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설화. 03 (완)
정적. 침묵. 아득한 어둠. 공허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들. 한참의 흐느낌 뒤로 커다란 스크린이 밝아졌다. 흐린 빛 속에서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왔다. 알렉스는 익숙한 이름으로 빼곡한 화면을 보며 계속 울었다. 세 개의 손이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알렉스가 눈을 깜빡, 거리자 눈물이 그들의 손가락 위로 떨어졌다.
영화관이 밝아졌다. 드문드문 앉아 있던 사람들이 빈 팝콘 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는 이상한 영화라고 이야기했고, 누군가가 출구와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다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에린은 손수건을 꺼내어 알렉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트리스는 알렉스의 허벅지를 토닥거렸다. 메그는 알렉스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젖은 눈꼬리에 입을 쪽 맞추어주었다. 뒷줄에 앉은 누군가가 쿠키 영상이 있을 거라며 일행을 붙잡았다. 알렉스는 가만히 훌쩍거리다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메그를 보았다. 쿠키 영상 있어? 메그가 픽 웃었다. 아마 없을걸. 알렉스는 에린의 손수건을 쥐어 눈물을 톡톡 닦았다.
아, 이게 우리 이야기라니.
낯설어?
너무 슬퍼.
괜찮아.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알렉스.
그래도 정말 사랑해. 나 이걸 보러 너희에게 왔나봐.
우리도 너를 너무 사랑해. 다음에는 반드시 우리가 찾으러 갈게.
그들은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스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에린은 알렉스의 뺨을 매만지다 젖은 속눈썹을 손끝으로 쓸었다. 트리스는 알렉스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고 메그는 아이를 달래듯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들은 낮은 계단을 올라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게 영화로 나올 줄을 몰랐다는 이야기. 캐스팅도 나름 괜찮았다는 이야기. 편집자한테 그럴듯한 선물이라도 보내야겠다는 이야기. 그럼 집에 가는 길에 핸드폰이나 마련하자는 이야기. 알렉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일렬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이어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해산물과 육류 사이에서 고민하다 드문드문 웃기도 했고, 서로를 툭툭 치며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새까만 스크린. 새빨간 의자들. 출구 너머의 빛. 트리스. 에린. 그리고 메그. 알렉스는 심장 위를 꾹 내리누르다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메그는 출구에 다다랐다가 문득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알렉스가 열 걸음 아래에 서서 아무도 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그는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계단을 내려와 알렉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뭐 해. 혼자 있지 마. 얼른 집에 가자. 메그가 말했다. 알렉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메그를 보았다. 메그의 작은 형체 뒤로 희미한 빛이 비치고 있었다.
있잖아. 알렉스가 물었다. 다음에는 날 데리러 와줄 거야?
그렇게 할게. 메그가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
알렉스는 메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들이 마침내 영화관 문 너머로 사라졌다. 문 너머로. 빛 너머로 완전히. 끼익. 쾅. 육중한 문이 닫혔다. 영화관의 불이 모조리 꺼졌다. 또다시, 어둠과 적막이 찾아왔다.
누군가가 어두운 스크린을 응시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푸른 눈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더 토해낼 것도 없이 목을 쥐어짜면서. 큰 소리로, 작은 중얼거림으로 몇 개의 이름을 더듬거리면서. 가느다란 목에 손톱 자국이 남아 있다. 검은 옷자락에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풀어헤쳐진 갈색 머리칼이 어둠에 젖어 있었다.
아. 만약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버리는 것보다 사랑을 위해 지옥에 가는 것이 더 쉬우니까. 그녀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곱씹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고, 당연하다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중얼거렸다.
아주 멀리서 빛이 내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가면 계단. 계단. 빛. 사랑. 너는 그렇게 죽어서 다시 천 년을 살 거야? 그녀는 끄덕거리며 끄덕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나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너의 지난 삶을 필사한다. 피와 눈물에 젖은 초로한 몰골로.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보잘 것 없는 몸뚱이로 다시 적는다. 눈물이 메마를 때까지. 더 기록할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사랑을 겪고 재회를 겪고 기적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때까지. 누군가가 경고했다. 만나지 못할 지도 몰라. 모든 걸 다 잊을 지도 몰라. 더 이상 너로서 존재하지 못할 지도 몰라. 그녀는 울고 있었다. 앞으로 더 울게 되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어둠이 끝나면 모든 걸 다 해내고 나면 그 자리에는 신도 악마도 아닌 편지가 있을 것. 그녀의 품안에는 전해야 할 천 개의 설화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