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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화/DEMIGOD

DEMIGOD. 01

Eugene_FMF 2018. 11. 28. 00:59

 

 이 대륙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 지 수십 년이 지났다. 나는 이 책을 씀으로써 세 가지 각별한 기쁨을 느낀다. 첫째, 군인들이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내 귀와 눈에 닿았던 위대한 사고와 지성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인류가 저지른 실수의 반복을 막고 바람직한 방향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이탄 코이우스가 말하길, 인류는 프로메테우스 통치 하의 천 년보다 백 년 간의 전쟁을 통해 더 방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화약 발명으로 인한 군수공학의 성장과 확산이 시초였다. 프로메테우스의 타계 후 타이탄들은 빈 왕좌에 앉기 위해 저마다 군사를 모았고 코이우스의 군대는 조잡한 창과 가죽 갑옷 대신 쇠칼과 권총을 쥐었다. 초기의 권총은 손잡이에 짧은 활강통을 장착했을 뿐이었으나 이단을 심판하기에는 충분했다. 이후 기술과 폭력에 감명 받은 똑똑한 인간들이 코이우스 아래로 모여들자 연발 매커니즘을 장착한 피스톨 같은 신무기가 삽시간에 쏟아져 나왔고, 유례없던 살인 무기를 가지게 된 인류는 신의 명을 받들기 위하여 전쟁의 구렁텅이로 걸어들어갔다. 

 총기의 발명으로 작은 규모의 무리나 부족, 신을 모시지 않는 국가는 역사에서 배제당하기 시작했다. 라이플과 개틀링으로 무장한 백 명은 5만의 군대도 쉽게 꺾을 수 있었다. 렐란토스의 군대가 카발라로 쳐들어가 20키로미터에 이르는 시체 언덕을 쌓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렐란토스님의 부하로서 이단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나니 그대들을 또한 가르치러 왔소. 그러므로 전체 바빌로니안을 대신하여 그대가 렐란토스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는 바, 그것이 그분의 뜻이요 또한 그대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이오.” 이것은 렐란토스의 수족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인간이 카발라의 지도자에게 했던 말이다. 카발라의 지도자가 그 말을 거절하자 그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만심 가득한 개에게는 공손하게 굴 필요가 없다. 렐란토스님의 대리자로서 내가 죄를 사하나니 저 자를 쏘아라.” 

 급작스러운 병기공학의 발전과 전쟁은 평화로웠던 봉건사회를 혼란에 빠트렸다. 강자들은 문명과 의식의 발전 없이 약자를 수탈했으며  식민지를 만들어 자원을 빼앗고 군수공장과 토목 현장으로 밀어 넣었다. 그 중 일부 엘리트 계급과 진실로 타이탄을 따르게 된 자만이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각 타이탄의 군대는 더욱 똑똑해지고 더욱 충성스럽게 변하였다. 프로메테우스 통치 아래에서는 작은 마찰조차 중재 받았던 세상이 왕좌를 원하는 타이탄들과 타이탄의 은총을 원하는 인간들로 인하여 핏빛으로 물든 것이다.  

 나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인간으로, 한때는 타이탄의 병사였다. 모시던 신이 죽은 후 인간들의 패권전쟁에 끼어들어 우리 문명의 재건을 꿈꾸던 헛된 자. 수천 명의 군인들을 통솔하며 어떤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군에 들어와 어떤 몰골로 세상을 떠나는지 질리도록 보았다. 죽음은 헛된 것이라 여겼으며 고통도 두려움도 그 무엇도 내 영혼을 꺾지는 못하리. 신이 시작했고 신조차 끝내지 못한 전쟁이 이 땅에서 사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타이탄 왕의 피를 뒤집어쓴 채 높은 곳에서 우리 인류에게 이념을 건네는 네 명의 거룩한 존재를 마주할 때 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인간이란 수천 가지 이유로 죽는 법. 강하고 오만한 자들을 꺾는 유일한 방법은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 명의 군인들이 무릎을 꿇었는가? 더 이상 왕은 없다는 그분의 말씀에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 아니된다고 부르짖는 것을 보았다. 당신의 말씀대로 인류는 스스로를 이끌 수 있을지언정 그 이정표를 세워줄 존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거절과 은거를 반복하셨으나 마침내 인류를 위해 금빛 왕관을 받아들이셨다. 가장 먼저 행하신 것은 식민지의 철폐와 노예의 해방이었다. 죽은 타이탄들의 보물을 처분하여 배상금을 지불하고 그들이 원하는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하셨다. 또한 전쟁이 없어지자 갈 곳 없어진 군인들을 재건 사업에 투입하였으며 각 분야에 뛰어난 자들을 행정 부서의 장으로 임명하셨다. 스스로 모자람 많다 생각하시어 하루에도 수권의 책을 탐독하셨고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것 또한 잊지 않으시니 모두가 성군이라 입 모아 말하였다. 그들의 통치에 반발하는 자들이 일부 있었으나, 모든 타이탄의 아버지 크로노스와 타이탄 왕 프로메테우스를 꺾은 힘을 이길 자는 없었다.

 먼 옛날 타계했던 타이탄들이 부활했을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께 전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일은 없었다. 찰나를 몇 십 갈래로 쪼개어 그 순간마다 눈을 번뜩이는 존재들. 전장의 흙과 화약 냄새를 맡으며 한계와 법칙을 집어던지고 무엇에게도 답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순응하지 않는 자들. 앞으로 나아가라. 피를 보아라. 그리고 승리하라. 우리는 희미하게 남아 있던 타이탄에 대한 복종심과 경외를 버렸다. 신의 피를 뒤집어쓴 채 차갑게 빛나는 네 쌍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우리를 위한 답이요 진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람 불지 않는 땅에서도 휘날리는 흰 망토를 보며 우리는 경외의 대상을 다시 세웠다.  

 냉정한 동시에 어진 왕. 찬란한 문명의 발전을 이끌었던 과학자. 불타오르는 망치를 드높이 치켜든 기사단장. 이단들의 암살 시도를 수백 번 막아낸 왕의 그림자. 시간조차 거스른 듯 수명이 다하도록 프로메테우스를 죽였던 그 모습 그대로 집권하시다 한날 한시에 잠드신 그들을 우리는 신으로 확신하였다. 이 책의 본론에서는 그들의 업적과 일대기를 여러 분야에 걸쳐 서술할 것이나 우리는 그 무엇보다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께서는 이 책 한권으로 담지 못할 일을 이루었으며 이제는 성체로서 영원히 이 나라를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이 책을 정보, 작전, 군수 분야의 참모를 역임한 왕실 최고위 과학자 에린께 바친다. 

 

 

 

 

 어둡고 긴 복도를 걸어가던 불빛이 훅 하고 꺼졌다. 잠시 후 작게 숨 끊어지는 소리와 묵직한 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둠과 분간 가지 않는 천으로 온 몸을 두른 자들은 곧 네 귀퉁이를 은빛 촛대로 장식한 석관 앞에 섰다. 그들 중 한 명이 걸어 나와 떨리는 손으로 석관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수많은 다이아몬드 무늬와 글귀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나의 지도를 따르라, 그대의 나날을 축복할 것이니. 그들은 석판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고개 숙인 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했다. 잠들어 계신 절대자께서 그들의 희미한 미래를 굽어 살피시길 바라며 간절하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오랫동안 이어진 후, 그들은 네 방향의 촛불을 엄지와 검지로 조심히 끈 다음 그 몸을 들어올렸다.  

 

 에린은 눈꺼풀 너머로 흔들리는 불빛을 어렴풋하게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 굳어 있던 근육이 당겨지면서 희미한 아픔을 동반했다. 웅웅대는 청각 속에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입 안은 비렸고 목과 머리가 무거웠으며 흐렸던 시야에 잿빛의 벽이 들어왔다. 부채꼴의 석재를 아치 형태로 쌓아올린 천장도. 벽에는 작은 창문이 몇 개 나있었으나 밖은 밤인 듯 어두웠고 에린은 그제야 불빛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의복을 갖춰 입고 무릎을 꿇은 자들이 감히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있었다. 

 에린은 알렉스가 기지개를 펴고 어깨를 내리눌러 목을 푸는 것을 보았다. 메그는 엎드린 채로 잠깐 몸을 일으켰다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다시 얼굴을 묻었다. 에린이 한쪽 눈을 찌푸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잠겨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상황 정리가 필요한데, 라고 툭 내뱉었다. 그들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존엄하신 분이시여……. 

 본론부터 말해. 에린이 비몽사몽한 두 명의 중얼거림을 들으면서도 짧게 끊어 말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싫어했으며 저들이 누구이며 자신들이 왜 이런 곳에서 눈을 떴는지 잠들기 전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했는지 기억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그녀의 말에 가장 맨 앞에서 무릎 꿇고 있던 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으나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탄복과 경외와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성체를……트리스님의 신체를 도둑맞았습니다. 

 엎드려있던 메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쥔 채 해가 떠오르는 땅을 달렸다. 그들의 오래된 의복은 삭지 않게 처리되어 신전 높은 곳에 걸려있었으므로 검은 군용 코트를 입은 채였다. 지평선을 너머 온 곳을 비추는 일출이 높게 묶은 금색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반짝거렸다. 인간들이 정기적으로 조심스레 손질한 총기는 삐걱거림 하나 없었고 핏빛 망치는 죽은 자 없이도 홀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인간들은 그들 네 명이 한날 한시에 잠든 후 그 육체를 성체로서 모셨다고 했다. 곳곳에 신전을 지어 그들의 가르침을 널리 퍼트렸으며 왕궁의 가장 깊은 곳에 그들을 안치했다고. 인간들은 네 명의 신이 그들의 땅을 영원토록 살피실 것이라 믿었으나 독립을 주장하던 땅이 성벽을 쌓고 독립전쟁을 벌였다고. 몇 번의 전투로 그 오만한 것들의 기세를 꺾어 놓자 발칙하게도 왕의 성체를 훔쳐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설명은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으나 그들은 언제나 그러했다. 평생토록,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땅을 박차는 자들. 두려움과 혼란은 없었다. 

 그들은 뒤를 따르겠다는 인간들을 뿌리치고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 앞에 섰다. 그을음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었으나 지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알렉스가 성문을 바라보며 망치를 두 손으로 고쳐 쥐자 육중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신새벽에 깔렸다. 곧이어 그들은 한껏 몸을 낮추고 있는 자들을 지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전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저희의 땅으로 걸음해주시나니 영광과 동시에 탄복하나이다, 따위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세 귀퉁이에 입구가 나 있는 다이아몬드 형태의 신전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3량 바실리카는 아치볼트 형태로 둥글었고 외벽에 아치의 무게를 버티는 수십 개의 버트레스가 서 있었다. 그들은 조각된 수많은 장식과 글귀를 지나 인간들이 열어주는 문을 통하여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가, 숨을 멈췄다. 네 귀퉁이가 직선으로 만나는 교차랑의 사방향 계단, 그 가장 높은 자리에 마치 제단처럼, 푸른 천이 깔려 은빛 왕좌를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높게 난 여러 개의 창문으로 빛이 새어 들어와 상아빛 벽에 다이아몬드 무늬를 남겼다. 뺨과 한쪽 눈을 부드럽게 가리고 있는 짙푸른 머리칼 끝에도 빛이 걸렸다. 월계잎을 정성스레 따 금을 입히고 가장 고귀한 자의 피를 박은 듯한 왕관에도. 정갈히 감겨 있는 두 눈꺼풀, 굳게 다물려 있는 입술, 겉은 푸르고 안감은 새하얀 망토가 둥근 목깃에서부터 바닥까지 기품 있게 쭉 뻗어 있었다. 두 어깨 위로 부드러운 양털이 짧은 케이프처럼 덧대어져 수많은 견장과 금색 끈이 화려하게 매달려 있었고, 어깨와 반대쪽 허리를 가로지르는 붉은 천이 허리띠에 묶인 채였다. 은빛 팔걸이에 두 팔을 올리고 곧게 허리를 펴고 앉은 모습은 당장이라도 눈을 뜨고 명령을 내릴 것 같았다. 등 뒤로 넓게 펼쳐진 상아빛 아치 돔이 아침의 태양빛을 받아 성서처럼, 영원처럼 불멸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은 삼켰던 숨을 내뱉고 뒤돌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인간들에게 무기를 치켜들었다. 

 

 트리스는 깨어난 후 세 번의 입맞춤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피투성이였으나 흐린 의식으로도 제 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린이 안경알의 피를 닦아내며 천천히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익숙한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트리스는 에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어깨에 달린 양털과 무겁고 긴 벨벳 망토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서 있는 세 명을 한 번씩 꼭 안은 후 침실의 육중한 문을 벌컥 열었다. 왕실의 인간들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죄인들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건 또 무슨…….

 트리스가 고개를 숙이며 한쪽 눈을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낮춰 맨 앞에 무릎 꿇고 있던 자의 어깨를 툭 치며 몸을 일으키게 했다. 주름이 있는 눈가를 떨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남자였다. 남자가 작게 폐하, 하고 중얼거리자 트리스가 진저리치듯 허리를 폈다. 몇 십 년을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호칭이었다. 

 대강 들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 네가 설명해. 

 ……감히 말씀 올리자면, 

 그전에 넌 누구지?

 트리스의 물음에 나이든 인간의 얼굴이 굳었다. 혀가 입 안에서 떨려 말을 내뱉지 못할 것 같았다. 트리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 짧은 침묵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눈을 내리깔고 더듬더듬 말했다. 현재의…왕입니다. 트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땅은 아직도 그렇게나 혼란스러운지 혹은 인간이란 어찌되었든 왕이 필요한 자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기준으로.

 가장 강한 자가 왕이 된다는 말씀에 따라, 

 난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너…어디 출신?

 어머니께서 군수사령부 사령관이셨습니다.

 그 녀석이 자식을 낳았다고? 허…….

 트리스가 뒷목을 꾹 눌렀다. 잠든 후 몇 년이 지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입을 다물자 자신이 만든 침묵이 폐 안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희미한 공기. 짙은 혼란. 문가에 서 있던 에린이 두 발짝 앞으로 나와 트리스의 어깨를 툭 쳤다. 50년은 지난 것 같네. 트리스는 손톱 밑에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우릴 어떻게 살려냈는지 들어야겠다.  

 살려낸 것이 아닙니다…눈을 감으신 후 언제나 살아계시듯 했습니다. 성체로 모시긴 하였으나 혈색이 있었고 그저 잠드신 것처럼,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어떻게 깨웠냐고 묻고 있잖아.

 나이 든 남자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비밀 뒤에 더 큰 비밀이 있다는 듯이. 두려운 존재 뒤에 더 두려운 존재가 있다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트리스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눈가의 주름 몇 개와 멋들어진 콧수염,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상체 근육과 단단한 두 다리. 하지만 네가, 모두가 원하는 지도자인지는 알 수가 없어. 트리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뭉쳐있던 근육들이 제 길을 찾아 움직이며 준비를 했다. 

 너무 오래 잤나봐. 전에 어떻게 사람들을 대했는지 기억이 안 나네.

 어진 왕을 연기했었나. 엄격한 군주로 살았던가?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그 말은 지긋지긋한 호칭도 무거운 망토도 언행을 조심할 필요도 이제 없다는 뜻. 그녀는 한 세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남자의 턱을 치켜올려 눈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큰일 나기 싫으면……당장 대답해.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 힘이 들어간 주먹 위에서 부푼 핏줄들. 가장 고고한 왕관의 보석과도 같은 그 붉은 눈. 남자는 침을 겨우 삼키고 입을 떼었다. 압도적인 폭력이 신이 된다면 바로 이 형태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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