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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발끝이 밤의 복도를 조용히 디뎠다. 발밑으로는 카펫이 깔려 있었다. 불에 타고 남은 재의 빛깔이었다. 자잘한 상처와 굳은살이 가득한 발의 주인은 어두운 색 담요로 작은 몸을 가리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가 사각지대 없이 깜빡이는 중이었다.
미로 같은 오래된 아파트 최상층의 안전가옥. 어떤 전자기기도 없이 폐쇄회로만이 오래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곳. 그녀는 구식 CCTV가 백업을 위해 자정부터 5분 동안 녹화를 멈추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감금한 자들이 이 계획을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 하나 강제했던 적이 없는데, 시선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부탁을 제외하고는 정말 그랬다. 그녀는 그 미친 부탁과 탈출 계획을 곱씹으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1층에 다다른 그녀는 복도 끝에 몸을 숨겼다. 복도 끝에는 매일 자정에 포크로 나사를 돌려가며 몰래 열어두었던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부식된 철창 프레임을 밀어 뜯어낸 다음 담요를 창문 너머의 정원수 위로 던졌다. 담요로 덮인 키 작은 정원수가 조용히 뜯어진 철창을 받아냈다. 그리고 작게 숨을 내쉰 그녀는 최대한 몸을 구겨 창문으로 빠져나왔다. 맨발에 닿은 흙의 감촉이 생생하고 낯설었다. 여기까지 169초. 그녀는 창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철창을 제자리에 끼워둔 후 화단에 숨겨두었던 나이프로 담요를 찢기 시작했다. 공기가 차고 습했지만 외출복을 입거나 짐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찢은 담요를 길게 묶은 후에는 담요 끝자락에 창고에서 주운 낚시용 작살을 달았다. 그녀는 불빛 하나 없는 정원에서 높고 붉은 벽돌담을 더듬다 우뚝 멈추어 서서 담요 자락을 담 위로 던졌다. 반대편 담의 튀어나온 부분에 탁 걸린 작살이 천을 단단히 고정했다. 밖조차 보지 못하도록 높게 쌓은 돌담. 그녀는 담요 자락을 몇 번 더 당겨보다 몸을 뒤로 뺀 후 두 발로 벽을 박찼다. 튀어나온 벽돌 모서리에 발바닥이 찍혀 피가 났지만 아무렇지 않았다.
나를 아는 인간들은 모두 나에게 병이 있다고 했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으며 혼자 죽어갈 병이라고. 살인에 죄책감도 없고 삶의 미련도 없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 같다고. 진창에 사는 놈들이야 뻔하지. 오갈 데 없고 목적도 동기도 없으니 쉽게 선을 넘는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라도 삶에 집착하고 돈을 욕심내며 누군가와 사랑을 하는데. 너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린 널 쓰고 버릴 거다. 그래도 좋다면 따라와. 나는 당연히 따라갔다. 총과 먹을 것만 있다면 어찌되었든 좋았다.
가벼운 몸이 담장을 넘어 바닥으로 내려왔다. 여기까지 278초. 누군가가 단정하게 땋아준 머리칼이 창백한 손가락에 맥없이 풀렸다. 그녀는 창문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던 거리를 살피다 도로 위의 차들이 향하는 곳으로 뛰었다. 길 구석의 쓰레기통에 담요 자락과 작살을 팽개치고 사람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멀리 주유소가 보였다. 저 곳만 넘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미친 인간들이었다. 납치하고 가둔 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너는 우리가 찾던 존재라고, 우리는 이전에 오랫동안 사랑했다고, 너를 잃은 후 평생 동안 너만을 찾아 헤매었다고 말하던 자들. 팔을 물어뜯기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쇄골에서 피가 뚝뚝 흘러도 눈을 피하지 않고 사랑한다 말하는 자들. 그야말로 미친 인간들이었다. 광기 이외엔 그놈들을 표현할 말이 없었다.
걸음마다 카펫이 깔려 있던 곳. 오래된 아파트를 공들여 개조하여 오직 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치한 건물. 경찰조차도 손을 뗀 오클랜드에서 이름 날리던 갱단을 일망타진하고 손에 넣은 게 나라니 우습지도 않았다. 너희 대체 뭐야? 여긴 네 방이야. 제정신이냐고. 불편하면 뭐든지 말해. 차라리 죽겠어. 안 돼, 제발.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들은 입안에 숨겨두었던 자살용 청산가리를 빼앗고 아픈 얼굴로 나를 메그라 불렀다.
그게 누구냐고 묻자 너라고 했다. 본명도 모르지만 그런 가명을 쓴 적도 없는데 그게 내 이름이라고. 한참을 비웃다 놓아주던 죽이던 둘 중 하나는 선택하라고 하자 그들은 나를 밤낮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소매에 숨긴 칼은 빼앗겼고 식사와 수면조차 감시당했으며 화장실 거울을 깨 손목을 베었을 때는 나대신 세 시간을 울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대체 뭐야. 뭔데. 대체 왜 이래. 메그, 너야. 우리가 원하는 건 너야. 네가 우리를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살아서 우리 곁에 있는 거. 그게 우리가 원하는 단 한 가지야. 핏자국을 닦아내지도 않고 덜덜 떠는 손으로 나를 붙잡아 간절하게 바라보던 세 쌍의 눈동자가, 목을 조르듯 숨 막히게 했다.
주유소를 지나쳤다. 멀리 간판 불빛들이 보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창문으로만 듣던 빗소리가 귓바퀴를 두드렸다. 생각만큼 개운하지는 않았다. 지난 날, 하루 한 번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흙바닥을 밟으며 산책 할 수 있었는데, 비 오는 날만큼은 허락받지 못했다. 마시멜로를 띄운 초콜릿 음료와 빗소리. 부드러운 담요. 매 끼마다 내오는 따뜻한 음식들. 정갈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잠자리. 옥상 햇볕에 이불을 말리던 넓은 등. 모니터를 보다가도 시선이 닿으면 입을 맞추고 돌아가는 온기. 혹시 그들의 메그는 비 오는 날 죽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들.
어느 순간부터 잠을 깨우는 그들을 끌어안아 한숨 더 자는 일이 익숙해졌다. 뺨에 키스를 받으며 늦은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저녁에는 그들이 사온 사탕을 우물거리며 하루 일과를 듣는 일 또한 그랬다. 코카인 금단증상에 침대 구석에서 떨고 있었던 밤에는 조용히 들어와 안아주었고, 턱을 조심히 쥐어 긴장한 입술로 입을 맞추고 혀를 섞으며 눈물을 닦아주기도 했다. 피부 아래에서 개미가 날뛰는 듯한 감각을 떨치고자 그 품에 매달리고 또 매달려 겨우 잠들었던 날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면, 사랑하게 되었다. 납치나 무장강도 일을 하며 주워들었던 무슨 증후군이래도 할 말이 없었다. 백 명을 죽인 인간을 갓 태어난 새처럼 품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세뇌하듯 속삭이는데, 자신을 속이고 그 품에 기대지 않을 인간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달콤함이 그렇듯 착각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아주 많이 사랑받고 조금이나마 사랑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꿈에서 보았던 네 명의 뒷모습. 내가 아닌 것 같은 여자의 등.
내가 너희가 말하는 메그가 아니라면 어떡하지? 꿈속의 그 여자는 대체 누구지? 이미 너희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버려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뜨거운 것이 뚝뚝 흘렀다. 그게 눈물인 것조차 모른 채로 숨을 참으며 이불자락을 적셨고, 얼굴을 닦으러 화장실에 들어서서는 자살을 생각했다. 너희가 기억하는 메그로 죽어 남은 삶을 갉아먹는 것도 좋을 거야. 나는 그 순간 내가 미쳐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병이 있었다고 했지. 같은 병이라면 이전이 나았어. 발 달린 총처럼 쓰이며 온기라고는 탄피밖에 몰랐던 그 때. 내가 너희의 메그가 아니라면, 그따위 생각을 떠올리기 전이 천 배는 나았다.
도망쳐야 해. 버림받기 전에. 총 한 자루면 벌어먹기 충분하니 어디로든 가자. 머물면 머물수록 지옥이 될 거다. 평생 풀어헤치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 역시 너희의 메그라고?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만 한 번이라도 의심했던 적이 있을까? 내가 나를 속이고 싶었듯 너희도 눈을 감고 싶었던 때가 있었을까? 이따위 질문의 답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다음 것들은 명확하다. 평생토록 불안 속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사실. 흔해빠진 머리칼과 눈동자 때문이라는 생각을 절대 떨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내게 쏟아지는 모든 사랑은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너만 있으면 된다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중얼거리던 그 모든 말들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메그, 괜찮아. 난 괜찮아. 놀랐겠다. 맛있는 거 먹을까? 메그, 제발 널 아프게 하지 마. 우리를 찔러도 좋아. 너만은 아프게 하지 마. 메그, 잠 못 자겠어? 괜찮아. 손 잡아줄게. 같이 자자. 메그,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아팠어. 이제야 너를 만났지만 그것마저도 기적 같아. 우리는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를 만큼 사랑해. 굵어진 빗줄기가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그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처음 겪는 사랑은 심장을 긁다 뜯어낼 만큼 고통스러웠다. 가슴 밑을 쿡쿡 찌르다 눈을 뜰 수 없는 아픔으로 어지럽게 만들었고, 당장이라도 뒤돌아 뛰어가려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뇌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흐린 시야로 횡단보도에 서있다 파란 불을 놓쳤다. 발이 깨질 듯 차가웠고 피가 물웅덩이에 녹아 사라졌다.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이었으나 나는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진창 같은 사랑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바닥을 맨발로 박찼다 하얀 선을 넘어 차가 지나가는 도로로 뛰어들었다 브레이크를 급하게 밟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너희를 사랑해 하지만 너희는 내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려움에 떨다 결국 버려지고 말겠지 이 순간조차 나 아닌 다른 이름을 부르는 간절한 목소리 나를 지우고 환상을 덧씌운 그 목소리가
몇 걸음 뒤에서 멎어들었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구름에서 단 하나의 물방울이 무겁게 떨어졌다 바닥에 누운 어두운 머리칼에서 그 눈동자 같은 색깔이 새어나와 빗방울 사이로 흩어졌다 돌아보면 까마득한 벼랑 순간 시야가 지워졌다 나는 정지했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젖어가고 바람이 몰아쳤다 지금 여기는
지옥이다.
메그는 수술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구급차가 도착했던 것 같은데. 그 입술이 떨면서 내게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굳어 있는 나를 누가 안아들어 택시를 태운 것 같은데. 택시에서 내린 후에는 응급실로 실려 가는 몸을 보았다. 왼쪽 어깨가 부러졌다고, 흉벽에 틈이 생겼고 혈압이 60까지 내려가 쇼크 상태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피와 죽음은 익숙했지만 사랑은 낯설었다. 끊겼다가 멈추었다가,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죽지는 않겠지.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분명히 도망쳤던 것 같은데 왜 병원 복도에 앉아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꺼풀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동공이 수축했다가 확장되기를 반복했다. 푸른 홍채와 검은 동공. 달달 떨리는 긴 속눈썹. 온 몸이 젖어 있었다.
괜찮을 거야.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에린이 말했다. 메그는 대답이 없었다. 혈압이 떨어진 건 출혈을 멎게 하려고 그러는 거거든. 수술도 오래 걸리지 않겠지.
내가 걱정할 거라고 생각해?
걱정하니까 여기 있잖아.
메그가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가 천천히 일어나 메그 앞에 몸을 낮추고 쪼그려 앉았다. 알렉스는 의자를 짚은 메그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고 꼭 쥐었다. 메그가 손을 뿌리쳤다. 메그는 이를 빠득 갈며 눈을 크게 떴다가 알렉스 너머의 에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너희가 뭘 했는지 알겠지.
미안. 모르겠어.
내가 거기 있었던 이유가 뭔지 몰라? 정말 몰라?
도망치려고 한 거 아니니?
그럼 내가 얌전히 갇혀 있을 줄 알았냐?
너라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두세 번 정도는 도망치겠다 싶었지. 그래서 놀랍지는 않네.
메그는 뒷골이 욱신거렸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아침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밤마다 좋은 꿈꾸라며 입 맞추면서도 언젠가는 도망칠 것이라 예상했던 것 때문은 아니었다. 너라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도망치는 순간조차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는 것이 역겨웠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어떻게 매 순간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렇게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메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에 젖은 몸이 흔들리며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가겠어.
메그. 알렉스가 메그의 앞을 막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메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이제 그만해. 난 메그가 아냐. 멋대로 모자를 씌우고 머리를 땋으면서 진짜 나라고 생각했어? 사탕 껍질 뜯는 걸 보면서 역시 나라고 생각했어? 그건 다 착각이야. 왜냐면.
떨림은 멎었다. 대신 무거운 납을 삼킨 듯 했다. 물이라고는 없는 땅에서 바닥으로 가라앉을 듯한 낮은 목소리. 검은 눈밑이 아픔을 다 드러내지도 못 했다. 모르는 이름이 나를 가두는 밤. 나를 지우고 누군가를 흉내 내어야 하는 두려운 나날들. 달콤했으나 그만큼 지독했다. 메그는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그들을 보았다. 갈라진 목에서 피 대신 검은 말이 쏟아져나왔다.
내가 너희의 메그라면 벌써 기억해내야 하니까. 다친 저 녀석 때문이라도 뭔가의 실마리는 잡았을 테니까.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하지 마. 왜 나만 기억이 없겠어? 애초에 내가 아니어서야. 잘못된 사람을 붙잡아서야. 이렇게 생긴 인간은 수백 명은 더 있어. 그 놈들이나 가둬 봐. 누구 한 명은 기억이 난다고 말할 지도 모르지. 너희 말에 맞다고, 너희를 지키려다 혼자 죽었던 기억이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 지도 몰라. 그 놈이 너희에게 빌붙으려는 사기꾼이든 아니든 내 알바는 아니야.
메그, 제발.
그만 해. 난 스스로 여기까지 온 게 아냐. 끌려왔지. 하지만 이제 됐어. 너흰 이제 나를 못 가둬. 내가 울면서 죽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거잖아. 내 총을 피하지도 않고 맞아줄 거잖아. 하지만 난 안 그럴 거야. 너희를 사랑해서도 아니고, 동정해서도 아니고, 그럴 가치가 없어서야. 너희가 내게 아무 의미도 없어서라고. 난 너희를 몰라. 죽이고 싶지도 않아. 너희는 내 것이 아니야.
사실을, 말하면서도 살갗이 쓸려나가는 아픔이 온몸으로 기어올라왔다. 그러나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었다. 메그는 생각했다. 절대 사랑한다 말하지 말자고. 외로움을 깨달았다 말하지 말자고. 너희로 인해 행복했고 아팠고 괴로웠다 말하지 말자고. 그게 나의 복수다. 달콤한 착각 속에 빠트려 헛것을 보게 한 복수. 눈이 따가울 만큼 매 새벽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의 복수. 알렉스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에린의 동공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메그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술실 알람등이 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트리스는 조용히 눈을 떴다.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고 오른쪽 갈빗대 아래로는 플라스틱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는 거의 젖혀진 상태였다. 며칠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트리스는 의료 기기들의 규칙적인 소리를 들으며 1인실을 둘러보다 발치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는 메그를 보았다. 해가 뜨고 있었고, 그들은 말이 없었다.
트리스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답답한 호흡에 기침이 섞였으나 겨우 가라앉혔다. 메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보다 그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웠다. 트리스는 메그의 고요한 그림자가 일출에 물드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 간결한 배치. 차가 달려오는 도로에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옆모습. 끝없는 빗소리와 점멸하는 빛무리와 몸이 떠오르는 느낌. 그 순간에도 네가 이대로 가버릴 것 같아 떨리는 입술로 애원했던 것 같았다. 메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타박. 타박.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진 그대로 늘어졌다.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가려고 했어. 메그가 말했다. 트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터져 나올 것 같은 기침이 그녀의 말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손으로 목 위를 꾸욱 눌렀다. 메그는 고개를 들고 손을 뻗어 트리스의 왼쪽 귀를 툭툭, 건드렸다. 너, 이쪽 귀가 안 들린대. 그렇지?
트리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트리스는 자신의 관자놀이와 귀를 만져보다 메그와 눈을 마주쳤다. 귀에서 떨어진 가느다란 손은 떨림 하나 없었다. 후회도 미안함도 절망도 없는 눈. 마치 계산을 하고 있는 듯한 눈동자. 트리스는 손상된 청각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녀가 조금씩 내비쳤던 애정이 도망을 위한 포석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폭풍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는 아픔이 심장을 꽉 쥐었다. 진통제가 몸에 돌고 있을 텐데. 우리가 억지로 가두었던 것이 맞는데도 왜. 결국 기침이 터졌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트리스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기침을 했다. 그 표정을 다시 보기가 무서웠다.
트리스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자 메그가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한쪽 눈을 가린 군청색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두 눈을 보았다. 트리스는 차라리 밤이었다면 이보다는 덜 아팠을 것이라 생각했다. 검은 눈 밑과 갈라진 입술. 칼날같이 따갑고 날카로운 목소리. 총이 없어도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모든 것들. 메그는 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이해득실과 빚을 따진 후 결정을 내린 그 눈동자.
내게 뭘 원해? 메그가 물었다. 트리스는 열 번의 호흡을 반복한 후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히 쥐고 입을 열었다. 메그는 예상을 빗나가지 않은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라. 인간은 이렇게나 이기적이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메그는 그들의 옆집에 살기로 했다. 한적한 주택단지의 정원 딸린 2층 집이었다. 그들이 메그의 집에 찾아가거나 메그가 그들의 집에 들르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메그의 삶을 지켜볼 기회를 얻었을 뿐이었고 메그는 한 사람의 청각 한 쪽에 대한 빚을 갚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감시라고 생각했고 도망치는 날에는 어떤 짓을 해서라도 다시 끌고 오리라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메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돈을 받고 누군가를 죽이고 증거를 없앤 뒤 인파 속에 섞여드는 일. 그들은 메그의 집에 불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가끔 빵 봉투를 안고 택시에서 내려 잠겨있지도 않은 집으로 들어가 죽은 사람처럼 지내는 나날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가끔 트리스는 정원에서 반주 없는 노래를 불렀는데, 메그는 그때마다 거실의 작은 창문을 남몰래 열어놓고 눈을 감았다.
8시간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날. 메그가 그들에게 준 시간은 단 8시간이었다. 메그는 그들이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찾아와 알렉스의 요리를 기다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불균형한 식사가 익숙한 냄새를 풍겼다. 그들은 마치 그녀와 한 집에 사는 것처럼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네었고, 메그는 짧은 단어로 대답하긴 했지만 다정하거나 상냥하지는 않았다. 그것마저 그녀다웠고 그녀는 언제나 그녀였는데. 그들은 어떻게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까? 사랑했기 때문이다.
알렉스가 정원을 손질하다 옆집 현관에 쏟아진 핏자국을 보았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옆집의 초인종을 눌러보다 대답이 없자 결국 문을 비틀어 열기로 했다. 그녀가 화를 낼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의 안위만큼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후,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먼지 앉은 벽난로. 켜진 적 없는 티비. 포장도 뜯지 않은 향신료와 쓰레기통으로 쓰던 개수대. 권총 두 자루와 코카인 포장재와 담배꽁초, 라이터 몇 개만이 굴러다니는 커피 테이블. 이 곳에 마음을 두지 않으리라 맹세한 것 같은 형상들. 메그는 소파 한구석에서 온기도 약도 없이 떨고 있었다.
깊이 찔린 상처였다. 그녀는 끊임없이 피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에린이 굳은 얼굴로 우리가 치료하는 건 허락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메그는 입을 다물고 한참동안 침묵하다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린은 메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한 손으로 메그의 가물가물한 눈꺼풀을 덮어 감겨주었다.
그리고 꼬박 하루 후. 걱정스러운 말소리 속에서 정신을 차린 메그는 알렉스가 준비한 식사도 외면한 채 그들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다. 가느다란 등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 그녀를 쫓아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그들은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에게 말했다. 죽고 싶은 듯 구는 이유가 우리 때문이라면, 우리를 허락하지 않아도 좋으니 살아만 있으라고. 원한다면 평생 마주치지 않을 테니 제대로 살아가기만 하라고. 메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트리스와 단 둘이 보냈던 몇 번의 8시간. 그 중에서도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날. 메그는 거실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트리스는 달콤한 사탕 몇 알과 갓 구운 머핀을 테이블에 조용히 올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정원수 나뭇잎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로 졌다가 바람에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쏟아지는 햇빛 조각과 부드러운 풀내음. 창백한 얼굴에 생기를 내렸다가 사르르 도망치는 녹빛 조각들. 거실로 나뭇잎 한 개가 살랑 날아들었다. 봄이었을까? 여름이었나? 메그는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약속한 시간이 끝난 후 현관에 발끝으로 서서 트리스의 왼쪽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들리지 않는 귀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가까이 와닿는 온기와 옅은 숨이 좋았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알 수 없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메그는 약을 끊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더 집요해졌다. 주사기를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뜨거운 머리와 눈으로 새까만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이 유일한 휴식이라는 것처럼.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에는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들이 진짜를 찾아낼 희망밖에 없었으므로, 그 절망의 희망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불씨였다. 그녀는 언젠가 그들에게 말할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듣지 못하는 귀가 아닌 다른 곳에, 싱그러운 뺨과 눈물로 젖은 입술에, 너희를 사랑하는 만큼 아팠고 아픈 만큼 너희를 사랑했다고. 죽을 것 같은 날에는 너희를 죽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고. 하지만 그 마음을 내리누를 만큼 너희를 사랑했다고.
메그는 오래 살지 못했다. 그들은 메그의 삶을 연장시키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병원이나 호스피스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겠다 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몸을 눕혔던 때가, 그녀가 그 침대를 처음 사용했던 때였다. 메그는 끝없이 눈물을 떨구는 눈동자 사이에서 둘도 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듯이.
누군가는 몇 년에 걸쳐 거짓말을 했고 누군가는 언제나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거짓말과 사랑에 대해 미안하다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마지막일 식사를 받아먹은 후 물을 힘겹게 삼키고 그들을 보았다. 생기 없는 입술. 마른 몸. 그럼에도 눈빛은 정교했다. 숲에서 빌려 온 듯한 햇빛이 침실의 절반을 채웠다. 그들은 그녀를 밝은 곳으로 데리고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와글거리는 저 햇빛이 너를 녹일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네가 나의 입술에 다시 한 번만 입맞추었으면 좋겠어. 메그가 입을 열었다.
계속 거짓말을 했어.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의 환생이라고 했지.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나면. 그 때는 무슨 짓을 해서든 사랑한다고 말하게 해. 너희만을 보게 하고 너희만을 생각하게 해. 협박을 하든 구슬리든 속이든 결국 너희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싫어한 게 아니었구나. 미워한 게 아니었어.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데려와 멋대로 애정을 퍼부으며 멋대로 내 삶에 파고든 너희를. 하지만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겠어. 미친 건 나였지.
다음의 네가 또다시 우리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누군가가 물었다.
가둬. 가두고 네 것이라고 말해. 괴로워하고 밀어내도 무시해. 그리고…….
메그가 그들에게 웃었다.
마음껏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줘. 그들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메그. 사랑해. 세 개의 시선이 끝없이 한 곳으로 모였다. 단단한 팔이 부서지기 직전의 몸을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메마른 어깨 위로 흩어졌다. 입술이, 더듬거리며 입술을 찾고 눈꺼풀을 찾고 두 뺨을 찾았다. 지금의 나는 아프고 있는 걸까.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 다 얻는 걸까. 사랑인 줄 알았는데 공포였고 고통인 줄 알았는데 사랑이었다니. 그들의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이제 버렸다. 나는 너희를 사랑했어. 사랑하고 사랑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메그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 뒤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웃었다.
갈색 머리의 여자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을 가로질렀다. 엉망으로 땋은 머리가 검은 코트 위에서 통통 튀었다. 발목을 덮은 검은 부츠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머리의 비니를 털면 먼지 한 줌은 나올 것 같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듯 두리번거리며 출구로 향하다가 잠깐 멈추고 다시 두 발짝 물러났다.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금발 여자가 회전문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우악스러운 손길을 받고 있다가 공중에서 두 바퀴 채 돌았을 때 금발 여자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팍팍 쳤다. 그때서야 아쉬운 칭얼거림을 들으며 바닥에 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멀리서 안경 쓴 여자와 군청색 머리의 여자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사람 중 키가 큰 쪽이 묵직한 캐리어를 가볍게 흔들며 선물은? 하고 물었다. 그녀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무사히 돌아온 내가 선물이지, 대답하고는 입을 맞춰 주었다.
새하얗고 천장이 높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 누군가는 여행을 기대하며 즐거워했고 누군가는 귀향에 기뻐하며 웃었다. 다른 누군가는 이별을 겪은 후 홀로 돌아왔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회의 포옹을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떨림과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꼽아두었던 식당 후보의 사진을 몇 장 넘겨보다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직접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고 툭 내뱉었다. 군청색 머리 여자가 난감한 얼굴로 예약 취소 전화를 걸었고, 금발의 여자는 기쁜 표정으로 재료부터 사러 가자고 웃었다. 안경 쓴 여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맛있는 술을 준비해두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공항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훅 다가왔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 수없이 많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하늘에 몇 없는 별. 아마도 바쁘게 움직일 인공위성들.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바삐 움직이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춥고 외롭고 비참하지 않은 세계. 그녀는, 메그는 밤과 그들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다가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다. 집으로. 너희와 나의 집으로 돌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