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inyes. 01
내가 자란 곳은 눈밭이 아름답고 바람이 칼날 같은 설산이었다. 스물여섯 개의 빙하와 얼어붙은 호수로 뒤덮여 침엽수만이 높게 자라는 곳. 흑곰, 재 빛깔의 새, 거대한 손바닥 같은 뿔이 자란 사슴, 노란 눈의 거대한 짐승만이 간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짐승의 털을 목과 발에 감고 가끔씩 마을로 내려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많은 것을 배웠다. 손상을 최소화하는 가죽 손질법, 산짐승들의 이름, 특정 부위의 가격과 요리법 같은 것들을. 자식들이 타지로 떠난 집에서는 가끔 버릴 책들을 주었다. 나는 처음 읽은 신화에서 내 이름이 될 만한 것을 찾았고 더 이상 눈표범으로 불릴 일은 없었다.
전쟁에서 격리된 땅. 일 년 중 며칠 동안만 타인과 말을 섞었으며 인간의 지도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가죽을 팔러 내려간 날 모두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무두질을 알려주었던 가죽장인, 사슴요리를 알려준 식당 주인, 매번 단검의 칼날을 갈아주었던 늙은 무기상, 이름은 모르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기억하는 자들 모두. 마을 구석에는 삼십 명쯤 되는 군인들이 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그들 중 열다섯 명의 얼굴을 뭉개놓자 어느 군의 어느 부대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은 퇴역군인과 탈옥수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었으며 그들을 징집하기 위해 왔으나 그들이 저항했다는 것 까지.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나는 한 명만을 끌고 그 마을을 나왔다.
산길이 끝나기 전 군인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걸레짝이 된 전우를 보고 내게 총구를 겨누었지만 쏘지는 않았다. 소대장이라는 여자는 나를 포위한 인간들 사이로 걸어 나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흑곰 털이군. 직접 잡았나?
그렇다면?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됐지?
누워 있어.
다 죽인 건가.
인간 상대는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무기는?
이거.
보위 나이프 하나라. 네가 보기에 그들은 약하던가?
내 산에선 10초 안에 죽을 거라고 장담해.
우리 소대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나는 그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러기로 했다. 그 여자가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했으니까. 전쟁의 목적도 규모도 모르지만 방법이 있다면 따를 것이다. 설산에서 아주 작은 갈까마귀를 잡는 것처럼, 몇 시간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 엘크를 덮치는 것처럼.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다고 믿었다. 어떤 일도 설산에서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 어렵지는 않아.
다시 마을로 돌아가 쓰러져있던 군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수습하라고 말했다. 군인들은 손등으로 코피를 닦아내며 머뭇거리다 들것을 들고 움직였다. 곧 작은 마을의 작은 광장에 얼마 안 되는 몸뚱이들이 쌓였다. 팔이 없는 몸도 목 위가 사라진 몸뚱이도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을 감겨 준 다음 나무를 쌓아 기름을 붓고 한 곳에 태웠다. 재와 역한 냄새와 연기와 눈송이가 칼날 같은 바람에 뒤섞여 날렸다. 너무 짧고 간단한 끝이었다.
항복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했을 거냐? 여자가 물었다.
죽였겠지.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을 텐데도.
그래. 저 놈들도 너도 전부 죽였을 거야.
틀림없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이후 일주일 동안 군대의 규율과 조직도 등을 익혔다. 내가 속한 군대의 목표와 지침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군대가 누구의 소유인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 앞으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왕이 되려고 남을 죽인단 말이야?
산에서 살았다고 했지. 그 산에서는 네가 왕이었을 거다. 모든 짐승들이 너를 두려워했을 거라고. 그 두려움을 원하는 인간들이 있어.
역겹고 웃기는군.
그 여자는 내가 전쟁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내게 소대의 훈련을 맡겼다. 꼴사납게 무릎 꿇었던 인간들을 훈련시켜야 한다니 내키지는 않았지만 못할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는 강해져야 전쟁이 끝날 테니까. 나는 그들을 공터에 불러 모아 두려움 가득한 눈빛 수십 개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나약해. 야생에 사는 짐승보다 약하지. 그러니 무기에 의존하지 마라. 주변을 파악하고 적의 눈빛을 읽고 낌새를 알아차려라. 보급 받은 식량에 의존하지 말고 사냥하고 나무에 올라라. 총을 빼앗기고 계곡 아래로 떨어져도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한다. 이기려면, 살아남아야 한다. 알겠나?
그들은 입을 모아 알겠다고 외쳤다.
주변 인간들이 말하기를 그 여자는 장교답지 않게 유연한 성격이었다. 나는 그들이 본대와 합류하는 길에서 멈춰 설 때마다 쉬는 시간 없이 교육시켰다. 그들은 동상에 걸리기도 총을 집어던지기도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군용 나이프를 얼음벽에 꽂아 산을 오르고 총알을 아껴가며 짐승을 사냥할 줄 알게 되었다. 삼 주 후 중대와 합류할 때쯤 소대장이 말하길, 가장 약한 소대에서 가장 강한 소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로 위장해 군에 입대했다. 생일도 과거도 밝힐 수 없다 했지만 그 마을은 원래 그런 곳이라며 넘어갔다. 인간이 눈사태같이 죽어가는 전쟁에서는 강함이 전부라고. 어떤 인간이라도 상관없다고. 그 이후 비슷한 처지의 신병들과 테스트를 치렀고 총기전을 제외한 모든 시험에서 선두로 통과한 내게 소대장은 방패병을 권했다. 전장의 가장 앞에서 화력을 막아내는 인간 전차.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그 후로 일 년. 크고 작은 전투를 반복하며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때까지 살아남은 나에게는 소위 계급장이 내려졌다. 나를 데려온 소대장은 반년 전 전사한 중대장의 자리를 메웠으며 나는 그녀를 따라 소대장이 되었다. 내가 가르친 인간들 중 절반만이 살아남았지만 전쟁터는 그런 곳이다. 한 달 후에 있을 겨울 최종공세에서 승리하면 전쟁이 곧 끝날 것. 중대장이 막사 안에서 전술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길어야 반년이겠군.
그러게.
전쟁이 끝나면 뭘 할 거야?
돌아가야지.
그 산으로?
그래.
아무도 없을 텐데.
원래 그랬어.
포상을 잔뜩 받을걸.
그런 생각은 의미 없지.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 게 전쟁터인데.
역시 너는…….
그녀는 웃으면서 막사 입구를 들춰 눈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십. 몇 백 걸음을 걸었다. 온통 새하얀 설원에 발자국이 길고 길게 이어지며 꼬리를 남겼다. 이 날카로운 바람과 자비 없는 온도. 추위는 적의 사기를 꺾을 것이며 겨울은 북방 군대의 편이다. 해가 천천히 지고 있었고 그녀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에, 전쟁을 끝내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 했었지.
승리하는 게 그 방법 아니었어?
아니. 트리스. 그건 바로,
그 다음 날 나의 유일한 상관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적군의 스파이라는 이유였다. 그녀의 시체는 이미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중대 유일한 대위의 견장이 그녀임을 증명했다. 스파이. 부하 한 명을 잃고 밤에 잠을 설치던 그녀가. 상관 몰래 사비를 들여 유품과 유서를 전달하던 그녀가. 다친 다리로 이미 숨을 거둔 시체를 껴안고 돌아와 한참을 엎드려 기도하던 그 여자가. 그래.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야. 나는 할 수 없었지만 너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날 밤 막사를 떠나 삼 주 동안 백만 걸음을 걸어서 적군의 문을 두드렸다.