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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화/DEMIGOD

DEMIGOD. 02

Eugene_FMF 2018. 11. 28. 01:00

 

 이 세상은 산산이 찢어져 안정을 잃어야 한다. 

 잿더미 속에서 그들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어두웠다. 칠흑이었다. 시간조차 흐르지 않는 듯 했다. 그 어둠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일말의 가능성만 있는 세계. 그렇게 진정 영원이 지난 후 태초의 빛에서 신들이 태어났으니 그들은 스스로를 타이탄이라 칭하였다. 수백의 타이탄들은 질서도 법도도 없는 땅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다, 숨 끊어진 자의 피거품에서 작디작은 생명체가 몸을 일으켰을 때 전쟁을 그만두었다. 신들은 그 하찮은 존재에 대한 긴 상의 끝에 빛을 신의 영역이라 결정 내렸고 그 초라한 생명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 태양을 모르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그 결함 가득한 비이성적 존재를 누구보다 사랑한 신이 있었으니, 이 곳이 그가 인류에게 나누어준 불의 시초, 최초의 불가였다. 

 오랜만에 보는 세상은 어떤가? 

 …….

 다른 질문을 하지. 더 이상 왕은 없다고 말하였거늘, 왕이 된 기분은 어떤가?

 검붉은 눈이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금이 입혀진 지팡이 끝에서 여섯 개의 깃털과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아무것도 없는 어둠을 찢을 것처럼 높게 자랐고, 죽은 신의 등뼈인지 첫 우주의 파편인지 모를 돌덩이가 그 불가를 둘러싼 채였다. 캄리 산의 깊은 동굴. 지성과 힘을 갖춘 자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에서 다섯 존재가 인류의 운명을 또다시 등에 지고 원탁에 앉아 있었다.  

 입 다무는 게 좋아.

 또 주먹부터 쓰려는 거냐.

 네가 그저 전쟁에 미친 잡상인이었을 때야 죽일 이유가 없었지. 정보가 필요하긴 했으니까. 하지만 네가 모든 일의 원흉인 걸 알았을 땐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푸른 후드를 쓴 자가 말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를 죽이러 온 거라고. 

 그래.

 하지만 말은 들어보고 싶고. 

 그래. 

 인간들은 너희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니까. 대답한다 해도 경외와 존경으로 바른 말을 못 하지.

 ……그래. 그녀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새까만 탁자 위를 보았다. 그 눈빛이 작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바람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우리를 깨운 건지 말해. 그녀가 말했다.  

 전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 난 너희들을 선택한 적 없고 너희들을 깨운 적도 없다. 그저 인간들에게 피를 조금 나눠주었을 뿐이지. 그게 어떻게 사용될지는 알았다만 쓸모가 있을 줄은 몰랐고.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투명한 안경알이 움직이는 불빛 따라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내가 아는 걸 말해볼까. 한날 한시에 잠들듯 영혼의 불씨가 꺼진 자들. 대륙의 통일을 이루어냈으며 여태껏 없던 평화를 인간의 손으로 가져온 자들. 너희는 타이탄의 왕을 죽였고 모든 타이탄의 아버지를 죽였으며 가장 강한 타이탄들을 차례로 도륙했지. 그래, 타이탄마저 깊은 곳에 처박는 게 한계였던 우리의 아버지를 말이다. 그 과정에서 몇 방울의 피를 맞았을까. 너희들이 만들어낸 우리의 피는 이미 강이며 바다다. 없던 생명도 태어나는 피바다에서 너희가 신이 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느냐?  

 말을 마친 자가 지팡이를 쥐지 않은 손을 올리며 웃었다. 옷깃 스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동굴 안에 커다란 정적이 찾아왔다. 그림자조차 죽고 불빛과 어둠만 있는 기이한 공간. 빠드득하고 이 가는 소리가 싸늘하게 깔렸다. 

 허점을 못 숨기는 거야, 안 숨기는 거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자가 턱을 들며 그를 보았다.

 내 말에 허점이 있다면 말해보게나. 

 타이탄은 백 년 후에나 부활하잖아. 인조적인 타이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 했어. 복구했던 수천 권의 고문서에도 말이지. 

 부활에 대한 건 나도 장담 못 하겠군. 하지만 없던 이야기는 아니다. 몇 세기, 몇 십 세기 전이었던가. 인간이면서도 신의 꿈을 꾼 발칙한 자들이 있었지. 피를 마시고 불에 타듯 죽은 자들이 말이다. 그는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눈을 감았다. 왜 너희들은 다른지 묻지 않기를 바란다.

 왜 우리들은 다른데? 붉은 옷을 입은 자가 몸을 당기자 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 그런 힘을 가지고 인간이라 주장하는 건 우습잖나. 

 흐음. 사탕 막대가 까딱거렸다. 그리고 어떤 말도 더 나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듯. 모든 일이 납득가지는 않으나 믿을 것이 그것 밖에 없다는 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부터 분노와 혼란이 일었다. 형식 없는 감정들이 고요하게도 발 아래로 차곡차곡, 쌓였다.

 ……이걸 선택한 건 아니었어. 

 선택은 누구든지 해야 하는 거다. 내 딸 스틱스가 말하지 않더냐? 너희들은 지겨운 전쟁을 끝내길 선택했고, 신을 죽이기를 선택했고, 왕이 되기를 선택했지. 그런 몸이 된 것은 선택의 결과물이고 말이야. 

 그래. 왕이 되었던 건 내 선택이야. 하지만 필요하다 생각했다. 황폐해진 땅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현명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인류는 인류 스스로를 이끌 수 있을 거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라고. 

 그것 참 낙관적인 말이군. 나 또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너희가 잠든 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아느냐. 누군가는 너희를 신으로 모셨고 누군가는 강력한 왕이 없는 국가에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지. 누군가는 백 년이 지나 몸을 일으킨 타이탄들을 죽여야 한다 말했다. 인간이 타이탄을 죽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수십만의 목숨과 두려움 없는 영혼 뿐. 인간들은 너희와 달라. 권력을 쥔 인간들은 전쟁터에 몸을 내맡기지 않는다. 타인의 피땀으로 타인의 재산을 갈취한 군의 지도자는 왕이 되었지. 온갖 자세로 말라비틀어진 육체와 갈기갈기 찢겨 구더기에게 몸을 내준 시체는 그가 아닌데도 말이야. 나는 인간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지. 그들 중 사랑하는 인간의 이름을 외치며 용기 있게 죽은 자도 분명 있었다. 허나 모든 자들이 두려움을 버릴 수 있나? 모든 자들이 인류를 위해 싸울 수 있겠나? 개인의 권력욕에 흔들리는 수십만의 목숨이 정당화 될 수 있냐고? 인류는, 퓨리즈여.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하지 않다. 멍청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자들의 모임이지. 욕구와 신앙심이 섞이면 더 진창으로 빠져드는 게 인간이야.  

 그의 후드 아래로 그늘이 졌다.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그는 앉은 채 지팡이 끝을 들었다가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불가에서는 말라비틀어진 나뭇조각이 타며 영원히 재를 내뿜고 있었다.

 미노티우스가 가장 먼저 죽었다. 앞서 말한 수십만의 군대에 의해서. 코이우스는 인간과 타협을 했다. 소수의 인간들에게 그의 기술을 전해주겠다고 했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렐란토스는 사막 깊은 곳에 숨어 있고. 인류에게 신을 죽일 영혼이 깃들게 된 것이야. 하지만 보아라, 이제 그들이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찬미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인류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진실이다. 

 마지막 진실. 트리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다시 묻지. 프로메테우스가 웃었다. 인류가 숭배하는 유일한 신이 된 기분은 어떤가? 

 트리스는 대답 없이 일어나 그의 붉은색 후드 뒷목을 붙잡고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의자가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온 어둠 속에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웃고 있는 새빨간 눈동자는 그것이 그저 화풀이임을 아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고요했다. 영원히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너희 같은 자들도 만나게 되니까. 하지만 네게는 있나? 자신이? 그 어떤 꼴을 보아도 인류를 사랑할 자신이 있을까? 불가 옆에 서 있는 그녀의 그림자가 길고 어둡게 졌다. 거대한 존재의 등줄기처럼. 피거품 같은 눈동자가 시리게 가라앉아 오랫동안 그를 보았다. 어떤 것에도 대답이 없었다. 

 새하얀 망토와 네 개의 발소리가 바닥을 쓸며 멀어졌다. 프로메테우스는 몸을 일으키며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변변찮은 잡상인은 언제까지고 여기 있겠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돌아오게나. 그는 마침내 움직이는 것이 없어질 때 까지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웃었다. 

 

 캄리 산에서 돌아온 그들은 흙발로 백 개의 열주 기둥이 웅장하고 높게 늘어선 상아빛 복도를 걸었다. 흰 망토의 움직임 따라 그들을 찬양하는 자들이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들어간 왕의 침실은 이미 자신의 것이라는 듯 정돈되어 있었고, 흑단나무로 만든 집무실 책상 위에는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왕의 인장과 깃펜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트리스는 잠들었던 사실을 잊을 만큼 모든 것이 제자리인 실내에 잠시 아득해졌다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이 그녀의 목을 죄고 있었다. 

 트리스, 또 왕 하는 거야? 알렉스가 그녀의 호흡을 지켜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모르겠어.  

 이대로 사라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세상은 다시 엉망이 되어버릴걸. 에린이 작은 수첩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무언가를 적으며 말했다. 트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메그는 활짝 걷혀 있는 커튼을 치고 넓은 침대로 기어들어가며 하품을 했다. 뭐가 됐든 좀 잘래. 흰 이불 아래에서 꾸물거리는 형체가 몇 십 년을 지나서도 한결같아 어두웠던 표정을 약간 풀자, 정중한 두드림이 문을 두 번 울렸다. 모두의 미간이 깊게 찡그려졌다.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네 존재가 돌아온 궁은 활력이 가득 찼다. 격식을 기꺼워하는 그들을 위하여 색색의 띠와 장식은 최소화했으나 가장 고급스러운 옷감만을 모아 만 번의 자수를 놓은 의복을 바쳤다. 바닥까지 끌리는 새하얀 망토와 책을 넘기기에도 불편하지 않은 장갑, 클로버 무늬가 새겨진 브로치와 금색 실이 목까지 퍼져 있는 붉은 자켓 같은 것을. 언제나 마음 깊이 모시던 존재가 벽화에서 걸어 나온 듯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기록관은 그 모습을 수십 줄의 문장으로 적어내렸다. 사랑해 마지않는 신이 이 곳에 다시 한 번 걸음한 날을 남기기 위하여. 경건하고도 영광스러우니, 우리 이 날을 영원토록 기억하자. 

 다이아몬드 형태의 왕궁 한 가운데. 여덟 개의 아일이 천장을 받치고 수십 개의 정측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팔각형 아치 천장의 꼭대기에 12미터의 쇠사슬로 매달린 거대한 촛대가 있었고 2층 갤러리 아래로 매달린 네 가지 색의 깃발들이 매일 먼지를 털어낸 것처럼 깨끗했다. 석조 기둥에는 아름다운 무늬 대신 글자가 빼곡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지도자, 교육자, 충성하는 자, 훈련받은 자에 대한 문구였다. 

 그들은 넓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앉아 정갈한 음식들이 가지런히 놓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기뻐 보였고 메그는 홀 너머에서 들뜬 인간들이 제가 들어가겠다고 다투는 것을 들으며 시끄럽다고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았다. 그들 옆으로 찻주전자를 든 자들이 한 명씩 서서 시중을 들려 했으나 트리스가 손을 내저으며 물렸다. 시종들이 아쉬운 발걸음으로 홀을 떠나자 알렉스는 손으로 빵을 덥석 집어 물었고 에린은 술 한 모금을 먼저 했다. 경직된 어깨로 가만 앉아 있는 전 국왕의 얼굴에는 기쁨과 긴장이 어려 있었다. 트리스가 그 얼굴을 빤히 보며 턱을 괴었다. 

 늘 이렇게 식사를 해? 

 평소에는 검소하셨던 생활을 본받아 여덟 가지 이하의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왜. 

 축하할 날이라 생각하였는데 혹 유쾌하지 못하셨다면…….

 뭘 축하해? 

 폐하께서 눈을 뜨신 것을, 

 그렇게 그만 부르라고 했지. 왕은 너 아니냐? 트리스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눈을 찌푸렸다. 남자는 그녀가 찻잔을 탁, 하고 내려놓을 때 까지 아무 말도 못 했다. 신성을 모독할 수도 신의 말에 부정할 수도 없었으므로.

 아니면 너희들은 내가 눈 뜰 때마다 다시 왕으로 복귀하고, 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다음 말에는 긍정하고 싶었다. 우리는 마음 깊이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몇 세기를 넘어 이 땅을 굽어 살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굳은 입술이 움직이기만 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에린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알렉스는 따뜻한 초콜릿 파이를 메그 쪽으로 밀어 메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가 메그가 밖이 시끄럽다고 중얼거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홀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그 움직임을 모두 보고 있다가 겨우, 물리라고 말하겠습니다, 한 마디를 뱉었다. 트리스가 고개를 작게 젓고 포크를 들었다. 

 됐다. 몇 명이 이걸 만들었겠어.

 트리스는 화려한 만찬에 손을 대면서도 표정을 펴지 않았으나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랫것들을 생각하시는 어진 왕,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역시 그녀뿐이라 생각하면서. 그 둘을 지켜보던 에린이 작게 혀를 찼으나 아무도 듣지 못했다. 

 

 돌아오신 왕께서 출전 준비를 하시니 온 병사들이 모여 갑옷을 닦고 무기를 손질하였다. 수천 필의 말에 타이탄 토벌을 위한 물자를 싣고 사막의 뜨거운 햇볕에 대비하여 물 또한 아낌없이 길었다. 닳은 끝과 거친 흔적까지 보존하여 매일 닦아두었던 은빛 방패를 올려드렸으며, 묵직한 신의 망치는 여덟 장정이 힘겹게 옮겨 바쳤다. 또한 왕실 과학자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원리를 알 수 없었던 공중 센트리건과 그 누구도 그렇게 사용할 수 없는 제식 저격총도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다. 각자의 옷을 갖춰 입으신 그들께서는 화려한 견장과 동물의 털 없이도 누구보다 고귀하시어 철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들을 무색하게 만드셨다. 허나 그들께서는 수천 수만의 군을 물리며 단 네 명으로 출발하시어 이틀 만에 바빌론의 타이탄을 참수하고 돌아오셨다. 그리고 역사의 일부분을 목도하고자 한 어리석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타이탄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경외를 패대기쳤지.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을 그만둬라.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꺾되 버리지는 마라. 맹목적인 믿음으로 목숨을 버리지 말라는 말이다. 전장에서도 사랑하는 자에 대해 끝없이 생각해라. 나를 믿지 말고 사랑하는 자와 너희의 이성과 타고난 본능을 믿어라. 그것이 너희들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무슨 생각 해? 

 왕의 침실. 창가. 소파에 앉아 있던 트리스가 고개를 들었다. 높은 천장에 쇠줄로 매달린 직사각형의 천개 걸이가 있었고, 그 아래의 침대에는 저녁을 배불리 먹은 알렉스와 메그가 꼭 붙어 자고 있었다. 흰 셔츠를 입은 에린에게서는 방금 씻은 듯 부드러운 향이 났다. 다 말리지 않은 머리끝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트리스는 붉은 카펫 위에 물자국이 남는 것을 보다 에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 말을 해도 됐을까? 

 인간들이 충격을 받았을까봐? 아니면 그 말 자체가 틀렸을까봐?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어. 경외를 버리게 해야 해. 

 이런 생각이 들어. 처음부터 잘못했던 건가. 그 자리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나. 인간들이 스스로 질서를 찾게 뒀어야 했을까. 깊은 눈매가 근심을 가지고 어두워졌다. 고개를 숙여 앞머리가 눈을 가리자 에린이 차가운 손으로 군청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쓸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그런 생각은 의미가 없어, 트리스. 모든 타이탄과 지도자가 사라진 후에도 세상이 엉망진창인 걸 봤잖아. 우리가 나서지 않아서 수십만이 더 죽었다면 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받아들인 것뿐이야. 죽음을 최소화했고, 인류간의 강한 유대와 믿음을 만들었고, 타이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게 했던 거. 우리가 죽은 후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였지.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독립에 방해가 된다면. 죽지 못 하게 된 우리가 인간의 사고를 정체하도록 한다면. 

 도망칠까? 

 에린이 웃었다. 유리알 너머로 보이는 부드러운 웃음이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다. 트리스는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다 안경테에 손을 대어 조심히 벗겼다. 인간들은 내게 언제나 3순위였어. 2순위는 지식, 1순위는 알지. 알렉스도 메그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 그 때로 돌아가기는 싫다고. 우리가 서로를 독점하지 못 하면서도 평화의 기둥이 되었던 건 전부 너를 위해서였지만, 너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들이 싫다고.  

 마치 비밀처럼 조용한 속삭임. 그 누구도 훔쳐듣지 못할 대화. 그들을 찬미하는 자가 듣는다면 손을 떨다 울음을 터트릴 말들. 하지만 그들은 태초부터 그러했고 그들 간의 유대와 애정은 바늘구멍조차 없었다. 트리스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에린의 어깨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잠깐 동안 촛불의 흔들거림이 멎은 듯 했다.  

 네 말이 진심인 건 알아. 너희들이 누구보다 나를 위하는 것도 알지. 하지만 우린 좀 더 고민해야 해. 최선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해. 

 에린은 닿았던 입술에서 쇠 같은 맛이 나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촛불 그림자가 진 얼굴.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과 고뇌가 담긴 눈동자. 수백 번을 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나는 저 표정에 약하다고 생각하면서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기대도 안 했어. 그리고 웃었다. 트리스는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다시 꼭 안았다. 그들은 좁지도 넓지도 않은 침대로 들어가 자고 있는 두 명을 끌어안고 촛불을 불어 껐다. 그리고 너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어둠마저 편안한 것이라 생각하며 잠든 자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좋은 꿈을 속삭였다. 

 

 그랬다. 화약 냄새와 흙먼지 앞에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으나 타인의 존망에는 누구보다 신중한 자들. 죽어가는 인간들의 비명을 무시하지 못해 안온한 삶을 버린 자들. 행하는 모든 것들이 희생이라는 생각은 일말도 하지 않으며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구는 처음부터 없던 자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뿐인, 혼자서는 불완전하나 함께할 때 서로를 완벽하게 만드는 존재들. 평범한 인간이 그들을 초월적 존재로 숭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인간이란 가지지 못한 것을 질투하거나 신격화하며 그들은 신 앞에서 멍청해지나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신의 책임은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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