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설화/진리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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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gene_FMF 2019. 7. 21. 02:42

 

 언젠가 검은 피를 뒤집어쓰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닿는 차가운 방아쇠도 옆구리를 파고드는 거친 칼날도 청각을 어지럽히는 신음도 코를 마비시키는 뜨거운 피냄새도 모두 죽음으로 끝날 것. 우리 같은 인간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살아가지만 내가 아는 것은 이론에 가까워 전쟁터에서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생물학적 작용과 역학적 기능이 멈춘 후 흙으로 분해되는 과정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우리의 영혼은 어둡고 조용한 것으로 사라질 것이며 그 누구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이야기를, 어느 누가 듣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우습고 두렵게도 진리란 그런 것이다.

 과학은 우리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상실을 보듬어주지는 않는다. 대지와 태양이 인류를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부정하고 싶을 수도 있겠다. 우리를 보살피는 거대한 법칙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 때때로 과학자를 괴롭게 만들기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자들은 죽음이 두렵기도 하지만 후련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두렵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끝이 있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죽은 자들의 노력과 과오를 길잡이 삼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영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으니 후회 한 점 없다고. 나는 평생토록 학문과 연구에 매달렸으나 운이 좋게도 사람을 만났고 사랑을 배웠으며 또 다른 진리를 익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이 끝이 나고 종말을 맞이했을 때

 후회 없는 선택을 했노라고 웃을 것이다.

 

 

 

 

 에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모를 만큼 몸이 아팠다. 그녀는 누워 있던 그대로 시선을 돌려 실내를 살펴보다 더듬거리는 손으로 오른쪽 팔걸이 아래의 버튼을 눌렀다. 삐익. 작은 알람과 함께 그녀의 몸에 부착되어 있던 케이블 다발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에린은 눈을 깊게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헬멧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연구실이었다. 삶의 죽음의 연구실. 진리와 광기의 연구실. 에린은 맨발로 그 곳을 둘러보았다. 이 좁은 곳에서 슬퍼하고 기뻐하고 마침내 미쳐버렸던 일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벽에는 온갖 수식이 날린 필체로 적혀 있었고, 구겨지고 찢어진 서류들이 발치에 즐비했다. 연구실 구석에는 즐기지도 않는 차 티백과 담배꽁초, 냄새가 사라진 딸기 향낭이 지저분한 커피 잔과 함께 쌓여 있었다. 이것들이 과거의 자신에게 희망과 절망을 주었을 것이다. 수식 하나에 웃고 답 하나에 소리 지르며 절망하는 삶을 아주 오랫동안 살았을 것이다. 에린은 먼지가 수북이 앉은 테이블 위를 쓸어보다 시선 닿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쪽 벽에 거대한 캡슐 세 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사랑들. 죽음조차 거부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죽고 싶게 만들었던 내 모든 것들. 꿈에서 입을 맞추고 속삭임을 나누었던 그들이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생기 있었고 꿈에서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야말로 완벽한 삶을 이루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아니야. 이것이 내 삶이고 내 사랑이다. 에린은 오랫동안 그들 앞에 서서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유리창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수식을 올려다보았다가, 오래된 일기장을 불에 태우며 키보드를 찬찬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쌓아둔 말은, 무수한 고해성사와 사랑은 천 번의 입맞춤을 받으며 고백하리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