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ene_FMF 2018. 8. 18. 18:41

 

 알렉스는 승리 외의 목적이 없었다. 쥐와 벌레가 들끓는 콜로세움의 최하층에서 태어났으나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고 운이 좋게도 살인에 재능이 있었던 인간.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그녀는 그 외길이 즐거웠다. 좁아터진 방에서 등을 맞대고 잠들고 별 것 아닌 음식을 나눠먹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을 때도, 형제들의 고통에 찬 신음보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좋았다. 그들에게 약한 자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자는 가장 강한 인간 뿐이었으므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콜로세움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알렉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유명한 존재였으므로 도시에서 가장 큰 폭력조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곧 그녀는 적의 의지와 목을 함께 꺾어버리는 행동반의 탑시드가 되었고, 많은 인간들이 그녀를 두려워하고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투견은 1분 안에 인간 한 명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던데 저 녀석은 몇 명이나 죽일 수 있을까? 추악한 인간들이란 전율할 만한 폭력을 위해 돈을 내거는 자들이다. 곧 그녀를 위한 무대가 준비되었고 그녀의 인생은 끝없는 콜로세움이었다.

 알렉스가 속한 조직은 마약 밀매와 광산 채굴을 주업으로 삼아 군대를 꾸릴 만큼 큰 규모였지만 중앙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알렉스는 모두 죽거나 도망친 도시에서 오랫동안 싸웠고 아주 많이 죽였으나 이길 수는 없었다. 한낱 폭력조직의 개로 죽을 테냐, 중앙군의 개로 살 테냐? 마지막 인간이 된 그녀에게 수천 명의 군대를 거느린 인간이 물었다. 그녀는 망치를 바닥에 내려찍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싸울 수 있다면 어디서 죽어도 상관없어. 

 군대의 규율은 답답했지만 전장은 즐거웠다. 끝없이 적이 있었고 날뛰면 날뛸수록 포상이 있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최고의 투견이라는 별명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군인이야말로 죽을 준비가 되지 않은 존재임을 알았다. 칼과 피밖에 모르는 콜로세움의 노예들과 다르게 생존을 희망하고 돈과 쾌락만을 아는 카르텔의 인간들과 다르게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다. 그녀는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등을 끌고 와 망치를 들었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곧 내려쳤다. 그녀는 약한 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동료를 해하려던 상사를 때려죽이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녀를 변호하려던 동료는 영창으로 끌려갔고 그녀는 반성하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또 이런 일을 저지를 거냐는 물음에 그럴 거라고 대답했다. 약한 사람을 괴롭힌 놈이 더 강한 놈한테 죽는 건 당연하잖아. 나는 여기 있는 모두를 맨손으로 죽일 수 있지만 그 후에 몰려올 군대엔 이길 수 없겠지. 어쩔 수 없어. 내가 약한 거니까. 하지만 후회도 안 해. 그녀가 말을 마치고 씩 웃자 군판사가 의사봉을 떨어트렸다. 군판사는 이마의 땀을 닦더니 알렉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부관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얼마 후 알렉스는 중앙군의 가장 높으신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알렉스는 그 고통에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칼에 찔린 적도 총에 맞은 적도 있지만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목뼈 사이에 얇은 칼날이 비틀고 들어가 척수를 절단하는 느낌. 동맥과 정맥이 터져 두개골이 뇌를 쥐어짜는 느낌. 피가 기도에 흘러넘쳐 거품이 끓는 듯한 느낌. 신경절과 신경들이 엄청난 규모의 불규칙한 자극을 내보내며 장기의 경련을 일으켰다. 다시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검은 피부 위에 흘러내리는 검은 피, 샛노란 금발이 죽은 자처럼 비리게 젖어들어갔다. 

 알렉스는 꽃가루처럼 흐드러지는 핏줄기 사이로 천사가 제 월계관을 뺏으러 오는 것을 보았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살랑거리는 흰 옷은 세상의 모든 것이 비칠 것처럼 투명하여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것이었다. 최후의 승리자이자 최후의 생존자, 모두를 잡아먹고 하늘에 망치를 치켜든 나의 것. 알렉스는 소리를 지르며 천사의 목을 물어뜯고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그 피를 마셨다. 그리고 피투성이로 깨어났다. 그녀의 인생은. 끝없는 콜로세움이었다. 

 

 죽었던 모든 감각이 돌아오듯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을 때 메그는 눈을 떴다. 낯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속에서 피가 왈칵 올라왔다. 익숙한 듯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짙은 초록색 이불에 핏자국이 남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닦을 것을 찾다가 왼쪽 눈에서도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고 다른 손으로 눈을 눌렀다. 입에 가득 찬 비린 냄새가 역해서 토할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피가 손등과 손목을 타고 흘렀다.

 트리스가 조심히 천막을 걷고 막사 안으로 들어오다 메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막사 밖의 인간에게 무어라 소리치는데 혀와 코에 가득 찬 냄새 때문에 어지럽기만 했다. 내장을 긁어낸 잔여물들이 모조리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 메그는 에린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불 위로 핏덩이를 게워냈다. 속이 썩어 문드러져가는 병든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메그는 부관이 이불을 치우고 얼굴을 닦아준 후에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져 있었고 갈색 속눈썹과 눈썹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메그는 양쪽 팔을 제 손으로 붙잡고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괜찮아. 이제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시력도 멀쩡하다. 에린이 막사 밖에서 부관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도 들을 수 있었다. 막사로 돌아온 에린은 메그가 누운 침대 옆에 걸터앉고 테이블의 약병을 가리켰다. 메그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안 되잖아, 그러면. 

 싫어. 

 언제 마지막으로 먹었어.

 ……2주 전?

 검사 한 번 해야겠다. 

 상부에 찌르지 마. 엄청 깨지니까.

 에린이 메그의 머리카락을 땋아주다 살짝 잡아당겼다. 메그는 표정을 찌푸리며 머리를 털어냈다. 갈색 거친 머릿결이 흩어졌다가 다시 에린의 흰 손에 닿았다. 메그가 잠시 등 뒤의 에린에게 고개를 돌려 냄새를 한 번 맡고 돌아왔다. 에린. 

 왜?

 그 개가 좋은 거야? 

 어떨까.

 에린이 웃으며 메그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메그는 피곤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안경 유리알이 빛에 반사되었지만 메그는 그녀의 촘촘한 속눈썹이 부드럽게 내리깔린 것을 보았다. 상냥하지만 상냥하지 않은 웃음. 무책임한 호의를 만들어내면서도 자신을 파고드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웃음.

 …너는 옛날부터 잘 모르겠다.

 네가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허어.

 트리스하고나 좀 친해져 봐. 네가 깰 때까지 계속 기다렸으니까.

 메그가 혀를 찼다. 에린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메그는 한 쪽 어깨를 쥔 채 트리스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메그가 눈을 비비자 속눈썹에 말라붙은 피가 가루처럼 떨어졌다.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트리스는 아까 보았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면도날 같은 어깨뼈와 창백한 피부, 움푹 꺼진 눈과 새어나오는 피, 그럼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래왔던 건지 당혹감 하나 없는 표정에 대해서. 비명도 신음도 될 수 없는 것. 차라리 독백이나 대화에 가까운 것. 눈이 마주친 순간 그 곳이 지옥인 줄 알았다. 트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지나가라고 말하는 붉은 눈을 한참동안 응시하고 있다가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뭐야? 

 ……사과하고 싶어서. 

 뭘 사과해. 탈영한 거? 트리스가 잠깐 굳어있자 메그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았다. 나 없을 때 가면 상관없어. 

 그게 아니야. 

 그땐 빡쳤을 뿐이야. 됐어.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뭘? 내가 살인에 죄책감을 못 느끼는 건 똑같잖아. 아니면 내 옛날 이야기? 군대에 사연 없는 인간이 몇이나 있다고. 그 정도로 오해니 뭐니 말할 거면 너무 물러. 곧 썩어버릴걸. 

 …내가. 너무 얄팍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건 아는군. 

 메그는 아직도 입안에 감도는 피맛을 내리누르며 사탕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의 막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펼 생각도 않고 고개를 숙인 트리스를 보았다. 메그가 손을 뻗어 손등으로 그 어깨와 팔뚝을 툭툭 쳤다.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몸이었다. ……너는 편하겠네. 이 몸도 체력도 전부. 움찔거린 트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피웅덩이 같은 눈동자로 메그를 보았다. 두 눈은 응고되지도 못할 온도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설산의 핏빛 발자국 같았다. 메그가 혀를 찼다. 너 내가 말해줄 때 까지 안 나갈 거지. 

 응. 

 뭘 듣고 싶은 거야? 

 네 실험…이야기. 아픈 이유….

 메그는 앞머리에 가려진 얇은 눈으로 트리스를 한참 보고 있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옆에 서서 몸을 풀었다. 팔을 올린 채 팔꿈치를 안쪽으로 당기고 깍지 낀 손으로 목을 눌러 고개를 숙였다. 공기가 코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여러 냄새가 뒤섞여 들어왔지만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가 테이블을 두 손으로 붙잡고 허리를 숙여 사지를 쭉 펴자 트리스는 그 몸 구석구석 남은 흉터들을 볼 수 있었다. 왼쪽 날개뼈 아래에 남은 총알 자국까지. 에린이 단정하게 땋아준 머리카락이 등 뒤에서 흔들거렸다. 저격수는. 메그가 입을 열었다. 

 저격수는 여차하면 자살해야 하니까 너희들처럼 몸의 강도를 올리면 안 돼. 우리는 가장 잔인하게 죽으니까. 적에게 공포의 대상인 만큼 생포되면 분노의 대상으로 바뀌거든. 두들겨 패서 죽이면 그나마 착한 놈들일 걸. 눈알이랑 혀를 뽑고 트럭에 매다는 게 보통이지. 메그가 뒤돈 채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래서 나는 감각을 억지로 깨우는 실험을 받았어. 소리와 냄새와 시야를 발달시키는 실험 같은 거. 더 많이 더 정확하게 죽이기 위해서였지. 트리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아까와 같은 무표정일 것이 무서웠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담담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픈 건 괜찮아…한 달이 일 년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괜찮다 싶더라. 하지만 후유증이 남았지. 못 먹고. 못 자고. 눈이랑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아픈 것 보다 피냄새가 더 역겨워서 계속 토했어. 게워낼 게 내 피밖에 없는걸 아는데도 참기 힘들더라. 그 시기에 에린이 나를 도왔지. 첫 번째 성공작인 그녀가. 에린을 보면서 나는 성공작이 아니구나, 나는 소모품이다. 생각했지만 화나지는 않았어. 

 트리스는 어젯밤 메그의 말을 떠올렸다. 인간은 모두 소모품이라는 말. 트리스의 손끝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어 살을 파냈다. 동정보다 분노를. 분노보다 살의를 느꼈다. 메그는 스탠드 옷걸이로 걸어가 에린의 군복 사이로 자신의 코트를 들어올렸다. 손끝의 지문이 모두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난 오감과 약간의 근육만 키운 덕분에 체력 손실이 대단해. 가장 끝 막사의 말소리나 취사병의 요리 냄새, 몇 키로미터 밖의 은신 저격수를 느낄 수 있다면 알겠어? 에너지를 감각에 소모해서 끝없이 먹어줘야 하는데 냄새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먹고 싶다면 알려나.

 메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했고 트리스는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삶 자체가 고통인 그녀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버팀목이라고는 라이플 한 정이 전부인 그녀는 모든 아픔을 날것으로 받아들인 채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다. 고통스럽게 일찍 죽을 거라는 말, 그것이 무지근한 절망인지 흐리게 빛나는 희망인지 단 하나의 소망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휘청거리지 않는 게 이상한 몸이 긴 코트를 걸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헐벗고 시커먼 전장의 연기 속에서 두 다리로 서 있는 그림자. 

 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 그래서 그만두기로 했지. 싸우다 자살할지언정 침대에서 손목을 긋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게 죽지 않기 위해서 살아있는 거야. 메그가 트리스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누구의 개인지는 말해줄 의무도 의리도 없어. 나를 믿지 않는 것도 네 자유고.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넌 내 앞에 방패를 세울 수 없겠지만, 나는 너도 모르는 사이 몇 번이고 네 목숨을 구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거. 무시하고 싶으면 무시해. 그리고 메그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 후 트리스는 에린을 찾아갔다. 에린은 부하들의 장갑차를 손수 살피다 메그에 관한 것을 묻는 트리스에게 조금 난감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게 화내진 않겠지만, 물은 너한테 화낼걸. 괜찮아? 

 괜찮아. 

 트리스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메그의 부대가 두 번째 실험에 선별되었다는 것. 그 중에 살아남은 자는 그녀 하나뿐이었다는 것. 그 후에 참모의장 직속 2티어 저격특무부대에 소속되어 북방군과의 전쟁부터 지금까지 주요 표적 47명의 사살을 이루어냈다는 것. 하지만 저격수 특유의 운용법 때문에 신체 강도는 일절 올릴 수 없었으며 끝없는 에너지 소모로 몸 안쪽부터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 그 진행을 막기 위한 약을 만들었으나 그녀는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트리스는 메그에게서 자기파괴적 욕구를 찾아볼 순 없었지만 그녀가 그 작은 등에 무엇을 지고 있는지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너도 죽으라고 외치는 망령들의 손을 뿌리치지도 않은 채 모조리 달고 살아가고 있는 그림자. 모든 인간을 위해 행동하는 너는 두려움이 없겠지. 트리스는 메그의 중얼거림을 떠올리고 혼자 남은 것처럼 참담해졌다. 

  

 중앙군 특수작전사령부 임시 대책실. 지금부터 알파-특수임무대 수립에 대한 전기 평의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실험 대상은 병기공학자문 연구원으로 개심수술 중 쇼크를 일으켜 프로토타입을 이식, 기적적으로 성공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그녀가 직접 전장에 나가는 것 보다 지휘관일 때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을 파악하여 정보지원활동대의 대장 이후 제 1 제병협동대대 대장으로 배치했습니다. 또한 그녀를 통해 강화군인에게 세뇌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 이후로는 철저한 심사로 대상을 선별했습니다. 삶과 권력에 목적이 없는 자들만을 뽑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두 번째는 유일한 성공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 부대의 지정사수들을 모아 실험을 강행했습니다. 전멸한 제 3티어 저격특무부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저격수의 양성은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소모되므로 이 안건은 제 12회 평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하지만 오감을 극단적으로 발달시키는 실험을 통과한 자는 60명 중 8명이며, 그 중 7명이 2개월 후 사망했습니다. 우리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에너지의 소실점을 찾았고 그것을 복구시키는 약을 만들었으나 효과는 최대 1주에 그쳤습니다. 현재는 주기적인 검사를 통해 최대한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조취하고 있습니다. 제 1티어 저격특무부대 중대장으로 복무 중인 이 자는 비공식 임무를 포함해 총 107건의 고가치표적 사살 및 납치를 성공했습니다. 

 세 번째로 신체 강도를 비정상적으로 증폭시키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원래부터 몸의 활용이 뛰어난 자를 대상으로 했으며 현재로서는 성공작 네 명 중 가장 뛰어납니다. 예. 말씀하세요. 아니오. 배포 드린 자료에 나와 있듯 네 번째 케이스는 불안정합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하나 이념과 사상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두 번째 케이스를 이 자의 감시역으로 파견했습니다. 현재까지는 납치 작전의 불응, 비정상적인 올곧음, 군인으로서의 자격 부적격…등의 보고가 있으나 곧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방법은 이어지는 특수임무대 수립 대책회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간 휴식시간 후 다시 착석 부탁드립니다. 

  

 메그는 3박 4일 동안 1.5키로를 포복전진하여 남방군 7기지에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가 포복을 하는 동안 경비병들과 군견들이 수시로 스쳐지나갔으나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우선 장군을 필두로 모든 장교를 사살하고, 그 후에 통신병의 목숨을 빼앗았다. 장교와 통신병들을 빼앗긴 일반 병사들은 머리에 구멍이 뚫릴까 바닥에 엎드려 있기만 했다. 이따금 고개를 든 병사 몇 명은 죽어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점토 같은 군용식량과 액체 젤리로 신진대사를 유지하며 5일 동안 한 숨도 자지 않은 메그는 마지막 한 발로 대치구도를 마무리 짓고 귀환, 최소 이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을 임무를 단 한 명의 저격수가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제 2 작전부를 전율케 했다. 

  

 경례를 받으며 기지에 돌아온 메그는 멀리 서 있는 트리스와 눈이 마주쳤으나 무시했다. 그리고 에린에게 작전결과를 보고한 후 제 막사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대로 붙잡혀 억지로 저녁을 먹었다. 군대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식사였으나 목으로 넘어가는 빵이 까끌하기만 했다.  

 비려……. 

 해산물은 쓰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스프에 들어간 돼지 냄새가 비려. 

 저런. 

 에린이 표정을 찡그리자 메그가 식기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테이블을 보고 있던 알렉스에게 식판을 밀며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알렉스는 약간 뜯어먹었을 뿐인 빵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물었고 에린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메그는 약을 먹으라는 에린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막사 밖으로 나가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비누향이 온 몸을 채우는 것이 싫었지만 적어도 벌레 시체 냄새보단 나으니까. 그녀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워 아주 새카만 밤이 될 때까지 눈을 뜨고 가만히 있었다. 

 멀리서 에린의 소곤거림과 알렉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작게 우는 목소리와 그것을 더 들으려는 듯 부드럽게 짜내는 물소리도. 그들은 서로를 예쁘다 달콤하다 말하면서도 사랑은 속삭이지 않았다. 메그는 천장을 보았다가 곧 불을 껐다. 막사 밖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지만, 그저 그 규칙적인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까지 고요하고 조용한 심음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면서.

 

 트리스는 메그를 만나고 싶었으나 메그가 작전본부에 머무르는 날은 몇 없었다. 소령님께서 들르셨다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빈 막사 앞 보초병의 물음에 트리스는 고개를 젓고 돌아갔다. 밤. 이름 없는 어둠이 한 발짝 다가와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트리스는 산마루 선을 따라 나무들이 시커멓게 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혼자 피냄새를 따라갈 메그를 생각했다. 너에게는 빗소리까지 시끄러울까. 수만 개의 빗방울이 흙바닥과 나뭇잎을 때리는 것까지 고통일까. 트리스는 대답을 듣고 싶었으나 그럴 자격이 없었다.

 

 며칠에 한 번 메그가 돌아오는 날에는 에린의 지휘 아래 전장에 나갔다. 제 2작전부에 의해 많은 병사들을 잃은 남방군은 델타 지점을 방어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 부었다. 트리스는 군복에 튄 피를 털어내고 방패를 휘두르며 적의 벽을 허물다 방패가 깨지기 직전에 눈앞의 적이 멋대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곧이어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를 따라 귀가 찌릿거렸고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전장의 행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네가 말한 거구나. 나는 네 앞에 방패를 세울 수 없는데도 너는 나를 보고 있겠지. 어디선가 엎드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로 우리 전부를 보고 있겠지. 고개를 들어 눈앞을 보라. 그녀가 나를 위해 뚫어준 길이다. 트리스는 방패를 치켜들었다.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트리스는 막사로 돌아와 피를 씻어내며 많은 것을 생각했다. 자신이야말로 전쟁을 가장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모든 자들이 모든 순간에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도 죽음을 상정하지 않았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승리밖에 없었다. 태생부터 맹수의 왕이었으며 싸우고 죽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트리스는 머리카락으로 목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차가운 물줄기를 맞으면서 입술 안쪽을 물어뜯었다가 머리를 털고 나왔다.

 

 트리스는 메그의 막사로 찾아가 메그의 침대 옆에 앉았다. 침대 위에 엎어진 채 눈을 감고 있던 메그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야기하거나 언쟁을 벌일 기력도 없는 것 같았다. 오늘 고마워. 정적을 깨는 트리스의 말에 메그는 옆으로 누운 채 끝이 너덜너덜한 사탕 막대를 뱉었다. 누가 감사 받으려고 한 줄 알아. 트리스는 대답 없이 침대 머리맡의 사탕 껍질을 까 그녀에게 내밀었다. 메그는 비니 밑의 눈을 가늘게 뜬 채 트리스를 한참 보고 있다가 그대로 사탕을 받아먹었다. 트리스가 살짝 웃었다. 

 트리스는 전투가 끝난 땅을 생각했다. 길게 휘어져있는 시체의 길들이 해가 지는 것을 따라 폐허처럼 물들어가던 광경에 대해서. 총알에 목숨을 잃은 자들은 편하게 죽은 것이다. 뼈가 있는 부위를 따라 살이 찢어지고 인대가 터져 있었다. 피로 얼룩진 흙바닥에 널브러진 인간의 눈구멍에는 벌레가 알을 깠고 멀리서는 시체 냄새에 부름을 받은 새까만 새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오고 있었다. 트리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승리뿐이더라도, 제 사람들만큼은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랬다.

 

 그 이후에도 트리스는 종종 메그를 찾아갔다. 특별한 담소 없이 그녀의 옆에서 책을 읽거나 자료를 보거나 했다. 메그는 라이플을 손질하는 시간 외에는 침대 위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잠을 자는 시간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트리스는 그녀의 절망이 직업상의 불치병이라 생각했다. 누구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병. 하지만 트리스는 그 모든 것을 불신하는 저격수에 대해 덧없는 상상을 계속 했다. 그러나 트리스는 그녀의 고통과 자신의 몸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 때 까지만 그 곳에 있기로 했다.

 

 날 동정하는 거라면 집어치워. 메그가 입가의 피를 닦아주던 트리스에게 말했다. 눈 밑이 검었고 유난히 피곤해보였다. 트리스는 그 붉은 눈동자에서도 피가 흘러내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천을 거두며 허리를 폈다.

 그런 거 안 해.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나도 네 정신머리가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메그는 사탕을 깨물며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만두고 돌아누웠다. 동정 받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 끔찍한 고통을 매 분 매초 견디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에 진저리칠 영혼.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고 트리스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여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트리스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싶었지만 손조차 뻗지 않고 불을 끈 다음 막사를 나왔다. 새벽의 별빛이 느리고 반쯤 불투명했다. 마치 그녀의 심박수처럼. 그랬다.

 트리스는 시간이 있을 때 메그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메그는 그 시선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트리스가 관찰한 그녀는 입에 사탕을 달고 다녔고 식사는 극단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끔 먹는 것은 흙 같은 맛의 군용식량 정도였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로 입을 게워내는 일도 잦았다. 그 때마다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보려 했지만 맡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가끔 자신도 느낄 만큼 피냄새가 몰려올 때에는 신경질적으로 사탕 껍질을 뜯곤 했다. 감각을 혹사시킨 탓인지 냄새를 덮으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트리스는 그때 쯤 에린에게서 메그가 대단한 흡연자였다는 것을 들었다. 이제 다시는 못 피겠지. 하는 말도.

 에린이 메그가 약을 먹는 지 감시를 부탁했을 때부터 트리스는 메그의 약통을 훔쳐보았다. 네모난 케이스 안의 약 개수가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테이블 위의 약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들켜 싸늘한 시선을 받은 날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 짜증과 신경질과는 다른 감정. 트리스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 그어진 선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눈을 돌렸다.

 비가 심하게 오는 날 새벽에 트리스는 눈을 떴다. 천둥이 치고 있었다. 트리스는 모자를 눌러 쓰고 막사 밖으로 나가 메그를 찾았다. 그녀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막사는 텅 비어 있었고 젖은 흙바닥에는 발자국조차 없었다. 트리스는 한참을 걷다 부대 경계선에서 검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채 비를 맞고 있는 메그를 보았다. 손바닥을 펼쳐 빗방울을 받아내는 것도 얼굴을 씻어내려 하늘을 보는 것도 아닌 그녀를. 시커먼 하늘 위의 잿빛 구름이 그녀를 삼킬 듯 다가오고 있었다. 트리스는 메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뇌가 삐그덕대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어둔 선을 넘어갈 수 있을까? 내게 그 자격이 있을까? 망설이는 사이 멀리서 뛰어온 에린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에린은 메그의 얼굴을 살피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이마를 맞대었다. 그리고 하얗고 가는 손으로 메그의 담요를 가져가 투명한 우의를 씌워 주었다. 안경알에 빗방울이 온통 튀어 있었다. 에린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막사로 이끌었다. 메그는 에린의 손을 붙잡고 뒤따라가며 멀리 서 있는 트리스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낯빛이 자신을 향하자 트리스는 심장 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나를 보호하려 들지 마.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트리스는 한참 동안 그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에린. 네가 할 수 없는 일은 나도 할 수 없을 거야. 야간 순찰을 위한 전등 불빛이 여섯 바퀴 돌았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메그는 에린의 막사에서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팔에 주사바늘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스탠드에 걸려 있는 두 개의 수액 주머니도. 메그가 몸을 일으켜 주사바늘을 빼려 하자 막사 안으로 들어오던 트리스가 메그의 손목을 잡았다. 메그는 흐릿한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다가 큰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메그는 옆을 더듬어 자신의 라이플을 확인했다.

 ……에린이 그렇게 화난 건 처음 봤어. 트리스가 손을 거두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널 얼마나 걱정하는지는 관심 없겠지만.

 네 알바 아냐.

 네가 약을 안 먹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뭐.

 대체 이유가 뭐야.

 알거 없다고 했다…….

 메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라이플을 더듬었다. 트리스는 철장 같은 침대 헤드를 잡고 메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앞에서 여태껏 드러내지 않았던 큰 몸이 메그를 덮을 듯 했다. 지금이 몇 시지? 얼마를 잔거지? 메그는 항상 탄창이 꽉 차 있는 라이플을 양 손으로 파지했다. 트리스는 그녀의 상처 많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넌 마치 저주받은 것 같아. 영원히 우수하게 살다가 죽을 저주. 흙과 재와 피를 씻어내려도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영혼 같았다.

 저주 같은 건 없어. 인간의 악의만 있을 뿐이지.

 말해.

 …죽고 싶어?

 죽어도 상관없어. 네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아야겠으니까.

 메그가 트리스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대로 턱을 치켜올리고 차가운 금속으로 피부를 꽉 눌렀다. 16.2그램의 총알이 저 두개골을 깔끔하게 관통하는 것을 상상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물소도 하마도 잠재울 수 있는 총알로도 이 방패를, 뚫지 못할 것 같았다. 알려주지 않으면 이 두 눈이 영원히 이글거리며 자신을 따라다닐 것 같은 직감. 이미 등에 수많은 망령들을 지고 살아가는데도 그것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자신을 내리누를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래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새끼는 싫어.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약을 먹으면. 감각이 사라져.

 뭐,

 평범한 감각으로 돌아온다고. 메그가 총을 거두며 시선을 돌렸다. 그게 아주 잠깐이든 몇 시간이든 못 버티겠어. 전부 개처럼 죽은 전장에서 혼자 엎드린 채 적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하면 알겠어? 언제 누가 날 노릴지 모르는데 내 감각을 믿을 수가 없다고. 늘 듣던 게 들리지 않고 어디서 화약 냄새가 날아오는지도 모르겠다고. 죽는다 해도 이렇게 무기력하고 두렵게 죽지는 않겠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비는 이미 그쳤으나 흙바닥에 남은 비냄새가 비리게 진동했다. 메그는 손톱으로 제 목덜미를 꽉 눌러 살을 파냈다. 마치 감각을 확인하듯이. 못 견딜 것 같을 때 아주 가끔 약을 먹었지만 아픔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알고 있던 정보들을 전부 빼앗겨 바보가 된 것 같았고, 정신과 머리는 맑아졌는데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어 비참했다. 트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메그의 숙인 고개에서 흐트러진 갈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이 곳에는 없다. 모든 상상과 의혹이 현실로 불거지는 땅. 악몽의 뿌리가 바로 여기 있었다. 아무도 잠들지 못하는 방이 광기로 채워지며 붉은 시선이 하염없이 공중에 머물렀다. 안에서 자라나는 분노처럼 알 수 없이 새롭게 받은 삶처럼 끝없이. 트리스는 메그의 피를 온 몸에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들은 일주일 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리스는 메그의 관찰을 그만두었다. 인파들 사이에서 검은 코트를 찾거나 스코프 안의 붉은 눈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군복을 입고 닦아놓은 방패를 손에 든 채 전장에 나가는 날이 반복되었다. 

 정보지원부의 원격 신호 수집 장비는 남방군의 지대공미사일 신호를 가로채어 그들이 공중강습을 계획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에린이 아군 폭격기에 SA-2 미사일의 보호 조치를 취하는 동안 세 명의 장교는 그들의 부대를 이끌고 야습을 진행했다. 그들은 어떤 중장비도 없이 이미 무력화 시켜놓은 광학정찰기를 지나쳐 쉽게 적 작전부에 침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제 1 목표는 무기 기지와 지휘통제 시설이었다. 어두워 피아식별을 할 수 없는 남방군이 사격을 주저하는 사이 망치와 방패는 시체를 차곡차곡 쌓았다. 메그는 멀리서 엎드려 야간투시경으로 통신병을 차례대로 쓰러트리며 아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 먼저 정리했다.

 알렉스가 무기 기지를 터트리자 트리스는 메그의 청신경을 걱정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겐 일상일 것들이었다. 하지만 폭발 소리에 뒤섞여 다른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트리스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건물에서 나와 한쪽 숲이 조그맣게 불에 타는 것을 보았다. 나쁜. 기분이 머릿속을 스쳤다.

 트리스가 이성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메그를 안은 채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적의 LK 로켓이 저격부대가 숨어 있는 산을 포격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부상자는 네 명이지만 죽은 인간은 없다는 것도. 메그의 몸에 외상은 없으나 몸을 굴려 피하려다 나무에 머리를 부딪쳤다는 것도. 트리스는 경례를 모조리 무시하고 메그의 막사로 들이닥친 뒤 에린과 군의관을 불렀다.

 군의관은 뇌진탕과 신장의 좌상이라며 진통제를 주사했으나 정신을 차린 메그는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하기만 했다. 검은 피. 부상 때문이 아닌 것. 메그는 진통제조차 듣지 않는 몸으로 모두 다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마와 목에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피투성이 입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나가라고!!! 안 들려?! 트리스는,

 트리스는 에린과 군의관이 나간 막사에서 가만히 서 있다가 약병을 쥐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노란 할로겐전구가 깜빡거렸다. 어두운 군청색 머리카락을 밝힐 빛으로는 한없이 부족해보였다. 메그는 호흡조차 괴로워하며 심장 위를 쥐어뜯고 있었다. 손톱 끝에서 피가 새어나와 검은 속옷 위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트리스는 그녀를 지켜보며 케이스 안의 연질캡슐 두 개를 입에 물었다. 메그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비린 핏빛 눈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아니. 싫어.

 너는 정말 아무도 못 믿는구나.

 죽여버릴 거야.

 괜찮아. 하지만 날 믿어.

 메그가 앉은 채 뒤로 물러나며 라이플을 찾았지만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침대 헤드를 꽉 붙잡고 침대 모서리로 몸을 구겼다. 천천히 다가오는 몸에서 온통 피냄새가 났다. 재와 화약의 냄새도. 고통으로 정신이 아찔한 와중에도 감각이 날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트리스가 그녀의 턱을 쥐어 눌러 입을 벌리게 했다. 메그의 손이 트리스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심장이 크게 뛰어 머리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싫어, 괴로워, 난 들어야겠어, 모든 걸 들어야겠어. 메그가 턱을 잡힌 채 중얼거렸으나 트리스가 벌어진 입에 파고들어 약을 밀어 넣었다. 아니.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메그는 그 모든 것이 죽음처럼 무서웠다. 모든 감각의 불이 천천히 꺼지고 통증이 사라지는데도 손을 놓아주지 않는 이 인간이. 무서웠다.

 트리스는 메그를 더 바짝 잡아당겼다. 그녀의 혀가 바들거리며 약을 삼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입을 맞췄다. 메마르고 거친 입술을 핥고 손을 잡아끌어 이로 장갑을 벗겼다.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핥으면서도 눈은 계속해서 붉은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리스의 머릿속에서 끝없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넌 할 수 있겠어? 때가 오면? 때가 오면 시간이 없을 거야. 지금이 그때야. 트리스는 손목에 이를 세우고 잡아당긴 팔의 가장 여린 살까지 입술을 대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버팀목에서 떨어져나와 떨고 있는 그녀를. 품에 안아. 너한테로 이끌어. 그녀에게 입을 맞춰. 빨리.

 메그는 짐승의 품 안에서 오감이 허물어지고 재구성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감각이 타인으로 차는 느낌이 무서웠다. 단단한 가슴팍 위에 올린 손에서 빠르게 뛰는 고동을 느꼈다. 그 고요한 격정적임. 그르렁대는 소리를 억지로 숨기는 목. 어깨와 가슴에 닿는 입술이 뜨겁고 힘들어 울자 손깍지를 껴 달래면서도 목을 물어뜯는 짐승에 잡아먹힐 것 같았고, 마디 굴곡까지 느껴지는 두꺼운 손가락이 쾌감을 짜내 허리를 떨었다. 두 손이 단단한 몸을 밀어냈다가 잡아당기고 쥐어뜯으며 헤매었다. 잡아먹혀. 아파. 지금 내 안 어디에 닿고 있는 거야. 아프고 괴롭고 무서워. 모르는 감각이 전부 무서워. 메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숨을 삼키고 울음 섞인 신음을 내뱉다 두 팔 안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