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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개처럼, 그녀는 꿈속에서 사냥을 한다.
비가 그칠 때쯤에 알렉스는 잠에서 깼다. 창틀에 매달려있던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면서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아직 침침한 응접실에서 기지개를 쭉 폈다가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씻었던 몸이 기분 좋게 나른했다. 그녀는 목과 어깨를 주무르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에린의 열을 재어본 후 깊이 잠들어 있는 세 명의 이불을 여며 주었다.
알렉스는 난롯가에 말려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양동이 두 개를 든 채 마당으로 나갔다. 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을을 둘러보다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 놓은 물펌프를 찾아냈다. 오래된 펌프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펌프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두 발에 힘을 주고 서서 수동 펌프의 손잡이를 눌러보았다. 차가운 지하수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손으로 물을 받아 냄새를 맡아보고 물을 몇 번 버린 후 양동이 두 개를 가득 채워 돌아갔다.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였다. 다 끓인 물은 양철통에 다시 부어 식혔고, 식힌 물 약간과 밀가루를 섞은 반죽을 달군 팬에 얇게 구웠다. 버터나 계란이 있다면 조금 더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말린 버섯을 물에 끓인 것 보다는 나았다. 음식 냄새를 맡고 드물게 일찍 일어난 메그가 부엌에 들어오다 밀랍으로 봉해놓은 산딸기 과일청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렉스는 당장 뚜껑을 열려는 메그의 어깨를 쥐고 부엌에서 내보내며 다른 두 명을 깨워 달라고 말했다.
에린의 열은 밤새 진정된 것 같았다. 알렉스는 팬케익과 과일청 한 병, 따뜻한 물주전자와 컵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식탁 의자를 장작으로 써버려 식사를 바닥에서 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과일청이 듬뿍 올라간 팬케익 몇 장을 먹고 몇 장을 더 구웠다. 그리고 따뜻한 물에 과일청 시럽을 탄 달콤한 차도 함께 마셨다. 메그가 남은 과일청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지만 알렉스는 아껴 먹자며 빈 잔에 뜨거운 물을 채워 주었다. 나무 바닥에 스며든 핏자국은 지워지지도 않았는데, 그들의 아침 식사는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그들은 응접실에 짐을 펼쳐둔 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설탕. 소금. 이름 모를 향신료 조금.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 식용유. 등불을 켤 수 있는 기름 찌꺼기. 성냥 세 갑. 붕대. 항생제 한 병. 밀주 두 병. 튼튼한 로프. 작은 손도끼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도끼집. 담요 몇 장. 과일청 한 병. 에린이 텐트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메그는 깃털이 잔뜩 들어간 베개를 만지작거렸지만 아쉽게도 가방에 자리가 없었다. 트리스는 말린 고기를 찾아내었으나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의심. 생존 욕구. 추악함. 마당 어딘가에 사람의 뼈가 묻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집을 떠나기 전 복도 끝의 문을 열었다. 다리가 잘린 채 누워 있던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들을 보았다. 트리스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 따뜻한 그릇을 내밀었다. 옥수수 가루를 물에 개어 만든 스프였다. 남자는 김이 오르는 스프 그릇을 한참동안 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매. 희미한 숨. 잘게 떨리는 목. 죽어가는 검은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을 죽여주길 바라나요?
남자가 끄덕였다. 트리스는 그릇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커튼 한 조각 없이 밖이 그대로 보이는 창가. 남자는 이 집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인간을 죽여줄지도 모른다고, 혹은 자신과 같은 꼴이 될 지도 모른다고, 혹은 이 삶을 끝내줄지도 모른다고? 인간을 추악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마지막 구원이 인간에게 있다 믿게 하는 것. 성서에는, 죄의 값은 죽음이라 적혀 있었다. 늙고 병들어 착취당한 삶이 죄는 아닐 터인데.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묻기에는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알렉스가 트리스에게 다가와 나는 괜찮다고, 아무 상관없다고 속삭였다. 트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잿빛 구름 사이로 해가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지고 길 위에 섰다. 눈길 닿는 곳마다 사람이 죽어 있었다. 쓸 만한 옷과 신발은 길을 지나간 자들이 이미 벗겨내었는지 모두 헐벗은 채였다. 파리가 꼬인 내장. 머리를 잃고 진흙 속에 고꾸라져 있는 신체. 바싹 마르고 움푹 들어간 얼굴들. 메그가 기묘한 시체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 트리스가 눈을 가렸다.
폭격으로 불에 탄 과수원에서는 씨앗 하나 얻을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진 창고의 지붕은 볼품없이 무너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시커먼 잿가루가 위로 올랐다가 검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형체만 남은 담장이 이유 없이 쓰러졌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잘 다져진 돌길이 언덕에서 끊어진 후 젖은 흙길이 이어졌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다 사라졌다. 폐허로 변한 평원은 하늘을 안고 움직이는 것처럼 넓었다.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그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문을 본 적이 있느냐? 내가 그 문을 열었습니다. 문을 열고 사람을 집어넣었습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까? 나는 죄를 지은 겁니까?
트리스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으나 찾을 신이 없었다.
그 날은 그런 날이었다. 또래보다 유난히 체구가 큰 아이가 성인 남성의 머리를 으깨놓았던 날.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며 물건을 부수던 인간이었으나 어쨌든 시설의 원장이었다. 네 안에는 괴물이 깃들어 있어. 신조차도 너를 외면하실 테다. 아이를 맡았던 교사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떨며 말했다. 너 같은 것은 어딜 가도 버려지겠지. 누구의 온기도 모른 채로 살다가 아무도 없는 길바닥에서 혼자 죽어라. 아이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변두리의 신전으로 보내졌다.
여섯 시간을 걸어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메그는 마을 입구에 멈춰 서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죽은 자의 냄새도. 입구의 환영 표지판이 무색하게도 모두가 도망친 마을이었다. 강줄기의 양옆으로 작은 집들이 자리한 소박한 터전. 작은 돌다리를 건너자 얕은 강물 아래로 헤엄치는 송사리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마을을 한 번 둘러본 후 이 곳에 남은 것은 쥐 수십 마리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무사히 대피했을까? 모르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들은 빈 집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창고를 뒤져보았지만 쥐가 갉아먹은 포대 자루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바닥에 흐트러진 옷가지. 창문으로 들어온 흙먼지와 비바람으로 삭은 침상. 서랍 안에는 쓰레기나 쓰레기가 된 것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천을 긁어모아 거실의 창문을 몇 겹으로 막은 후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해가 지자 트리스는 일찍 잠들었다. 에린은 작은 난롯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메그는 2층의 테라스에서 살필 것이 있다고 올라갔다. 오늘 밤도 냉기가 올라오거나 새벽이슬이 내릴 일 없는 잠자리였다. 알렉스는 트리스 곁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에린을 지켜보았다. 별빛이 들어올 틈조차 막아 깊은 동굴처럼 느껴지는 실내. 금이 간 안경알 너머의 검은 눈동자에 흰 종이와 벽난로 불빛이 비쳤다. 고열 속에서 앓을 때마저도 일그러지지 않았던 차분한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알렉스가 고상함과 우아함이라는 단어를 알았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책을 몇 장 넘기며 안경을 고쳐 쓰던 에린이 알렉스를 보았다.
무슨 책이야?
간단한 응급처치 기술.
그런 책이 있었어?
아까 책장을 뒤졌거든.
어려워?
어렵지 않아.
왜 나보고 죽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알렉스가 에린과 눈을 맞추었다. 거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검붉은 눈으로 던진 물음은 맥락이 없었지만 의미는 뚜렷했다. 잠시 침묵이 찾아오자 장작 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벽난로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함께 흔들리며 형태를 바꾸는 그림자. 언제든 힘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그 순수한 폭력에 필요한 것은 계기 뿐. 첨예하게 갈고 닦아진 것이 아니기에 더 위험하다 생각을 했다.
결과보다 목적을 중요하게 여겨서 그래. 에린이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너는 아무 상관없다고 말했잖아. 메그도 그랬고 나도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트리스는 상관없지 않았거든. 에린은 잠든 트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짙은 색 담요에 어둠과 주황색 불빛이 섞여 그녀를 덮고 있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몸. 짙은 머리칼을 타고 내려오는 빛. 그 희미한 명암 차이를 지켜보던 에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응시했다. 그래서 자기가 죽였지. 그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는 결과보다 어떤 마음으로 행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겨서 말이야. 우리 중 순수하게 그 노인을 걱정한 사람은 트리스밖에 없었으니까.
내 대답이 도움이 됐을까? 에린이 상냥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트리스와 에린을 번갈아 보다 몸을 더 둥글게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벽난로의 불길조차 가리지 못하는 부드러운 온기. 몸을 감싸고 있는 차분함. 향상심. 지식.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단서에서 답을 찾는 능력. 나에게는 없는 것.
에린이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알렉스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자신이 폭력을 휘둘렀던 목적과 결과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화가 났으니까. 때릴 수 있었으니까. 조용히 시키고 싶었으니까. 상대의 무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고 튀어오르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뜨거워진 머릿속을 비울 수 있다면 그저 좋았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단편적인 감정보다 목적과 결과를 떠올려보려 노력했으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알렉스는 조용히 잠들어 있는 트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조차 외면한 자에게 과연 천사가 머물까. 아이는 이제 아이가 아니었고 더 이상 상관없지 않았다.
다음 날 에린이 라디오 하나를 고쳐 전시 방송을 틀었다. 약탈의 불길이 어디로 퍼지고 있는지, 신의 이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승기를 잡은 군대의 물결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듣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지도를 보았다. 이미 사라진 도시와 이제 사라질 도시의 이름들이 의미 없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재처럼.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는 구름처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누군가가 묻자 다른 누군가가, 침묵 끝에 대답했다. 생존.
그들은 전쟁의 불씨가 닿지 않은 곳을 찾아서 계속 걸었다. 버려진 집에서 잘 때도 개울가에 텐트를 펼칠 때도 있었다. 메그는 가끔 혼자 정찰을 하고 돌아왔다. 트리스와 에린은 그녀를 말렸으나 메그가 새벽에 몰래 나가기를 반복하자 행선지라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알렉스는 메그를 걱정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녀였다.
모닥불을 피워 저녁을 먹었다.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끓인 물에 과일청 시럽을 섞어 차처럼 마셨다. 작은 병은 혼자 먹기에도 모자랐지만 메그는 꼭 세 명의 입에 산딸기를 하나씩 넣어주었다. 마지막 단맛이 아쉬워 산딸기를 입안에서 한참동안 굴리면서도. 알렉스는 과일을 구해 남은 설탕을 넣고 조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메그의 동그란 정수리에 볼을 부볐다.
다음 날. 부슬비가 내렸고 먹을 것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두 명씩 나뉘어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산을 올랐다. 알렉스는 양 팔을 들어올려 방수포를 지붕처럼 만든 후 메그가 사냥감을 찾길 기다렸다. 곧 메그가 남쪽을 가리키며 발을 떼었다.
진흙 바닥에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가느다란 다섯 개의 발가락이 작은 간격으로 부산스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 나무 아래에 솔방울과 이로 갉아먹은 나무껍질도 흩어져 있었다. 알렉스는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 나무 구멍의 속의 다람쥐 두 마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새둥지로 손을 뻗어 새알을 훔쳐냈다. 자루에 나뭇잎을 잔뜩 깔아 새알을 조심히 담은 그들은 낮은 덤불을 헤쳐 블랙커런트를 한 알 떼어 먹기도 했다. 메그가 신맛에 표정을 잔뜩 구기며 설탕에 절이면 달아질까? 하고 묻자 알렉스가 웃었다. 산딸기나 자두를 찾으면 그걸로 하자. 아주 달게 만들어줄게. 그들은 한 알씩 열매를 따다 덤불 가지를 그대로 꺾어 자루에 넣었다.
신전에 있을 때 유난히 작고 마른 아이가 있었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낮게 묶고 커다란 원복을 포대자루처럼 걸쳤던 아이. 눈 밑은 검었고 머리칼은 엉망이었으며 말을 못하는 건지 착각할 만큼 말수가 없었다. 덥수룩한 앞머리 때문에 눈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알렉스는 이따금씩 옛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네 본질을 알면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말. 그러나 그 아이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빨래바구니를 홀로 옮길 때 도움을 주고서도 감사 인사 한 번을 못 들었지만 괜찮았다.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관심이 갔다. 언제나 혼자였고 언제나 무기력해보였으며 가끔 불합리한 일을 겪기도 하는 그녀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는 눈. 작은 그림자 하나로 버티고 서있는 뒷모습. 칼날 같은 눈빛을 품은 그녀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알렉스는 그녀가 오래된 흉터들을 품고 있음을 알았으나 원복에 새겨진 이름만을 곱씹으며 가까워질 날을 기다렸다. 메그. 이 곳의 모두가 그렇듯 이름 하나만이 아이의 모든 것이었다.
신전의 점심시간은 늘 초라했다. 딱딱한 빵과 묽은 스프, 치즈 조각과 우유 한 병. 배급을 끝낸 어른들은 식사를 위해 지저분한 급식소에서 나갔다. 알렉스는 그 날에도 메그를 보고 있었다. 긴 테이블 양 끝에 앉은 두 아이는 똑같은 원복을 입은 무리 사이에서도 혼자 같았다. 누군가가 메그의 우유병을 가져가 그 안에 침을 뱉기 전까지는. 그랬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남자아이는 메그의 앞에 서서 재밌다는 듯 낄낄거렸다. 며칠 전 창고 정리를 떠맡기려다 꽁무니를 뺀 녀석이었는데, 친구들을 데리고 와 메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식판을 멋대로 헤집으며 웃고 있었다. 알렉스는 녀석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다 우뚝 멈추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메그가 조용히 포크를 쥐었기 때문이다. 아주 조용하고 아주 천천히. 알렉스 외의 누구도 메그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콱. 메그는 포크로 남자아이의 손등을 내려찍었다. 남자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우유병을 머리에 던져 깨트린 후 식판으로 옆얼굴을 후려쳤다.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달려든 덩치 녀석에게는 발을 걸어 넘어트려 배를 찼고, 어깨를 치며 깔보던 녀석은 식탁 위에 얼굴을 처박았다. 치즈 조각이 테이블 위로 철퍽 떨어졌다. 딱딱한 빵이 바닥 위에서 몇 번 굴렀다. 묽은 스프가 엉망으로 튀어 있었다. 넓은 급식소가 한순간 숨 막히게 조용해졌다.
알렉스는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차가운 호수가 얼어붙은 것처럼 날카롭고 위험한 눈동자. 저 위를 달린다면 누구라도 빠져 죽을 것이다. 소란을 느낀 어른들이 뛰어 들어왔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커다란 손이 메그를 독방으로 끌고 가는데, 그 눈빛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징계를 받고 돌아온 메그에게 알렉스는 숨겨두었던 사탕을 건네며 친구가 되자고 말했다. 메그는 알렉스를 경계하면서도 사탕은 외면하지 않았고,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히 밀어내지는 않았다. 사탕의 단맛이 좋았던 걸까. 같은 냄새를 맡았던 걸까. 내가 마음에 든 거라면 좋겠다. 아이들은 알렉스가 메그를 보호한다고 떠들었다. 비슷한 놈들끼리 어울리는 거라고. 혹은 메그에 대한 동정심 때문일 거라고. 하지만 알렉스는 메그를 작고 여리다 생각한 적 없었다. 그녀의 위험함에 매료되었던 것뿐이지. 알렉스는 색 없던 눈동자에 화와 분노가 깃들어 칼날처럼 번뜩거리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가장 가까이에서 평생토록.
알렉스는 메그의 눈에 숲이 깃드는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파란 눈동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새의 날갯짓. 동물의 발자취. 이파리 더미 아래에서 썩어있는 동물의 배설물. 그 사이에서 무엇이든 움직이는 것들을. 숨소리 대신 방수포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만 들렸다. 안개가 높은 침엽수림을 조금씩 먹어치우고 있었다. 메그는 또다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알렉스는 팔을 뻗어 그 작은 손을 조심히 감싸 쥐었다. 그리고 문득 입을 열었다.
넌 대단해.
왜?
남들이 못 하는 걸 해내잖아.
딱히.
트리스도 대단하고, 에린도 대단해.
너도 잘 하고 있는데.
정말 그럴까?
불안해?
응.
버릴 거면 나부터 버리고 갔겠지.
알렉스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아니야. 메그. 그게 아니야. 동물에 가까운 감이 그녀에게 속삭였던 걸까? 알렉스는 생각을 읽힌 사람처럼 입술을 더듬거렸다. 메그는 여전히 시선을 멀리 던진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없었으면 못 건넜을 강이 몇 갠데. 물 긷는 것도 그렇고. 장작 줍는 것도 몇 배로 힘들었을걸. 메그의 목소리는 특별히 상냥하거나 다정하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길게 말해 주었다. 알렉스는 가만히 듣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메그의 손을 놓았다.
축축한 녹빛. 진흙 같은 땅. 시선 끝의 어두운 숲. 안개가 짙어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숲을 걸으며 에린과 메그의 말을 곱씹어보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떠올리려 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폭력이 아닌 어떤 것. 어둠 속에서 목표물을 찾아내는 직감처럼, 답을 알려주는 냉정한 지성처럼, 길을 이끄는 빛처럼 반짝거리는 것.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알렉스는 대체 불가능한 무언가를 원했다. 폭력이 그녀가 가장 잘 하는 것이라 해도 그녀는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메그가 지도를 보며 북쪽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피 냄새와 화약 냄새가 생생하게 난다고. 얼핏 서른 명쯤 되는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알렉스는 지도 위를 움직이는 메그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았다. 이틀 먹을 식량. 산에서 움직일 때는 얻은 식량보다 힘을 더 쓸 때가 많았다. 에린은 내일 군인들의 행선지를 파악한 후 움직이자고 말했다. 트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과 메그는 잠을 청하러 텐트로 들어갔다. 늦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체력을 많이 썼는지 피곤한 듯했다. 불가에는 알렉스와 트리스만이 남았다. 모닥불에 장작을 넣자 불씨가 크게 튀었다가 잠잠해졌다.
아직 괴로워하는 걸까? 살인이 죄라고 생각하는 걸까? 알렉스는 에린의 말을 떠올렸다. 결과보다 목적이 중요하다는 말. 추악한 인간의 목에 칼을 꽂아 넣을 때도 떨지 않았던 너인데. 힘없는 노인의 목숨을 거둘 때는 유난히 힘겨워했다. 굳은 입술. 웃음기 없는 눈. 얼굴에 진 그림자가 어두웠고 깊었다. 트리스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
응?
괜찮아?
응?
기운 없어 보여서.
알렉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정적을 모닥불 소리가 메웠다. 고요한 숲은 가끔 악몽 같았다. 어둠이 그들을 통째로 집어 삼킬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사람을 처음으로 죽여봤어. 트리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칼 손잡이를 타고 피가 내려왔는데 따뜻했어. 방금까지 살아있던 사람이 정말 금방 차가워지더라. 하지만 죄책감은 안 들었어. 죽이지 않았으면 죽었을 테니까.
트리스가 눈을 내려깔았다. 자신과 같은 색의 눈동자였음에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가끔 사제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 했을 때, 몰래 훔쳐본 거대한 석상보다 더 고요하고 깊은 성스러움. 지나치게 멀었다.
네 덕분이야.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알렉스의 입이 벌어졌다가 조심스레 다물렸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표현할 말이 없었다. 트리스는 곧은 눈으로 알렉스를 천천히 응시했다. 네가 없었으면…누구 한명 다치는 걸로 끝나지 않았겠지. 알렉스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스가 웃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와 희미하게 올라간 입술. 알렉스는 어쩌면 트리스의 웃음을 처음 보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는 더 위험할 거야.
응.
그 때가 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있겠어?
망설이지 않을게. 알렉스가 대답했다.
알렉스는 텐트 안에서 어둠에 잠긴 방수포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전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트리스가 보여주었던 희미한 웃음이 좋았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 좋았다. 동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좀 더 깊기도 하고 반짝이기도 하는 어떤 것. 죄 없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서도 며칠 밤을 지새운 네가 살인을 저지르고서도 아무렇지 않았다니. 그 사실이 새삼 좋았다.
너희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내가 필요했을까? 누군가는 나에게 은혜도 모르는 개자식이라 말했다. 개는 자매애조차 없다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아닐지도 몰라. 내가 너희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 지도 몰라. 결과보다 목적이 중요하다면…너희를 위해 움직여도 될 지도 몰라. 알렉스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단검과 손도끼를 허리에 차고 작은 기름등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나침반과 지도를 번갈아 본 후 산을 내려갔다.
네가 사자의 먹이를 계속하여 댈 수 있느냐? 굶주린 사자 새끼들의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느냐? 까마귀 새끼가 신을 향하여 허우적거릴 때 그것을 위해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검은 개는 태어나 한 번도 훈련받은 적 없었으나 그녀는 꿈속에서 하릴없이 사냥을 했다.
알렉스는 지도에서 본 길을 따라 걷다가 멀리 보이는 불빛에 발소리를 죽였다. 발자취를 없애는 것. 새벽바람을 타고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녀와 짐승의 차이는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다. 그녀는 막사 두 채의 크기와 보초의 수로 그들이 전투에서 부상당해 낙오된 자들이며 본대로 돌아가는 길임을 알아챘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거렸다. 서른 명. 메그가 언급한 숫자와 똑같았다. 알렉스는 메그의 대단함을 곱씹으며 막사 옆에 쌓인 군용식량을 보았다. 여전히, 선한 의도가 있다면 악한 자들을 살해해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우리의 땅을 폐허로 만든 자들이라는 핑계도 있었다. 목적. 핑계. 현재의 상황. 모든 것이 들어맞는 지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알렉스는 볼일을 보러 풀숲으로 들어온 보초의 입을 틀어막고 뒤에서 단검을 쑤셔 넣었다. 품안의 심장박동이 쉽게도 멎었다. 알렉스는 무너지는 몸을 받쳐 풀숲에 조용히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다른 사람을 불렀다. 그렇게 두 명. 열댓 명은 막사 안에 누운 부상당한 병사들이었다.
막사 앞에서 경계를 서던 자가 이상함을 느끼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알렉스는 조용히 그의 뒤로 다가가 흙을 발로 차 모닥불을 꺼트리고 목을 꺾었다. 목뼈를 부러트리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짧은 신음이 어두운 땅에 스며들자 막사 안의 인간들이 무슨 일이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명이 막사의 문을 걷고 나올 때, 알렉스는 어둠 속에서 웃고 있었다.
그 몸에 깃든 힘과 감각은 천부적인 재능. 싸우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아는 개에게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새빨간 눈이 희번뜩거리며 사냥감을 탐색했다. 호흡. 속도. 완급조절. 미친 듯한 악력.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총검을 붙잡고 몸을 비틀어 아군을 찌르게 했다. 정강이를 발로 차 무릎 꿇게 한 후에는 두 손으로 머리를 내려쳤다. 군인들은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혹시나 살아있는 아군을 쏠까 싶어 발포하지 못하였다. 잔인함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은 다름 아닌 고양감이다. 뼈를 부러트리고 피로 손을 적시면서도 즐거움은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은 단 한명만이 승리한다는 명확한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이 짓거리를 즐겼다고 말하면 버림받을까.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건 이거야. 이걸로 너희를 기쁘게 만들 거야. 먹을 것을 잔뜩 들고 너희의 품으로 달려가 사랑받고 사랑받으며 계속 함께 할 거야. 순간. 바닥에 쓰러져있던 군인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여기다! 소리 질렀다.
알렉스는 관자놀이에 격통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누군가가 모닥불 자리에 기름등을 던져 넣어 다시 어둠을 밝혔다. 알렉스가 아픔을 털어내고 고개를 들자 군인 다섯 명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자들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들. 이제 죽는 걸까? 알렉스는 이마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지도 않고 두 눈을 깜빡였다. 겁나지는 않았다. 지끈거리는 아픔도. 이제 찾아올 고통도 두렵지는 않았다. 도움이 되지 못했고 돌아가지 못할 거란 사실이 조금 슬펐고, 그럼에도 자신이 폭력에 흥분하는 개자식임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알렉스는 손에 쥔 단검과 허리춤의 도끼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무거운 흉기가 흙바닥 위에서 거친 소리를 냈다. 그 때였다.
알렉스, 다시 들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은 순간. 알렉스는 숨을 멈추고 몸을 낮추어 왼쪽에 서 있던 군인에게 다리를 걸었다. 이어 낯선 목소리에 진형이 흐트러진 사이 손도끼로 다른 군인의 발등을 내려찍었다. 그들 뒤에서 나타난 트리스가 군인에게 달려들었고, 에린이 두 손으로 총검을 꼭 쥔 채 쓰러진 인간을 찔렀다. 권총을 쥔 메그는 몇 걸음 떨어져 군모를 쓴 머리통을 쏘았다. 흙바닥 위로 검은 피가 쏟아졌다.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의 신음이 고통스럽게 맴돌았다. 마지막 군인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이들을 응시하다 소리를 지르며 미처 몸을 일으키지 못한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려다, 제 앞을 막아서는 트리스의 등을 보았다. 미성숙한 붉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떠지는 그 찰나.
군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군인이 무릎을 꿇었다. 트리스가 죽은 자에게서 칼을 뽑아들고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피에 젖어가는 어깨가 드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자들 중 말할 수 있는 것은 알렉스밖에 없었는데, 알렉스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알렉스……걱정했어.
트리스,
알렉스의 눈이 에린과 메그를 지나 트리스에게로 돌아왔다. 왜? 너희는 먼 산에서 따뜻한 모닥불에 기대어 자고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흙투성이로 피를 묻힐 것이 아닌데. 그 피와 그 상처는. 내가 입어야 하는데. 생각이 툭툭 끊겼다.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트리스가 천천히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피가 엉겨 붙은 검은색 머리카락을 헤쳐 이마를 드러내며 눈을 맞추면서도, 묻고 싶은 것이 태산처럼 많으면서도 호흡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그 상냥함. 방금까지 폭력과 살해를 즐거워하던 자의 동공이 줄어들었다가 커졌다. 알렉스가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메그가…말한 걸 듣고,
응.
군인들이라면 죽여도 될 거라 생각했어.
응.
식량이 있을 테니까 뺏어서 들고 가자고…너희가 기뻐할 거라고……
위험한 짓이었어.
버려질 것 같았어.
알렉스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결과보다 목적이 중요하다고 해서. 너희를 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왔는데. 즐거웠어. 뼈를 꺾고 피를 묻히면서 즐겁다고 생각해버렸어. 트리스 너는 한 명을 죽이면서도 죄스러워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서, 너희가 나를 버릴 것 같았는데…내가…….
점점 움츠러들던 등이 우뚝 멈추었다.
너희를 위험에 빠트리고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어. 눈물이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떨리는 입술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엉망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감정에 허덕이고 무력하고 초라해져서 죄를 고백하는 목소리. 트리스는 알렉스의 말에 눈앞이 새까매지는 것을 느꼈으나 화를 낼 수 없었다. 다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고, 그녀는 근본부터 다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죽는 것보다 미움 받는 게 더 무섭다고 우는 아이에게 어떻게 화낼 수 있겠는가? 버림받기 싫다고 애원하는 아이를 어느 누가 내칠 수 있겠는가? 트리스는 숨을 천천히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괜찮아. 너를 살렸으니까. 그게 네 잘못이라고 해도 괜찮아. 트리스가 알렉스의 두 뺨을 감싸 쥐고 이마를 맞대었다. 알렉스는 더듬더듬 고개를 들면서도 아프게 일그러진 눈과 상냥한 목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괜찮다니? 실수도 아니었고 살아남기 위한 살인도 아니었다. 빼앗기 위해 빼앗았고 죽일 수 있으니 죽였는데.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저주를 들었었는데. 뺨에 느껴지는 온기는 이상할 만큼 다정하고 그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해도 괜찮다 했다.
너는 분명 위험해. 선악이 없고 폭력을 즐거워하지. 하지만 난 네가 무섭지 않아.
……왜?
너는 우리를 사랑하잖아. 눈물로 젖은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랑. 끝없는 불안과 악몽에 심장을 쥐어뜯으며 잠을 설친 이유. 사냥개를 내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공포 때문이다. 목을 물어뜯길까 두려워서다. 하지만 그들은 알렉스가 두렵지 않았다. 강을 건널 때 등을 내어주는 그녀가. 위험한 길목에서 망설임 없이 앞장서는 그녀가. 가장 먼저 일어나 보잘것없는 재료로 정성스레 아침을 준비하는 그녀가. 사랑스러웠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스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울음으로 목이 잠겼다. 대신 고개를 겨우 끄덕거렸다.
네가 저지른 건 분명 죄야. 우리가 너를 구하기 위해 저지른 살인도 죄야. 우리는 평생 죄를 짓고 살겠지. 하지만 그건……. 메그가 뒤에서 알렉스의 머리를 껴안았다. 에린의 손가락이 알렉스의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트리스는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우리가 함께하기 위한 거야. 그러니까 나와 약속해. 우리만을 위해서 죄를 짓겠다고. 트리스는 이것이 기만임을 알았으나 그럼에도, 그렇게 말했다.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새벽이 밝아왔다. 비를 뿌리고 물러가는 먹구름 너머로 희미한 해가 뜨고 있었다. 골짜기의 뿌연 빛. 숲의 그림자가 그들의 발치까지 내려오려다 어떤 것을 보고 물러난 것처럼 조금씩 흩어졌다. 우리가 너에게 확신을 줄게. 트리스가 다시 한 번 더 말했다. 확신과 사랑을, 살아 있는 동안 잔뜩 안겨줄게.
피의 냄새. 손에 남아있는 뼈의 촉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그 감촉을 덮었다. 앞으로 가을이 올 것이다. 가을 후에는 겨울도. 비가 내리기도 눈이 오기도 하겠지. 트리스는 그 모든 순간에 죄를 짓고서도 너와 함께 하겠다 말했다. 평생을 혼자 살다 혼자 죽을 것이라 저주받았던 아이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듯, 하염없이 멀다 생각했던 형체가 알렉스의 눈앞에 있었다. 어쩌면 몸을 감싼 이 온기가 나의 목줄일지도 몰라. 하지만 알렉스는 기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알렉스 앞에 섰다. 죽은 자들의 아우성이 바닥 위를 기어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행하듯 그렇게 했다. 무릎을 꿇은 알렉스는 그들의 손을 둘도 없이 소중히 쥐어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눈물이 툭툭 흩어지는 눈은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오직 너희만을 위한 폭력이 될게. 알렉스가 말했다. 나의 즐거움보다 너희를 우선으로 생각할게. 언제나 너희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나의 마지막은 너희를 위한 죽음으로 맞이하고 죽은 후에도 너희를 잊지 않을게. 너희가 나의 전부야. 거짓으로 내뱉었던 기도문은 의미가 없었다. 영혼이 원하는 것만이 진실이었다.
영원불멸의 사랑과 충성. 지옥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이들보다는 아름답지 않으리. 멀리서 먹구름이 걷혔다. 일출이 능선을 물들였다. 빳빳한 나뭇잎이 흔들렸다. 검은 산은 더 이상 검지 않았다. 알렉스는 세 명의 입맞춤을 달게 받으며 눈을 꼭 감았다. 죄는 너의 존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것이 기만이라 해도 위선이라 해도 속절없이 어쩔 수 없이 너를 사랑해. 거친 입술이 코와 뺨 이마에 닿으며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불안해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알렉스는 활짝 웃으며 사랑한다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어떤 생각을 했고 얼마나 무서웠으며 지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전부 다 말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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