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yes. 05
트리스는 낯선 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나뭇잎을 태우는 것 보다 조금 더 독한 냄새. 막사의 녹색 천장을 흐린 눈으로 보다 그 냄새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트리스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메그가 한쪽 무릎위에 팔을 얹고 구겨진 담뱃갑을 쥔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손끝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갈색 필터를 문 입술은 찢어진 채였다.
메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갈색 속눈썹 위로 먼지가 앉을 때조차도. 입술만 벌려졌다가 다물리고를 반복했다. 저 얇은 입술 아래에 차게 식은 피가 천천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테이블 위에서 굴러다니는 알약들이 심장을 붙잡고 있을 것이었다. 사과가 안쪽부터 문드러지듯 조용하게 파국으로 행하는 몸뚱이가 호흡을 반복하자 담배 연기가 위로 흩어졌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깜빡임 없는 눈꺼풀이 한참이나 그대로 있다가 내려깔렸다. 그리고 눈동자만을 움직여 트리스를 보았다. 흐리고 어두운 눈이었다.
이제 날 보호하게 돼서 만족해?
트리스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메그가 조용히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밤새 울어 검은 눈 밑, 아픈 소리만을 내뱉어 갈라진 목, 잇자국과 붉은 멍이 남은 가느다란 목과 어깨. 묶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이 그 위로 내려왔다. 가장 어두운 색은 검은 것이 아니라 진창에 빠진 붉은 색이다. 전쟁터에서 말라붙은 피웅덩이이자 까마귀들이 깃털을 남기는 곳이다. 경우의 수를 따진 모든 죽음이 담겨 있는. 저 눈동자일 것이다. 트리스는, 창백한 뺨에 손을 대어 쓸어내렸다. 그 몸에 피가 도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네가 아프지 않으면 좋겠어.
불가능해.
그런 몸이라서?
목적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
죽기 전까지 인간답게 사는 거?
그래…….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아니야.
너.
메그는 마지막 모금을 들이쉬고 트리스의 얼굴 위로 연기를 훅 뱉었다. 그리고 찌푸려지는 얼굴 바로 옆 철창 같은 침대 헤드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회색 담뱃재가 군청색 머리칼 근처로 후드득 떨어졌다. 트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 남은 연기가 새어나왔다. 내가 온 이후로 에린을 노렸던 놈들이 왜 없는지 알아? 없던 게 아니었어. 다 죽였거든. 수색 같은 거 필요 없이 쏘면 끝이니 아무도 몰랐을걸. 근데 너 때문에 당분간 못 하게 됐지. 네 행동으로 몇 명이 더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에린이 또 공격을 받으면? 알렉스는. 나는. 그게 너라면?
메그의 손가락이 트리스의 목을 더듬다 성대를 꾸욱 눌렀다.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트리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아, 하고 내뱉었으나 그 손가락이 그대로 턱을 치켜올리고 입을 다물게 했다. 희고 시린 손끝이 얼음보다 차가웠다. 트리스는 메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차분하고 적막하게, 숨 막힐 듯이 느리게.
약한 인간이었던 적 없는 네가 싫어.
메그의 두 손이 목을 단단하게 조여들었다가. 물러났다. 트리스는 저항하지도 않았다. 가장 강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메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참을 수 없었다. 메그는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 한 벌만을 걸치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트리스는 아무도 남지 않은 빈 곳에서 손자국이 남은 목을 천천히 매만지고 그래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했어야 했다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여기 없는 너를 생각하고 혼자 남은 나를 생각한다. 숲이 타는 냄새가 정신을 어지럽혔던 것. 눈에 띄는 모두를 죽여버렸던 것. 네 몸이 너무나 가볍고 너무나 아파했던 것. 늘 그렇듯 피를 토하던 입술과 소리를 지르는 눈동자를 보았던 것. 걱정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풀어놓고 덜덜 떠는 흰 살결을 빨갛게 물들였던 것. 어제의 열락이 오늘의 나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따가운 손톱자국만이 등 위로 흐리게 남아있을 뿐. 트리스는 침대 위에서 팔로 얼굴을 가리고 메그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강한 인간인 채로 죽고 싶을 뿐이었다.
트리스는 에린이 찾아올 때 까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몇 시간을 넘겼는지 몇 끼를 건너뛰었는지 알지 못했다. 에린은 트리스가 자리를 권하기 전에 의자를 빼어 앉고 다리를 꼬았다. 트리스는 그녀와 마주 앉아 철제 테이블 위만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메그는.
어?
메그는 잘 먹고 잘 자고 있어.
…잘 자?
예전부터 그랬어. 도망치고 싶으면 잠만 잤지. 에린은 안경 뒤로 눈을 보여주지 않은 채 웃었다. 그래도 먹고 싶은 건 꽤 있었던 모양이야. 계란 비린내가 싫다며 입에도 안 대던 것들을 잔뜩 먹었어. 재료가 부실하긴 했지만 설탕만 들어가면 다 좋다던가.
아,
트리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작은 감탄을 막듯이. 그리고 솔직하게 안도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눈꺼풀이 느지막하게 몇 번 감겼다 떠졌다. 에린은 트리스를 보고 있다 짧은 손톱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목은, 메그가 한 거야?
…응.
메그 몸은 네가 한 짓이고.
…….
나한테 사과 하지 마.
에린.
왜?
너와 메그는 뭐야?
트리스는 한참동안 입안에서 맴돌던 말을 꺼내었다. 그동안 보았던 것들과 그 모든 위화감. 항상 메그를 보았던 자신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관계. 의지하는 몸뚱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 주는 것 같으나 아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트리스는 알고 싶었고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질투하는 거야?
…난 널 존경해.
트리스.
에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트리스 손을 끌어와 손바닥을 펴게 했다. 에린은 그 단단한 손바닥 위를 한번 부드럽게 쓸고, 엄지로 꾹 눌렀다. 나는 메그가 원하는 걸 하는 사람이야. 알렉스는 내가 원하는 걸 하는 사람. 그리고 너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굳은살 위를 머물다 전체를 꽉 쥐었다. 넌 네가 원하는 걸 메그에게 하는 사람이지.
에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있었다. 트리스의 손을 붙잡았을 때부터 놓아줄 때 까지. 마른 침이 뜨겁게 목 아래로 내려갔다. 에린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흑 아니면 백으로 나뉘는 감정이 아니라 더 복잡하고 엉망인 것. 그 습관적인 미소에서 진짜 표정과 가짜 표정을 구분하는 일은 직감이나 애정 없이는 못 할 짓이었으나 트리스에게는 타고난 직감이 있었다. 트리스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달싹거리던 입술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어떤 짓을 해야 조금이라도 덜 괴로워할까. 이딴 생각을 하다 내 마음대로 해버렸어. 대체 왜. 내가 뭐라고. 하지만 걔는. 언젠가 정말로 때가 오면……한 마디 없이 사라져서 혼자 죽어버릴 것 같아. 내가 운이 좋다면 시체라도 볼 수 있겠지. 아니라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른 채로 끝날 거고. 그렇지 않아? 너도 나 같은 생각을 하고 그녀를 봐? 그럼 어떻게 버틸 수 있는 거야? 알려줘.
알려줘, 에린. 낮게 긁힌 목소리가 갈 곳을 잃은 채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절망 같기도 했고 기도 같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신이 없어 오직 맹목적인 욕망만 존재할 뿐, 너를 가진 적도 없으나 잃고 싶지 않다 제발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져 나 없는 곳에서 죽어버리지 말아라 아무도 살지 못한 통증으로 그 몸이 죽어갈 때 네가 앓는 아픔이 나를 병들게 한다 식은땀이 뒷목을 타고 내렸다 단지 상상의 한 귀퉁이일 뿐인데도 절벽 아래로 떨어져 눈사태처럼 산산조각이 나듯 몸이 덜덜 떨렸다. 제발.
에린은 잘게 떨리는 트리스의 어깨를 보며 품에서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명령서 한 장으로 몇 명을 사지로 보냈을지 모를 절제된 움직임이 트리스의 흐린 눈 안에 들어왔다. 탁.
미움 받아도 상관없어?
……날 평생 저주해도 상관없어.
그럼 이곳으로 가. 에린이 처음으로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나는 못 한 일이야. 그 굳은 입술에 트리스는 조용히 숨을 멈췄다가, 다시 내쉬었다. 트리스는 그 말에 어떤 무게가 실려 있는지 어떤 심정으로 이 종이 한 장을 준비했는지 전부 알지는 못했으나 조용히 종이를 쥐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에린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후 트리스는 머릿속을 헹구듯 오래오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아무도 모르게 기지 밖으로 사라졌다.
알렉스는 작은 등 하나만 켜둔 막사에서 에린이 작은 유리잔에 보드카를 따라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글자가 빽빽하거나 구조도가 그려져 있는 서류가 몇 장 있었다. 검은 천에 싸인 무언가도. 에린의 식도로 쓰고 뜨거운 술이 내려가기를 반복하다 멈췄다. 잔을 내려놓은 에린은 팔을 뻗어 알렉스의 금색 머리칼을 만지작대었다. 그리고 보드랍고 사랑스러운 색의 금발이 손끝에서 몇 번이고 흩어지자 작게 웃었다. 알렉스가 조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는 것 같아.
괜찮아. 안 취해.
안 좋은 일 있었어?
기쁜 일만 있는걸.
기뻐 보이지 않아서.
하하. 아니야.
에린은 보드카를 한잔 더 따라 한 번에 넘기고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은 손이 제 얼굴을 감싸는 것에 저항하지 않으며 뺨을 대었다. 그냥. 내가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일을 망설이지도 않는 사람이 조금 부러워서. 알렉스는 에린의 안경테를 만지작대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무서운 것도 있어?
가끔은 있지.
알고 싶어!
안 알려줄래.
왜?
너한테는 항상 강한 사람이고 싶거든.
알렉스가 에린의 대답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가 방긋 웃었다. 속눈썹 긴 눈이 예쁘게도 휘어졌다. 검붉은 색의 동공이 흐린 빛을 받아 일렁이는데도 상냥하고 상냥해서 좋았다.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지만 스스로 인정한 자만은 죽이지 않을 투견. 에린 너는 내가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이야. 그건 내가 뭘 알게 되던 변하지 않을 거야. 알렉스는 그렇게 속삭이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중앙군 병기공학자문의 납치는 조용히 이루어졌다. 그녀 한 명을 제외하고는 사망자도 부상자도 없었다. 중앙군은 에린의 오랜 동료였던 북방군 스파이가 납치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녀가 스스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알렉스를 포함한 특수전술대대 인원 몇 명을 차출하여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알파팀만을 보냈다. 알렉스는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도 된다는 작전명령을 하달받으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불복종하는 때가 없었다. 적어도 전투에 관련해서만큼은.
알렉스는 GPS 신호를 따라 북방군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적군 포로에 대한 가학행위 증거가 발견되어도 발뺌할 수 있을 만큼 떨어진 창고에 도착했다. 새까만 옷을 입은 그들은 밤중에 경비의 입을 틀어막고 명치를 친 후 목을 꺾어 죽였다. 알렉스는 열세 번째의 단말마를 들으며 무거운 철문을 비틀어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몇 명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납치된 포로가 여자인 것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래로 꺾였다가 높아지는 비명은 어떻게 들어도 남자의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복도 끝 문 앞에서 안대를 들어 한쪽 눈을 비볐다가 가늘게 떴다. 네 개의 조명만이 모서리에 설치된 어두운 방, 누군가의 흰 가운이 흰색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젖어 있었다. 피비린내가 코로 훅 들어와 심장을 뛰게 했다. 알렉스는 그 가운이 펄럭거리는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왼쪽 손목이 잘린 팔로 남자의 목을 뒤에서 끌어안고 의료용 가위를 귓바퀴에 꽂았다. 눈을 까뒤집으며 소리 지르는 남자를 총알의 방패막이로 쓰다 인간들 한가운데에 집어던지고 몸을 낮춰 온갖 도구들이 펼쳐져 있는 테이블을 뒤집었다. 못 세 개가 일렬로 조여져 있는 무선 드릴의 스위치가 켜져 바닥에서 시끄럽게 튀었다. 그녀는 그것을 재빠르게 집어 들고 다른 남자의 허벅지를 내려찍었다. 벽을 뚫는 드릴이 인간의 근육과 살을 후벼팠다. 비명이 끊임없이 튀었다. 다른 남자가 총알이 떨어진 자동권총을 집어던지고 아이스픽을 쥐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끝이 목 가운데의 피부를 파고 들어가 손잡이만 남았다. 그녀는 허억 숨을 집어삼켰다가 남자의 어깨로 쓰러졌다. 그리고 남자가 하, 비웃기 전에 오른손으로 아이스픽을 빼내어, 남자의 목 뒤 조그맣게 움푹 들어간 공간에 조용히 찔러 넣었다. 머리를 제거하지도 않고 척수를 끊어버리는 국부적 단두대. 남자의 근육이 곧바로 이완되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늘어져 숨을 거뒀다.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여버린 그녀는 숨을 고르다 은빛 트레이 위의 네일건을 쥐고 구석에서 떨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초록색 네일건의 퓨셔를 내리며 겁에 질린 숨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어깨와 손등, 쇄골과 겨드랑이에 하나씩 못을 박아 넣었다. 즉사 부위를 피해서였다. 작은 발사 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에 묻혔다. 남자는 힉힉거리며 숨과 아픔을 되는 대로 집어삼키다 손가락을 꿈틀대며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괴물인 줄 몰랐어요, 저는 그저,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악! 제발! 아니야, 눈은, 눈은, 눈은 제발, 아악!
네 덕분에 알게 된 게 있으니 죽여는 줄게.
살, 살려, 저는, 당신 부하였,
알렉스는 그녀가 남자의 혀를 쥐어 마지막 못을 박아 넣고 웃는 것을 보았다. 아니야. 너는 내 사람이 아니야. 그 눈. 그 차분함. 붉은 홍채에 설득당하고 반달 같은 웃음에 휘어 잡힐, 나는 어떤 아픔도 두렵지 않으며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웃음. 알렉스는 제 발치에 떨어져 있는 자그만 손을 쥐어들고 중얼거렸다. 너는 아름답네. 에린은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보았다가 안경알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고 고마워, 하고 대답했다.
알렉스가 그리운 회상에서 빠져나왔을 때 에린은 책상 위의 서류를 화로 안에 한 장씩 넣어 태우고 있었다. 종이 타는 냄새가 막사를 채웠다. 그녀는 부드러운 천으로 싸여 있는 것을 집어 들어 천을 벗겨내었다. 화롯불에 비쳐 날이 빛나고 있는 군용 나이프였다. 아마도 새 것.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선 알렉스의 손을 쥐고 불가로 데려왔다. 그들의 검은 형체 사이로 주황색 불빛이 흔들거렸다.
네가 도와줄 게 있어.
응, 에린.
내가 아파해도 그만두지 마.
알렉스는 달궈진 칼을 받아들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죽지 않는다면 뭐든지.
트리스는 조용히 중앙군 정보국에 숨어들었다. 트리스는 에린의 자료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사각지대 없는 CCTV 아래에서 군복과 군모로 위장한 채 에린이 적어준 패스워드로 통과했다. 자료에는 모든 CCTV의 위치와 병사들의 순찰 시간, 환풍구와 하수관을 이용한 최단 루트, 최고위 기밀 정보를 다룰 수 있는 코드가 적혀 있었다. 트리스는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지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았으나 오래전에 했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트리스는 수많은 약품과 실험 결과물이 쌓여 있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새하얀 벽과 바닥에 다섯 칸짜리 락커가 끝없이 쌓여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고 열세 번째 선반에서 가장 높은 칸 가장 안쪽의 락커 다이얼을 쥐었다. 틱. 틱. 여덟 번의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 후 철제 문이 끼익거리며 열렸다. 트리스는 검은 왁스로 실링된 큰 봉투를 꺼냈다. 검은 왁스 위에는 기지마다 걸려 있는 중앙군의 문양이 있었다.
트리스는 단검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얇게 자르고 맨 앞 서류 뭉치를 꺼냈다. 강화군인 실험 프로토타입 기록 문서였다. 그녀는 그것을 몇 장 넘겨 보다 옆구리에 끼우고 다음 뭉치를 꺼냈다. 에린의 민간인이었을 시절의 정보와 강화 실험의 진행, 성공 후의 신체 강도, 그녀를 대상으로 한 세뇌와 실패, 처우, 주기적 상담을 통한 심리 상태, 전적과 성과 그 모든 것들이 적혀 있었다. 트리스는 그녀의 몸에 GPS 수신기가 심어져 있다는 것을 읽으며 그녀가 어째서 진작 움직이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세 번째 뭉치는 메그에 대한 내용이었다. 에린에게서 얄팍하게 전해 들었던 것보다 훨씬 깊고 동정 없는 기록이었다. 트리스는 그 종이들을 넘기며 메그의 오감이 어디까지 강제로 끌어올려져 있는지, 그 부작용이 얼마나 깊이 침투하여 세포를 갉아먹고 있는지에 대해 읽었다. 그리고 완벽한 약은 이미 완성되어 있으나 그녀를 놓아주지 않기 위해 유지기간이 짧은 약만을 공급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주 사무적인 문체로 적힌 것 까지 전부, 읽었다.
트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나머지 자료를 뒤졌다. 알렉스와 자신에 대한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깔끔했다. 그들에게 부작용 같은 것은 없었다. 수백 명을 죽여 얻은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진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종이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트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어지러운 머리로 마지막 뭉치를 펼쳐들었다. 알파-특수임무대 수립 대책회의의 자료. 강화군인 특수부대의 시작을 알릴 핏빛 청사진. 트리스는 열여덟 장의 회의록을 모두 읽은 후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허공 위에 한참 동안 매달려 있다가 내려왔다. 분노가. 드디어.
갈 곳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