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ene_FMF 2019. 7. 21. 02:41

 

 모든 신이 죽었다. 전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앙보다 권력을 중요시한 자들과 신을 잃은 광신도들이 성전을 재현했다. 멋대로 국경을 긋고 비무장 상태의 일가족을 몰살시킨 자들. 인류가 인류를 이끌 것이라는 선언을 입맛대로 해석한 인간들. 힘없는 자들은 헛간의 쥐처럼 불안 속에서 살았고 따각대는 말발굽 소리만 들려도 집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폭력의 주체가 인간으로 변한 것 외에 무엇이 바뀌었는가? 우리는 버석하게 마른 땅과 날카로운 피안개를 헤치며 계속해서 싸웠다. 약한 자들의 세상은 아직도 도래하지 않았다.

 이가 부러지고 허벅지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 날이 끝없이 이어졌다. 핏덩이. 매캐한 화약 냄새.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모래 알갱이. 특별히 고되지는 않는 고통과 고난들. 가끔은 이유 없이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트리스는 불안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충만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 그녀는 시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들판과 투명한 강물에 비치는 그림자들을 사랑했다.

 창백한 구름 그림자. 물결에 부딪혀 반짝거리는 햇살. 태양이 잠시 얼굴을 숨기자 고요가 찾아왔다가 들꽃과 나뭇잎들이 바람을 노래하는 여름 한낮. 누군가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즐겼고 다른 누군가는 짙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책을 읽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바지를 걷고 물고기를 잡으러 뛰어다니다 등을 펴고 활짝 웃곤 했다. 코를 스치는 초목의 냄새. 평화로운 숨소리. 사랑스럽게 꽃피는 웃음. 튀어오른 물방울마저 그들을 위해 빛나는 듯 아름다운.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유난히 일찍 잠에서 깬 밤. 침낭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트리스가 조용히 텐트에서 나가자 작은 형체가 모닥불에 의지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좁은 등은 살짝 굽어 있었지만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어둠에 파묻히지 않을 듯 보였다. 트리스는 그 형체를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가 조용히 다가가 어깨에 망토를 덮어주었다. 뭘 보고 있었어? 그녀는 안경알 아래의 검은 눈동자에 푸르스름한 새벽을 담으며 대답했다. 곧 동이 틀 것 같았거든. 모닥불에 녹인 손은 따뜻했으나 콧등은 차가워 입을 맞춰 주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트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유전학적 질문은 아니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나 삶과 죽음의 차이를 묻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보았으나 여전히 알 수 없는 그들의 기원, 핏줄과 태생과 고향에 대한 질문이었다. 트리스는 그녀가 수천 개의 별빛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질 듯이 고요하게 타오르는 눈동자. 트리스는 그녀를 품에 안고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아니면 싫어?

 …좋아하진 않지.

 기억이 안 나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해?

 우린 계속 함께 갈 거잖아.

 태생이 무엇이든지 고향이 어디이든지 그렇게 할 거잖아. 품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맞아. 바람결 같은 목소리가 투명하게 웃었다. 우린 계속 함께할 거야.

 그들은 멀리서 천천히 고개를 내미는 해를 보았다.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여명의 빛이 한 줄기씩 뻗어들어 낮은 구름과 높은 산허리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광경을. 태양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아침은 신의 은혜가 아님을 알고 있었으나, 성스러운 금색 빛이 어둠을 쫓아낸 것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트리스.

 응.

 어딘가에 황금빛 폭포가 있다고 했어.

 그래?

 전쟁이 끝나면. 언젠가 가보지 않을래?

 빛이 닿는 곳마다 생명을 새기고 초목이 잎을 틔우는 여명. 금빛이 살짝 굽은 등에서 목으로, 머리로 이어지는 선을 물들여 아름다웠다. 트리스는 그녀의 따뜻한 손을 쥐고 끄덕였다. 등 뒤에서 들리는 포근한 숨소리. 한 줌의 모닥불에 잠긴 좁은 텐트.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트리스는 지평선을 넘어 그들의 뒤를 돌아보았다. 이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이. 다만 소중하고 소중한 듯이. 더 담담하게는 한날 한시에 죽고 싶다는 듯이. 태생은 기억하지 못하나 죽음은 기억할 것이었다.

 

 눈을 뜬 트리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먹구름 낀 하늘이었다. 잿가루와 회색 연기가 뒤섞여 비 오기 직전처럼 흐린 하늘. 그 다음은 흙바닥 위의 익숙한 형체들이었다. 트리스는 그대로 몸을 뒤집고 바닥을 짚어 벌떡 일어났다가 크게 휘청거렸다. 방패에는 금이 가 있었다. 어?

 그들은 모두 누워 있었다. 코에 손가락을 대보았지만 호흡이 없었다. 손발이 빠르게 차가워졌으나 그들의 체온보다 더 차갑지는 않았다. 턱을 눌러 입을 벌려보자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 찢어진 입술, 붉은 혀, 핏빛 목울대, 그 안에 종유석 동굴이 있다고 해도 믿을 깊이와 어둠. 햇빛 아래에서 시퍼렇게 빛나던 검은 총신은 산산이 부서졌고 망치에 살육의 흔적을 묻히고서 이를 드러내어 웃던 얼굴은 눈을 감고 있었으며 모든 호흡과 각도를 계산하고서 방아쇠를 당기던 손은 돌덩이처럼 차가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녹아내리기 직전의 뇌가 찰나를 감고 감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소름끼치는 이명이 청각기관을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잠깐의 반짝임과 잠깐의 열기와 잠깐의 굉음이 기억났다. 핏빛 전투에 어울리지 않게 살랑거리던 초목들이 갑작스러운 열기에 맨살을 드러낸 것도. 압도적인 폭력에 전율하며 숨을 거두었던 인간들 위로 더 많은 뼈와 살이 쌓인 것도. 넓게 퍼지는 핏덩이. 존재하지 않는 물. 모래알. 나무 십자가도 없는 시체더미.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살아있지 않았다. 천천히 바닥에 스미는 피웅덩이에 두 손을 담구고 얼굴을 비추자 그때서야 그때서야 그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

        났       는지

 

                       알

                             수

 

 순간 돌풍이 불었다.

 

 

 

 

 그녀가 특수작전사령부 최상층에 들이닥쳐 모두 죽였다고 말하자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채였다. 눈가에는 작은 살점이 튀어 있었고 옷깃을 붙잡으려던 손은 손목 채로 잘려 바닥에 나뒹굴었으며 흰 망토는 원래의 색을 잃었다.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줄기가 눈썹과 눈꺼풀과 턱을 타고 내려와 옷 위로 툭툭 떨어졌다. 군인에게서 빼앗은 검의 손잡이를 꽉 쥔 채 숨을 찬찬히 들이쉬는 입술과 미치광이의 눈처럼 빛을 잃은 동공. 덜덜 떨던 사령관은 피보다 더 붉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발 디딘 땅이 무너지는 착각을 느꼈다. 그는 자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대신 천 개의 손아귀가 목덜미를 붙잡고 저걸 보라고 네 죄를 보라고 속삭이는 것을 들어야만 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보아라. 모든 신이 죽은 땅에 새로운 신을 불러와 온 땅을 불타게 만들 것.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무딘 칼날로 남자의 어깨를 내려찍은 다음 손잡이를 반쯤 돌렸다. 남자가 의자에서 나동그라져 바닥을 기며 헛구역질을 했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들어야 했으므로, 아직 멀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인간들이 그들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인류의 새 시작을 선언한 네 영웅을. 군대의 선봉에서 평화를 위해 싸우길 바란다고 했으나 그 이유 뒤에는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이 몇 있었다. 남자는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그들의 참모격인 자가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군은 자신들이 정의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는 그들에게 처벌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고도 실토했다. 그리하여 그 칼날이 등에 닿기 전에 움직여야 했었다. 어떤 명분과 어떤 희생을 만들어내서라도.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남자의 목이 툭 떨어졌다. 남자는 영문 모른 채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받아내었다가 뒤로 쓰러졌다. 쿵. 그녀는 칼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검은 칼끝이 시체의 길 위로. 검은 피가 하얀 복도에. 그녀의 핏빛 발자국이 아우성치는 시체들로 가득한 긴 복도까지 이어졌다.

 

 길에 불을 지를 것이다. 전부 다 불타야 했다. 이 땅에 새로운 분노를 불러와 모든 존재를 사그라트릴 것.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고 새카만 재가 눈처럼 비처럼 내리는데, 그녀는 두 눈동자에 모든 것을 담고 가만히 서있었다. 불길을 담은 두 눈동자가 더 새빨갛게 더 붉게 어두워졌다. 뼈가 드러날 만큼 명확한 사실. 지리멸렬한 삶과 함께 이어질 저주받은 몸. 환멸을 구름들. 답을 알 수 없는 모든 것들. 죽음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라면 내가 나빴다. 그녀는 무덤으로 돌아가 차가운 세 몸뚱이를 지고 아무도 모르는 땅으로 갔다.

 

 어떤 추위도 시체가 삭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침대에 눕혀두었으나 곧 관을 짰다. 하얀 자작나무를 베어 마당으로 끌고 들어와 길게 쪼갠 후 결을 다듬으면서도 믿겨지지는 않았다. 관을 짠다는 것은 죽음을 인정한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면 망치질 한 번에 손끝이 저리고 심장이 얼어붙고 두 다리가 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눈밭보다 새하얀 관에 그들을 눕힌 날에는 울다 쓰러져 그 앞에서 며칠을 지냈다. 그럼에도 죽지 못하여 눈을 뜨자 보이는 세 개의 관이 차라리 눈을 도려내라고 도려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관(下棺). 총 한 자루. 망치 한 자루. 안경 한 벌. 피를 씻어낸 망토를 세 조각으로 잘라 몸 위에 덮었고 금이 간 방패를 묘석으로 세웠다. 계절을 모르는 설산에 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중얼거림도 비명도 울음소리도 눈에 파묻혀 고요가 목을 조르는 땅. 얼어붙은 눈물을 부수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들을 이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제법 길었다. 거울을 보지는 못했다. 집안의 모든 거울을 깨고 유리창은 판자로 막아버린 탓이다. 달이 뜨지 않는 흐린 밤에 강에서 몸을 씻었다. 동물의 가죽을 손질하여 바닥에 깔고 커다란 식탁과 의자 네 개를 짰다. 먹을 필요 없는 몸으로 4인분의 요리를 하고 잘 필요 없는 몸으로 혼자 잠을 잤다. 그들이 누운 추운 땅속을 생각하며 불을 피우지 않고 살았다. 스산한 추위가 발끝을 썩혔으나 아픔은 익숙한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어떤 고통도 의미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났을까?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을까? 혼자라는 사실은 아침을 차갑게 맞이하는 일이다. 부엌에서 나는 좋은 냄새도. 더 자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목소리도. 아침 신문을 넘기며 커피 잔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없는 것. 잠결에 이불을 뺏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곤란할 일도 없으며 빨래 당번을 떠맡는 일도 없다는 것. 그녀는 하루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새하얀 땅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에 잠겨 그리움을 곱씹는 일은 정신을 천천히 망가트리기에 충분했다.

 스틱스를 찾아가지는 못 했다. 그들이 명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면 세상을 무너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또다시 태어났다면. 이미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세상을 뒤흔들 테냐? 타이탄 왕이 저지른 일을 재현할 것이냐? 세상을 고통과 분노에 빠트려 그들이 다시금 잿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도록?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대도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할 텐데?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천 명을 죽이겠다. 가지기 위해서라면 만 명이라도 죽이겠다. 다시 내 품에 넣을 수만 있다면 시체로 산을 쌓고 피로 강을 만들겠다. 그게 너희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녀는 음식이 식은 식탁에 엎드려 수백 가지의 방법을 생각했으나 그만두었다. 그들이 원할 리 없었다.

 목이 졸리듯 잠에서 깬 밤에는 미친 사람처럼 땅을 팠다. 자작나무 관의 뚜껑을 열자 옷과 뼈대가 보였다. 나뭇조각에 찔린 손끝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얀 뼈 위에 살아있는 몸처럼 피가 번졌다. 이상하다. 나를 안아주었고 내 손을 붙잡았던 뼈대는 이렇게나 그대로인데. 여기 있는 네가 죽은 자라는 증거가 어디 있지. 이제 충분히 기다렸다. 자, 내 심장을 가져가. 그리고 너희를 데려와.

 대답은 없었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지붕이 무너져 눈을 떴다. 삐걱거리는 몸이 마지막으로 움직인 지 수십 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오두막 잔해 아래에서 기어 나와 묘석 위의 눈을 털어내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평원. 드높은 침엽수에 쌓인 눈. 날아오르는 앙상한 산새들. 설산은 소름끼치도록 변함없었다. 저 멀리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전쟁의 불씨를 피해 척박하고 추운 땅으로 도망친 자들인 듯했다. 그들은 힘없는 목소리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총칼로 자리 잡은 국가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살해와 약탈을 거듭하고 있다고. 개중에는 끔찍한 타이탄들과 손을 잡은 놈들도 있다고. 그들이 몇 명의 혈육을 잃었는지 몇 끼를 굶었는지는 알 바 아니었으나 타이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넘길 수 수 없었다. 그녀는 먼 옛날의 녹슨 검을 쥐고 설산을 내려갔다.

 부활한 타이탄 중에서는 이미 인간의 손에 죽은 자들도 있었다. 인류는 신에게 권력의 일부를 받는 대신 권력 그 자체가 되기를 선택한 것 같았다. 인류가 죽이지 못한 타이탄들은 여전히 천하를 제 것이라 여기며 찬란했던 옛 시절을 재현하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부질없이 단 한 명에게 모두 죽었다. 죽음도 삶도 부활도 있는 그들은 완전한 불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으므로.

 온 몸에 신의 피를 뒤집어쓰고서도 공허한 눈은 그리운 자를 생각했다. 네 명이서 힘겹게 신을 살해했던 때를 곱씹으면서.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그리워하는 방법이다. 이 세상에 남은 수많은 일들 중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망토가 또다시 새카맣게 젖었다. 이 검은 왜 이렇게도 가벼운지 저 자들은 왜 이리 쉽게도 스러지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신 타이탄 왕이 그녀의 발치에 쓰러졌다. 그 먼 옛날에는 두렵다고도 생각했던 거대한 형체는 맥없고 형편없었다. 그는 색색 소리가 나는 목으로 웃었다. 그녀는 바닥으로 떨어진 금색 월계관을 내려다보다 검을 치켜들었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목에 닿기 전에, 타이탄 왕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아직 죽지 않은 눈빛으로 무언가 말할 듯이. 그는 마지막 신이자 마지막 왕이자 그녀의 과거를 아는 마지막 존재였다.

 너는 신을 멸하러 온 또 다른 신인 것 같구나. 대체 어디에서 태어나 죽지도 못하고 떠돌고 있는 것이냐. 그가 말했다. 지팡이 끝의 불씨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망자보다 더 생기 있게 붉었다. 분노하나? 분노하느냐고. 단어 하나 하나를 버겁게 이으면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는 목소리가, 인류를 모조리 죽여버리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적도 목표도 사랑도 없는 자에게 영생이란 저주다. 너는 빛이 아닌 어둠이며 한낱 망령일 뿐이다. 신도 인간도 아닌 자. 너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있지. 너는 어떻게 살 테냐? 수백 년. 수천 년 후의 너는. 어떤 몰골로 말라비틀어져 있을까?

 웃음소리 뒤로 허망한 기침이 이어졌다. 검은 칼날이 머리 위로 올랐다가 느릿하고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지팡이 끝의 불씨가 훅 스러졌다. 마지막 신이 죽었다. 칼끝에서 뚝뚝 흐르는 피가 어두운 공간에 더 어두운 웅덩이를 만들었다.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고개. 굽은 등. 바닥으로 늘어진 망토는 더 이상 찬란하지도 빛나지도 않았다. 신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손에 끌어내려져 쇠꼬챙이에 찔렸는데.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어떤 비난에도 변명하지 못할 영혼. 이미 충분히 고통스러웠으나 귀퉁이부터 천천히 바스라지고 있었다.

 순간 머리에 총을 맞았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며 한쪽 눈을 짚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쓰러지지 않은 몸뚱이를 향해 더 많은 총알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뼈를 부수고 폐를 찢는 고통은 이제 상관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큰 국가의 군대가 눈앞에 들이닥쳤을 때도, 그들이 두렵고 떨리는 눈으로 피투성이의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도, 그들의 손에 이름도 모르는 붉은 땅에 봉인되었을 때도 상관없었다. 이 모든 것이 지리멸렬하고 금방 지나갈 것이므로. 그랬다.

 

 

 

 

 그녀는 인간들이 옛적부터 준비해왔던 관 속에서 오랫동안 잠을 잤다. 두 팔과 다리를 고정한 채 신경을 차단하여 분노도 후회도 할 수 없는 좁은 공간 속에서. 그녀를 가둔 자들은 이것이 벌이 아니며 인간들을 위한 격리인 것을 알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불사의 존재를, 이 피투성이의 분노를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관리자들이 모두 죽고 시설이 노화했을 때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시설을 감싸듯 흐르던 용암은 모두 굳어 있었고 시설은 보잘것없이 풍화되어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천천히 시설을 걸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구름과 낙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나무와 건물은 보이는 대로 쓰러져 있었고 도로는 핏줄처럼 갈라진 채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걸었지만 살아있는 인간을 볼 수는 없었다.

 부식된 표지판과 무너진 집터를 살피며 도시로 들어갔다. 옆으로 쓰러져 거리를 덮친 고층 건물 잔해에는 인간과 동물의 뼈만 남아있었다. 그녀는 사무실 책상을 뒤져 마지막 달력을 찾아냈지만 달력에 표시된 날짜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식당 입구에 꽂혀 있던 신문을 펼쳐 보았다. 신문은 국제 정세와 군대의 움직임, 이상기후, 계속되는 냉전과 공산주의 국가의 핵실험 등으로 빼곡했다. 그 중 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칼럼 연재 페이지 맨 위에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웃었다. 이게 전쟁의 결과라면 아주 잘 했다고. 내가 지키려 했던 것.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 그럴 필요 없었다. 끝까지 인간을 믿지 않았던 네가 현명했던 것이다.

 그녀는 도시를 벗어나 그들의 관을 찾으러 설산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회색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무너진 오두막의 정원을 파냈다. 관 안에는 수의처럼 덮어준 천조각과 삭은 유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방패에 기대어 눈을 덮고 잠을 잔 후 다시는 그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백일? 이백일? 영하 십도의 길바닥에서 눈을 감고 뜨거운 사막에서 일어난 날을 셀 수 없었다. 그녀는 형태만 남은 공군기지 안으로 들어가 인간이 손을 뗀 지 한참 된 총기 무더기를 보았다. 그녀가 먼지를 털어낸 소총으로 벽을 쏘자 개머리판이 어깨뼈를 부쉈지만 금방 붙었다. 그녀는 잠시 제 쇄골을 더듬어보다 권총을 쥐어 머리를 쏘았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가, 곧 일어났다. 그리고 무릎 꿇은 채 거울을 보았다. 아.

 백 년이 넘게 지났다. 수도 없이 피를 흘렸다. 아직도 살아있는 몸뚱이가 두려웠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부를 이름이 없었다. 오랫동안 말을 뱉지 않은 목이 아팠다. 그녀는 차라리 봉인된 채 잠을 자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말을 나눌 존재도 문명의 부스러기도 남지 않은 세상이 차가웠고 낯설었고 죽고 싶었다. 너희를 지키지 못한 죄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인가. 초라한 세상을 영원히 지켜보는 것이 나의 벌인가. 그녀는 길을 걸으며 몇 백번 더 죽음을 도전했다. 오늘은 성공할 것이라 믿으면서. 그리고 모두 실패했다. 그녀는 잿빛 길 위에 퍼진 자신의 핏자국을 돌아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훗날 우연히 이곳을 지나칠 유령에게 신이 이 땅을 지났으며 그녀의 피가 강을 이루었다는 증언을 해 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단 한마디를 들을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사랑한다고? 너희가 나의 전부라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냐고? 삶의 지침을 알려주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텐데. 죽으라고, 따라 죽으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호흡도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벌처럼 죄처럼 목을 졸랐다. 모든 것을 지나는 것은 죽음이다. 모든 죽음을 관통하는 것은 외로움이다. 죽은 자의 이름은 내뱉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쉽다 하던데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잊혀질 것들. 그 사이에서 영원히 살아남을 것들.

 무시무종의 시간이 지났으나 너에 대해 생각하면 아프기만 했다. 길을 알려주기 위하여 촛불 하나에 의지해 책을 읽던 너. 어떤 것도 달가워하지 않으나 언제나 내 뒤에 서서 적을 꿰뚫던 너. 내 앞을 막는 것은 누구라도 죽이겠다고 말하며 햇살처럼 웃던 너. 사랑과 충성의 맹세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네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녀는 숲을 헤매다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거목이 빽빽하게 자리 잡은 숲의 창고. 그녀는 냉기가 올라오는 나무 바닥 위에 녹슨 접이식 의자를 펴 앉았다. 그리고 작은 창문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았다. 백야도 없이 어두워지는 시각. 서쪽의 해가 산마루 아래로 사라졌다. 형태만 남은 허름한 창고 안쪽까지 밤이 들어왔다. 안개비가 걷히자 높은 나무들 끝자락에 별빛이 걸렸다. 모든 것들이, 사랑 없이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날 밤 황금빛 하늘에 물들어 반짝거리던 너는 꼭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태생에 대해 운을 띄울 때면 늘 심장이 아팠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생각했으나 너는 아닌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 근본이 다른 존재라고 말할 것 같아서였다. 네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언제나 의미 있는 말만을 했던 네가 자랑스러웠고 너를 사랑하는 만큼 겁이 났었지. 그런 나를 알고서도 웃어주었던 너는 더없이 상냥했다. 그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한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을까? 내 존재의 지침을, 다시 한 번만 내려줄 수는 없을까? 공허한 눈이 유리창 한 겹을 두고 별을 쫓았다. 생기 없는 붉은 눈동자가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그렇게 있었다.

 빽빽한 나뭇가지와 수천 개의 이파리들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새벽. 검은 하늘은 흐려졌고 멀리서 태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시선을 내려 지평선을 보았다. 그리고 문득 곱씹었다. 따뜻한 손과 차가운 콧등을 느끼며 입술을 나누었던 풍경을. 가느다란 목과 굽은 등을 물들였던 금빛 줄기를. 그리하여 이제는 검게 탁해진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여명이 드는 그 순간…….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나 국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삼천만권의 도서와 사백 칠십 개의 언어로 된 인쇄물들과 몇 세기에 걸친 정부 신문이 건물 네 채에 전시되어 있는 도서관. 창문과 전등은 깨졌고 책장은 비바람에 볼품없이 삭았으나 바다에 수장되지는 않았다. 그녀는 기름등에 불을 붙이고 바닥에 앉아 종이 장부를 뒤져가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황금빛 폭포가 내리는 절벽에 대한 기록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가져본 목표에 잠시 즐겁다고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고, 황금빛 폭포가 정답이 아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가 곧 두려워했다. 그녀는 책장 하나하나를 살피고 기름을 갈고 잠시 하늘을 보았다가 비 들어오는 창문을 방수포로 막으며 한 달을 보냈다. 염원으로 죽은 존재가 돌아온다면 그들은 이틀 만에 돌아왔을 것이다.

 먼 옛날부터 기억하지 못했던 부모와 고향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이상하다 여긴 적 없었다. 그것이 누구이든 무엇이 되었든 오직 그들만이 나의 자매이며 가족이며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맞닿았던 숨. 두려움을 감싸 안아 주었던 온기. 피도 눈물도 섞여 아픔마저 공유했던 우리들의 기원이 어딘가에 있다면 나의 죽음 또한 있을지도.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고 죽고 싶었다. 둘은 다르지만 같은 말이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에 대한 마지막 땅의 단서라면 어떤 것이든 좋았다.

 출입이 금지된 절벽에서 용암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그 시기는 불규칙하며 높이는 480미터에 달하는…황금빛 폭포가……. 가지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금빛 폭포가 내리는 성역에 대한 활자를 읽으면서. 그 땅에 발을 들였던 모두가 검은 비를 맞고 이유 없이 쓰러져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는 글자를 보면서. 인간들은 그 폭포를 빛의 산란에 의한 현상이라 추측한 후 연구를 그만두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키다 메마른 기침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백팔십 점의 지도를 뒤져 이제는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땅을 떨리는 손으로 찾아내었다.

 

 무너진 울타리. 썩은 농장. 죽은 콘크리트 다리. 출입 금지 구역임을 경고하는 표지판과 철조망이 그녀를 반겼다. 숲의 입구에서부터 백이십 미터의 세쿼이아 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있었다. 뱀 색깔 강이 천천히 흐르고 저 멀리 반구 형태의 절벽이 보였다. 이 땅의 침입자들은 비참하게 죽어 나무의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두 번 다시 이 땅을 탐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세상을 배경으로 삭막하고 검게 드러난 나무들을 향해 걸어갔다.

 걸쭉한 물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 방향을 틀면서 잿빛 거품을 일으켰다. 물속에는 물고기 그림자 하나 없었다. 모든 것이 검고 어두웠다. 그녀는 천 제곱마일이 넘는 숲을 돌더미 하나 나무줄기 하나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춰보았다. 혹시나 이 땅에서 그들이 다시 태어났을까봐 그랬다. 새나 나비로 나타난대도 모를 리 없었다.

 폭포. 초원. 삼백 개의 호수. 어쩌면 오늘. 어쩌면 내일. 날은 충분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재를 날리는 바람이 멈추자 계곡 위에서 우뚝 섰다. 그리고 새 소리 없는 적막 속에서 오랫동안 가만히 있었다. 어느 땅에 해가 닿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계곡에서 뛰어내려 죽은 나무들을 밟고 튀어 올랐다. 비탈을 오르고 물을 건넜다. 암벽과 빙하가 만들어 낸 삼천피트 높이의 기암절벽은 빼곡한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채 폭포 하나만을 보호하고 있었다. 세상의 여명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 여명의 벽. 그녀는 확신했다.

 돌바닥에 발이 베이고 나무줄기에 살갗이 찢어지며 폭포 가까이 다가갔다. 폭포는 검지 않고 푸르게 투명했다. 이곳만이 숨 쉬는 땅인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내는 소리와 함께 물안개를 만들었다. 퍼지는 물줄기. 천둥 같은 울음. 하지만 그녀에게는 제 심장 소리가 무엇보다 컸으므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눈을 똑바로 뜬 채 폭포 안으로 걸어갔다.

 폭포 뒤의 작은 동굴은 푸른 나무덩굴이 이방인을 경계하듯 빼곡했다. 밖의 나무들과 달리 잎에 윤기가 돌았다. 동굴 안은 기름등 없이도 밝았다. 스러진 세계의 빛. 모든 신을 내 손으로 죽였으나 이곳에 마지막 신이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성스러움. 황금빛 폭포를 보고 싶다고 했었지. 나는 보았다. 그러니 이제 너희를 깨울 것이다. 우리가 인간을 지키기 위해 태어난 불합리의 존재라고 해도. 이제 더 이상 지킬 세상이 없다고 해도. 만일 이것으로 세상이 지금보다 더 진창으로 빠진대도 기꺼이 깨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를 사랑하니까. 그 외에 달리 이유는 없다.

 그녀는 동굴 가장 깊은 곳에서 하얗게 빛나는 알을 보았다. 몸을 웅크린다면 딱 그녀 정도의 크기일 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이자 깊은 곳에서 딱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깃털 같은 숨소리도. 한쪽 벽이 완전히 막힌 동굴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생명의 근원이 여기 있다고 울듯이, 세상 모든 바람이 이 곳에서부터 시작하듯이. 그녀는 손등에서 굳은 피딱지를 털어내고 흰 알로 손을 뻗었다. 심장이 과분하게 뛰고 있었다.

 작은 고동 소리가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점점 커졌다. 손끝과 맞닿은 곳에서 작은 금이 생겼다가 고동 소리와 함께 알 전체로 퍼져나갔다. 작은 호흡 한 번에 한 가지씩. 떨림 한 번에 또 한 가지씩. 갈라진 틈에서 껍질이 떨어져나와 새카만 안쪽에서 짐승의 내장 같은 것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빛. 새벽. 천지의 재건. 조용한 예언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시간. 너만 돌아온다면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도 상관없다. 언젠가 혼자 남겨질 것이라 해도. 몇 번이고 이별을 반복하여 심장이 천만갈래로 찢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알을 깨고 두 팔을 뻗는 존재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껍질을 벗고 일어서는 작은 아이들을 보면서. 만약 자신이 모든 만물의 법칙이라면 세상을 바로 이렇게 만들었지 절대 다르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떨어지는 물방울. 세 개의 숨소리. 마지막 태양이 그들의 눈에 나누어 박혀 있었다.

 넌 누구야?

 빛 속의 검은, 붉고 푸른 눈. 몇 백 년을 넘어 마침내 재회한 그리운 목소리. 입으로 내뱉으면 닳아버릴 것 같아 삼키고 또 삼켰던 소중한 이름들. 발성하는 법을 잊은 성대가 천년 동안 쌓인 모래를 눈물로 씻어내고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나의 에린, 내 알렉스. 그리고 나의 메그. 내 마지막 청각의 역사를 여기서 다시 쓰겠다.

 너희를 사랑하러 온 사람.

 폭포 너머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그들이 죽고 난 후의 세상에 대해서였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죽었고 나는 더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눈을 뜨니 모두가 죽어있었다고. 지난 몇 백 년 간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너희를 찾아다녔다고. 몇 백번 죽음을 시도했고 죽은 사람을 부러워했으며 너희를 그리워했다고. 나의 봄은 어디로 갔는지 나의 여명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했을 때가 있었고, 너희가 천국보다 더 천국인 곳에서 잘 지냈으면 하기도 했다고.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둘도 없는 지옥에 가고 싶기도 하였다고. 아이들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외로웠겠다. 트리스. 앞으로도 외롭겠네. 트리스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끝을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또 몇십 년 살다 죽는 너희를 만나러 몇백 년을 기다릴 거야.

 우리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못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사랑할 거야.

 피로써 행하고 피로써만이 씻을 수 있는 그 맹세. 그들은 웃었다.

 

 암전이 밝아졌다. 그림자가 가라앉았다. 세상의 중심인 여명의 벽에서부터 새로운 지도가 만들어졌다.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는 바로잡을 수 없는 것들을 그린 지도. 하루의 마지막 태양빛이 안개와 만나 폭포를 용암으로 물들였다. 그들은 화강암 절벽을 달리고 호수에 미끄러지면서 비를 맞았다. 누군가는 너희의 죽음을 몇 번이고 보겠으나 지옥 같은 세상의 끝에서도 너희를 맞이하러 가겠다 다짐하고, 누군가는 영원히 사는 너를 몇 번이고 우리가 반겨 주겠다고 약속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