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03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
네 동기는 대체 뭐냐? 에린이 언젠가 들었던 말이다. 에린은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의자에 묶인 남자를 보았다. CIA와 협업하면서도 테러 집단에 무기를 공급하고 정보료를 받았던 자. 허벅지에서 새어나온 피가 의자 위에 고였다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린은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후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너 같은 인간들을 잘 알지. 비밀을 파헤치는 걸 쾌감으로 삼는 인간. 높은 지능을 가지고서는 타인과 상황을 통제하고 퍼즐이 맞아떨어질 때 보람을 느끼는 인간들. 거만하고 자부심이 대단해서 허를 찔리면 굉장히 수치스러워들 하잖아. 하지만 네가 날 쐈을 때 네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고. 분노. 화. 수치. 당혹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저 내 목숨을 오랫동안 붙들어놓을 수 있는 부위가 어디인지, 본부 인간들이 몇 시간 내에 도착할지, 받았던 정보가 어디까지 참이고 거짓인지나 생각했겠지.
글쎄.
너와 일하면서 이 일을 그만두자고 생각했다. 차라리 배신을 털어놓고 저것들을 다 죽이자고. 넌 손에 아무것도 없는 척 하면서 내 목숨을 쥐고 있었잖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라는 듯 계속 허점을 내비치면서. 웃기는 건 통할 놈한테나 그런다는 거야. 최소한의 노력과 최대한의 계산으로 맡은 바를 수행하는 거. 난 그게 두려웠어. 인간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너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게 되어버렸다고. 넌 대체 뭘 위해 살아? 뭘 위해 죽이는 거지? 그 소름끼치는 인간 가죽 안에 뭐가 들어있는 거냐?
알려줄 이유는 없어.
동정이라도 베풀어주지 그래.
네 목숨이 뭐라고.
그래. 그러시겠지.
잠깐의 침묵이 깔렸다. 거대한 말 농장 한 가운데 위치한 창고. 나무 궤짝 안에 든 불법 무기들. 핏방울이 나무 바닥에 스미며 기이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남자는 곧 들이닥칠 인간들이 자신의 팔다리를 묶고 자루에 넣어 빛도 소리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을 직감했다. 주검으로도 돌아오지 못할 것 까지. 남자는 머릿속으로 남겨둔 것들에 대한 생각을 하다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도 알고 싶은 것에 대해 묻기 위하여.
에린, 난 널 존경해. 하지만 부럽지는 않아. 넌 가끔 죽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죽어서 죽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 같아. 아니면 모든 걸 다 끝내거나. 누군가와 유대를 맺고 싶지도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어디 혼자 처박혀서 세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남자는 팔이 뒤로 꺾여 의자에 단단히 고정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기우뚱거려도 상관없는 것처럼. 그리고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은 허무로 가득 차 있어. 아무도 너를 못 건드려. 어떤 우정도 어떤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어떤 것도 전부 다. 화도 분노도 없이 속이 비어 있는 인간. 너는 그냥 모양만 남은 사람 껍데기야. 그런 주제에 총알이 튀고 폭탄이 떨어지는 이 땅에서 아득바득 살아있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겠어? 궁금하지 않겠냐고?
에린이 남자의 눈을 보았다. 남자는 호흡이 부족한 듯 상처가 아픈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에린은 자신이 죽인 인간들의 마지막 눈빛을 떠올리려 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감정과 색채 같은 것은 누락되어 저장된 듯이. 에린은 남자를 보며 네가, 나를 가장 정확하게 본 인간이라 말하려 했으나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에린은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살아서는 만나지 못할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 밖으로 나갔다.
꿈들이 희미해졌다. 사라진 세계가 돌아왔다. 오래 전에 죽은 자들이 깨끗하게 씻은 모습으로 나타나 죽음이 깃든 기묘한 눈빛으로 에린을 곁눈질했다. 그 속에 그리운 자의 얼굴은 없었다. 에린은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기억의 궁전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 맞이한 잿빛의 하루. 줄줄이 묶인 포로들. 눈앞으로 달려드는 자를 쏘아 그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던 날. 마우스 휠을 내리다 누군가의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순간. 에린이 두 손으로 무거운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두 뺨을 쓸었다가 등 뒤로 사라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으로 채워진 곳. 탄소강 프레임 여섯 개가 세로로 길게 서서 수백 칸의 책장을 받친 채였다. 무게를 버티기 위한 철근이 칸마다 가로질러 볼트로 단단히 죄여져 있었고, 책장과 책장 사이에는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작은 승강기가 놓여 있었다. 낡은 소설책. 오래된 종이쪽지들. 끝이 삭은 노트. 검고 두꺼운 바인더에 정리된 문서들. 산소는 희박했으며 냄새라고는 없었다. 에린은 거대한 창고 같은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다 생각했다. 이게 이번 생의 기억이라면 참으로 삭막하게도 살아왔다고. 그녀의 그림자가 수만 권의 책보다 길게 늘어졌다.
목적 없이 정보를 먹어치우며 이것들을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밀 취급 허가를 받은 자라 해도 문서의 형태로는 들고 나갈 수 없는 정보들을. 그래서 전부 기억하기로 했지. 앙상한 뼈처럼 드러난 은색 프레임을 보며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곳에 지난 생의 따뜻한 봄바람은 없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볕도. 용암이 끓는 바닥도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없다. 그러나 그토록 알고 싶었던 동기만큼은 있었다. 글자를 익힌 그 날부터 읽고 썼던 모든 것들이 여기. 바로 이 곳에. 에린은 서류더미 하나를 집어 들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속했던 곳은 유쾌하지 못한 집단이었고 그녀가 다루었던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남아시아의 무기 밀수 네트워크와 중동에서 벌어지는 그림자 전쟁,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피의 다이아몬드, 남미의 코카인 농장은 화장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녀는 CIA가 라오스에서 공산주의를 억제하기 위해 모르핀과 무기 밀수를 눈감아주며 쿠데타를 지원했던 기록을 읽었다. 예멘 무장단체에 붙어 나라를 배신한 미국인 성직자를 비밀리에 암살할 것을 명령하는 문서도. 그녀 또한 허가가 나지 않은 지역에서 살인을 위해 대리군을 고용했고, 프레데터 프로그램을 완성시켜 효율적인 처형을 주도하기도 했다. 나는 지옥에 갈 거야. 에린이 중얼거렸다. 이렇게나 죄를 지었는데. 너희를 찾기 위해서라면 수만 명도 더 죽일 테니까. 그녀는 다 읽은 서류를 뒤로 집어던지고 다음 바인더를 꺼내들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다. 다가올 세계에 어렴풋한 희망을 걸었음에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책장 두 칸을 비우며 빛이 희미한 공간에 차디찬 숨을 내뱉었다. 종이를 파라락 넘겨가며 드문드문 글자를 읽기를 반복하면서. 날 때부터의 과거를 더듬는 일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 모든 기록을 읽는 일은 외로움과 공포의 원인을 알면서도 전부 받아들인다는 것. 그들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보다 기록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흔적이 더 두려웠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 너희를 알기 전의 나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아. 그러나 계속해서 읽었다. 알고 있어야 했고 찾아내야만 했으니까.
사랑과 돈 때문에 싸우는 인간들 사이에서 고작해야 명령 때문에 싸웠다. 에린은 죽음을 확신했던 명령서를 읽으며 그때를 더듬었다.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던 날. 두렵지는 않았으나 그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곤죽이 된 폐와 비장 때문에 아픈 게 아니야. 불에 타죽을 미래가 비참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곁에서 죽어야 하는데. 뺨을 쓸어주는 온기와 머리카락 위로 내리는 입맞춤 속에서 눈을 감아야만 하는데. 그녀는 그 때의 흐려졌던 시야까지 기억해냈다가 입을 틀어막고, 부족한 호흡을 천천히 되돌리며 흉터가 남아 있는 갈빗대를 쓸어내렸다. 주마등에 최악의 공포를 덧입혀 생생히 되살려내는 두뇌가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있었는지 모르겠다. 열두 번째 칸에 멈춘 승강기 아래로 서류 뭉치들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혹은 바다. 혹은 사막 같았다. 다시 집어넣지 않은 이유는 과거를 버렸기 때문이다. 에린은 활자와 기록이 넘칠 것처럼 넘실대는 머리를 붙잡고 종이를 넘겼다. 숨이 막히고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희망을 원했고 기대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을 원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한 빛. 희미한 실마리. 푸르고 붉은 문자로 새겨진 단 하나의 글귀. 영원은 없다. 그러나 영원처럼 길었다. 너희를 사랑했던 때가. 너희를 잊은 채 지냈던 때가. 에린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지혜를 빌려 줘. 우리 모두 이 하늘 아래에 있어. 저 위의 태양은 언제나처럼 타오르고, 우리 모두 같은 달을 보며 한날 한시에 잠들 것이다.
자, 지혜를 빌려 줘.
에린의 손가락이 멈췄다.
에린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온 몸이 저리고 아팠다. 검은 눈동자가 어둠에 익숙해지려 허공을 더듬었다. 열댓 번을 깜빡인 후에나 희미한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2인용 침대 하나가 절반을 차지하는 작은 방이었다. 얇은 커튼이 작은 창문을 가리고 있었고 벽에는 직물로 짠 커다란 장식물이 걸린 채였다. 검은 체크무늬 이불과 푸른 색 베개, 오래된 티비,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카펫이 어설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에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침대 위를 짚자 싸구려 매트리스가 끼익거렸다. 그녀는 한 쪽에 쌓여 있는 가방을 뒤지다 베개 밑에 손을 넣어 권총을 꺼냈다. 오랫동안 굳어 있던 손이 저리고 마디가 삐걱댔다. 그녀는 몇 초 동안 등을 굽힌 채 가만히 서 있다가, 알렉스를 떠올리고 몸을 확 돌렸다. 그러나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멈추었다.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빵 접시가 있었다. 물 세 통과 제대로 잠그지 않은 빵 봉투, 반쯤 남은 이름 모를 잼도. 에린이 손끝으로 빵의 가장자리를 떼어내 가루를 내었다. 마른 정도로 보아 두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이 방에 있었을 것이다. 에린은 그때서야 핸드폰을 찾아내어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였다. 머리가 그대로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뒷목까지 지끈거렸다.
여긴 어디지? 리비아 국경을 넘은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애가 핸드폰을 가지고 나갔을까? 누군가를 뒤쫓고 있는 건 아닐까? 연락을 하면 받을 수나 있을까? 지금쯤 추격이 붙었을 것이다. 범죄자와 내통하고 자취를 감춘 이중 스파이를 쫓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이 명령을 수행했듯이 한 때 동료였던 자를 법적 문제없이 죽이기 위해서. 알렉스의 생사에 대한 의심은 하지도 않았으나 발밑에서 끝없이 불안이 치고 올라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이 생기는 것과 같았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부터 계단을 딛고 올라오는 듯했다. 자세히 들으려 했으나 먹먹한 귀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린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리볼버를 꽉 쥐고 문 뒤에 숨었다. 일 년의 절반을 극한 상황에서 보내는 자는 언제나 최악의 상상만을 해야 했다. 열쇠가 절그럭대는 소리 후 낡은 나무문이 조용하고 천천히 열렸다. 에린은, 그 문짝 너머로 밝은 머리칼을 보고서야 멈추었던 숨을 내쉬고 눈높이까지 치켜들었던 팔을 내렸다. 뒷목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에린?! 알렉스가 안경이 콧등에서 흘러내린 채 겨우 호흡하고 있는 에린을 보고 재빨리 문을 잠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어 에린을 끌어안은 후 큰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에린은 그 손에서 피냄새를 맡았으나 그녀의 피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에린이 알렉스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중얼거리듯 물었다.
신원 확인은 했어?
못 했어.
죽였어?
묻었어.
어떤 인간이야?
국경부터 쭉 우리를 미행하고 있던 인간.
한명이 아닐 거야. 더 있겠지.
내가 경솔한 짓을 한 거야?
아니야, 알렉스. 아니야. 에린이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저 걱정한 거야. 눈을 떴는데 네가 없어서.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에린을 안아들어 침대에 앉힌 후 종이 지도를 무릎 위에 펴주었다. 품 안의 몸이 불덩이 같았으나 그녀가 알고 싶어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열이 심하네. 너 삼일 동안 잠들어 있었어.
머리를 너무 썼나…….
네가 그럴 때도 있구나.
알렉스.
응?
메그의 행방을 찾아냈어.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순간 크게 벌려진 알렉스의 입을 에린이 두 손으로 덮었다. 알렉스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가 입술에서 떨어지는 에린의 손을 쥐었다. 커다란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벅찬 감정과 두려움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에린은 알렉스의 손 안에서 손을 꼼지락대다가 알렉스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제 말해줘도 돼. 알렉스가 에린의 머리를 꼭 안은 채 조심히 말했다. 에린이 알렉스의 품 안에서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에 볼리비아에서 마약단속국 수사관이 살해당한 일이 있었어. 장기 잠복수사 중이었는데, 정체를 알게 된 카르텔이 그를 죽이려고 볼리비아 미국 대사관의 외부 건물을 폭탄으로 날려버렸지. 수사관은 목숨을 건졌지만 대사관을 지키던 해병대원 두 명이 죽었어. 그 일로 미국은 볼리비아 카르텔을 국토안보부의 위험단체 10위에 올렸고. 수사관은 얼마 후에 살해당했지만 관련 정보를 받아볼 수는 있었어. 카르텔의 간부와 그 측근들, 경호 리스트를.
거기에 메그가 있었어?
볼리비아 카르텔은 밀수, 생산, 교화, 보안 이 네 가지 대분류로 나뉘어. 메그는 밀수 간부의 경호였어. 간부들 얼굴은 다 까발려졌지만 총알받이 경호들은 자주 바뀌니 특별한 자료가 없었어. 사진도 없이 짧은 설명이 전부였지. 검은 코트를 입고 비니를 쓴 갈색 머리 저격수. 메그의 이름은 까마귀였어.
까마귀…….
난 그 후에 중동으로 불려갔고 볼리비아엔 블랙옵스가 파견됐지. 메그는.
에린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떻게 됐을까?
살아 있을 거야.
그 설명 한 줄로는 기억해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에린.
그래도 내가 바보같이 느껴져.
가장자리가 튼 입술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린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아직도 만 개의 문자를 정처 없이 뒤쫓고 있는 것처럼. 알렉스가 에린의 어깨를 상냥하게 쥐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콧등과 뺨에 키스를 내리는 입술과 뒷목을 쓸어내리는 손이 부드러웠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눈을 뜨지 못했을 거야. 이유 없는 외로움에 심장을 태우다 아무렇게나 죽어버렸을 거야. 네가 없었다면 메그의 위치조차 알지 못 하고 이 뜨거운 사막을 헤맸을 거야. 후회는 해도 되지만 두려워하지는 말자. 두려움으로는 남을 죽이지 못해. 우리는. 살아남아야지. 알렉스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그녀의 위로는 그렇다. 위험하고 편협하며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다. 안타까운 상황에서도 정제된 사실만을 골라 건네는 말. 벌어진 일과 해야 할 일을 어르는 목소리. 에린이 따가운 목으로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메그가 이미 그 땅에 없다면? 혹시나 이 하늘 아래 없다면? 에린은 불안함에 술렁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알렉스의 말을 중얼거렸다. 살아남아야지. 살아서. 바다를 건너 만나러 가야지.
알렉스의 품에서는 여전히 피 냄새가 났다. 식은 피. 흙내음. 차가운 지방. 날붙이의 금속. 총의 희미한 화약 냄새.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고 앞으로 나아갈 자의 냄새. 우리는 무릎을 쏘지 않는다. 그건 경찰이나 하는 짓이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들의 확실한 죽음 뿐. 지옥이 활짝 열려있고 심판이 나를 기다린다 한들 두렵지 않았다.
에린은 먼 옛날을 떠올렸다. 목적과 동기는 오직 서로였던 때를. 영원은 없다. 그러나 영원으로 만들 것이다. 에린은 안경을 고쳐 씌워주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곧 아침이 올 터였다.
해가 밝아왔다. 그들은 흐트러진 침대와 짐가방을 그대로 두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왔다. 4층짜리 건물의 1층은 식당과 과일 가게였다. 그들은 복도로 난 식당의 옆문으로 들어가 개점을 준비하는 주인의 입을 틀어막고 돈을 쥐어주었다. 입술 위에 올린 에린의 검지와 단단히 쥐인 알렉스의 주먹을 본 주인은 몸을 숙이며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그들은 옷 위에 흰 유니폼과 검은 앞치마, 위생 모자를 쓰고 시계를 보았다. 아침 일곱 시였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의자를 내리고 바닥을 청소했다. 식료품 배달 트럭이 도착하자 주인이 뛰어나가 운전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하얀 컨테이너 트럭에서 상자와 봉투에 담긴 식재료를 내려 주방으로 옮겼다. 운전수와 이야기를 끝낸 주인이 가게로 들어오며 턱짓으로 트럭을 가리키자 그들은 가게 안에서 유리창으로 주변을 살펴보다 트럭에 올라탔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문을 닫는 척 하며 그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두즈. 세 시간 안에 도착할 겁니다. 에린이 운전수의 말에 자동권총을 품에 집어넣었다. 도착하면 세 배 더 주겠어. 운전수가 침을 꼴깍 삼키며 트럭의 문을 닫았다.
그들은 두즈에 도착해 길거리를 떠돌던 사람 두 명을 고용했다. 그 후 체격이 가려지는 흰 옷과 두건을 씌우고 두즈 외곽의 작은 여행사로 보냈다. 낙타를 타고 크샤르길레인으로 가도록. 어떤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세 평짜리 여행사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을 잊기는 힘들 것이다. 그들은 고용한 자들이 낙타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며 두즈에서 가장 큰 여행사로 찾아갔다. 온갖 국가에서 온 여행자들로 로비가 가득 차있었다. 그들은 로비에 잠시 동안 앉아 있다가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당일 예약이 불가한 여행사의 사장에게 총과 돈을 들이밀고 9인용 밴 하나를 빌렸다. 뒷좌석이 짐으로 가득 차 있는 직원용 차량이었다.
두즈를 빠져나오자 커다란 오아시스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 줄 맞춰 심어진 나무들도. 그대로 30분을 달리자 210번국도 양 옆으로 암석지대가 펼쳐졌다. 낙타를 탔다면 사하라 사막의 새하얀 모래 알갱이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몇 천 년 동안 태양 아래에서 타오르고 식기를 반복한 땅. 바람이 쓸고 지나가 파도처럼 물결이 남은 언덕들. 어스름 속에서도 선명한 낙타의 굽은 등 같은 것들을. 알렉스는 어깨에 기댄 에린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버거운 숨을 내쉬며 식은땀을 흘리던 에린이 그 손길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세 시간 반을 달려 알제리 접경지역에 도착했다. 높은 요새나 바리케이드, 헬리콥터 같은 것은 없었다. 유럽 열강이 식민지를 나누기 위해 그어두었던 직선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은 밴을 돌려보내고 허술하게 무장한 국경 수비대에게 다가갔다. 국경 수비대는 외국인처럼 보이는 그들에게 여권과 비자를 요구했으나 알렉스가 말했다.
코르시카의 개가 왔다고 전해.
그들은 십 분도 안 되어 알제리 국경 검문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손 뗐다고 들었는데.
작은 테이블과 나무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응접실로 단발머리 여자가 들어왔다. 높게 떠 있는 해가 얇은 창문으로 더운 빛을 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사람을 착각한 건지 고민했다가 익숙한 얼굴에 의심을 그만두었다. 코르시카 조직 알제리 지부의 유명한 사냥개. 위험한 일에서 손을 씻고 작은 검문소의 수비대장 노릇을 하던 여자에게는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그 인간은 누구냐고, 사랑의 도피라도 하는 것 같다고 빈정대고 싶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병원 하나 수배해줘.
얼마나 오래?
반나절. 수액만 맞으면 될 거야.
이제 더 찾아오지 마. 빚은 갚았다.
하나만 더.
또 뭐?
뒷돈주고 국경을 넘으려는 놈들이 있을 거야. 가둬.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건데.
CIA.
그 놈들을 나보고 감당하라고?!
해야 할 걸.
허…….
해야 할 거야.
알렉스가 한 번 더 중얼거리며 여자를 보았다. 새카맣게 가라앉아 명줄을 틀어쥐기 전의 눈동자. 다른 이름으로 살아온 평생 동안 타인을 대하던 눈빛이었다. 여자는 많은 인간들을 보았으나 이 인간은 본질부터 다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피바다에서도 기어 올라올 자. 파괴의 이름을 지닌 인간. 이교도를 해하는 무장단체도 다나킬에서 인육을 먹는 자들도 이토록 통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여자가 어깨를 떨었다가 혀를 차고 턱을 괴었다.
…24시간이 한계야.
알렉스가 그때서야 활짝 웃었다. 죽는 것 보단 감봉이나 파면이 나을 거라 말하듯이.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스는 여자가 돌아오기까지 응접실에서 기다렸다가, 그녀가 준비한 차를 타고 10분을 달려 작은 종합병원 입구로 들어갔다.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한낮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지중해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 코르시카. 그 섬의 마피아들은 세계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70년대 까지는 아편을 밀수했고 80년대에 들어서자 무기에 손을 대었으며 10년 후에는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로 눈을 돌린 영악한 사업가들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등록된 소형 항공회사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고, 밀수품의 창고로 쓸 호텔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합법적인 회사였으므로 노련한 조종사들을 고용할 수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어떤 밀수도 정부가 개입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무엇이든 어디든 언제나 실어 나르는 항공사. 사막과 바다를 건널 자들에게 필요한 것들.
코르시카 조직은 한 국가에서도 여러 지부로 나뉘어 있었다. 서로 감시하게 하며 지부의 힘이 본국을 뛰어넘지 않도록 취한 조치였다. 알제리의 코르시카 지부는 해안선의 대도시를 하나씩 꿰차고 있었고 알렉스는 그 중 한 곳에서 2년 동안 일했다고 말했다. 코르시카 내의 동맹과 배신에 대해 알고 있던 에린은 그 말을 듣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바쁘게 돌아다녔다. 노트북을 취급하는 전자 상가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휘발유와 사제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구매했다. 코르시카가 접수한 호텔에서 짐을 풀고 마무리 준비를 한 다음에는 호텔 전화기를 빌려 알제의 우두머리에게 연락을 했다. 약속은 알렉스의 옛 이름으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호텔로 온대? 응. 로비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여럿 보였지만 대부분은 수송기 정비원과 조종사, 조직의 주먹꾼들이었다. 알렉스는 그들의 머릿수를 세고 소총을 든 입구 경비원을 보다가 에린의 시선에 웃었다. 죽일 수 있어. 전부 다 죽일 수 있어. 송곳니가 하얗게 드러났다.
조직의 우두머리는 밤늦게 찾아왔다. 매일 모스크에 들러 예배를 한다는 남자는 하얀 칸두라를 입고 머리에는 샤피예를 쓰고 있었다. 검은 턱수염과 짙은 눈썹, 갈색 눈,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주름. 그들은 호텔 맨 위 층의 방에서 알제의 초라한 야경을 보며 차를 마셨다. 술을 금지하는 교리를 지키는 것인지 그들을 불신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에린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알렉스의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묻지 않겠네. 거래를 하러 왔으니까. 에린과 알렉스의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의 경호원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에린이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는 척 하며 숨겨둔 핸드폰을 조작했다. 커다란 굉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가 창가로 뛰어가는 경호원들에게 두 명만 남고 나머지는 내려가보라고 소리쳤다. 에린은 경호원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소음기 달린 자동권총을 두 발 쏘았다. 몸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카펫 위로 붉은 피가 스며들었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현명하게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수염이 까끌한 턱을 문질렀다가 그들을 보았다. 그래. 거래를 하자고. 현명하고 오만한 자의 눈빛이 어둡게 반짝였다.
내일 새벽 대서양을 넘어가는 비행기가 필요해.
남미? 캐나다?
남미.
지금 당장은 그 쪽으로 갈 항공편이 없다네.
그러니까. 만들라고.
알렉스가 손의 관절을 풀며 대답했다. 남자는 제 몸을 반으로 찢어버릴 수 있는 알렉스의 힘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자신만이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너희는 뭘 해줄 수 있지? 키보드를 두드리던 에린이 노트북을 돌려 남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네 경쟁 상대들의 정보. 조직의 구성원, 교통망, 뒷배에서부터 개인적인 약점까지. 남자는 빠르게 지나가는 화면에서 자신의 동료이자 적이 분명한 이들의 사진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이게 진짜라는 걸 어떻게 믿나?
그런 말은 네가 우위에 있을 때나 통해. 무력적 우위 말이야. 에린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남자를 보았다. 알렉스가 말해줬거든. 넌 오만하지만 멍청하지는 않고, 안전에 신경을 쏟지만 죽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는다고. 그래서 네 목숨을 쥐고 흔들어봤자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폭탄을 터트린 것도 너희들이군.
알제의 보스가 운영하는 호텔이 습격을 받다니 꼴이 말이 아니겠어. 경쟁자들이 곧 팔다리를 떼어내러 오겠네.
이 정도로는 어림없지.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럴까. 이건 어때.
에린이 웃으며 오른쪽 방향키를 한 번 눌렀다. 남자가 자신의 집에 설치해둔 폐쇄회로 화면이 모니터에 떠 있었다. 새벽에도 쉴 새 없이 정찰을 돌며 가정의 안전을 지키는 경비원들. 창가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 친지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 남자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동안 알렉스가 테이블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본 너는 불명예스럽게 사느니 그냥 죽어버릴 놈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가족의 안전이 네 손에 달려 있잖아. 가족을 배신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널 죽이고 다른 놈들과 협상하면 그만이야. 그러니까 수락하든 아니든 아무 상관없다는 거지. 그게 네가 제일 끔찍해하던 거 아니야? 세상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뒤지는 거.
남자는 붉은 눈을 보았다. 남자는 알렉스를 말없이 주먹만 휘두르던 바보쯤으로 여겼으나 그렇지 않았다. 저 안경 쓴 여자가 멍청한 놈을 꾀어 조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것이다. 이 놈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어. 조직의 권력 싸움에서 어떤 위치인지도, 선택권이 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전부 다.
알렉스가 남자의 멱살을 쥐어 일으켰다. 아직도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나네. 난 거래를 하자고 말하는 게 아냐. 협박을 하는 거지. 그게 우리가 제일 잘 하는 거였잖아. 안 그래? 남자는, 입꼬리는 웃고 있으나 눈은 그렇지 않은 그녀에게서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 에린을 보았다. 마치 오후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독서를 하는 듯한 그녀를. 피냄새가 올라오는 방에서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금발의 괴물을 보는 그녀를. 뱀처럼 또아리를 튼 자와 그녀의 망치. 압도적인 폭력. 폭력은 인생의 지름길 같은 거다. 어디에서든 확실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수단이다. 남자는 오랫동안 조직을 위해 일했고 협박과 회유와 살인으로 살아왔으나 이들에게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 너머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린이 노트북을 닫고 자동권총을 쥐었다. 정확히 이마를 관통당한 시체 두 구에서 끝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비린내. 화약 냄새. 사라지는 차의 향기.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 자, 선택할 시간이야. 알렉스가 말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