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애. 02
※ 후타나리 요소 포함 ※
잔잔한 겨울 호수의 수면 아래에서 커다란 몸이 드러났다. 군청색 머리카락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새빨간 동공은 눈 덮인 땅과 새파란 물결을 응시했다가 다시 물 아래로 사라졌다. 동상에 걸릴 것 같은 냉기 속에서 단단한 손끝이 물살을 갈랐다. 트리스는 얼음이 언 호수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심박이 느려지고 사고가 본능과 가까워질 때를 즐겼다. 호흡기에 차오른 입김이 기포로 나오는 것도. 수면 위로 빠져나왔을 때 폐로 다급히 들어오는 얼음 같은 공기도.
호수 위에서 얼굴을 내밀자 날카로운 바람이 눈가를 스쳤다. 차가운 감각이 상체를 덮쳐왔지만 익숙했다. 차분하게, 하지만 확실히 심박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두꺼운 목선과 단단한 어깨. 그 아래로 자리 잡은 두터운 가슴과 통나무 같은 팔. 선명한 근육들. 물에 젖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과 그에 살짝 가려진 눈. 먼 곳에서 빼곡히 서있는 침엽수림이 바람 없이도 눈을 후드득 떨어트렸다. 고요했다.
"후."
트리스는 호숫가에서 걸어 나오며 이미 세탁을 끝낸 빨랫감과 비누가 든 양동이를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쭉 폈다가 머리의 물기를 대강 털어내며 오두막 방향을 바라보았다. 몇십 걸음 떨어진 오두막의 앞마당에서 순록 고기를 훈제하고 있는 메그가 보였다. 메그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장작을 넣으며 연기를 지키고 있었다. 트리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메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
미쳤나?! 멀리서 트리스를 보고 있던 메그가 장작을 후드득 떨어트렸다. 그리고 입을 벌린 채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저, 저렇게 다 벗고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보라가 그치긴 했지만 아직 얼음 같을 텐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인간이 아닌 건가?!'
검고 푸른 물에서 수영을 하는 모습은 호수의 신 같았다. 상체를 드러내며 물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은 설산의 주인 같았다. 며칠간 좀 익숙해졌다 싶었지만 젖은 얼굴은 또 새롭게 잘생겼고, 생존 근육이 빼곡히 자리 잡힌 몸은 흠잡을 데 없이 탄탄해 보였다. 어두운 피부 구석구석 새겨진 흉터들은 야생성을 드러내었고, 돌덩이 같은 허벅지는 얼음장 같은 물에서도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그 허벅지와 허벅지 사이 달려 있는 무언가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크기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킬 만큼…그랬다.
저런 걸 말 같다고 하나……?
메그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민망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애꿎은 장작을 더 밀어넣었다. 그러자 훈제를 위해 준비하던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메그는 작게 콜록거리며 멀리서도 형태와 크기가 선명했던 것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미간을 눌렀다. 하. 미친. 내 눈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말은 또 무슨 놈의 말이고. 너 말 거시기 본 적 있어? 없잖아? 애초에 거시기를 본 것도 처음이면서 큰지 안 큰지는 어떻게 아는데? 물론 비교할 상대가 없어도 저만한 크기면 큰 게 맞겠지만──
"잘하고 있어."
으악!
불쑥 튀어나온 손에 메그가 두 손으로 장작을 꽉 쥐고 소리 질렀다. 어느새 양동이를 들고 오두막으로 돌아온 트리스가 곁에 서있었다. 트리스는 메그의 비명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는 메그의 언어로 더듬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잘…잘 한다.
익숙하지 않은 발음으로 메그를 칭찬하는 트리스는 다행스럽게도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상체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가슴팍과 복부의 선명한 근육과 상처를 훤히 드러낸 채였다. 메그는 연기와 놀람에 찔끔 나온 눈물을 후다닥 닦으며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훈제 작업대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다 힐끔, 훔쳐본 트리스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작은 모닥불에 냄비를 걸어 산양유를 끓이고 있었다. 작은 컵에 산양유를 따르고 홀짝거리는 게 성인 소설에 나온다던 화끈한 양치기 같기도 했다. 아, 젠장. 잊어라, 좀. 빨리!
마셔.
으응…….
메그는 트리스가 건넨 컵을 어물어물 받아 들고 입을 대었다. 산양유에 각설탕을 넣은 건지 단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호륵. 나무 연기만 가득 마시던 몸에 부드러운 향기가 퍼져 조금 나른해졌다. 메그는 한 손으로 잔을 쥔 채 잠깐 멍하게 있다가 불가에 앉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트리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 잘생겼고… 몸 좋은……집주인 녀석. 이 놈은 수치심이란 것 자체를 모르는 게 분명하다. 같이 지낸 지 고작 보름 정도 되었는데 벌써 저 가슴을 몇 번이나 마주쳤는지. 그래도 상체는 면역이 좀 생겼는데, 바지 안은 도저히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아니. 왜 다시 보는데? 진짜 돌았냐? 메그가 흘러가듯 떠오른 생각에 충격을 먹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리고 트리스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다. 트리스는 달라진 것 없는 눈빛으로 메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한숨을 푹 쉬고, 트리스의 언어로 "추워?" 하고 물어보았다. 춥지 않냐는 뜻이지만 끝을 올려 말하면 대충 의문형 같을 것이다. 추위는 둘째치고 눈 둘 곳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니까 옷을 입어줬으면 좋겠어. 근데 이걸 네 언어로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편안해."
메그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트리스가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메그는 후, 짧은 한숨을 한번 더 쉬었다가 그러냐…하고 중얼거리며 훈제 연기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트리스는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호수를 바라보다가 머리의 물기를 몇 번 털었다. 그리고 연기 속의 메그를 보았다. 검댕이 살짝 묻은 얼굴이 약간 지쳐 있었다. 작업이 끝나면 씻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에서 목욕하면 된다고 했더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던 게 며칠 전이었다. 그녀에게는 이 날씨가 추울 수도 있겠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뺨도 귀도 추위에 빨개져 있었다.
트리스는 양동이를 들고 오두막 옆의 헛간으로 들어갔다. 동물 가죽을 손질하거나 부피 큰 짐을 쌓아두는 곳이었다. 흙바닥 한 구석에 불을 피워 빨랫감이 얼기 전 바싹 말리는 용도로도 썼는데, 마침 구석에 마을에서 가져왔던 위스키 통이 보였다. 제 양팔보다는 작고 가슴께보다는 낮은 크기였다. 술을 숙성시키는 용도인 만큼 물이 새지 않아 욕조로 딱일 것 같았다.
트리스는 헛간 밖을 흘끔 보았다. 메그가 나무와 돌을 세 방향으로 쌓아 올린 훈제 작업대 안에 고기 덩어리를 걸고 있었다. 온 얼굴로 연기를 맞으면서도 찡그리지 않고 이마를 닦아내면서. 가끔 기침을 하면서도 잘 훈제된 덩어리들을 보며 옅게 웃으면서. 트리스는 메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지었다가, 오두막에서 무쇠 솥 두 개를 들고 와 헛간에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하아.
메그는 몇 시간 동안 연기를 쬐어 완벽하게 훈제된 고기 몇 덩이를 작업대 위에 늘어놓았다. 순록 고기는 겉이 바싹 마른 채 훈제 향이 듬뿍 나고 있었다.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이고 연기를 맡으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메그는 그것들을 종이로 감싸고 끈으로 묶은 후 호수에서 물을 길어와 연기를 완전히 껐다. 그리고 종이로 포장한 고기를 오두막의 부엌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그저 몇 끼 먹을 식량을 준비한 것뿐인데, 왠지 모를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다.
"메그."
응?
"여기."
부엌에 서서 기지개를 켜고 있자 오두막 문가에서 고개를 내민 트리스가 메그를 불렀다. 호숫가에서 물을 잔뜩 길어가더니 헛간에서 뭔갈 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 끝난 걸까. 메그는 이제야 옷을 제대로 입은 트리스를 보고 조금 안심하면서 그녀가 손짓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뒤에서 바라본 트리스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오두막에서 열몇 걸음 떨어진 헛간에 들어서자 따끈한 수증기가 훅 하고 얼굴을 덮쳤다가 문 밖으로 사라졌다. 놀란 메그는 눈을 깜빡이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창고 같은 공간에 이런저런 짐들이 쌓여 있었고 손질한 가죽들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나무 상자들. 낚싯대와 그물. 먼지 먹은 천 뭉치도. 한쪽 벽에는 창문이 밖으로 나 있었는데, 그 창문 앞으로 커다란 술통이 놓여 있었다.
어?
메그는 김이 뽀얗게 올라오는 위스키 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트리스는 메그의 손을 쥐고 메그를 그 고전적인 욕조 앞으로 데려갔다. 바로 옆의 나무 작업대 위에는 가성소다와 기름으로 만든 비누까지 있었다. 그 옆에는 흙바닥을 파서 만든 불가와 물을 끓일 때 사용했을 무쇠 솥 두 개. 앉아 물이 끓는 것을 지켜봤을 나무 의자까지.
몸 닦기. 아니… "목욕."
트리스가 메그를 보며 말했다. 메그는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는 나무 욕조에 손을 살짝 대었다가 트리스를 확 돌아보았다.
목욕? 진짜?
군인으로 살아오며 매일 씻지 못하는 환경에는 익숙해진지 오래다. 하지만 흙밭에 구르고 있었다면 체감도 못 할 것을, 따뜻한 집에서 따뜻한 음식이나 먹으며 매일을 보내니 젖은 천으로만 몸을 닦아내는 게 찜찜하기도 했다. 그래도 저 집주인처럼 차가운 호수에서 씻어야 한다면 그냥 안 씻고 말지 싶었는데. 이 살을 에는 추위에서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는! 메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트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트리스는 제 옷을 벗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 끓이는 냄비 앞에 뒤돈 채 걸터앉았다. 신경 쓰지 말고 벗으라는 뜻이었다. 메그는 사양하지 않고 얼른 걸친 것을 벗어서는 수건 대신 쓰는 천조각으로 앞만 가리고 욕조 앞으로 달려갔다. 드물게,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신난 듯한 발걸음이었다.
찰박.
다리를 뻗어 발끝부터 욕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찬바람이 더 강해지기 전에 욕조의 가장자리를 잡고 발끝부터 조심스럽게 천천히 몸을 담갔다. 무릎을 세워 앉으면 편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크기의 욕조였다. 뜨거운 물에 종아리부터 허벅지, 복부와 가슴께까지 천천히 집어넣자 열기가 더 짙어졌다.
흐아… ……하아아.
피부부터 뼛속까지 천천히 전해지는 뜨거움에 저절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뜨거움과 따뜻함 사이. 온몸이 편안하게 감싸이는 느낌. 얼굴은 차가운데 몸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고, 어깨니 목이니 뭉쳐 있는 몸 구석구석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 크기와 이 높이. 어떻게 이렇게 제 몸에 딱 맞는 욕조가 있을 수 있지. 위스키 냄새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 미쳤어.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좋다…….
메그가 중얼거렸다. 몇 시간 동안 훈제 작업대 앞에서 찬바람을 맞았던 건 벌써 잊을 만큼 몸이 풀어졌다. 메그는 고개를 들어 물을 끓이고 있는 트리스의 등을 보았다. 저 솥 두 개로 이만큼 물을 끓이려고 몇 번을 퍼날랐을까. 이상한 마음이 가슴께에서 간질거렸다.
트리스… "이거 좋아."
메그가 말했다. 머리끝까지 찌르르한 느낌이 퍼져 희미한 웃음도 함께 나왔다. 뒤돌아 앉아 있던 트리스가 움찔거렸다. 그 목소리가 아름답고 귀여워서 자신도 모르게 돌아볼 뻔 헀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나도 좋다."
트리스는 희미하게 따라 웃으며 과일청 병을 열고 나무 스푼으로 설탕에 절여진 산딸기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탁탁, 스푼을 컵에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조르륵 따랐다. 나무가 타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 물이 천천히 끓는 소리. 욕조가 식으면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줄 생각으로, 계속 불을 지키고 있는 사람.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차 마실래? "가도 되나?"
트리스가 뒤돌아 앉아 컵을 쥔 채 물었다.
"좋아…."
메그는 목까지 잠긴 채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뭐 어때. 수증기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을 테고 누구는 알몸까지 보여줬는데. 녹아내린 머릿속으로 눈을 내려깔고 멍하게 있자 트리스가 컵을 들고 곁으로 다가왔다. 메그는 빨개진 뺨을 하고서는 눈을 깜빡이다가 트리스를 흘끔, 올려다보고 욕조에서 팔을 빼 그 잔을 받아 들었다. 첨벙. 찰박. 물방울 맺힌 피부가 열이 올라 생기가 돋아 있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 직접 담근 과일청이 들어간 산딸기 차. 메그는 컵을 쥐어 호륵, 한 모금 머금었다. 양쪽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눈이 깊게 감겼다가 느릿하게 뜨이길 반복했다. 창문 밖으로 눈 덮인 겨울 호수를 바라보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달콤한 차를 마시고 있다니. 군인일 때도 군인 이전에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편안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사치스럽고, 편안하고, 안락했다. 정말 이상할 만큼 그랬다.
"…고마워."
트리스는 메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눈을 닮은 창백한 피부가 따뜻한 물에 발그레해진 것을 살펴보았다. 며칠 잘 먹여 조금은 살이 오른 두 뺨이 수증기에 촉촉해졌고, 이마와 귀를 살짝 가리는 갈색 머리칼도 끝이 젖어 색이 더 짙어 보였다. 기분 좋게 내리깔린 속눈썹과 멍하니 수증기를 바라보는 눈이 예뻤다. 작은 콧망울과 살짝 벌려진 입술도. 입술 사이에서 맴도는 붉은 혀도. 무엇보다 내가 준비한 것들을 이렇게나 마음에 들어 하다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안심. 편안함. 행복 같은 것들. 트리스는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메그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올린 팔로 메그에게서 컵을 받아 들고 땋은 머리칼을 욕조 밖으로 빼냈다.
머리. "감겨줄게."
아? 아,
메그는 몽롱한 정신으로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뒤로 넘기며 꿈질꿈질 자리를 잡았다. 트리스는 자그만 한손 냄비로 욕조의 물을 퍼 메그의 머리에 조심히 끼얹었다. 그리고 작업대 위의 비누로 갈색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힘겹게 비누 거품을 내었다. 커다란 나무껍질 같은 손이 긴 머리카락 한 줌을 쥐고 흙먼지와 연기를 털어냈다. 메그는 다른 사람이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생소한 느낌에 낯설어하다가도 뜨거운 물이 머리에 끼얹어질 때마다 눈을 흐리게 깜빡였다. 간질간질하고 노곤하고 몸의 가장 끝에서부터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 점점 트리스의 손을 따라 목이 젖혀지고 입가가 느슨해졌다.
어어… 흐, ……
트리스는 한 손으로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뒷목을 받친 채 다른 손으로 두피를 따라 머리를 감겨주었다. 따뜻했다가 시원했다가, 졸렸다가 잠이 깼다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손길이 너무 정성스럽기도 했다. 새벽부터 일 좀 했다고 따뜻한 목욕물에 달콤한 차에 머리까지 감겨주다니. 유복한 생활은 무슨 박복하기만 했었는데, 이 낯선 땅에서는 무슨 호텔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메그는 결국 멍한 머릿속으로 트리스의 손에 머리를 완전히 맡겼다.
"괜찮나?"
응…좋아…졸려…….
고개가 완전히 넘어가자 몸을 가린 천 아래에 숨어 있던 가슴이 아른아른 비쳤다. 트리스는 손을 움직이다가 잠깐, 멈추고 그 형태를 바라보았다. 봉긋하게 오른 작은 가슴. 하지만 도드라진 끝. 손이 멈추자 보채는 듯한 웅얼거림에 다시 머리를 감겨주면서도 욕조 위를 떠도는 수건이 가슴을 가릴 때까지 계속 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메그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트리스가 거품을 다 씻어내고 허리를 펴자 메그는 거의 잠들어 있었다. 트리스는 그런 메그를 조금 오랫동안 가만히 내려다보다 새 수건을 가져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가능하다면 밤 내내 지켜보고 싶었지만 물이 식기 전에 침대로 데려가야 했다. 커다란 손이 갈색 머리카락 한가닥 한가닥을 뜨개질하듯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그리고 머리가 대강 말랐는데도 눈을 뜨지 않는 메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자러 갈까."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메그는 으응, 하고 대충 대답하며 고개를 트리스 쪽으로 돌렸다. 새벽부터 찬바람을 맞아가며 일을 했으니 지칠만 했다. 이 산은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자를 알게 모르게 배척하지. 상처가 다 아물었어도 체력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을 테다. 트리스는 메그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집어넣고 제 가슴에 기대게 해 몸을 일으켰다. 촤악, 조금 식은 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눈을 감은 메그는 저항도 없이 트리스의 품에 늘어졌다.
트리스는 커다란 천으로 여기저기 맺힌 물기를 대강 닦아냈다. 등과 엉덩이, 어깨와 가슴팍까지. 그 후 접어둔 천을 펼쳐 온몸을 감싼 다음 품에 안아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걸음으로 오두막을 나가 성큼성큼 걸었다. 찬바람이 피부를 식히기 전에 불을 피워둔 훈훈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이 몸을 눕힐 침대가 있는 곳으로. 온기가 오른 뺨을 따뜻하게 데워줄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메그는 코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트리스의 품 안에서 잠깐 꾸물거렸다. 기다란 갈색 속눈썹이 깜빡, 깜빡 움직였다.
이 느낌은 뭐지.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기분은 대체 뭘까. 맨몸으로 안겨 있는데도 상관 없을 만큼 편안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안심하고 편히 안겨 있으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왜 그런 거야? 내가 이렇게 대해줄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아아, 따뜻하다. 바람이 차가운데도 춥지가 않아.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내게 돌아갈 곳이 있는 것만 같아. 살면서 그런 건 가져본 적도 없는데. 머릿속을 떠도는 이상한 생각도 얇은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흐릿하게 몽글몽글…….
메그는 입술을 우물거리다 꽉 끌어안는 뜨거운 체온에 다시 안심하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호흡 두 번 후 쌔액, 잠들었다. 침대에 몸을 내려놓기도 전에. 멋대로 씻기고 닦고 안아들었는데 놀라거나 싫어하지도 않고. 경계심도 없이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처음 만난 날에는 경계하여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으면서.
"……."
트리스는 메그를 침대에 조심히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보았다. 옷 한 겹 너머로 닿았던 살결의 감각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고, 가느다랗지만 여리지만은 않은 몸. 어깨에 닿은 숨결과 졸음에 칭얼거리던 목소리. 꽉 끌어안으니 안심한 듯 몸에서 힘을 풀고 새근 잠들었던 무방비함까지.
나도 안다. 언젠가는 떠날 것임을.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떠날 여자일 것을 안다. 강하고 아름답고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존재다. 이런 곳에 묶어두기에는 드넓은 하늘과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트리스는 몸을 숙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침대 위로 졌다. 새의 깃털을 채워 넣은 베개 위에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느릿하게 나무가 타오르는 소리가 고요한 오두막에 차올랐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두 뺨의 살결. 그 살내음. 살짝 벌려져 곤히 숨을 내쉬는 입술. 내 침대에서 나의 집에서 더없이 포근하게 잠든 나의, 나의…….
"네가……."
트리스는 메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추운 땅에서, 단 둘이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나와 함께하면서. 나의 보호를 받으며. 나의 아내로."
듣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흘러나온 순수한 바람. 한 번도 발음한 적 없는 단어이자 책으로만 읽었던 단어가 자연스레 입술 위에 올랐다. 그렇군. 나는 너를…아내로 삼고 싶은 거였어. 나와 함께 일어나 나와 식사를 하고 사냥을 나설 아내로. 호숫가에서 함께 낚시를 하고 두 손 가득 생선을 지고 돌아와 스튜를 끓이며 맛을 봐줄 아내로.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차가운 피부를 데우고 입술과 입술로 숨을 옮기면서 같은 잠자리에 들 아내로. 창밖으로 바람이 스쳤다가 지나갔다. 멀리서 새 무리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눈이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이 굵어지는 소리. 푸르른 어둠이 내리는 소리. 그간 이상하고 낯설었던 자신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트리스는 침대가에 앉아 메그의 머리칼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이런 날들이 길게 길게 이어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어쩌면, 이 아름다운 여자가 조촐한 나의 집을 마음에 들어 하길 바라면서. 노란 불빛이 흐리게 새어나오는 오두막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