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설화/신의 기원

신의 기원. 03

Eugene_FMF 2019. 7. 21. 02:41

 

 군인의 첫 번째 자질은 지속적인 피로와 고충을 견디는 것이다. 용기는 부차적일 뿐이다. 결핍과 박탈, 갈망은 좋은 군인을 만들어 낸다.

 

 메그는 풀숲에 버려진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복부를 깊이 찔렸고 다른 한 명은 경동맥과 성대를 잃은 채였다. 이들은 과다출혈로 고통스럽게 죽었을 것이다. 고작 몇 십 걸음 너머의 비명소리에 안타까워하면서.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모르면서 단칼에 죽일 줄은 안다니. 메그는 알렉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다친 자들을 치료했다. 전투 의지가 없는 인간들을 감시하기는 쉬웠다. 아이들은 군용식량을 가방 가득히 챙긴 후 서로의 상처를 살폈다.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알렉스는 피 묻은 붕대를 감아주며 많이 울었다. 메그는 주인 없는 총기를 둘러보다 권총 두 자루와 소총 하나를 챙겼다. 곧 해가 질 것 같았다.

 따라오면 어떻게 될지 알지. 메그가 권총을 쥔 채 군인들에게 말했다. 짧은 협박. 아이답지 않은 눈. 엄지와 검지 사이를 권총 뒷부분에 밀착시키고 손잡이를 단단히 쥔 파지법. 그 손은 자그마했지만 빈틈이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은 자들이 양팔을 천천히 올렸다. 메그는 몇 발짝 뒤로 걷다 등을 돌렸다. 부상당한 군인들이 어디로 갈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알바도 아니었다.

 

 어두운 길을 헤쳐 몇 시간을 걸었다. 발이 아플 때 쯤 적당한 평지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자라난 달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들은 보존식을 아끼고 상하기 쉬운 음식부터 먹기로 했다.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작은 목소리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 자들을 전부 죽였어야 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트리스가 물가에서 그릇을 씻고 돌아왔을 때 메그는 에린에게 권총 사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양 팔을 곧게 뻗어. 팔꿈치를 살짝 구부려서. 그래……. 작은 목소리가 조곤조곤. 작은 모닥불에 늘어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평소보다 길고 곧았다. 알렉스는 뜨거운 김이 오르는 컵 두 개를 쥐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쏴 봐도 될까? 에린의 물음에 메그는 검은 하늘과 어두운 숲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소리와 냄새. 사람의 낌새를 더듬듯이. 그리고 열 걸음 쯤 떨어진 나무를 가리켰다. 에린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이 큰 소리와 함께 두꺼운 나무줄기의 가운데 박혔다. 심장이네. 발끝으로 빈 탄피를 툭 건드린 메그가 에린을 칭찬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에린은 드물게 기쁜 듯 웃었다.

 

 트리스가 텐트와 짐을 정리하는 동안 에린은 탄창 교체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알렉스는 마지막 과일청 시럽으로 차를 타준 후 메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땋아 주었다. 망원조준기를 손보던 메그는 따뜻한 양철 컵을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홀짝거렸다. 입안 가득히 퍼지는 포근함이 드물고 좋았다. 이거 이제 다 먹었어? 메그가 묻자 알렉스는 하얀 이마 위로 흘러내린 갈색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대답했다. 만들 수 있어. 과일을 찾으면 만들어줄게. 메그가 끄덕거렸다.

 알렉스가 굿나잇 키스를 하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 시각. 에린은 밤늦게까지 총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처음 가져본 무기에 조금 들뜬 것 같았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아이가 권총 따위를 쥘 일도 그 사실에 기뻐할 일도 없을 텐데. 핏빛 땅에서는 죽기 위해 죽여야 했다. 금이 간 유리알에 검은 총신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메그는 에린의 연습을 지켜보다 짧은 칭찬을 내뱉었다. 빨리 배우네.

 네 덕분이지.

 만약 쏠 일이 있다면…한두 발쯤 남겨두고 탄창을 가는 게 좋아. 약실에 한 발쯤 남겨둬야 대비할 수 있으니까. 아깝긴 하지만 뭐.

 목숨보다는 안 아깝다는 거지?

 그래.

 잘 할 수 있을까.

 익숙해지면 금방 해. 넌 금방 할 걸.

 넌 이미 익숙한 것 같은데.

 나야 몇 년 됐으니까.

 그렇구나.

 에린은 더 묻지 않았다.

 트리스는 모닥불에 나무를 부러트려 넣으며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백열의 주황색으로 타오르는 작은 나뭇가지들. 열기가 닿는 곳은 따뜻했지만 등은 추웠다. 총을 만지작대는 가느다란 손은 손톱이 너덜거렸고 아프게 갈라져 있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식사와 같은 생활을 했을 텐데 어떻게 몇 년이나 익숙한 걸까. 바람에 묻은 냄새와 발소리로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는 법. 제 두 배만 한 어른들에게 능숙하게 총구를 겨누고 협박하는 방법 같은 것. 열 몇 살 남짓한 아이가 알 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다. 트리스는 메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이만 자러 가자는 에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높이 떠있었으나 어제보다 추웠다. 차가운 바람이 너절한 신발의 앞코부터 파고 들어왔다. 도랑을 건너다 젖은 몸을 말릴 곳이 필요했다. 에린은 조금 떨고 있었다. 트리스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어 에린의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딱딱한 흙 같은 군용식량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커다란 수통 하나를 나누어 마시며 계속 걸었다.

 무너진 마을에 도착했다. 전쟁이 짓밟고 간 마을의 풍경은 질리도록 익숙했다. 그들은 오래된 목조 가옥을 지나 흙길을 가로질렀다. 물가와 가깝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적당한 집을 찾아야 했다. 잠시 메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걸었다. 알렉스가 메그의 손을 꼭 쥐고 왜 그래?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메그는 마을 외곽까지 도착해서야 멈추어 섰다. 그 곳에는 철망으로 뒤덮인 높은 울타리가 숨 막히게 서있었다.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의 파란 눈이 콘크리트 건물과 넓은 공터를 바라보며 드물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리움이 아니라고 말하듯이, 분노와 기대가 깃든 목소리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대로네. 그대로였어. 해가 구름 뒤로 숨으며 온 땅으로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뜯어진 철망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2층짜리 건물 네 채가 넓은 공터를 감싸듯 자리 잡고 있었다. 울타리 안쪽으로 줄지어 심어진 나무들은 마디가 지고 시커멨다. 공터 구석구석에는 온갖 방법으로 죽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대부분 군인이었고 그들 중 절반은 팔다리가 묶인 채였다. 산처럼 쌓인 죽은 자들. 바닥을 긁다 부러진 손가락. 말라붙은 핏자국과 잿빛으로 썩은 내장. 전에 다 본 것이었다. 메그는 긴 쇠꼬챙이로 다 삭아버린 주검을 뒤적거리다 그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여기는 일 년도 더 전에 망했어. 전쟁이 이 근처에서 시작됐거든.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알렉스가 물었다.

 여기서 키워졌으니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훈련장으로 들어서자 경보탑 높은 곳에 십자가 형태로 걸려 있는 시체가 있었다. 메그는 쇠꼬챙이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그 앞에 섰다. 바지와 웃옷은 피에 절여져 악취가 났고 배에서는 창자가 삐져나와 썩어 있었다. 두 발은 발가락이 없었고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말라붙은 피눈물. 절규하는 얼굴. 문드러진 눈동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명을 지른 듯 생생한 표정. 누군지 알아? 트리스가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알지. 가죽 공장에 걸려 있어도 알아볼 수 있지. 메그가 대답했다.

 피냄새는 해가 삼백 번 떠오르는 동안 멀리 떠나갔고 얻었던 상처는 흉터가 되었는데. 살의는 조금도 깎여나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을 고되게 훈련시키며 도태된 아이들은 본보기로 죽였던 인간. 너희의 일은 때가 되면 신을 위해 죽는 것이라 매일같이 말했던 인간. 그래서 너는 신을 위해 죽었나? 메그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웃었다. 바람이 산에서부터 강하게 불어와 공터를 쓸고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에 두 뺨이 빨갛게 틀 때쯤 실내로 들어갔다. 메그는 조금 들떠 보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설렘은 아닌 것 같았다. 신전에서 오랫동안 자유 없이 살아왔다 해도 그녀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독방에 갇히거나 식사를 빼앗긴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피투성이로 만들어 거리에 내쫓긴 적은 있어도 죽음과 이토록 가깝지는 않았으니까. 트리스는 앞장서서 걷고 있는 메그의 땋은 머리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발치에는 깨진 유리와 콘크리트 파편이 즐비했지만 그 작은 발의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메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바닥으로 찬 공기가 그대로 올라오는 낡아빠진 창고 같은 곳. 창문은 창살로 막혀 있었고 바닥은 커다란 발자국과 말라붙은 핏자국으로 엉망이었다. 메그는 바닥에 찍힌 발자국에 제 발을 대어보고는 쓰러질 것 같은 나무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 쌓여 있는 허름한 담요 뭉치를 치우자 바깥과 연결된 구멍이 있었다. 작은 아이 한 명이 웅크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을 크기였다.

 나는 여기서 살았어. 메그가 말했다. 하루 두 끼를 먹고 열 시간을 훈련받고 다섯 시간을 잤어. 남는 시간은 일을 했지. 나랑 같은 애들이 서른 명 정도였을 거야. 우린 서로 이름도 몰랐어. 말 한마디만 섞어도 죽도록 맞았거든. 애착을 가지면 삶의 미련이 생길 거라고 했었나. 메그는 어두운 초록색 담요를 만지작대다 그들을 보았다. 우린 하루 종일 딱 두 마디만 해야 했어. 알겠습니다, 교관님.

 트리스가 입술을 달싹대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과 능숙함은 보통 아이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지만. 말해주기 전까지는 묻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기원이 콘크리트 건물의 좁은 창고일 줄은 몰랐다. 모든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씹어삼키며 산 너머를 끝없이 탐색하던 눈동자가 이렇게나 척박한 곳에서 태어났을 줄은, 몰랐다. 말 한마디 못 나눠봤다 했으나 그녀를 옷장으로 이끈 작은 손들은 누구보다 절박했을 것. 너라도 살라고, 꼭 살아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는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고마움? 미안함? 슬픔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그녀의 태생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몰랐다.

 기분 좋아 보여. 에린이 메그의 갈색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그래? 메그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가 끄덕였다. 그 새끼가 죽어서 기분이 좋네. 에린이 메그를 끌어안았다. 그들 모두 메그를 꼭 안아주었다.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 작은 전구도 없는 천장. 팔다리가 마비될 정도로 뛰고 난 후 차가운 물로 씻고 기절하듯 잠드는 일상. 짐짝만도 못한 생활이 지난 삶의 절반이었으나 슬프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는데. 메그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저 포근한 품과 익숙한 냄새가 좋아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그들은 1층 복도에 쓰러진 난로를 일으켜 세우고 숲에서 주워 온 땔감으로 불을 피웠다. 쇠로 된 것들은 모두 도둑맞은 듯했지만 화장실 구석에 구겨진 대야 두 개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구겨진 바닥을 돌로 두드려 펴고 마을 시냇가에서 길어온 물을 데웠다. 따뜻한 물로 세수를 했고, 조금 남은 비누조각으로 머리를 감았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에서 물길을 털어낸 후에는 난롯가에 앉아 통조림을 나누어 먹었다. 모두 지쳐 있었지만 흙길의 냉기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쟁터의 짧은 잡담은 정신이 마모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그 이론에 들어맞는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으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일같이 낯선 시체와 마주치고 익숙한 듯 시체의 주머니를 뒤져야 하는 삶. 무거운 가방을 지고 행군하면서도 이 식량의 무게가 언제 줄어들까 조바심 내야 하는 생활. 그들은 어렸지만 어른보다 빨리 죽음에 적응했다. 메그는 훈련 받은 자였으므로 그들이 얼마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알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알렉스가 메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거기에 메그랑 숨으려고 했는데 에린 너한테 들켰잖아. 이를 줄 알고 엄청 걱정했는데! 알렉스의 호들갑에 에린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난 책 읽을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던 것뿐이야. 에린의 말에 트리스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거들었다. 그래서 조용하긴 했고? 글쎄, 메그가 코를 골긴 했지. 에린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두 명의 웃음이 터졌다. 메그는 눈을 깜빡대다 천천히 알렉스에게 머리를 기댔다. 졸려? 아니, 좀 더 이대로 있을래.

 밤이 깊어지자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메그는 눈을 뜬 채 신전에서의 생활을 떠올렸다. 저 담에 구름 그림자가 닿기 전에 날 잡는 거야. 살갗이 환하게 아픈 햇살 아래에서 처음으로 목적 없이 뛰놀았던 날. 그냥 여기 있어. 언덕 너머의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마주쳤던 고요한 얼굴과 하얀 손가락. 같이 가자, 같이 가야 해. 어두운 독방에서 아플 만큼 절박하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

 사실 메그는 그들이 말하는 애정이나 사랑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들이 사랑한다 말할 때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을 때 안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트리스가 잠을 못 자는 것이 껄끄러웠고 아픈 에린을 보살펴야 했으며 알렉스가 버리지 말아달라고 우는 것이 싫었을 뿐. 나는 오랫동안 홀로였고 제대로 된 인사말 하나 알지 못했는데. 죽음과 삶의 경계조차 흐릿했으며 신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말을 평생토록 들었는데 너희는 대체 뭐였을까. 메그는 혀가 아린 그 달콤함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눈 감은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후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다시 길에 올랐다. 추운 공기가 잠이 덜 깬 폐로 들어왔다가 하얀 입김으로 빠져나갔다. 산행에 가장 방해 되는 것 두 가지. 어둠과 추위. 이제 짧은 해와 긴 추위가 몇 달 간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마을 출구에 닿기 전 메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 끝자락에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이 걸렸다. 내 끔찍한 고향. 그 네모난 하늘이 전부라고 믿었던 삶. 그립지도 않았지만 두렵지도 않았다. 호흡마다 하얀 입김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어제 네가 웃는 걸 처음 봤어. 트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랬나?

 우리랑 같이 가도 괜찮아?

 메그가 트리스를 보았다. 붉은 눈은 차분해 보였지만 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들과 함께하는 이유에 대한 확신. 수개월을 어둠과 허기 속에서 함께 지내고서도, 그녀의 고향과 지난 삶을 보고서도 자신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조차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빨리 자라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차가운 바람에 입술이 전부 메말랐다. 어설프게 침을 바를수록 차가워졌다. 짧은 침묵 뒤로 눈송이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아, 눈이다.

 반가울 겨를 없이 겨울이 왔고 대답은 듣지 못했다.

 

 몹시 추웠다. 오후가 되자 눈이 잠깐 그쳤다가 다시 내렸다. 메그는 일찌감치 잠자리를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에린은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인간들이 닦아둔 길이 눈 사이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들은 숲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쌓인 눈을 치운 후 텐트를 쳤다. 침낭을 깐 다음에는 가방 안의 담요를 전부 꺼냈다. 알렉스는 눈에 젖은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부채질로 불을 피워올렸다. 작은 불씨가 설산 귀퉁이에 작은 둥지 하나를 만들었다. 그들은 텐트 안에서 서로 기대어 불 속으로 떨어지는 눈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적막함. 추위. 사지를 펴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한 좁은 텐트와 침낭. 너무 고요해서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다. 그들은 일찍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이 온다 해도 봄이 함께 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잠에 들었다.

 

 공기가 희박해지자 트리스는 정상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어쩌면 내일이면. 산을 넘거나 얼어붙은 발가락을 잘라내야 할 것. 눈은 다시 오지 않았으나 길에 쌓인 눈이 한 뼘은 되는 것 같았다. 골격이 제법 큰 두 명은 군화를 신을 수 있었지만 다른 두 명은 그러지 못했다. 작아도 한참 작은 발바닥에 천을 덧대고 방수포를 묶은 게 전부였다. 익숙한 산행은 계절의 변화만으로 새로운 고난으로 변했다. 트리스는 자리에 가만히 선 채 황량한 비탈길을 굽어보았다. 작은 발자국의 보폭이 힘겨워보였다.

 분수령의 남쪽 사면을 내려갔다. 네 명 모두 발이 완전히 젖었다. 그들은 거의 말이 없었다. 가끔씩 목적지를 잊지 않으려고 지도를 펼치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전쟁이 없는 땅으로 향한다 했지만 그런 곳이 남아 있는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계속 걸었다. 걷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메그가 자리에 멈춰 섰다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앞질렀다. 그녀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왼쪽 무릎에 팔꿈치를 올린 후 소총의 망원조준경을 들여다보았다. 트리스는 에린과 알렉스를 이끌고 나무 뒤에 숨어 몸을 낮추었다. 파란 눈동자가 눈과 나무로 뒤덮인 곳을 빠르게 수색했다. 겨울의 틈에 숨은 불규칙한 발자국과 낯선 냄새를 찾기 위해서. 잠시 후 메그가 트리스를 손짓해 불렀다.

 창고가 있어.

 ……창고? 여기에?

 뭐…먹을 걸 숨겨 둔 거겠지. 뻔하잖아.

 몇 명 같은데?

 남자 여섯. 더 있을 지도 모르고.

 위험해 보여?

 걸음걸이가 군인은 아냐. 화약 냄새도 전혀.

 다른 무기는.

 나무로 깎은 창이나 활 정도…어떻게 할 거야?

 고요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물었다. 트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균열 하나 없는 푸른 눈이, 나는 요리보다 살인에 능숙하고 알렉스는 기꺼이 폭력이 될 것이며 에린은 무엇보다 효율을 우선시하는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대화로 좋게 끝나는 일 따위는 없다. 아이들에 대한 동정도 도움 따위도 없다. 낯선 땅에서 낯선 자들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은 살해를 뜻했다. 할 수 있을까? 첫 번째는 사고. 두 번째는 사건. 세 번째는 명백한 의도를 가진 약탈과 살해. 총칼을 눈앞에 둔 것이 아니고서야 누군가의 목을 분지르기는 쉽지 않았다. 너희를 위해 죄를 저지르겠다 했으나 실행이 쉽지는. 않았다. 메그는 투명한 눈으로 트리스를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갈게.

 아니. 메그.

 알렉스, 나 따라와.

 잠깐만.

 왜? 넌 지금 부상자야. 우린 먹을 게 필요하고. 넌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잖아.

 메그가 소총을 두 손으로 쥐며 말을 이었다. 난 각오가 필요했던 적 없지만……. 넌 필요할 수도 있겠지. 어깨를 붙잡으려던 손이 멈췄다. 트리스가 메그를 내려다보았다. 살인의 죄와 체벌 따위는 관심 없는 얼굴. 그저 네가 싫다면 내가 하겠다는 표정. 명령의 수행이 전부인 칼날 같은 눈.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데 그 얼굴만은 새하얗게 선명해서 피할 길이 없었다.

 트리스의 시선 안에 메그의 발끝이 들어왔다. 너절한 신발이 다 젖어 있었다. 해가 산 뒤로 숨을 때가 되었는지 바람이 날카롭게 귓불을 쓸었다. 감상에 젖은 머릿속을 현실로 끌고 오듯이. 새 신발. 먹을 것. 쓸만한 옷가지. 노을 속에서 메그의 숨이 하얗게 드러났다.

 같이 가자. 트리스가 말했다. 메그는 꼭 쥐인 손을 보고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일몰을 기다렸다가 숲으로 들어섰다. 숲의 초입부터 허리를 숙여 걸었다. 발자국은 눈이, 그림자는 어둠이 가려줄 것이다. 메그는 다섯 발자국 앞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창고의 아주 희미한 불빛과 야생동물의 피냄새를 따라 망설임 없이. 가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눈이 떨어지며 그들을 놀래키려 했지만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이십분 쯤 걷자 창고가 나왔다. 메그가 알렉스에게 눈짓하자 알렉스가 자물쇠를 손으로 우그러트렸다. 창고 안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나무 바닥에 의자가 끌리는 듯한 소리였다. 메그는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풀고 문을 겨눴다. 에린이 메그 뒤에 서서 손가락 세 개를 폈다. 3, 2, 1. 쾅. 문을 열었다.

 문에 부딪칠 뻔한 남자가 휘청 물러서는 순간 트리스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알렉스는 남자의 손에 들린 창을 뺏어 바닥에 팽개친 후 팔을 꺾어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에린은 문가에 걸린 밧줄을 그들에게 건네고 바닥에 담요를 펼쳤다. 2단 선반에 어수선하게 쌓인 잡화와 식량. 자루에 담긴 옥수수 가루와 밀가루. 알렉스가 남자를 의자에 단단히 묶고 에린을 도와 식량을 챙겼다. 메그의 총구는 처음부터 남자의 이마를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2인 1조 같던데. 다른 한 명은 정찰 나갔어?

 트리스가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떼어내고 남자의 뒷목을 꽉 쥐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발자국 벌써 들켰겠네. 메그가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에린과 알렉스는 두 번째 담요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메그가 바닥에서 천조각을 집어 들어 트리스에게 넘겨주었다. 트리스는 남자의 턱을 눌러 입을 벌리게 한 다음 재갈을 묶었다. 에린과 알렉스가 담요 뭉치 두 개를 안고 허리를 폈다. 메그가 손짓하며 말했다. 트리스, 비켜. 매일 밤 이제 자러 가자고 말했던 그 작은 목소리. 정말로 변함이 없었다.

 아니야.

 트리스가 바닥의 나무 창을 주워 두 손으로 부러트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큰 소리. 억지로 찢은 듯한 나무줄기. 거친 손바닥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가 사라졌다. 그냥 가자. 메그는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서 힘을 빼지 않고 있다가 한 발짝 뒤로 걸었다. 그리고 그들이 창고에서 빠져나갈 때 까지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닫히는 문틈으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남자의 눈에 천천히 분노가 깃드는 것을 보았다. 메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가자. 빨리 가야 해.

 

 숲에서 벗어났지만 불을 피울 수는 없었다. 불빛과 연기는 지표가 될 것이다. 해는 완전히 졌고 날은 점점 더 추워졌다. 음식과 가재도구를 가득 얻었다 한들 이대로 잠자리를 찾지 못하면 얼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산을 완전히 벗어나거나 동굴 같은 것을 찾거나 전부 다 죽이거나. 사실 가장 쉬운 것은 마지막 선택지 같았다. 메그는 산 중턱과 능선 너머를 둘러보다 고개를 돌렸다. 두터운 눈에 반사된 달빛이 에린의 파리한 입술을 비추었다.

 여기 있어. 잘 곳을 찾아볼게.

 당황한 시선이 메그에게 향했다.

 혼자 가겠다고?

 너희는 에린 좀 따뜻하게 해줘.

 나도 같이 갈게. 알렉스가 메그 앞을 막아섰다. 메그가 손을 내저었다. 덩치가 커서 들켜. 금방 올 거고. 에린 동상 안 걸리게 해. 메그는 말릴 틈도 없이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는 어둠이 파먹은 것처럼 검었다. 마치 불을 끄고 사라진 듯 혹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이. 밤의 새소리. 바람 소리. 그들은 불길한 생각을 입 밖에 내는 대신 담요를 꺼내 추운 몸을 감쌌다. 에린은 메그의 색적과 관찰력을 믿으려 노력했지만 심장이 이상할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아이는 우리가 찾아낸 최고의 소재입니다. 혼란스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습니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으며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철학이 없고 망설이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과감하게 행동하고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수행합니다. 죽음과 삶만 알 뿐 그 중간에 있는 것은 모릅니다. 그리하여 날 때부터 군인의 자질을 품은 이 아이는 평생토록 군인으로 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신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아이라는 황금을 신에게 바치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에린이 물었다. 총소리가 들렸어. 한 번, 두 번……세 번. 알렉스가 대답했다. 쿵. 쿵. 모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메고 방수포를 챙겨 빠르게 비탈길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눈앞이 더 까맣게 변하듯 시야가 좁아졌다. 휘청거리다 나무를 짚어 손바닥이 찢어졌지만 아프지 않았다. 거리 감각이 이상해졌고 한 걸음 한 걸음의 보폭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아픈 공기가 폐를 찢어놓는 것 같았지만. 달릴 수밖에 없었다. 느껴본 적 없는 후회가 토기와 함께 치밀어올랐다.

 

 여섯 명 보다 더 많았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다섯 명의 심장에 총알을 박아 넣고 한 명은 개머리판으로 후려쳐 넘어트린 후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 틈에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못한 화살이 쇄골 왼쪽 아래에 박혔다. 찌릿한 격통이 몰려왔으나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고 도망치는 남자의 등을 쏘았다. 마지막 적이 쓰러졌다. 상처가 깊지는 않았다. 단지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팔을 못 쓰게 될 것 같았다. 순간 두려웠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방아쇠를 당길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내가 죽을 때는 신을 위해 전쟁터에서 백 명의 피를 마신 후라고 들었으니까. 쓸모에 집착한 적은 없었지만 처음으로 스스로가 쓸모없이 느껴졌다.

 겨우 걸음을 내딛어 작은 창고에 숨었다. 텅 비어 있는 꼴을 보니 버려진 것 같았다. 구석에 넘어져 있는 테이블을 일으켜세워 문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테이블 아래로 기어들어가 권총의 탄창을 갈았다. 누가 들어온들 한 번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이다. 공기가 조금 차가웠는데, 화살이 박힌 곳에서는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총소리를 들었을까. 핏자국을 봤을까. 시체를 봤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아픔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작은 소리를 냈다. 왼팔이 파르르 떨렸다. 눈이 깜빡깜빡 감겼다. 천천히, 옛날 생각이 났다.

 신전에서의 짧은 생활은 이상할 정도로 평범했다. 기껏해야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고 기껏해야 독방에 갇히는 나날. 살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이들과 좋은 옷을 입고 으스대는 어른들 뿐. 평범한 사람들이 줄 수 있는 모멸은 딱 그 정도였고 무엇을 당하든 소질이 없다고 끌려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다 문득, 완전히 평범해진다 한들 언젠가는 그 녀석들과 그 곳을 뛰쳐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간절한 눈이 나를 다시 한 번 붙잡으면 그대로 따라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한 번도 바라지 않았던 것들이 심장 속에서 숨 쉬게 되었을까. 멍한 머리로 더듬더듬 답을 찾으려 하다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 그들의 부드러운 살냄새를. 따뜻한 숨결을. 때로는 단호하고 때로는 애틋한 그 눈빛이 떠올렸다. 나는 조곤조곤 이름을 부르는 속삭임이 좋았고 아득할 만큼 짙푸른 초목이 좋았고 하늘까지 닿을 듯한 노랫소리가 좋았다.

 죽어서 가는 곳에는 신이 있다고 했다. 신의 커다란 손이 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전사자들의 낙원으로 이끈다고. 하지만 나는 신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버려진 땅에서 추위와 출혈로 죽기 전에 흩어져버릴 이름들을 뼈에 새겨야지.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노랫소리를 다시 한 번 더 듣고 싶다고 생각해야지. 점점 열이 올랐다. 총을 쥔 오른손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정신이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느릿하게 잠기고 있었다.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가느다란 손이 잠시 움찔거렸다. 환한 달빛이 낡아빠진 창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긴 그림자들이 휘청거리다 문틀을 꽉 쥐었다. 익숙한 냄새와 흐느낌에 가까운 숨소리. 짧은 이름을 수도 없이 중얼거리는 울음소리. 그 모든 것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 듣는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흐리게 젖었다.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거운 눈꺼풀이 꿈뻑, 꿈뻑. 눈물이 얼어붙은 세 쌍의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아,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다.

 노래를 불러 줘, 트리스. 노래를 불러 줘.

 메그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