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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설화/극야

극야. 00

Eugene_FMF 2018. 11. 11. 18:41

 

 검은 커튼이 창문을 단단히 가려 빛 한줄기 새어들지 못할 실내. 침대 위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새카만 방 안에서 새카만 그림자가 언덕처럼 둥글었다가 목선을 따라 곧게 펴졌다. 창백한 살결이 이불 위를 더듬거리다 멈추었고, 투명한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몇 번 숨었다가 다시 드러났다. 메그는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닥을 딛고 일어나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주황색 슬리퍼가 복도를 걷자 낡은 마루가 걸음마다 삐그덕거렸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 거실에는 달콤한 냄새가 잔뜩 퍼져 있었다. 알렉스가 햇빛에 말린 러그를 거실에 펼치다 메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트리스는 부엌에서 체리 파이를 자르며 인사를 건넸고, 에린은 그녀에게 입 맞춘 후 테이블에 접시를 마저 깔았다. 메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몇 번 긁다 식탁 의자에 앉아 크게 하품을 했다. 부드러운 음식 냄새. 밝고 예쁜 조명들. 산에서부터 불어온 밤바람이 갈색 머리칼을 흔들고 부엌 한켠의 창문으로 흩어졌다. 태양은 커다란 거실창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메그는 하품을 하다 체리 시럽을 듬뿍 뿌리고 커스타드 크림으로 속을 채운 파이를 보며 포크를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평화로운 대화가 저녁 식탁을 맴돌았다. 오늘 수입은 어땠어? 전파탑 고쳐주고 꽤 받았지. 우린 내내 사냥만 했어. 가죽이 돈이 꽤 돼? 그보다는 사냥꾼 두셋 쯤 죽인 곰을 처리해달라더라. 버터에 구운 소고기. 속이 꽉 찬 파이. 푸른 샐러드와 빛깔 좋은 과일들. 메그는 정성스러운 음식들을 먹으면서도 배부르지는 않았지만 포크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피와 살이요 나의 끼니가 될 것이니 나는 저작 한 번마다 이를 곱씹으며 기억하리라.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사라질 때 쯤 메그는 트리스의 허벅지에 올라타 단단한 피부 위로 이를 박았다. 목과 어깨 사이의 경동맥에 유난히 날 서린 송곳니를 꽈악. 트리스는 미동도 없이 메그를 받쳐 안았다가 꼴깍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린 후에나 등을 토닥여 고개를 들게 했다.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던 알렉스는 메그를 두 팔로 끌어안아 피와 온기를 잔뜩 나누어주었고, 그 후에는 에린의 손에 이끌려 하얗고 얇은 피부를 물었다. 이 조용하고 기이한 흡혈귀의 식사는 일주일에 두 번. 에린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든 메그의 뺨에 드물게 생기가 올라 있었다. 싱그러운 과일 냄새가, 피 냄새로 바뀌어 있었으나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 후 그들은 홍차와 우유, 보드카 한 잔과 설탕을 잔뜩 탄 사과 주스를 내왔다. 그리고 소파와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책을 읽고 낱말퍼즐을 풀고 큐브를 만지작거렸다. 메그는 소파 위에서 에린의 무릎을 베고 누워 다리를 휘적거리다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는 러그 위에 흩어진 큐브 조각을 이리저리 끼우다 내려놓고 메그에게 팔씨름을 하자고 졸랐다. 메그가 대답 없이 돌아누워 소파 등받이만 쳐다보자 에린과 트리스가 웃으며 울상인 알렉스를 다독였다. 활짝 열어둔 거실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고, 트리스가 에린의 어깨와 메그의 다리에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들은 메그의 사탕을 칩으로 포커를 열댓 판 하다가 에린이 사탕을 모두 쓸어가자 카드를 집어던지고 그만두었다. 원카드. 블랙잭. 그리고 포커까지 모두 에린의 승리였다. 거실 한쪽에 걸린 시계가 새벽 한시를 가리킬 때 즈음 에린이 무거운 눈꺼풀을 비볐다. 트리스는 거실 창문을 닫고 새까만 커튼을 두껍게 친 후 굿나잇 키스를 해주었다. 알렉스는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메그의 곁에서 한참이고 재잘거렸다. 맛있는 크레이프 가게를 발견했다는 이야기. 이 지방은 날씨가 좋아서 과일이 맛있다는 이야기. 광장 분수에서 무지개를 보았다는 이야기. 햇살 냄새가 잔뜩 나는 지저귐 같았다. 알렉스의 말이 조금씩 느려지고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퍼뜩 깨기를 반복하자 메그는 이제 자러 가라고 말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젓고 메그의 손을 만지작댔다.

 이럴 필요 없는데.

 그래도 너랑 더 오래 있고 싶어.

 알렉스가 메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메그는 표정 변화 없이 금색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다 등을 툭툭 쳐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럼 원카드나 하자. 메그가 러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있는 카드 더미를 눈짓하며 말하자 알렉스가 방긋 웃었다. 메그는 사르르 녹는 그 웃음이 사랑스럽다 생각하여 입을 맞춰 주었다.

 새벽 네 시쯤. 어두웠다. 메그는 소파에서 몸을 구긴 채 잠든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커튼을 걷고 밖을 살폈다. 희미한 가로등조차 모조리 꺼진 도시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메그는 러그 위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알렉스의 큰 몸에 덮어준 후 라이플 끈을 어깨에 메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새벽 공기조차 온화한 지방이었다. 지붕 낮은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정원조차 공유하는 도시. 중앙 분수대를 중심으로 새하얀 모자이크 타일이 동그랗게 펼쳐진 아름다운 곳. 메그는 달빛과 비정상적인 시각에 의지하여 모두가 잠든 땅을 둘러보았다. 서점과 크레이프 가게가 어느 골목에 있는지, 그들이 어떤 표정으로 제 생각을 했을지 상상하면서. 벌레와 새조차 잠든 시간이었다.

 모든 신이 죽었고 전쟁은 끝났다. 먼 곳에서는 신의 이름을 내세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으나 곧 끝날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풍요로운 땅을 찾아 도시를 세웠다. 길었던 전쟁에 진저리치듯 평화와 안정만을 수용하는 아름다운 도시들을. 그들은 전쟁터와 평화의 땅을 오가며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 일이란 무기로 땅을 다지고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메그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새하얀 달 아래로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먼 날을 떠올렸다. 세계가 끝나는 것을 기어이 보려던 크로노스의 추종자들과 마지막 전투를 했던 때였다.

 무엇이 그 치들을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만든 것일까.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그들조차 그런 놈들은 처음이었다. 옷 속에 폭탄을 숨기고 뛰어들던 놈.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기관총을 쏟아 붓던 놈. 에린조차 모르는 고대의 저주를 읊던 인간까지. 메그는 마지막 적을 죽이던 마지막 순간에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녀는 사흘 밤을 내리 앓은 후에나 눈을 뜰 수 있었고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봄날의 햇살 아래에서 검게 타오르던 자신의 피부를 기억한다. 오직 지옥의 용암만이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것도. 타인의 혈액을 끝없이 원하는 몸뚱이를 보며 그들이 어떤 후회를 내뱉었는지도 기억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간절함이나 미련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쓰러지기 전에 보았던 세 명의 시선과 그 생생한 절망을 두고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몰래 생각했다.

 메그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이 도시가 좋았다. 적당히 돈을 벌고 적당히 외진 집에서 적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좋았다. 폭격 걱정 없이 술을 마시고 떠드는 밤. 무기를 손질할 시간에 책을 읽고 카드를 돌리는 일. 모닥불을 피우지 않아도 따뜻하게 잠들 수 있는 집. 메그는 그들이 순번을 정하여 피를 내어주고 밤을 지키는 일조차 곧 익숙해졌다. 그들의 표정에 가끔씩 깃드는 초조함이 거슬릴 때도 있었으나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해 대신 달. 일출 대신 불 꺼진 거리. 새벽 거미가 깔리면 이 광장을 떠나야 했다. 메그는 온통 새카맣고 좁은 방에서 낮 내내 잠을 자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다른 생각을 했다. 가을 한낮의 오후에 반짝거리던 은색 방패와 빛이 비치는 안경테, 햇살이 가닥가닥 스며들던 금색 머리칼에 대한 생각들을. 그러나 그녀는 상념을 잘라낼 수 있도록 훈련 받은 자였으므로 금방 그만두었다. 사랑하는 자들이었으나 사랑하기 때문에 더더욱. 밤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었다.

 

 색색의 나뭇잎이 푸른 그림자를 만드는 오후. 그들은 햇빛에 말린 하얀 이불을 안아 메그의 방문을 열었다. 복도 양옆의 작은 창문조차 검은 천으로 가려두어 약간의 빛조차 새어들어오지 못했다. 에린은 메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가져온 이불을 온몸에 덮어 주었다. 메그는 눈도 다 뜨지 않고 고개를 작게 흔들다 포근한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해의 냄새와 한낮의 나른함이 깃든 솜뭉치. 햇빛의 비늘들이 그대로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메그는 태양 아래에서 반짝거리던 그들의 머리칼과 눈빛을 흐리게 떠올렸다가 팔을 뻗어 에린을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신난 듯 뛰어들자 침대가 크게 흔들렸고, 트리스가 픽 웃으며 좁은 벽 쪽으로 겨우 몸을 눕혔다. 누군가는 작게 투덜거렸고 다른 누군가는 마냥 밝게 웃었다. 그들은 좁아도 너무 좁은 침대에서 몸을 구겨 살을 맞대고 잠이 들었다. 누구에게는 깊은 잠, 누구에게는 짧은 낮잠을. 메그는 그들의 뺨에서 나는 바람의 냄새가 좋았다.

 

 트리스는 저녁 식탁을 깨끗이 치운 후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붉은 펜으로 몇 번이나 길을 덧그린 너절한 지도였다. 트리스의 손끝이 이 도시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위도 85도의 극지대, 걸어서 향한다면 언제 도착할 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역. 트리스는 그 곳으로 가자고 했다. 하루 중 네 시간만이 밝으며 그마저도 새벽 같다고. 겨울은 완전히 어둡고 가을과 봄에도 해가 짧다고. 눈이 아주 많이 내리지만 추위는 우리에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메그를 제외한 모두가 좋다고 대답했다. 메그는 표정을 찡그렸을 뿐 그들이 자신 몰래 준비했을 것들에 대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외진 곳의 낡은 2층집을 사들였다. 고칠 곳이 많아 보였지만 그들에겐 흠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숲에서 자작나무를 베어와 듬성듬성 삭은 곳을 덧대고 굴뚝을 청소했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을 수리하고 먼지와 거미줄을 적당히 닦아낸 후에는 삐그덕거리는 마루 위에 곰 가죽을 펼쳤다. 메그의 방은 언제나처럼 2층의 끝자락. 그 옆은 에린의 방. 트리스와 알렉스는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업어온 두꺼운 이불을 각자의 침대 위에 깔고 벽난로 앞에 앉아 작은 마을의 지리를 이야기하다 곧 잠이 들었다.

 오후 세시. 해는 지평선 위로 떠오르지도 않았다가 그마저도 어두워졌다. 그들은 멀리서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것을 보며 메그를 불렀다. 메그는 밝지 않으나 밤처럼 새까맣지도 않은, 어두운 푸른빛이 가득 찬 하늘을 문가에서 한참동안 보고 있었다.

 그들은 산길을 내려가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은 아직 한낮처럼 분주했다. 이 추운 날씨에 젤라또를 파는 가게. 살짝 열어둔 문틈으로 버터 냄새를 한껏 풍기는 빵집. 새벽 낚시에서 건져 올린 생선을 파는 매대들. 극야의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리마다 작은 전구를 걸어두었다. 어닝 위와 가로등 사이는 언제나 축제인 것처럼 반짝거렸고, 하늘은 보랏빛과 짙푸른 색이 뒤섞여 마치 신새벽 같았다. 환상 같기도 하고 꿈같기도 한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서도 작은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등에서 통통 튀어오르는 땋은 머리카락을. 색을 바꾸는 전구 아래에서 주홍빛에 물드는 살결을. 비니를 살짝 들어올려 불 들어온 곳마다 눈길을 주는 시선을.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푸른 동공에서 들뜸과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를.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메그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차가운 바람에 콧등과 두 뺨이 빨개진 채 시린 입김을 뱉으면서. 얇고 날카로운 눈꼬리를 예쁘게도 접어내리면서. 입술은 희게 트고 갈라져 있었으나 분명 웃고 있었다. 그들은, 투명한 바다가 파도가 되어 햇빛에 부서지는 것보다, 해가 고개를 내미는 사막의 지평선보다 시리게 빛나는 겨울 자작나무숲이 아름답다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너를 사랑해. 네가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디든지 갈 거야.

 

 그들은 자주 바깥에서 식사를 했다. 메그가 빼앗겼던 몇 개월을 채우려는 것처럼. 달콤한 것들을 잔뜩 먹은 후 도시의 유일한 캔디샵을 매대 하나하나 뒤지기도 했고, 갓 구운 파이를 한 조각씩 물고는 얼어붙기 직전의 항구를 걷기도 했다. 어둡고 푸른 하늘.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단단한 밧줄에 메여 흔들리는 작은 어선. 평화로운 일상이 이 땅에 전부 있었다.

 극지방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으나 그들에게는 어렵지도 않았다. 그들은 마을을 돌며 배와 자동차 등을 고쳤고 버려진 사륜 오토바이를 개조해 사냥을 나갔다. 가끔은 어선에 올라타 그물을 당겼으며 마을에서 힘쓰는 일을 하고 음식을 얻어오기도 했다. 메그는 정원 구석에서 장작용 나뭇가지들을 부러트리다 맨손으로 대련하던 알렉스와 트리스를 보았다. 에린은 창고 쪽에서 스노우모빌의 엔진을 고치고 있었다. 메그가 벽에 걸쳐두었던 라이플을 쥐고 일어서자 알렉스가 놀란 얼굴로 대련에 낄 거냐고 물었다. 메그는 대답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높이 날던 새를 한 발로 쏴 떨어트린 후 그들을 보고 씩 웃었다. 저녁 재료야. 먼저 주워오는 쪽이랑 대련한다. 알렉스와 트리스는 잠깐 눈을 맞추었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땅을 박차고 뒷산으로 뛰어갔다.

 그런 생활을 한 달쯤. 트리스와 에린은 이유 모를 일로 또다시 바빠졌다. 메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을 알렉스와 함께 보냈다. 그들은 스노우모빌을 타고 나가 사냥을 했고 생선에만 있는 이름 모를 영양소가 좋다는 말에 몇 시간 동안 얼음낚시를 하기도 했다. 메그는 낚싯줄을 감으며 그 두 사람이 다시금, 자신 모르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불편한 거 없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던 메그에게 트리스가 물었다. 메그는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뜨리며 트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에린과 알렉스를 보았다. 메그는 아직도 피가 조금씩 새어나오는 트리스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불편한 건 너희들 아니고?

 그런 말 하지 마.

 너야말로.

 메그,

 쓸데없는 생각 마. 전쟁통을 쏘다녔던 것보다는 편하니까.

 메그가 손가락을 거두며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한 명씩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살기 위해 너희를 깎아먹는 짓이 달갑지 않으나 나라도 너희에게 살결을 내어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니 죄책감 따위는 없으며 너희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 그녀의 투명한 눈은 거짓이 없었고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함께했다. 긴 침묵 끝에 트리스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그가 트리스의 가슴팍에 툭 기대었다. 에린과 알렉스가 소리 없이 다가와 그들을 껴안고 이마와 뺨, 입술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들의 목에서는 여전히 비리고 달콤한 냄새가 났는데, 메그는 눈을 내려감고 그 손에 몸을 맡겼다.

 

 그들은 메그가 잠들었을 시각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겨울이 끝나 해가 길어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대화 속에 그들의 불편함은 조금도 없었다. 태양이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그랬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우리의 곁이며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듯, 저주를 풀 방법에 대하여 작은 목소리로 드문드문 말하면서도, 다시 잃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그 지나친 다정함. 그 절박함과 이기심.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와 함께 살아가면 그만이야. 그리고 우리는 모든 짓을 다 할 거야. 메그는,

 메그는 계단 층계참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다가 조용히 빛 없는 방으로 돌아갔다.

 

 새벽 네 시. 모두가 잠든 시간. 메그는 비니를 눌러쓰고 목깃을 당겨 입을 가렸다. 낡은 나무문이 조용히 열렸다가 닫혔다. 갈색 군화가 자갈 섞인 눈을 밟는데도 무게가 없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걸음 걸어간 메그는 새까만 어둠 속에 파묻힌 작은 집을 돌아보았다가 흐린 입김을 내뱉었다. 빛이라고는 없는 땅. 끝없이 자라나는 거목처럼 해와 비를 맞아야 할 자들을 가두어 놓았던 극야.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어둠으로부터 떠내려오는 눈송이들 뿐이었다. 메그는 등을 돌렸다. 곧. 바람이 거세질 것이다.

 ……어디 가?

 공기가 숨을 삼키는 것처럼 눈발이 공중에서 멈추었다가 내려왔다. 메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흐린 형체가 어둠 속에서 한 명씩 걸어 나왔다. 메그의 시선이 잠시 먼 곳에서 머물렀다. 띄엄띄엄 길을 비추는 가로등. 작은 항구의 새벽 출항을 준비하는 어선들. 규칙적으로 깜빡거리는 높은 등대. 온통 흐린 세상에서 잘게 떨리는 목소리만이 색을 가지고 있었다. 메그는 입을 작게 벌려 날카로운 이를 만져본 후 삐딱하게 서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주 풀 방법 찾으러.

 그런 건 없어.

 것 봐. 말 안 해줄 거잖아.

 세 명의 표정이 굳었다. 메그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서 떠돌던 눈이 갈색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았다. 트리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표출할 곳 없는 화와 슬픔이 악문 이 사이로 흐리게 새어나왔다.

 …그렇게 떠날 듯 굴면 말할 거라고 생각해?

 난 안 떠나. 다시 돌아올 거야.

 메그. 이 생활 나쁘지 않다며. 에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메그는 긴 코트를 펄럭거리며 그들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알렉스가 그 움직임에 움찔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대면서도 당장이라도 그녀를 덮쳐 붙잡을 것처럼. 그들은 절망을 몰랐으나 넷 중 하나만 사라지면 지옥이었다.

 날 묶어두기라도 하려고? 메그가 끝이 너덜한 사탕 막대를 눈 위로 뱉으며 말했다. 안 그럴 거잖아. 다 알아. 너희는 내 뒷모습을 좋아하니까. 그녀는 그들의 생각과 시선을 전부 다 안다는 듯 슬쩍 웃었다.

 자유롭게 사는 나를, 좋아하잖아.

 트리스의 짧은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메그는 그 익숙한 피냄새를 맡으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문장이 되지 못할 단어 토막들로 표정을 한껏 무너트린 자들. 사랑과 배려와 집착 사이에서 어지러이 길을 잃은 자들. 트리스의 목에서 씹어 삼키지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확률이 너무 낮아. 절반의 확률에 어떻게,

 내 목숨을 거냐고?

 그래! 우린 못 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눈더미가 후드득 떨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이 짧게 머물렀다 사라졌다. 에린이 겨우 메그의 어깨를 쥐었다. 메그는 그 가느다랗고 하얀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 깍지를 꼈다가 손등을 쓸고 놓아주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은색 동전을 하나 꺼내 엄지 위에 올렸다. 동전 던지는 거랑 똑같네. 쌓인 눈보다 시리고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보다 반짝이는 것이었다.

 살면서 도박 아닌 게 얼마나 있다고.

 메그는 그들과 한명 한명 눈을 맞추었다. 춥고 어두웠으나 분명하게 타오르는 세 명의 눈동자가 메그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간절했다. 빛에 반짝거리던 흰 망토와 은빛 방패. 피바다에 뛰어들며 태양처럼 타오르던 붉은 망치. 흙먼지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아쇠를 당기던 고아한 손가락. 그 자유가 너희의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하늘을 보지 못하더라도 다시는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살게 하지는 않겠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메그를 붙잡을 것처럼 발끝에 힘을 주고 다가왔으나 메그는 웃었다.

 내 삶에서 도박이 아니었던 건 너희들 밖에 없었어.

 그들은, 그들은 숨을 삼키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봄의 잎사귀같이 투명한 웃음이 얼어붙은 심장을 녹인 듯.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짐작하고 포기하고 있었는지 알아버린 듯이. 그들은 메그를 위하여 각자의 방을 가졌으나 그것이 메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메그를 위하여 태양 없는 땅에 왔으나 그들 두 뺨에서 나는 햇빛 냄새를 빼앗았다. 사랑은 희생이 아닌가? 집착은 사랑이 아닌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메그가 동전을 퉁기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사랑이란.

 어느 쪽?

 트리스는 너절한 입술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뒷면. 모든 것을 정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단어.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꺾는 방법을 몰랐다. 메그는 손등을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내가 이겼어. 그녀는 그들에게 두 팔을 벌리고 몸을 기대며 소곤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난 햇빛 아래의 너희를 다시 보고 싶어, 둘도 없는 사랑고백을 하듯이 그렇게.

 사랑이란 때때로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다.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으나 그들은 그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들은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네 명의 피를 섞고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를 읊은 후 마지막이 될지 아닐지조차 불투명한 밤. 메그는 그들의 품 안에서 가죽과 뼈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피부 위에 이를 세우며 속삭였다. 너희의 심장이 좋아. 뜨거운 살결이 좋아.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지. 필요한 피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메그의 말에 대답했다. 사실은 어렵지 않다고. 신선한 시체는 질리도록 봐왔다고. 하지만 네가 우리만을 원했으면 해서 그랬다고.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그 담담한 중얼거림은 검고 탁한 욕망과 다를 바 없었으나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누가 입 밖으로 내었는지 알 필요 없을 만큼 그랬다. 메그는 뜨거운 손길과 입맞춤을 몇 번이고 받으며 하얀 시트가 핏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에린의 허벅지에 이를 박았다.

 검은 코트가 차가운 돌바닥 위로 스러지던 그 마지막 기억 온 살갗에서 느껴졌던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니다 비명도 시체의 찢어진 내장도 붉게 검붉게 흩어졌고 피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몸은 따뜻한 피부를 잃었다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 했던 그들의 맹세는 둘도 없이 절박하게 타올라 처절한 고통으로 튀어올랐다 푸르렀던 세상이 하나 둘 죽어갔고 단지 네가 눈뜨기만을 바랬던 그 신새벽 지금 그들은 커튼을 걷고 이미 멈춘 듯한 차가운 심장에 박동이 떠오르기를 기도하며 새하얀 몸이 희미한 빛에 젖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바닥으로 피바다로 가라앉는 저 몸을 우리에게서 빼앗지 말아라 기어이 그러겠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멸할 재앙이 되리라 그리하여 하늘과 저승의 강을 뒤집고 모든 이를 죽여서라도 되찾으리라 안대를 풀어낸 알렉스의 두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그 모습을 눈에 새기듯이.

 

 

 

 

 언덕마다 새순이 돋았다. 푸른 잔디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누웠다가 일어서며 하늘에 젖어들었다. 멀리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트리스는 구름 조각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내렸다. 알렉스는 빨간 자켓을 하나하나 개고 있었고 에린은 탄창을 챙기며 짐을 살펴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수천 개의 푸른 이파리들이 햇빛을 받아 저마다의 색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 화사하게 부서지는 녹음. 이슬에 젖은 풀냄새가 뺨을 쓸고 지나갔다.

 트리스는 몸을 숙여 비니로 눈을 가리고 잠들어 있는 메그를 들여다보았다. 트리스의 무릎이 잔디 위를 디뎠다. 따갑지 않은 햇볕 아래에서 아주 조금 드러난 살갗. 살짝 벌려진 메마른 입술. 트리스는 비니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손끝으로 감긴 눈꺼풀을 매만졌다. 색 옅은 속눈썹이 촘촘하게도 내리깔려 있었다. 트리스는 하얀 이마에 입술을 조심히 내렸다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얇은 눈꺼풀이 몇 번 꿈뻑거리며 천천히 눈동자를 드러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가느다란 아래속눈썹이 하나 둘 펼쳐지고 밝은 하늘색 홍채가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그는 햇볕에 눈을 찌푸리고 비니를 다시 눌러쓰면서도 팔을 뻗어 트리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알렉스와 손을 뻗어 일으켜주는 에린에게도 굿모닝 키스를 했다. 아침 치고는 늦었다며 한 번 더 해달라는 알렉스의 보챔에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면서도 껴안는 팔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이마에 다시금 입을 맞추고 콧잔등을 깨물며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따뜻한 입술. 부드러운 살결. 햇빛에 부서지는 높은 목소리. 여름잎처럼 풍요로운 웃음들. 있잖아. 나는 단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아주 행복해.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길을 비추었다. 바람이 옷자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햇살이 두 뺨들을 적셨다. 해가 비치는 수면처럼 반짝거리는 은빛 방패. 봄을 머금은 듯 웃음 짓는 검은 눈동자. 황금빛 바다처럼 물결치는 금색 머리칼. 자. 봄은 우리의 것이다. 그러니 노래하자. 극야의 땅에서 걸었던 만큼 더 걷자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필요하다면 달을 쏘아 떨어트리고 해의 심장을 가져오자고 노래하자. 우리는 그렇게 몇 번이나 사랑을 읊으며 마침내 영원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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