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애. 01
※ 후타나리 요소 포함, 다음 편부터 묘사될 예정 ※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 나무 도마 위에서 말린 야채를 통통 썰었다. 물기를 바싹 말린 버섯도. 눈 속에 파묻어 두었던 순록 고기는 질긴 힘줄을 잘라낸 후 한입 크기로 잘랐고, 화로에 무쇠 솥을 걸어 산양젖과 함께 팔팔 끓였다. 나무로 쌓아 올리고 흙을 바른 후 못으로 박은 집의 천장에 뽀얀 수증기가 차올랐다. 조리대 따라 늘어선 나무 식기와 절임 야채들. 말린 식재료와 커다란 치즈 덩어리들. 벽 따라 걸려 있는 망치와 줄톱. 플라이어. 커다란 칼 몇 자루. 피가 말라붙은 도끼. 트리스는 눈을 내려깔고 잠시 고민하다가 식재료가 든 서랍과 포대 자루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통후추가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겨울 호수와 설산 사이의 조그만 통나무 집, 낡고 초라한 산장의 유일한 향신료였다.
트리스는 나무 그릇에 스튜를 옮겨 담고 방의 한켠을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잔불 소리를 내며 타고 있는 벽난로와 그 곁의 의자가 보였다. 바구니에 담긴 뜨다 남은 뜨개감도. 커다란 작업대 겸 식탁도. 낯선 형체가 누워 있는 침대도 보였다. 트리스는 그릇을 쥔 채 조용히 침대가로 다가갔다. 창백한 안색의 여자가 옅은 숨을 색색 내쉬며 자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바싹 마른 입술에서는 간간히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트리스는 의자를 빼고 앉아 나무 컵에 난로가에서 끓인 물을 담았다. 그리고 여자를 지켜보았다.
"일어나."
뜨거운 물이 미지근하게 식을 때 즈음 트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을 찡그린 채 잠들어 있던 여자가 흑, 하고 움찔거렸다. 피로와 고통에 절여져 있던 신경이 놀라 퍼뜩 반응하듯이.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가 흐린 시야를 걷어내려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피딱지가 앉은 오른손이 본능적으로 총을 찾으려 베개 밑을 더듬었다.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잊은 듯 다급하게 상체를 일으키다가, 검붉은 눈과 눈을 마주치고는 짧은 숨을 삼켰다. 다 풀어헤쳐진 갈색 머리카락이 흰 이불 위로 부스스 내려왔다. 새파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여자가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의식 없이 감탄 같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아…….
그녀의 눈 앞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형체가 서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밤, 사막보다 넓은 설산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인간이었다. 눈은 피웅덩이처럼 붉고 밤하늘 같은 군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 어깨는 딱 벌어졌으며 목은 단단한 나무처럼 굵은 존재. 어두운 피부에 셀 수 없이 많은 흉터가 올라 있는데, 이목구비는 기묘할 만큼 뚜렷한 사람. 인간이라 칭했지만 정말 인간이기는 할까? 그보다는 설산의 신 같은 것이 아닌가? 여자는, 메그는 이상할 정도로 기이한 형체가 고요히 내려다보는 것에 힘이 탁 풀렸다. 긴장으로 조여들었던 몸이 깃털을 채운 베개 위로 축 늘어졌다.
왜…?
메그가 지끈거리는 옆구리 상처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침을 몇 번 했다. 지금 몇 시지. 여기 시계가 있긴 한가. 머리가 무거웠고,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고, 기력이 없었다. 메그는 더 자고 싶어 내려오는 눈꺼풀을 끔뻑거리다 뒤늦게서야 트리스가 든 나무 그릇을 눈치채고 몸을 다시 일으켰다. 하지만 뒤집힌 속 탓에 입맛이 없어 그릇을 선뜻 받아 들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가만히 메그를 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깜짝 놀랐다가 다시 감겼다가 제 옆구리 상처를 살폈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까지. 긴 속눈썹이 분주하게 팔랑거리다 우산처럼 펼쳐지는 것까지 전부. 스튜가 담긴 그릇을 보기는 했는데, 받아 들지 않는 걸 보면 먹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경계를 하는 건가. 경계는 좋다. 이런 곳에서 해야 하는 첫 번째 행동이다. 트리스는 작은 나무 스푼으로 스튜를 한입 떠, 먼저 입 안에 넣고 몇 번 우물거렸다. 그리고 꿀꺽 삼켰다.
"자."
트리스는 메그의 두 손에 나무 그릇을 쥐어주고 아까 떠온 물컵을 잡았다. 따뜻하게 끓인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투박한 손이 메그의 뒷목을 조심히 쥐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메마른 입술로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 주었다. 메그는 나무 그릇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곧 근육에 힘을 풀었다. 물이 턱을 타고 몇 방울 뚝 뚝 떨어졌다. 바싹 말랐던 목으로 물이 몇 모금 넘어갔다. 트리스는 메그의 뒷목을 놓아주고 제 옷깃으로 입을 톡톡, 닦아준 후 스튜 그릇을 눈짓했다. 메그는 그제야 더듬더듬 나무 스푼을 쥐었다.
타인이 몸에 손대게 두지 말라. 타인이 주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 맨몸으로 폭우를 맞을 지언정 누군가의 온기를 찾지 않았고 뱃가죽이 등에 붙을 때조차 혀를 깨물며 허기를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 의미 없는 것들이다. 이 이상한 인간이 무장한 적 다섯을 죽이고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구해줬을 때 그딴 규칙은 버렸다. 눈밭에 버리려면 다섯 번은 더 버렸고 죽이려면 열 번은 더 죽였을 텐데 경계와 의심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적들 손에 죽든 이 이상한 놈에게 죽든 어차피 똑같다. 이제 치열하게 살아남으려 발악하지 않을 것. 하지만 오래된 나무 스푼으로 스튜를 입으로 옮기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워서 병간호를 받고 침대에서 음식을 받아먹다니. 나는 생존을 포기한 후에나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는 걸까. 제 꼴이 조금 우스웠으나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얼굴을 뚫을 듯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부담스러운 눈만 빼면…다 좋았다.
…당신은 안 먹어?
결국 제 말을 못 알아들을 것을 알면서도 메그가 입을 떼었다. 그리고 스튜 그릇과 산장의 주인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렇게 먹다가는 체할 것 같기도 했고, 양이 정말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이렇게 많이 못 먹어. 좀 토할 것 같고…배에 안 들어가.
언어가 다른 탓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굴린 메그가 제 배를 툭툭 쳤다. 그리고 으레 많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알겠어? 여기. 많다고.
메그의 손짓과 말을 알아들으려 몸을 기울인 트리스가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커다란 손을 뻗어 홀쭉한 배를 슥 만져보았다. 비쩍 말라서는 배가 부르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트리스가 말없이 배를 한번 더 만지작대다 고개를 들자 메그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잠깐 머뭇거린 트리스가 손을 어색하게 떼어냈다. 그리고 곧 무언가를 깨달은 듯 메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양이 많다는 거군. 이해했어."
트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메그를 보며 입을 벌렸다.
…어,
메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 갑자기 무슨. 알아듣지도 못하는 낯선 언어였지만, 알아들었다고 해서 덜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배를 만진 건 의사소통 문제로 넘어간다고 쳐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먹여달라니? 메그가 얼떨결에 가장 큰 고기 조각을 입으로 옮겨주자 눈을 내리깐 얼굴이 뽀얀 스튜와 고기를 받아먹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허리를 펴고 너도 한입 먹으라는 듯이 눈짓을 했다.
진짜, 진짜 이상한 인간. 이런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해. 어딜 봐도 수상한 도망자를 제 가족처럼 먹이고 재우는 것도 이상해. 그 도망자한테 음식을 먹여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쓰는 말은 어느 나라 언어일까. 저 얼굴과 목소리가 진짜 사람이기는 할까. 의심도 경계도 의미 없다고 한 주제에 무슨 속셈인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저 정갈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면, 그냥 시키는 대로 따르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다시 한 입.
…맛있네. 이건 무슨 고기지…….
자신답지 않은 혼잣말이 나왔다. 하지만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까 상관없을 것 같았다. 긴장이 풀린 가슴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 배에 차는 따뜻한 음식에 몸이 조금 녹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나눠먹고 나니 드디어 그릇에 바닥이 보였다. 메그는 마지막 한 입을 입에 털어 넣고 산장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트리스는 빈 그릇을 보고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릇을 가져가 부엌 같은 곳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달그락거리더니 따뜻한 물이 든 양동이와 작은 천 몇 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깨끗하게 세탁한 옷과 술이 담긴 병도 함께.
"상처를 닦아내."
트리스는 뜨거운 물에 적신 천으로 제 가슴팍을 닦는 시늉을 하고 메그에게 넘겨주었다. 트리스의 눈길이 메그의 옆구리에 닿았다 떨어졌다. 덫을 회수하러 가는 길목에 쓰러져 있던 작은 여자. 어두운 옷을 입고 커다란 총을 꽉 끌어안은 채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를 콸콸 쏟아내던 여자. 뒤따라오던 놈들은 도끼로 모두 죽였다. 어느 쪽이 선하던 악하던 그런 것은 관심 없다. 이런 여자를 다섯 명이서 쫓고 있는 놈들이 죽어 마땅하지. 경계를 하면서도 음식을 삼키고, 당장 졸음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도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배가 부르니 피가 새어나오는 옆구리는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짓는 여자다. 트리스는 머뭇거리면서도 침대가에 걸터앉으려 애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으…….
메그는 조심히 붕대를 풀고 상처를 닦아내었다. 상처를 의식하기 시작하니 작게 움직일 때마다 환부가 찌릿거렸다. 그 고통에 가슴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트리스는 하얀 피부에 자리 잡은 검은 상처를 바라보다 술병을 열었다. 그리고 메그의 어깨를 단단히 쥐었다. 메그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술로 젖은 천이 상처에 와닿은 탓이었다.
"괜찮아, 힘 빼고……"
트리스가 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붙잡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불로 지지듯 타는 느낌에 메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낯선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트리스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술로 상처를 소독하고, 원통형 케이스를 열어 연고를 발라주고, 따뜻한 물에 적신 천으로 주변의 피딱지와 고름을 닦아낸 후에는 다시 붕대를 감고. 웬만한 군인보다 능숙하고 빠른 손길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메그는 겨우 숨을 후, 내뱉었다. 하지만 곧 경악했다. 트리스가 제 다리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트리스는 침대에 걸터앉은 메그와 마주 앉아 메그의 다리를 제 다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메그의 품 넓은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올리고 적신 천으로 다리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뼈. 상처 많은 피부. 거칠게 튼 발등 까지도. 메그는 트리스가 제 뒷목을 붙잡고 물을 먹였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가 고개 숙인 트리스의 얼굴을 보고 합 다물었다. 단정한 콧대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목구비가 불만을 토해내기에는 지나치게 단정했다.
짙은 눈썹과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붉은 눈. 깊은 눈매가 고요히 내리깔려 상처를 훑고 있다. 밤하늘을 담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을 살짝 덮었다. 위로 뻗은 콧대는 잘생긴 콧망울을 그렸고, 묵묵히 닫힌 입술은 명화의 마무리 같았다. 메그는 남의 얼굴을 뜯어보는 자신이 생소했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비슷한 생각을 할 거야. 누구라도 저 그림자가 아쉽다고,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고개를 들게 하고 싶다고 생각할 거야. 제대로 된 처치와 조심스러운 손길이 피부에 와닿았다. 한없이 무뚝뚝해 보이는 태도면서 지극한 정성을 쏟는 것을 바보라도 알겠다.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삶에서 누군가가 내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 인간이 이런 존재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메그는 문득 죽어가며 꾸는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괜찮…….
상념에 빠져 있던 메그가 문득 정신을 차리며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다리를 빼려 하자 트리스는 아직 안 끝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발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순간 간지러운 감각이 흠칫 지나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몰래 숨을 내쉬고 발끝에 힘을 뺐다. 아, 젠장. 이 놈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나? 목 뒤까지 끼쳤던 소름이 호흡 세 번에 겨우 가라앉았다. 성적인 행위도 긴장감도 모를 놈 같으니. 높은 공기의 밀도에 혼자 긴장하고 혼자 시덥잖은 생각을 하다 민망해져 괜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사람들과 한평생 섞여본 적 없는 듯 행동한다. 몸에서는 모습을 감출 필요 없는 상위 포식자의 냄새가 난다. 흐린 시야로 보았던 형체는 붉은 눈의 맹수 같았고, 정신을 잃기 직전 끌어안겼던 품은 뜨거운 돌덩이 같았다. 눈보라 속에서 피 묻은 도끼를 들고 돌아와 집 문을 잠그었을 때는 정말이지 설산의 신 같기도 했다. 그 손도끼 하나로 무장한 군인 다섯을 상처 하나 없이 죽이다니. 이 산에 발 들이는 그 어떤 존재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 피로 젖은 하찮은 인간 하나를 지극히 돌봐주다니.
……당신 뭐야?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메그가 툭 웅얼거렸다.
"……?"
트리스는 메그의 말에 의문스러운 소리를 냈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멍하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이 가슴께를 덮어 봉긋한 것을 숨기고 있었고,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바지 아래의 살결이 자신의 단단한 손끝 아래에 눌려 있었다. 트리스는 잠깐 행동을 멈추었다가, 두 다리를 놓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분 천에 물을 적셔준 후 개어두었던 옷을 베개 옆에 두었다. 그리고 메그의 허벅지를 톡톡 건드리고 몸을 돌렸다.
"다 닦으면 옷을 갈아입어. 뒤돌아 있을 테니까 걱정 마라."
트리스는 메그의 의아한 표정을 못 본채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실 만한 것을 찾으며 서랍과 조리대를 뒤졌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아른거리는 가슴의 형체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려 했다. 술은 피가 도니 좋지 않겠지. 달콤하고 뜨거운 것이 좋겠다. 흉터가 많은 거친 손이 밀봉된 채 진열된 병들을 하나씩 건드리다 과일청을 꺼냈다. 그리고 부엌 한쪽의 화롯가에서 작은 냄비에 물을 끓였다. 작은 컵에 설탕에 절인 이름 모를 과일을 몇 개 넣고, 병을 기울여 묽은 시럽을 따르고,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식혀 천천히 붓고…….
이상한 여자다. 다른 사람과 부대끼며 산 적 없는 나조차 저런 여자를 아름답다 느끼기는 한다. 깊은 눈매와 작은 입술. 얼음 호수 같은 눈동자와 머리카락 사이에 숨은 귀.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과 얕은 산봉우리 같은 가슴. 떨어지는 나뭇잎같이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하얗게 퍼지는 달뜬 숨까지도. 내 품에서 식어가던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고, 이 여자를 노리며 눈을 빛내던 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나도 좀 이상하군. 트리스가 중얼거렸다. 가만히 벽을 바라보던 트리스는 그대로 찻잔 하나를 들고 침대가로 갔다. 메그는 옷을 다 갈아입은 채였다. 무겁고 너절한 옷에서 어제 막 빨아 말려둔 옷으로. 메그는 트리스가 가져온 찻잔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예민한 후각이 단 향기를 찾아 킁킁거렸다. 잔을 받기도 전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챈 메그는 트리스가 잔을 넘겨주자마자 더 생각하지 않고 한 모금 머금었다. 꼴깍.
…맛있어…….
달콤한 맛이 혀 위를 감돌다 목으로 천천히 넘어갔다. 따뜻함이 온몸에 퍼지며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달간 긴장만을 거듭하던 머릿속이 오랜만에 천천히 비어갔다. 진통제는 없지만 응급 처치는 한 상처. 죽어버렸으므로 더 이상 자신을 쫓지 못할 놈들. 후추 맛이 강했으나 부드러운 고기와 야채의 맛이 남아 있던 스튜. 그리고 설탕의 단맛과 이름 모를 과일의 새콤한 맛이 느껴지는 차까지. 메그는 그대로 멍하게 있다가, 머리에 무언가가 닿고 나서야 트리스가 곁에 서서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 아야.
투박한 손이 투박한 나무 빗으로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어내려갔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워낙 머릿결이 거칠게 엉켜 있어 따끔거렸다. 무심코 나온 소리에 손이 멈추자 메그는 트리스를 힐끔 올려다보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그리고 손으로 계속 빗어 달라는 동작을 했다. 트리스가 조심조심 빗질을 이어갔다. 엉킨 부분은 최대한 아프지 않게 풀어내고, 피딱지는 천으로 닦아내며 천천히. 왜 이렇게까지 할까? 대도시에서도 슬럼에서도 오래된 폐허의 안전가옥에서도 겪은 적 없는 행동들 뿐이다. 단순한 친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과했고, 목적이 있다고 하기엔 가진 게 없었다. 메그는 이리저리 계산을 해보다 슬금슬금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어느새 꿈뻑, 꿈뻑 졸았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이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톡톡.
트리스가 빗을 침대가에 내려놓고 메그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메그는 잠기운에 꾸물거리다 등 뒤가 시원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돌려 어깨와 등을 만져보고 피식 웃었다.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땋여 있었다.
뭐야. 당신 취향이야? 자긴 머리도 짧으면서.
메그가 내려다보는 트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트리스는 하얀 끈으로 마무리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파란 눈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 좋아 따라 웃었다.
"예뻐."
분명 뜻을 알 수 없는 말인데 메그는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슨 말을 하길래 저렇게 웃는지. 친절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일면식도 없는 나를 살려줬는지. 무뚝뚝했던 눈이 얕게 휘어지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멈췄다. 살짝 벌어지며 무언가를 말하는 입술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신기했다. 끝이 딱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가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 얼굴을 보며 멍하게 더듬더듬 생각하고 있자 트리스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방 한켠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몸이 괜찮으면, 잠깐 저기 앉지."
메그는 손을 꼼질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저기 가서 앉자는 뜻일 것이다. 작은 집의 단출한 부엌과 식탁 겸 작업대 같은 테이블. 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 나무로 만든 투박한 의자. 메그는 홧홧거리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커다란 손에 이끌려 테이블 앞에 앉자 트리스가 어깨에 묵직하고 따뜻한 담요를 둘러 주었다. 트리스는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더 넣고는 메그의 맞은편에 앉아 거친 종이 몇 장과 투박하게 깎은 연필을 꺼냈다.
"단어를 알려줘."
한참 고개를 숙인 채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던 트리스가 메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 위에는 여러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침대. 옷. 아침 해. 음식을 뜻하는 듯한 그림. 눈과 추위를 형상화한 것 같은 그림들. 이건 사슴인가? 아니면 순록? 메그가 꿈뻑꿈뻑 종이를 보고 있자 트리스가 본인의 입술을 톡톡, 치고 메그의 입술도 두어 번 건드렸다.
"발음."
담요를 둘러 쓴 채 서툴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다가, 입술에 닿는 손끝에 문득 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 이런 유치하고 귀여운 그림이라니.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메그는 허리를 펴 몸을 기울이고 종이 위의 그림을 짚으며 입을 떼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천천히 두 번씩 읽어주었다. 이건 침대, 침대. 이건 식사, 식사……. 트리스는 메그의 발음을 주의 깊게 들으며 이름 모를 글자를 적어내렸다. 그들은 산속 생활에 필요한 단어들을 한바퀴 돈 후 고개를 들었다. 메그는 트리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메그.
이름을, 그것도 본명을 가르쳐 줄 필요는 없는데. 스스로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다만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으니까. 단지 그뿐이었다. 메그가 다시 한 번 이름을 알려주며 입모양으로만 나야, 하고 덧붙였다. 트리스는 연필을 멈추고 메그와 눈을 맞추었다. 아파 죽어가던 몸으로도 입을 꾹 다물고 제 치료를 달가워하지 않던 여자가, 지금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나의 담요를 덮어쓴 채 경계심 없는 표정으로 제 이름을 알려주고 있다니. 난로가에서 마른 장작이 탁탁 타올랐다. 테이블에 가져다 둔 주전자 끝에서 아직 김이 오르고 있었다. 멀리서 밤의 눈보라가 강하게 불었다 사라졌다. 트리스는 순간, 메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는 것을 깨닫고 연필을 툭 내려놓았다. 그 이름은 쓰지 않아도 잊지 못할 것이다.
"…트리스."
트리스가 자신을 가리키며 입을 떼었다. 스스로에게도 낯선 이름. 내가 붙였으나 불러줄 이가 없어, 눈밭에 파묻힌 묘비처럼 흐려질 것이었던 이름. 누군가와 이름을 교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고 욕망한 적도 없었는데. 트리스가 처음으로 눈을 깊게 접으며 웃었다. 그리고 종이에 웃는 얼굴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이름 알려줘서 기뻐. 메그."
아하하.
메그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소리 내어 웃은 것이 굉장히 오랜만인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이번에는 조각상 같은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기보다 그저 즐거워 마주 웃어주었다. 거의 몇 년 만이던가? 웃을 일이 뭐가 있었지? 메그는 그녀의 낯선 발음으로 불린 제 이름을 곱씹었다. 그리고 이곳을 떠난 후에도 서로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그는 조금 길게 웃다가 연필을 받아 들고 트리스의 낯선 발음을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남의 목소리에 이렇게 귀 기울인 적이 있었나. 남이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 적이 있었나……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 됐다.
메그가 허리를 쭉 피고 완성된 종이를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서로의 발음을 받아 적은 종이 한 장이 제법 유용해 보였다. 물. 상처. 식사. 춥다. 배고파. 침대. 아침. 사냥. 사슴. 토끼. 덫. 낚시. 장작. 불. 트리스는 익숙한 단어 옆에 낯선 발음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그녀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곱씹었다. 낯설었다. 그리고 좋았다. 아름답다는 단어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트리스는 다시금 연필을 쥐어 한 귀퉁이에 그림을 몇 번 그리다 헛손질을 했다. 트리스가 뭘 그리는지 살피러 고개를 숙였던 메그가 우스운 그림에 또 웃었다.
"아름다워."
트리스는 메그의 웃는 얼굴을 가리키고 자신이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겨울 꽃을 그렸다. 메그는 그림을 들여다보다 나랑 꽃? 하며 갸웃거렸다. 트리스는 그녀에게 이 단어를 전달하는 것은 아직 무리임을 깨닫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 벽난로 곁의 창문으로 어두운 바깥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뒤집어 다시 무언가를 그렸다. 바람이 불었고, 아직 눈이 내렸고, 그럼에도 아무도 없다는 듯 고요한 숲의 소리가 들렸다.
"이 다섯 명은 깊은 곳에 묻어 뒀어."
빈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인간 다섯 명이었다. 그리고 우뚝 솟은 산도.
"아마 들짐승이 해체해서 먹었을 거다." 그리고, 들짐승도.
"걱정하지 마. 너는 안전해."
트리스가 종이를 내려놓고 메그를 바라보았다. 메그는 낡은 종이를 쥐어 뒤집었다. 꽃 그림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뒷면에 그려진 사람 다섯의 모습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 놈들과 산과… 곰 그림. 죽인 뒤 산속 어딘가에 버려 짐승한테 먹였다는 뜻이겠지. 메그가 사람의 목을 자르듯 일직선을 긋고, 산짐승 그림을 목이 잘린 사람 그림과 연결하듯 화살표를 그리자 트리스가 끄덕거렸다.
……어떻게? 메그가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죽인 이들의 숫자를 꼽자면 자신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에 적응하도록 훈련받은 군인과 민간인은 경험의 기반이 다르다. 근접 무기 하나로 무장 군인 다섯을 쉽게도 죽이고, 시체를 처리하고, 살인의 동요조차 없이 평화롭게 차를 마시고 있다니. 이 자에게는 살인과 사냥이 다를 바 없을지도 몰라. 메그는 군인의 천성처럼 올라오는 경계심을 내리누르려 노력하면서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물음표를 그리고 자신을 가리켰다. 대체 왜 그랬어?
"왜냐하면……"
트리스가 연필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사각사각,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한 명을 그렸다. 그 옆에는 사람 다섯 명을 그린 후 손에 시커먼 총칼을 쥐어 주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너는 한 명이고 그들은 다섯이었으니까." 트리스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생각했다. 너는 아름답고 그 놈들도 그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
"죽어 마땅하다."
낮은 목소리의 끝이 툭 하고 내려왔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연필이 다섯 명의 그림을 까맣게 지우고 멈추었다. 내리깐 눈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자신은 혼자서도 다섯 명을 죽이고 돌아왔으면서. 내가 왜 쫓기고 있는지 몇 명을 죽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그 이유로. 메그는 트리스의 대답에 말문이 막혀 잠시 조용해졌다가, 트리스와 눈이 마주쳐 헛기침을 했다. 트리스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한 눈으로 메그를 보고 있었다.
…왜?
"음."
잠시 목을 가다듬은 트리스는 메그와 단어가 적힌 종이를 번갈아 보다 메그의 언어로 입을 열었다.
상처. 회복. 낚시. 장작. 메그?
메그는 트리스의 낮은 목소리가 자신의 모국어를 말할 때 조금 높아지는 것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다 눈을 굴렸다. 상처가 나으면 같이 나가자는 뜻 같았다. 메그는 그제야 이 작은 오두막의 세간살이들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그리고 부상자가 떠앉긴 수고를 머릿속에서 계산했다. 식량도 연료도 무엇 하나 공짜인 게 없는 설산에서,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있었던 값은 얼마면 될지. 하지만 침착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머리와는 달리 속은 이상하게 가라앉았다. 내게 원하는 게 그것밖에 없는 건가. 낚시니 장작이니 하는 것들 밖에…….
메그는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연필을 가져갔다. 그리고 긍정과 부정을 뜻하는 단어를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그는 영문 모를 꽃을 그리던 트리스와 마찬가지로 헛손질을 몇 번 하다, 연필을 내려놓고 트리스와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설산의 안개처럼 고요한 얼굴이, 또다시 웃는 것 같았다. 아. 나무가 타는 냄새와 낯선 땅의 눈 내리는 소리. 내 것이 아닌 옷과 어깨에 덮인 담요의 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모를 단맛과 어쩌면 난생처음 받아보는 친절. 번호나 계급이 아닌 나의 이름과 너의 이름. 어떤 꾸밈도 없고 거짓도 없는 검붉은 눈동자.
메그는 눈을 깊이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리고 창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에 눈을 내려깔았다. 받았던 것들을 전부 갚으면 이 곳을 떠나야 한다. 상처가 흉터로 아물기 전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누군가의 온기가 당연해지기 전에. 얼굴에 웃음이 깃들기 전에. 너의, 이름이 익숙해지기 전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메그는 고개를 들어 트리스와 눈을 맞추고 마주 웃어주었다.찻잔을 쥔 손과 어깨에 덮인 담요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