸 위해 영원히 사라지겠다고.
우리가 있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할 테니까.
그들이 곧고 선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수천 명이 죽을 수도. 수만이 죽을 지도. 하지만 그 모든 게 신이 아닌 인류의 선택이라면. 우리가 거부할 권리가 있나? 그 땅은 이미 그들 거야. 우리는 역사의 일부일 뿐이야.
너희는 신이 되어서도 신을 부정하는구나.
기꺼이 부정하지.
그게 답이라고. 그게, 너희들의 답이라고.
답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변화할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다.
그들이 진정 변하리라 생각하나?
그래. 인류는 성장했고……앞으로도 성장할 거야.
끊임없이. 트리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미래를 더듬더듬 그렸다. 지니는 것만으로도 고문과 사형을 면치 못할 금서 속의 새로운 시대. 신이 내려준 왕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사회적 계약을 통해 국가를 꾸리는 다수의 세상. 살인과 불합리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의 선택이자 스스로 성장하고자 하는 의지라면 우리는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라질 테다. 태초부터 없던 존재로 돌아가 자유를 부르짖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들 테다. 타이탄 왕이 고개를 늘어트렸다. 희미해지는 목소리로, 낙관적인 말이라 중얼거리고 이 세상에 없을 비밀을 남기면서. 그 죽음을 천천히 뒤따르는 잿빛 공기. 왕의 이름. 색깔들. 신의 성명. 마침내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대의 끝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그들은 스러져가는 마지막 왕을 마주하며 그래도 단 하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네가 우리를 깨운 것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새하얀 망토와 네 개의 발소리가 바닥을 쓸며 멀어졌다.
신이 죽었다! 세계가 또다시 갈 길을 잃고 말았다. 감금당했던 왕은 진실을 목도하기 위해 감옥에서 뛰쳐나왔으나 침실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된 네 구의 시체를 보고 두 다리로 걸어 나오지 못하였다. 왕을 대신하여 행정참모가 섭정을 자처하여 신의 죽음과 관련된 언급을 일체 금지했지만 새어나가는 말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소문은 소문을 타고 지식인들의 귀로, 조그마한 쪽지로, 거리의 신문으로 퍼졌다. 신성모독의 죄로 감옥에 수감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자들과 그의 친지들은 이 소문에 분개하여 당장이라도 감옥을 습격할 듯 했고, 대륙 곳곳에서 왕권을 부정하는 봉기가 불씨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왕궁의 높은 담이 무너졌다.
그들은 그 모든 혁명의 외침을 들으며 테살리아의 깊은 곳으로 달렸다. 남은 날이 며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오래전 인류의 눈을 피해 지어둔 낡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삭았고 낡았으나 무언가가 지켜준 것처럼 쓰러지지는 않은 좁은 공간. 그들은 아주 먼 옛날처럼 화로에 불을 피우고 바닥에 냉기를 막을 천을 깐 후 가져온 음식들을 데워 먹었다. 보잘것없으나 그 무엇보다 배부른 식사였다.
화롯불에 둘러앉아 옛날이야기를 했다. 알렉스가 어느 날 안대를 하고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앞다투어 걱정했던 일. 트리스가 좀 씻으라며 메그를 차가운 강물에 던져 넣었던 일. 에린과 메그가 대련을 하다 마지막 안경을 깨먹어 며칠이고 손을 붙잡고 다녀야 했던 일.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다 누구 한 명이 졸면 손을 꼭 쥐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지금 잠들면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 죽을까?
타이탄처럼 백 년 후에 다시 깨어날 지도 모르지.
그때도 너희와 함께 있겠네.
그게 아니더라도 좋아.
맞아. 이게 우리가 바라던 끝이니까.
한날 한 시에 죽는 거?
처음부터 그랬잖아. 그렇게 약속했지.
우리 시체는 그대로 썩었으면 좋겠어.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말이야.
만약 깨어난다면 뭘 할래?
난 일단 사탕 가게에 갈 거야.
돈이 없는데 어떻게?
금화 몇 개 가져왔어. 그때쯤엔 엄청 가치 있겠지.
손버릇 좀 봐.
내키면 너희들 것도 사줄게. 술이나 찻잎이나 뭐…새 옷 같은 거.
좋아!
난 도서관에 가보고 싶어. 얼마나 바뀌었을지 궁금하거든.
찻잎은 너무 싼데.
그럼 나한테 잘 보이던가.
이 이상으로?
흠…쉽진 않겠네.
많이 웃었고 많이 사랑했다. 화로에 장작을 두어 개 더 넣을 때 쯤 에린이 깜빡깜빡 졸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트리스가 그녀의 몸을 두꺼운 팔로 받치고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메그는 그녀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 안경은 안 벗을래. 마지막까지 얼굴을 보고 싶어. 에린의 짙은 갈색 속눈썹이 이제 지는 낙엽을 뒤로하고 다시 피어나는 이파리처럼 예뻤다. 알렉스가 입을 맞췄다. 울지 않았다.
에린을 무릎에 눕힌 채 하얗고 예쁜 이마를 쓸어내리던 알렉스가 내 차례인 것 같아. 하고 말했다. 알렉스는 두 팔을 뻗어 메그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푸는 트리스의 손길을 받아내었다. 메그는 알렉스의 뺨에 이마를 누르고 달콤한 체향을 오랫동안 맡았다. 있잖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알렉스가 속삭였다. 이게 정말 죽음이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다시 태어날 세상에서 다시 한 번 너희를 사랑할 거야. 곧은 손가락 사이로 햇살 같은 머리칼이 사락사락. 트리스가 알렉스를 꼭 끌어안고 대답했다. 기다릴게. 기다릴 테니까. 사랑해.
새근새근 잠든 자들에게 언제나 그랬듯 새하얀 이불을 덮어 주었다. 메그는 맨 바닥에 앉은 트리스에게 안겨 있었다. 드문드문 끊기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이마에 입 맞춰주는 입술에 안심하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부드럽게도 풀어내는 손가락이 기분 좋았다. 나는 이 마지막이 마음에 들어. 메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겐 너희 밖에 없었으니까. 트리스가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리며 끄덕거렸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앞으로도. 내겐 너희 밖에 없을 거야. 메그가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거친 입술과 입술이 오랫동안 이어져 호흡을 앗아갔으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문턱마저 네가 주는 것이라, 좋았다. 메그가 눈을 감았다.
트리스는 불이 꺼지기 직전의 화로에 마지막 장작을 넣으며 작디작은 천국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는 끝없이 겨울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리멸렬한 겨울. 내 삶에 봄을 불러오고 여름을 가져온 유일한 자들. 몇 번씩 계절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했다. 촛불 하나를 두고 이름을 나눠 가지며 영원을 약속했던 때를. 지금까지의 시간은 너무 이기적이고 외로웠어. 우리는 심장보다 비싸고 시간보다도 긴 사랑을 맹세하자.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으니까. 트리스는 작은 창문으로 백지보다도 희고 재보다도 새까만 설산 위로 불변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니라고, 이것이 진정한 불변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는 자들을 껴안고 눈을 감았다.
반역으로. 혁명으로. 전쟁으로. 인류의 역사는 피로 쓰인다. 왕이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지식인들이 새로운 권력자로 떠올랐다. 지식인들이 파벌을 나누어 물어뜯다 자멸하여 새로운 영웅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웅은 다시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패배하여 섬에 유폐되었고, 사회는 소수의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의회를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기술의 발전과 산업혁명으로 공급과잉이 발생하자 식민지가 다시금 생겨났고 제국주의의 후발주자들은 하나 둘 전쟁을 선포했다. 그동안 그들은 몇 번이나 눈을 떴을까. 알자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대전의 마지막 전쟁터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
참가국조차 밝힐 수 없는 비밀 공동체는 실체가 있는 신을 모시는 것을 우려하여 특수한 조직을 만들었다. 백 년에 한 번 눈을 뜨는 신을 없애기 위하여. 아무것도 모른 채 몸을 일으킨 타이탄들은 무장한 인간들에 의해 죽었으며 21세기에 다다라서는 세계 증시의 붕괴를 막기 위해 무기 실험장으로 위장된 사냥터에서 부활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러나 어떤 짓으로도 죽일 수 없는 네 명의 신이 있었으니 그들의 목을 노린 자들은 동료의 눈앞에서 산채로 찢긴 후 시체조차 남지 않았다. 그들의 위대한 폭력에 압도당한 인간들은 그들을 비밀리에 모시며 복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작금에서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평화를 뒤흔드는 전쟁의 땅으로 향하기를 요청하였다. 배로, 기차로, 비행기로, 먼 길을 걸어서까지. 그들이 가지 못할 곳은 없었고 그들이 이기지 못할 자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들께서 국제 테러리즘 네트워크의 수장을 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수십 개의 보안 절차를 통과하여 긴 복도에 들어선 그들 어깨에 수많은 손들이 망토와 코트를 걸쳐 주었다. 그들은 피와 흙이 묻은 군화로 카펫을 밟아 회장의 가장 높고 가장 어두운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새하얀 망토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각 국가에서 보낸 자들은 두려움 없이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려 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호흡 에도 위협과 압박이 섞여 있는 것 같았고 입을 열면 침묵에 목이 베여 죽을 것 같았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손가락. 피와 흙먼지가 묻은 군화 밑창. 타오르듯 붉은 동시에 무엇보다 서늘한 눈. 분노와 전쟁의 신은 흉터 많은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꽉 쥐었다가 손바닥을 탁탁 털며 입을 열었다. 우리 슬슬 쉬려고 하는데. 적당히 신분 좀 만들어줄 수 있지?
예?
여덟 국가의 대표들이 동시에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트리스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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